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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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필자가 길림신문 서울지국장/특파원으로 재직중인 11년전의 일로 1999년 3월 4일, 부산구치소를 방문, 당시, 한.중 양국간에 파란을 몰고 왔던 <페스카마호사건>의 주범으로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조선족 사형수 <전재천>을 전격 취재한 내용이다.
당시 전재천은 다른 조선족 5명과 함께 한국인 등 11명을 살해, 바다에 수장시킨 혐의를 인정받아 사형수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어 수감 중인 중죄인이었다.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이 사형수를 구치소 감방 안까지 들어가 취재를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자는 모든 방법을 총 동원, 사형수인 전재천을 직접 취재하여 특종을 보도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후, 전재천은 본 기자가 보도한 기사와 꾸준한 관련단체의 감형 운동에 영향을 받아 지난 2008년 1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14년째의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 길림성인민정부 기관지인 <길림신문> <1999년 3월 25일> 자에 보도되었던 페스카마호사건 주범 전재천에 대한 필자의 취재기사 보도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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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1999년 3월 25일>
“나 혼자의 희생으로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페스카마호사건 사형수 전재천을
본사 서울지국장 류재복 특파원이 만나보다
1999년 2월 25일, 이날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을 선출, 국민의 정부를 탄생 시킨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러한 축하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80주년이 되는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한국정부는 이날 25일, 8000명에게 사면, 복권, 감형, 석방 등의 특사조치를 단행했다.
이날, 본 기자는 이미 서울지국에 입수된 보도 자료를 통해 이번의 대통령 특사조치에서 우선 감형자 명단에 전재천이란 이름이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전재천(남, 48세)은 1996년 8월에 발생한 그 유명한 <페스카마15호 선상살인사건>의 주범으로 현재 부산구치소에서 사형수로 언제 어떻게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운명의 날을 항상 눈앞에 두고 있는 중국 조선족이다.
기자는 지난해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관계된 범인들인 전재천을 비롯, 현재 다른 곳에 수감중인 조선족 5명 <박군남, 최금호, 최일규, 리춘승, 백충범>의 구명운동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부산의 인권단체 대표 2명(김정각, 정귀순)을 특집으로 각각 보도한바 있다
페스카마호 사건, 200만 조선족들의 특별 관심사
그것은 본 기자가 한국인이면서 중국 200만 조선족과 관계가 깊은 중.한 량국간의 친선교류에 나름대로 힘써왔고 현재는 또 길림성 조선족의 대변지인 길림신문의 서울지국장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사건은 중국 현지에 있는 200만 조선족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 한민족의 일이고 나아가서는 중.한 량국간의 중대한 현안 문제이기에 본 기자는 사형수 전재천을 직접 만나 특별취재를 하기로 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감형의 조치를 바라는 련명의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 정부 당국에 제출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 특사의 혜택을 받지 못함에 대한 위로를 그에게 조금이나마 해주고 싶었고 또한 사형수라는 신분에서 하루 하루를 초조하게 살고 있는 그의 현재 심정과 또 47년간을 살아온 그이 인생과정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먼저 이 사건에서 97년 4월 당시, 전재천 등, 이 사건에 관계된 조선족 6명의 피고인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자청했던 부산종합법률사무소의 대표 문재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피고인들을 위해 열변을 토했던 변론 한 부분을 옮겨본다.
[우리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남쪽에서 좀 더 아량을 가지고 대하였다면 남북관계가 훨씬 호전되지 않았을가 라는 후회를 하곤 합니다. 조선족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중국의 조선족들과 한민족 의식을 나누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북통일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도 갖게 됩니다.
1991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로동현장을 체험하였고 그 체험을 토대로 <한신하이츠>와 <감전동 376번지> 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길림성의 조선족 소설가 김남현은 조선족들의 정서를 표현하면서 한국에 대하여 <국토가 작아서인지, 오래동안 대국의 틈에서 신음해서인지 흉금이 너르지 못하다. 너무 협애하다. 중국처럼 30년대에 그 많은 한국인들의 망명과 독립지사들을 품어주고 또 이주민을 품어주는 대국의 풍토가 없다. 하물며 동족이고 할아버지의 호적이 그 땅에 있는 후손들마저 포옹을 해주지 못한다.>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경청할만한 통렬한 비판이 아닐수 없습니다.]
