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김애자
물고기들을 위한 연가.
윤사월 긴 해가 지고, 능선 위로 샛별이 돋는다. 어둠살이 짙어진 개울가로 나가 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소리가 끊긴 지 열흘이 지났다. 아니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어 물고기들은 작은 소(昭)에 몰려 복작거린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물의 양으로 보아 일주일 이내에 비가 오지 않으면 녀석들은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 이런 위급함은 물고기들만이 아니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농민들은 대지의 가쁜 숨결에 애가 마른다. 위세 등등하던 첨단과학도 자연과학도 생명공학도 이 가뭄 앞에선 속수무책이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문학도 철학도 종교도 이 가뭄 앞에선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윗동네에선 식수마저 떨어져 이틀에 한 번씩 소방서에서 물탱크를 동원해 식수를 공급해 주고 있다.
사람의 몸 속에 저장되어 있는 수분의 함량은 75%나 된다. 이 수치가 떨어지면 열이 오른다. 응급조치로 식염수에 포도당을 첨가한 링거액을 정맥에 주입시킨다. 대지도 적절량의 수분을 저장하지 못하면 탈수 현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90년 만에 든 최악의 가뭄에 심한 탈수 현상으로 온 산하가 타는 갈증을 풀지 못해 널브러지고 있다.
안산에 사는 김노인은 오늘도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을 들여다보고 한숨만 쉬다가 집으로 올라가셨다. 80고령에 시절이 좋아도 농사짓기가 어려울 판인데 뚝새풀마저 벌겋게 말라붙는 이 가뭄은 노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인 것이다. 어두워지는 논둑에서 다리를 절며 걸어나오는 김노인의 굽은 등을 안쓰럽게 지켜보다가 문득 영화 <마농의 샘>에 나오던 ‘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 <마농의 샘>의 주인공인 장은 곱추다.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문학에도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지닌 지성인이다. 그가 아내와 어린 딸 ‘마농’을 데리고 상속받은 토지를 찾아 프랑스 남쪽 지방인 ‘프로방스로 내려간다. 산의 중간지대에 있는 농장에서 ‘과학적 농업’을 꿈꾸며 토끼도 기르고 카네이션과 호박과 토마토를 재배하면서 행복한 날을 보낸다. 하지만 가뭄이 들어 장은 곱추인 등에 물지게를 지고 멀리 떨어진 산밑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온다. 그러나 욕심 많은 ‘세자르’가 샘을 막는다. 물이 떨어진 농장은 지금 김노인의 논바닥처럼 바싹 말라 애써 지은 농작물은 한낱 마른풀로 변한다. 실의에 빠진 장은 어느 날, 마른 번개와 천둥소리만 요란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절규한다.
“난 곱추예요. 이렇게 사는 게 쉬운 줄 알아요? 이 가뭄에 열풍까지 몰아치고. 하느님 비를, 오 비를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비는 끝내 내리지 않고 ‘장’은 샘을 파다가 죽는다. 행복하게 살려고 찾아온 땅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장의 절규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다리를 절며 하루에도 몇 번씩 뚝새풀마저 말라버린 논바닥을 들여다보는 김노인의 심정도 그러하려니 싶어서다.
“다리 저는 이 늙은이가 보이지도 않소?”
불덩이 같은 해를 향해 한바탕 몽니라도 떨어보고 싶은 울화가 중치를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 개울에 있는 물고기들도 불원간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너도나도 비닐호수를 들이댄 탓이다. 전답마다 얼기설기 쳐 놓은 비닐호수가 중환자 몸에 주렁주렁 달아 놓은 의료기구와 다를 바 없건만, 들어가는 물은 어린애 오줌줄기만도 못하다. 증발하는 수분이 곱절이나 되니, 품앗이로 근근이 심어 놓은 고추가 건사(乾死)하기 직전이다.
동네에 냇물이 이처럼 바닥을 드러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여기가 탯자리인 노인회장님 말씀에 따르면 이런 변고가 일어난 것은 80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단다. 산의 등고선이 치마 주름처럼 첩첩 포개져 있으니 수원이 마를 턱이 없었던 것이다. 양쪽 골짜기에서 내려가는 물이 얼마나 풍부하였으면 협곡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을까. 자그마치 둘레가 6km나 되는 저수지에 노상 산영이 잠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수랫골에서 내려가는 물의 양이 그만큼 풍족해서다. 수랫골이란 지명이 하루아침에 주동(酒洞)으로 둔갑을 한 것은, 담당서기의 불찰로 그리된 것이다. 일제 때 모든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물 수(水) 자를 ‘술’자로 잘못 알아들은 탓으로 ‘酒洞’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주동이 아닌 ‘수랫골’이래야 쉽게 알아듣는다.
이렇게 쉬임 없이 흐르는 수랫골 냇물은 일급수에 해당된다. 저수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음식점이나 공장, 축사에서 나오는 오물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통제하고 있어서다. 때문에 모래무지와 송사리는 물론 밀어와 빙어까지 적잖이 살고 있다. 이런 것들이 개울물이 줄어들자 일없는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두어 축 훑어다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운 좋게 살아 남은 녀석들이 장마 때 수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공낙차 밑으로 몰려와 복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낮이면 얄밉도록 내려 쬐는 불볕으로 물이 졸아들고, 밤이면 살랑거리는 바람이 이슬마저 걷어 간다.
내가 이 생명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물을 내려 녀석들을 건져 함지박에 담아 차에 싣고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조정지 댐으로 가 거기다 풀어 주면 된다. 그 일을 실행하고 싶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남편이 한사코 이를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하는 이유는 모래와 자갈이 깔린 여울에서 살던 녀석들을 오수로 뒤범벅이 된 물에다 갑자기 놓아주면 병을 얻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살아 남는다 해도 잉어나 가물치, 송어 같은 큰 고기들의 밥이 되기 십중팔구라는 것이다. 남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일주일 안에 비가 오지 않거나, 주위에서 누군가 그물을 던져 또다시 매운탕거리로 삼는다면 나는 가차없이 구조물을 이용하여 녀석들을 조정지 댐으로 싣고 갈 작정이다. 그 다음의 일은 저들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행동을 설령 누군가 “그까짓 물고기가 뭐 그리 대수라고 유난을 떠느냐” 비아냥거려도 나는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말 것이다. 땅 속에는 미물이 살아야 하고, 물에는 물고기들이 살아야 하며, 땅 위에선 숲과 발이 달린 짐승들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공존해야 인간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오늘밤은 물고기들을 위한 연가라고 불러야 이 뻐근한 목젖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