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국학에서 본 신라인의 공간적 예지
새화랑유치원 이사장
교육학박사 김영호
길지(吉地)는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과 연결시켜, 집을 짓는데 혹은 묘지를 선택할 때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된다는 지점을 말한다.
뒤편에는 우뚝한 산이 든든한 배경으로 위치하고, 전면에는 호수나 강이 흐르며, 햇볕이 상조(常照)하고, 통풍(通風)이 잘 되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은 아마도 길지가 아닐까. 이런 조건을 갖추면서 시장과 병원, 학교, 관공서 등이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격으로 선호하는 곳이다.
경주시가 강한 태풍의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극 노력한 시정책임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방풍역할을 해주었다고 여겨진다.
신라가 계림에 도읍을 정했던 것도 사방에 아름다운 산이 병풍 되어 바람을 막아 주었고, 시가지의 남쪽, 북쪽, 서쪽에 넓은 남천, 북천, 서천이 흐르는 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거환경이 좋아서 장수하는 노인인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어서 시명(市名)과 같이 경사스러운 고을이라 생각된다.
신라 신문왕(682) 2년에 오늘날 국립대학 격인 국학(國學)을 교동에 설치한 것도 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며, 교동은 뒤편에 아름다운 계림과 소금강산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앞에는 사금(砂金)이 나는 남천(南川)이 유유히 흐르고, 또한 아담한 도당산이 근접해 있고 자라(鰲:자라 오) 형상의 금오산 준령(峻嶺)이 문천(蚊川)을 향해 뻗어 내리는 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원이나 학교를 설치하는 데 특별히 고려할 사항에 대지(垈地)가 반듯하고 산이 원경(遠景)으로 바라볼 수 있고 넓은 들이 내다보이며, 강의 흐름과 사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을 최우선 입지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위치와 방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는 위치, 방향을 철학적으로 중요시하고 있다. 오방(五方)인 동서남북이 오행(五行)인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와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대응하고, 오륜(五倫)인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과도 대응(對應)한다.
서울의 보신각(信)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대문(四大門)을 동쪽의 흥인지문(仁), 서쪽의 돈의문(義), 남쪽의 숭례문(禮), 북쪽의 숙정문의 이름에 각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넣어서 지은 것을 보면 오상(五常)과 방향(方向)을 중요시한 것이다.
방향에 관한 것을 『예기(禮記)』 「왕제(王制)」에서 보면, “하후씨양국로어동서(夏后氏養國老於東序)”라 하여, 고관출신의 원로인 국로(國老)는 동서(東序)에서 대접하였고, “양서로어서서(養西老於西序)”라, 관직이 없는 서민출신 노인은 서서(西序)에서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여기서 말하는 서(序)는 규모가 12,500가(家)로 구성된 행정구역을 뜻한다.
“소학재공궁남지좌(小學在公宮南之左), 대학재교(大學在郊)” 즉, “소학은 궁궐의 남쪽 왼편에 있고, 대학은 교(郊)에 있다”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에 “은인설우학위대학(殷人設右學爲大學), 좌학위소학(左學爲小學)”이라 하여, “은나라 사람은 우학(右學)을 세워 대학(大學)이라 하였고, 좌학(左學)은 소학(小學)이라 하였다.” 학(學)은 국도(國都)에 세워진 학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국학을 국도의 중심인 현 경주향교의 기지(基址)인 교동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위치와 방향을 중요시 여긴 사적이 아닐 수 없다. 국학에 경(卿), 박사(博士), 조교(助敎), 대사(大舍), 사(史) 등의 관직을 두어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시전, 육선(六選)을 나누어 주로 가르쳤다.
박사 또는 조교 1명이 학생들에게 예기, 논어, 주역, 효경을 가르치고, 어떤 이는 춘추좌시전, 모시, 논어, 효경을, 또 어떤 이는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쳤다.
국학(國學)을 국도(國都)에 설치한 공간적 이유는 권위를 부여한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지방대학교가 서울에 소재하는 대학교보다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다 할지라도 세칭 일류대학교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단지 국도가 아닌 지방이라는 지역적 권위의 상징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국학의 구지(舊址)에 경주향교의 건물이 우뚝하지만 서울의 성균관(成均館)에 비하면 비록 고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그 권위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옛사람은 학교를 건립할 때, 응취풍수(應取風水)와 모합청정(謨合淸靜)이라는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고려하여 교육공간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삶을 자연과 조화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학의 건물이 웅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랑도 교육이 교실과 같은 폐쇄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방공간에서 유오(遊娛)교육을 통해 심신을 수련했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신라인은 인간교육에 있어서 공간을 수단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수축사회에 접어들어 인구는 급감하고 집중화 현상 때문에 고대광실의 건물도 빈공간화 되고, 학교건물도 빈 교실이 매년 늘어나서, 불가피하게 폐교가 속출하고 있으니, 아담하게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국학의 공간적 디자인 기술이 경주향교의 골기와 건물에 비치는 듯 미래를 예견했던 선인(先人)의 예지(叡智)에 감탄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