변론문과 판결문 한민족임을 시사
다음은 97년 4월 18일에 있었던 이 사건의 최종판결 재판부인 부산고등법원 형사 제2부(판사 김진기, 신창수, 김종기)의 판결 내용중 일부를 옮겨본다.
[피고인들은 모두 중국 조선족으로서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이 사건 선박에 승선하였으나 같은 조선족인 한국인 선원으로부터 가혹한 폭행과 학대 및 모욕을 받게 되자 차후의 일을 살피지 아니한 채 하선을 요구하였고 하선으로 인한 조업 손실금까지 부담시키겠다는 위협적인 말을 듣게 되자 절망감과 함께 가혹행위를 한자에 대한 보복 심리까지 겹치게 되어 피고인들 중 가장 년장자이고 승선 경험까지 있는 피고인 전재천의 제의로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점, 사전 계획하에 자신들을 심하게 괴롭혔던 선장과 갑판장을 살해한 이후에는 범행을 은폐하거나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잇달아 살해하게 된 점, 피고인들은 모두 중국에서 교원이나 농부, 또는 점원으로 아무런 전과 없이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성실히 살아왔고 이 사건 수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대체로 범행사실을 시인하면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은 참작한다.]
1999년 3월 4일 오후 3시, 부산구치소 특별면회실로 들어서는 전재천 그를 기자는 처음으로 보았다.
이날, 본 기자가 그를 특별면회 하기까지는 사실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과정을 이곳에서 자세히 밝힐수는 없다. 어쨌든 이날, 본 기자와 전재천, 두 사람은 뜻있는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본 기자를 보자 의아했다. 처음 대하는 낯선 얼굴이기에 당연히 궁금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얼굴은 혈색이 좋았고 매우 건강한 모습이였다. 또한 살인을 한 사형수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도 없고 느낄 수 도 없는 착한 인품을 보이는 미남 이였다.
본 기자가 우선 그에게 <중국 길림신문 서울특파원> 이라는 신분을 밝힌 후 그를 위로하고 또 앞으로의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그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한 후 본격적인 둘 만의 대화가 시작 되었다.
류재복: 현재 많은 인권단체와 사람들이 전 선생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사건에 민족문제가 관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재판사상 6명의 사형수 중 5명의 사형수를 무기로 감형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이는 분명 민족적 차원에서의 한국 재판부의 대 결단으로서 우리 민족사상 잊을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전선생과 다른 동료들이 우리 한국 선원들에게서 많은 학대와 구타를 당했다곤 하나 선상에서의 11명 대학살 사건은 분명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선생은 현재 사형수의 신분입니다. 지금 이순간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고인과 유가족들께 매일매일 참회기도
전재천: 기자님께서 이렇게 멀리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오직 한국의 국민과 피해자 가족들께 용서를 바랄뿐입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생명을 잃게 한 안타까움, 가책, 죄스러움, 미안함 등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고향에 있는 가족의 그리움과 시간의 고귀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목숨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숨진 11명의 고인들을 위해 매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번민은 더욱 깊어가고 고인들에게는 더욱 죄스럽고 유가족들께는 더더욱 미안할 뿐입니다. 나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그분들께 용서를 청하며 빌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으로 위로가 된다면 나는 그분들을 위해 죽음을 달게 받을 것 입니다. 이제 곧 마칠 나의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매일 매일 고인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하고 있습니다.
류재복: 성실한 사람이 극도의 절망에 봉착 했을때 선택하는 길이란 자살이 아니면 살인을 한다고 봅니다. 나도 전 선생이 다른 분들과 같이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반항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당시 만약 선장 등 한국인들이 조금이라도 련민과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인도주의적으로 인간답게 대하여 주었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도 해 봅니다. 그간 지내온 전 선생님의 성장배경을 알고 싶은데요?
