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일(나해)
제1독서(창세 3,9-15)는 하느님의 심문과 사람의 변명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3,1-7)와 그에 대한 벌(14-24) 사이에 끼어 있는 내용으로서 하느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은 인간(아담과 하와)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소리(양심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자신을 감추고, 심지어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숨어듭니다. 자기 보호본능이 강한 존재이기에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질문은 아담이 숨은 곳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마주하려면 아담이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는데 일그러진 모습으로 도망치고, 숨는다고 하느님께서 모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인간)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는 죄의 도구가 되었음에도 판관처럼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질문에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인간(아담)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데도 여자(하와) 탓으로 핑계를 댑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 왜 그런 열매(계명)를 만들어놓았느냐고 덤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여자 때문에 죄를 지었으니 결국 하느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변명을 들어주십니다. 또 하느님께서 여자(하와)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으시자 여자 역시 뱀이 자기를 꾀어서 따먹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죄를 지은 것은 자기들인데 끊임없이 다른 이들 탓만 하면서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뱀으로 상징되는 죄악과 인간 사이에 서로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반드시 그 악의 원천을 물리치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축복과 구원의 선물을 주셨으나 하느님께 순종이라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은 마치 뱀처럼 아무도 모르게, 눈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므로 늘 깨어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창세기 저자는 교만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음에도 핑계로 일관하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복음(마르 3,20-25)은 예수님 가족과 충돌 이야기에 율법학자들의 모함을 연결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가족들의 불신 이야기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심각한 도발을 끼워 넣은, 이른바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음식을 드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비해 아주 작은 무리인 가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합니다. “붙잡으러 나섰다.”라는 것은 죽이려는 음모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라고 하는데, 어머니 마리아께서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밖에서만 머무르면서 예수님보고 미쳤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참된 가족은 바로 당신 어머니처럼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즉시 따라나선 사람들(1,16-20)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도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듯이(14,50),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따라나설 사람들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당신 어머니처럼 사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던 것입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을 대적할 만한 실력자가 없었나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똥파리의 주인)과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로 반박하시는데, 사탄의 싸움이라면, 둘 다 버티지 못하고 끝장난다고 하십니다. 또한 힘센 자의 집을 털기 위한 행위를 말씀하시면서 “큰 능력을 지니신 분”(1,7)이신 예수님께서 악령을 제어하신 모습(1,21-28.32-34.39; 3,11.15)을 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하는 가족들이나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율법학자들 모두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하느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지니신 예수님(1,10)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면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제2독서(2코린 4,13-5,1)는 자기를 조롱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코린토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바오로는 자신의 외적 인간이 점점 쇠퇴해 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비록 자기 몸이 쇠퇴해져도, 그리고 자신이 초라하다고 비난해도 실망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남들이 알아주건 아니건 코린토에서의 자기 삶이 하느님 앞에 떳떳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이 자신도 일으켜주시리라는 희망 때문에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희망으로 은총이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고 복음을 선포했다고 바오로는 대답합니다. 코린토 사람들이 바오로의 겸손과 성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태도를 보았음에도 예루살렘에서 온 선교사들의 엉뚱한 소리를 듣고 비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을 얻게 될 영광에 견주면,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로마 8,18).
자기가 죄를 지었음에도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간(아담과 하와)은 늘 함께 하는 이들을 탓하고, 끝내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일그러진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에도, 죄악의 수렁에 빠져있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주시는 분이십니다. 필리피 공동체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코린토인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생활비를 안 받았고, 온갖 열정을 다 쏟아 복음을 전해주었건만, 예루살렘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부화뇌동하여 바오로가 얼굴이 못생겼다고, 자기 밥그릇도 못 챙겼다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목격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코린토인들에게 자기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준다.”라고 하면서 견뎌냅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알아야 할 사람들이 마귀의 힘으로 사악한 짓을 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아담과 하와, 코린토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까지 자기들의 추악한 모습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시는 것에 대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악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람(율법학자)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은 물론 신자들도 읽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더 무거운 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쉽게 저지르는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잘 안다면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지는 못할망정 이웃에게서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 시기 질투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곤란하게 만든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 가족이며, 성모 마리아처럼 형제들을 예수님과 화해시키려는 이들이 예수님의 참 가족입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과 화해시키려고 형제(유다인)들을 데려오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밖에 서서”)에 머물면서 예수님 탓만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 보면 여러 가지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터무니없이 하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실망하지 않았던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고,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깊은 구렁 속에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나를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여달라고,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방효익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