오상선 바오로 신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8,1-8 요한 16,16-20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이런 경로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예고하실 때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의 대목에서처럼 빗대어 말씀하셔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한 16,18)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직면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무지를 선택한 것인지 그들 자신만 알 겁니다만, 사실 꽃길만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앞으로 닥쳐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대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아,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대개 뭔가 순조롭고 평탄하고 미래의 빛이 보일 때 그렇게 여깁니다. 터무니없이 큰 걸 바라지 않으면서 소소한 만족과 안정감이 일상으로 자리잡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뭔가 그 일상성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닥칠 때가 다가옵니다. 인간 삶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런 불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곧 닥쳐올 어둠의 시간, 스승을 빼앗기고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져 목적과 의미의 혼란을 겪게 될 두려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수수께끼같은 이 말씀에서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도 여느 인생길처럼 슬픔과 기쁨이, 고통과 평화가, 죽음과 생명이 항상 짝을 이루어 다닌다는 걸 알려주려 하십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좀 더 좋고 편한 쪽만 계속되면 좋겠건만 인생은 그걸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인생을 살아 본 제자들은(우리는) 제법 알고 있지요. 코헬렛 저자 역시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코헬 3,4)고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알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요.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겪어온 것처럼 여기서도 바오로는 성공과 실패를 두루 체험하게 됩니다. 서로 도우며 힘이 될 신앙의 동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를 만났고 또 기다리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까지 합류하여 온전히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게 되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텐데, 이대로 쭈욱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지요.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는"(사도 18,6) 이들에게서 또 한 번 거부 체험을 당해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를 털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에게로 갑니다."(사도 18,6)
이 선언은 진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며 최선을 다한 이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그래도 유일신 사상과 종교적 체험의 뿌리를 공유하는 유다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 했지만 번번이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니까요.
그래도 오늘 제1독서의 마무리는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방금 겪은 어둠과 절망처럼 보이는 체험이 빛과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과연 예수님 말씀처럼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먼저 근심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먼저 실패가 있어야 성공을 느끼고, 먼저 상실을 체험해야 획득에 감사합니다. 먼저 없어 봐야 작은 것에도 만족하게 되고, 먼저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압니다.
일상의 삶에서처럼 영성생활에서도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빼앗길 때가 있으면 다시 얻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충만히 머무르며 진보하고 성장할 때가 있고, 주님이 안 계신 듯 공허하고 메마를 때가 있지요. 대부분의 고통의 순간이 그렇듯, 영적 메마름이 오면 언제 좋았는지 언제 주님을 누리며 행복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혼은 슬픔에 빠져버립니다만, 그럴 때는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견디어야 합니다. 꿋꿋하게 나아가다보면 살짝 가리워졌던 은총이 다시 비칠 때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에는, 일상 삶과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현존과 부재의 리듬을 잘 타라는 예수님의 자상한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갑시다.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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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8,1-8 요한 16,16-20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앞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것이지요. 이어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은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역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악함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선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만드셨습니다. 미움과 파괴의 문화를 사랑의 문화로 바꾸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틀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만을 모든 기준으로 삼다가 어느 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삶의 모든 기준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악과 불신에 가득 찬 나머지 세상을 미움과 증오로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열려 선과 사랑을 지닌 존재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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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8,1-8 요한 16,16-20
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은 우리 인간이 모두 가장 원하는 감정 상태입니다. 즐거움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금세 사라지는 데 비해 기쁨은 여운이 길기 때문이고, 쾌락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닌 것처럼 즐거움은 퇴폐적으로 흘러 인생을 망치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는 허무감만 남기기 일수입니다.
그에 비해서 기쁨은 남는 것이 있지요. 감정에 여운이 있는 것은 물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얻음의 만족감, 성취의 만족감, 성공의 만족감, 만남의 만족감입니다. 집을 얻거나 자식을 얻었을 때 기쁘고, 원하던 목표를 성취했을 때 기쁘며, 사업이 성공하고 번창할 때 기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대가가 즐거움 뒤의 허무감이나 피폐함이라면 기쁨의 대가는 기쁨을 얻기 전에 치러야 하는 것으로서 고통이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즐거움의 후 대가이고 기쁨은 전 대가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서 삶의 지혜, 기쁨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기쁨을 위한 근심과 걱정으로 바꾸고, 기쁨을 위해서 근심과 걱정을 마다하지 않는 지혜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과 비생산적인 근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것입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 예를 드신 바 있지만, 아기를 낳기 전의 근심, 아기를 낳기 위한 근심은 생산적인 근심이요 기쁨을 낳는 근심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우杞憂 같은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근심입니다.
기우란 하늘이 꺼질까 근심했다는 옛날 기나라 사람의 근심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의 근심대로 하늘이 꺼졌다면 근심했는데도 꺼졌으니 쓸데없이 근심한 것이요. 꺼지지 않았다면 꺼지지 않을 것을 근심했으니 이 또한 쓸데없이 근심한 거지요. 근심하여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의 병만 얻고 건강은 잃은 셈입니다.
이제 우환憂患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환이란 근심스러운 일을 말하고 그중에서도 병으로 인한 근심을 말하는데 우환이 생기면 누구나 처음에는 근심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람은 생산적인 근심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쓸데없이 근심만 합니다.
우연히 생로병사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파킨슨씨 병을 앓는 사람들 얘기를 봤는데 거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가 이내 극복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특히 춤을 추면서 마음을 밝게 가지려고 했더니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행복을 되찾았답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우는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요. 하느님을 만나서 병이 치유되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설혹 병이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만난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근심이 있다면 이런 생산적인 근심으로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근심을 바꾸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 제6주일 복음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