전재천: 나는 1952년 12월 8일에 길림성 반석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전정기)의 고향은 한국 경상남도 거창인데 부모님들은 1940년도에 새로운 살길을 찾아 중국에 오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시다 아버지는 1964년도에 뇌출혈로 사망하셨고 나는 그해 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조선인의 기백이 강해 조선인들만이 사는 마을을 만들었는데 한국 고향의 이름을 따 <경남촌>으로 마을 이름을 정했고 지금도 그 마을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1966년에는 문화혁명이 터져 온갖 고초를 겪었고 1968년에는 천진 사범학교에 입학, 2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1971년에 현의 조선족 중학교 교원으로 발령을 받아 열심히 사업 했습니다. 그때 첫 월급으로 중국 돈 38원을 받아 흥분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모두 드렸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교원노릇도 잠시, 1972년도에는 료녕성 제1사단에 입대, 직업군인으로 가무단에서 사업을 했고 1977년도에는 길림성 휘남현 문화관에 있다가 1984년도에 중국이 개방되면서 음악학교에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들 삼형제를 군에 모두 입대시켜 혁명가족 칭호를 받고 기뻐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84년도에는 내게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법을 어기고 아들 하나를 더 낳은 것입니다. 원래 조선민족은 자식을 둘까지는 허용하는데 어머니의 봉건사상 탓으로 손자를 원하시면서 안해를 조르기에 우리 부부는 숨어 살면서 아들 봉주를 낳았지만 결국은 국가를 속일 수 없어 고리대금으로 돈을 빌려 중국 돈으로 벌금 8000원을 내고 경고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2>편에 계속
<1>편에 이어
한국초청 사기 피해자로 가산 탕진
그때부터 가정생활은 아들을 낳은 탓으로 쪼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기에 얼굴을 감추고 남새장사를 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친척에게 중국 돈 1만원을 빌려 찌프차를 사 택시운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93년 6월에 아들 봉주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했는데 결국은 그때 또 아들 때문에 찌프차도 팔고 많은 돈을 빌려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그때 한국입국의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고 나도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마침 군대친구가 한국인 리00씨를 소개 했는데 리씨라는 그 사람은 꼽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족 20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주겠다면서 1명당 중국 돈 15,000원씩을 내라고 하기에 나는 친구와 그를 믿고 동생, 사돈까지 7명을 모집하여 중국돈 12만원을 주었는데 결국은 믿었던 친구와 리씨라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나에게 사기를 친 것이였습니다.
할수없이 나도 친척들에게서 사기군 소리를 들어야 했고 결국은 그간 모았던 전 재산을 털어 근근히 1만5천원을 마련, 시집살이 하는 녀동생에게만 변제해주고 7~8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고난의 생활을 하다가 다시 로무초청 모집에 응해 1994년 한국 원양어선 풍산호 27호에 올라 14개월간을 싸이판에서 일했고 그 대가로 1년 반 동안 5만원을 벌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역시 배를 탈 때도 한국 선원들에게 갖은 폭행과 모욕, 협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욕을 밥으로, 매를 떡으로 삼고, 인내하며 참고 지냈던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올 때 평생 1만원도 손에 쥐어보지 못한 내가 5만원을 벌었으니 어찌나 기쁜지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빨리 이 돈을 안해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했습니다.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을것이고 이 돈을 계획적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는데 쓰면서 열심히 살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와보니 그런 생각은 모두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안해가 너무도 심한 병에 걸려 병원 치료비로 큰 돈이 나가야 했고 딸 둘과 아들의 학비, 그 외 생활비, 또한 곧 내야 할 큰 딸의 대학 입학금 등 5만원이 금새 사라졌습니다. 앞이 캄캄 했습니다. 나는 또다시 배를 한번 더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6년 음력설을 보낸 후 나는 곧바로 수중에 남아있는 돈을 가지고 연변의 송출회사에 찾아가 항해사 모집에 응한 후 친구회사의 영업허가증을 보증금으로 눌러놓고 또 1만원을 빌려 대련 수산학원에서의 4개월간 학습비로 낸 후 1급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 페스카마호 15호에 승선하게 된 것입니다.
류재복: 결국은 모든 것이 가난 때문입니다. 전 선생의 환경이 부유했다면 페스카마호 배를 타지 않았겠지요. 1996년도 음력설에 전 가족을 만나고 그 후 지금까지는 가족을 보지 못했는데 선생의 가족사항은 어떻게 됩니까?
병든 로모와 아들, 아직 사건내용 몰라
전재천: 고향에 72세인 어머니가 병환으로 계시는데 아직도 이 사건을 모르고 있습니다. 안해 김옥춘은 내가 이곳에 구속된 후 처음 면회 왔다가 돌아간 후 소식을 모르고 있으며 남동생 전재수(42세), 전재봉(39세), 2명이 있고 녀동생 전화자(34세), 딸 전려해(20세), 전려홍(19세), 아들 전봉주(14세)가 있습니다. 큰딸 려해가 지난해 8월에 연변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둘째 려홍이는 고중 3학년인데 휴학을 했고 아들 봉주는 소학교 5학년 입니다. 녀동생 전화자는 연변의대를 나와 현재 연변병원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가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을 어머니와 아들만이 모를 뿐 다른 가족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류재복: 설령 가족들 모두가 전 선생이 이곳에 수감돼 있는 것을 안다고 해도 큰 흉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 선생이 고의로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6명중 가장 나이가 많은 탓으로 책임을 졌고 또한 5명을 살리는 희생정신 때문에 이곳에 계신 것으로 모두가 그렇게 보고 있으며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당시의 상황을 다시한번 사실대로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전재천: 나는 온두라스 국적의 254톤 원양참치어선 페스카마호 15호의 2등항해사(2항사)로서 조선족동료 박군남, 최금호, 최일규, 리춘승, 백충범, 최만봉 등 7명, 한국인 선장 최기택 등 7명, 인도네시아 선원 9명 등 총 23명이 승선, 96년 6월 27일부터 남태평양 해상에서 참치조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중 나를 제외한 6명은 승선한 경험이 없어 작업을 잘못해 언제나 선장과 갑판장으로부터 온갖 폭행을 당했고 인간이하의 별별 수모를 당했습니다. 당시의 사건과정을 시간이 없어 지금 여기에서 모두를 이야기 할 수 는 없습니다. 며칠 밤낮을 이야기해도 못할 것입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항상 얻어맞아 터지고 기합 받는게 일과 였으니깐요... 물론 얻어맞아 터진것은 우리 조선족뿐만 아니고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 중에 가장 악독한 사람은 갑판장 장인호 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1항사(한국인 이인식)에게 “항해사님, 갑판장님은 어찌 이렇게 계속 우리들을 때립니까? 좀 얘기해 주십시요”라고 말을 하자 1항사는 “선장도 어쩌지 못하는데 내 말을 듣겠습니까?”하며 무관심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참다 참다 할 수 없이 한국인 최기택 선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내용은 <갑판장의 잔혹한 행위에 더 견딜 수 없으니 선장님께서 갑판장을 교육하여 시정토록 요구해 주십시오. 꼭 폭행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장님 밑에서 열심히 참고 일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큰 딸이 써 준 참을 忍자 지금도 간직
참는 말이 나왔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내가 고향을 떠나던 날, 큰 딸 려해가 제손으로 만든 1개의 곽을 주면서 “아빠, 이것은 아빠가 배에 도착한 후 뜯어보세요.”라고 부탁하여 나는 배에 오른 후 딸이 준 그 곽을 뜯어보니 그 속에는 정성스럽게 쓴 참을인(忍)자가 있었습니다. 딸의 지극한 정성과 효성이 깃든 글 이였습니다. 나는 이 글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왜 딸과의 약속을 잊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딸은 그동안의 1차 선상 생활의 어려움을 내게서 들었기 때문에 忍자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에게 전하는 그 편지는 선장에게 전해지지도 않았고 그 후의 작업에서도 갑판장은 우리들에게 몽둥이로 내리치고 쌍스러운 욕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네시아인이 작업도중 큰 실수를 하자 갑판장과 선장까지 가세하여 쇠파이프를 들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우리들에게 휘둘렀습니다. 정말 상상 할 수도 없고 지금도 생각하면 끔직 합니다.
이때 우리 조선족 7명중 동료 리춘승이 더 이상은 맞을 수 없다며 선장에게 대항했고 나를 제외한 5명은 리춘승을 위해 방어를 했습니다. 선장은 이러한 상태를 보자 1항사에게 “도끼를 가져오라. 이 거렁뱅이 새끼들을 다 죽여야지” 했습니다. 그러자 1항사는 정말 도끼를 가져다 선장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이때 이 광경을 본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모두 흉기를 들고 방어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일단은 불상사 없이 그냥 지났는데 도무지 일할 분위기가 아니였습니다. 동료들도 선장에게 “더이상 이 배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다. 집에 돌아가겠다.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거부했고 계속 하선을 요구했습니다. 원래 계약서상에는 작업기간이 있기에 하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작업을 계속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96년 6월 16일 저녁에 승선한 후 45일만인 7월 30일, 우리는 마침내 선장과 하선에 관한 담판을 했습니다. 그러자 선장도 하선을 시키겠다고 하면서 1항사를 시켜 하선에 관한 보증서를 쓰게 했고 우리들에게는 모두 손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승선 45일 만에 작업중지 하선 요구
그런데 뒷면 내용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내용을 보니 <중국 조선족 6명은 승선 후 선장과 갑판장의 지시를 듣지 않고 또 작업을 거부하고 심지어 흉기를 들고 선장을 살해하려 달려 들었고 계속 작업거부 및 폭행 행위를 하기에 강제 하선시킬 것을 결정한다.>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선장은 또 우리에게 “썅, 거러지 같은놈의 새끼들, 그렇게 쉽게 보내줄 줄 아느냐. 사모아 구류소에 3개월 구속 시키고 그곳에서 먹고 자는 비용을 너희들 가족이 보내와야 그 후에 돌아가게 하고 또 이곳에서 사모아까지 가는 배의 연료 및 일체비용도 너희들이 물어야 한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할 수 없이 선장과 항해사에게 “미안합니다. 돌아가지 않고 일하겠습니다.”라고 사정을 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쌍스러운 말과 오히려 욕만 얻어 먹었습니다.
이때 나는 방광결석이란 병이 있어 꼭 하선하겠다고 했지만 선장은 오히려 “당신, 2항사가 폭동의 주동자이고 또 흉기를 들고 폭행에 가담했기에 용서 못한다.”라고 나에게 고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결국 그들이 지독하고 악독한 자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후, 나는 하선에 따른 손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왕복항공비, 사모아까지의 비용, 사모아 구류소 3개월 비용, 친구의 보증금인 집 한 채, 금액으로 환산하면 중국돈 20만원이 되었습니다. 이 돈이 사모아에 송금되어야만 집에 갈수 있는데 이 돈을 가족들이 어떻게 보내오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선장을 찾아가 “선장님, 천번만번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를 보지 말고 우리 어머니와 자식들을 보아서라도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금후에는 선장님이 시키는대로 꼭 하겠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답이 없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우리 조선족 7명은 초조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사실 나는 연변에서 혼자 왔고 다른 5명은 장춘에서 왔기에 원래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자 서로의 어려운 처지들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장춘에서 온 5명은 장춘 송출회사에 1만원을 빌려 계약금을 냈는데 1만원의 빚이 2만원으로 증가 되었고 96년 6월 10일 출국하면서 장춘 회사에는 보증금으로 집 두채와 현금 5만원을 눌러 놓았다고 했습니다. 매달 봉급은 190딸라인데 담보금은 그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20만원의 빚, 자자 손손 10대도 못 갚아
이러한 절박스런 이들의 사연을 들을 때 나는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승선하여 50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매일 욕을 먹고 매를 맞으며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개고생을 하고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도리여 빚을 지고 가야하고 오히려 승선 반란자로 몰리어 사모아 구류소에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아프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벌러 왔습니다. 집에는 안해와 자식들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인당 20만원 빚을 지게 됩니다. 20만원의 빚은 자자 손손 10대를 가도 못 갚습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선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선장은 끝내 우리들의 호소를 묵살 했습니다.
<3>편에 계속
<2>편에 이어
한민족동포 유감 조선족6명 모두 자살 결의
선장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혔고 행복을 짓밟았고 가족과 함께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너무도 원통했습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으로서 너무도 그가 미웠고 정말 유감스러웠습니다. 결국 우리는 죽기로 했습니다. 죽는김에 우리를 죽게 한 선장을 죽이고 자살하자고 6명이 다짐을 했습니다. 이날 저녁,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술에 의한 이들의 눈에선 독이 올랐고 긴장된 분위기 였습니다. 결전의 순간은 오고 있었습니다.
그순간 동료중 백충범이 먼저 나에게 “2항사님, 오늘저녁 당직을 설 때 선장을 우리 5명이 있는 곳으로 들여보내시오. 그러면 뒤 일은 우리가 처리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나는 이들의 요구대로 96년 8월 2일 새벽 2시부터 7시까지 선장, 갑판장, 기관장, 기관사, 조기장, 조리장 등 한국인 6명을 하나 하나씩 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했고 한국인 6명은 그렇게 이들에 의해 살해된 것입니다.
이날 저녁, 이들은 흉기를 언제 준비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또 살해하는 곳에도 나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1명의 한국인은 감정은 없었으나 현장을 목격한 탓으로 살해 되었고 나머지 4명(조선족1명, 인도네시아 3명) 역시 살인행위를 보았기에 감금 시켰는데 이들은 랭장고 안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11명의 목숨이 망망 대해의 바다 한가운데서 없어지고 우리도 곧바로 자살하려 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류재복: 당시의 사건을 상세히 직접 듣고 보니 전 선생과 다른 분들의 순간적 행위에 리해가 갑니다. 여러분들은 한국 선원들이 여러분들께 가혹하게 대했고 또 절망적인 궁지에 빠트린것을 보복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살해 행위를 한 것이지 고의적으로 살인을 했다고는 생각이 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선상근무의 경험이 전혀 없는 외국인 선원들에 대한 가혹한 폭행과 학대, 그리고 모욕이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 됩니다. 사실 강자와 약자간의 상습적 구타는 피해자에게 원한만 심어주는것이 아니라 공포감과 절망감, 자기부정, 자기모멸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일으켜서 정상적인 분별력을 크게 훼손 시킨다고 봅니다.
어쨌든 선상폭력의 특수성과 그로인한 피해 의식이 선장과 갑판장의 살해를 유발했고 이어 다른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죽음으로 이어진것은 역시 안타깝고 아쉬운 일입니다. 전 선생은 지루한 재판을 거쳐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5명은 무기형으로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지만 전 선생은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을 선고 받았을 때 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사형선고 받는 순간, 어머니 모습 그리워
전재천: 재판장의 <피고 전재천을 사형에 처한다>라는 소리에는 오직 눈앞이 캄캄하고 어두웠을 뿐입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고 자식들, 그리고 동생, 사랑하는 안해의 얼굴이 스쳐갔고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이구나 하는 절망의 생각 뿐이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렇게 뵙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후회도 했습니다. 1항사인 이인식에게 속아 일본의 00섬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일본경찰에서 한국경찰로 이송되어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때 나는 직접 살인을 하지 않고 또 살해 현장에 없었으면서도 다른 동료 5명의 창창한 젊음을,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가 했다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진술하여 결국은 사형선고를 받음에는 정말 내 정신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위대한 사회주의 공민이고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전재천은 희한스런 눈물을 흘리며 말했고 특히 자신의 어머니 생각에는 더더욱 괴로워 했으며 자신이 직접 살인을 하지 않고도 모든 책임을 자기 스스로 지기로 했다며 말 할 때는 그의 강인한 의지를 굳센 눈 빛에서 읽을수 있었다.)
류재복: 나 자신의 귀한 목숨보다도 나이어린 다른 조선족 동료들을 위해 모든 책임을 떠맡고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신 전선생의 용기에는 깊은 격려를 드립니다.
그간의 구치소 수감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전재천: 죽을 생각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생명에 지장을 준다는 약도 구해서 먹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모기약을 먹으면 죽는다고 해 그 약도 먹었지만 그것도 토해내게 되었고 결국은 2일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내가 입은 죄수 옷에는 살인범만이 달고 있는 사형수를 상징하는 붉은 명찰을 달고 다른 죄수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나도 피해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느 때는 다른 감옥에 수감돼 있는 5명의 동료들도 생각해 봅니다. 그들도 사실은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이곳 0.75평방메터의 작디 작은 감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흘러간 지난 옛일들이 영화처럼 떠 오릅니다. 그리고 또 나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왜 이렇게 흉악한 놈이 되었을가 하는 생각에 꿈을 꾸고있는 듯 합니다.
외모부터도 선하게 생긴 탓으로 남들에게 무엇이든지 자꾸 주려했고 남을 더 도와주며 살아왔는데 어찌해서 지금은 내가 살인범으로 사형수가 되었을가... 하면서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그럴때면 그 고뇌를 잊기 위해 책을 봅니다.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감방에서 읽은 책이 200여권이 넘지만 가장 관심 있게 본것은 내가 사형수의 신분인지는 모르나 박상중 스님이 쓴 <사형수 수기>와 신영복 선생이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인데 그 책을 자주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나의 생명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식사도 잘하고 운동도 꼬박 꼬박 잘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있다면 내 몸 신장에 들어있는 결석병이 있을 뿐입니다.
감옥에서 200여권 책 읽으며
류재복: 오늘 제가 전 선생을 보아도 얼굴색이 아주 좋아 안심입니다. 부디 건강에 유의 하시고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편하게 생각하고 지내십시오. 그러면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봅니다.
사실 전선생의 사건에는 한국과 중국의 변호사들이 량국 관계의 중대성을 감안, 무료변호를 해 주었고 또한 많은 사회단체와 인권단체, 개인들이 그간 구명운동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구명 운동이란 전선생의 사형을 중지시키고 무기로 감형 시키려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또 진실로 전 선생에게 도움을 주어 전 선생은 물론 중국에 있는 200만 조선족의 섭섭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동시 우리와 같은 피줄인 조선족은 과거 우리나라 일제 시대에 식민지의 핍박을 피하여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타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모진 고생을 겪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수많은 한국의 지성인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런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전재천: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제가 목숨이 붙어 있어 살아가고 있는것은 바로 그 분들의 힘입니다. 그 고마움은 영원히 잊지 않고 이곳에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이곳에서 사형을 당해 죽는다 해도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한국인의 온정은 매우 따듯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또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 아름다움의 정신, 오직 감탄할 뿐입니다.
거대한 중국과는 다르게 작디작은 이곳 나라에서 그렇게 뜨거운 온정이 있음을 볼 때 감회가 새로울 뿐이고 전날의 내 행위가 분명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감동을 받으며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류재복: 전 선생의 사건은 200만 중국 조선족과 우리 한국인들 간의 모순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사건이지만 한국의 많은 분들이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이 사건을 아량과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특히 저는 오늘 전 선생을 보면서 정말 순박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량하고 참되게 살아온 전 선생의 과거를 들었고 또 일반적인 흔한 불법체류의 길을 걷지 않고 가장 고생스러운 선원의 길을 선택, 정정 당당히 노력의 대가를 받으려 한 전 선생의 정신에는 나도 본받고 싶습니다.
분명 이 사건은 혼자서는 범법행위를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사람들이 동병상련속에서 집단이 되다보니 집단의 상승 작용에 의하여 엄청난 범행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만약 석방이 되신다면 어떻게 여생을 보내실 것입니까?
도와주시는 분들께 감사, 열심히 살고파
전재천: 한국인들처럼 봉사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항상 나눔의 삶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걷고 싶고 또 그것을 락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고 애써주신 고마운 여러분들을 위하고, 우리 조선족을 위하고, 나아가서는 남북 통일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할것입니다.
붉은 천에 검정글씨로 6501의 수인번호 명찰을 달고 사형수의 신분에 처해있는 전재천__. 그와 약 2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져 구치소를 나올 때 봄을 손짓하는 3월의 해살도 서서히 서산을 향하고 있었다.
이날, <외신기자>의 신분에서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만남 그 자체가 의의 있는 일 이였고 그 만남 또한 민족사적인 일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중국 200만 조선족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페스카마호 사건의 사형수인 전재천을 비롯, 그 외 박군남, 최금호, 최일규, 리춘승, 백충범 등 그들이 중국에서 돈을 벌기위해 한국행을 결심 했을 때 그들의 가족들은 <한국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이 사는 나라이고 또 말이 통하고 감정이 통하기 때문에 돈을 버는 곳으로 최고의 나라다.>라고 생각했기에 높은 리자를 주기로 하고 남에게서 돈을 꾸어서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고 이들 6명은 거액의 그 돈을 밑천으로 더더욱 래일의 알찬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다가 지금은 그 아름다운 꿈이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 꿈이 깨어진 그들의 절규어린 현실을 볼 때 거기에는 분명코 원인, 그리고 리유, 또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 기자는 스스로 생각해 보며 부산을 뒤로하면서 짙은 어둠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끝>
류재복<인민일보해외판 한국대표처 특별취재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