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이시이 바꾸 문하생으로서 무용 수업을 마치고 1929년 조선으로 귀국했을 때, 신여성 사이에서 최승희의 단발 머리 사진이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서부터는 조선에서 손기정과 함께 조선 최고의 인기인으로 꼽혔다.
"1942년에 최승희가 연변의 목단강에서 공연하였는데, 최승희가 미인이고 춤도 잘 추기도 하였지만 그때에 그 공연을 본 조선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을 흘리고 감격한 것은 최승희의 춤을 통해 우리 민족이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연변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영웅을 말할 때 정치사에서는 이준과 안중근 열사를 말하고 체육에서는 손기정, 예술에서는 최승희를 말했다. 이것이 당시 대중들의 소박한 생각이었다."
-무용 평론가 최봉석
서구 근대 무용에 전통춤을 접목하여 근대 신무용의 체계를 확립한 최승희
최승희의 첫 무용 스승인 이시이 바쿠가 서양 발레로 기초를 세워주었다면, 한성준은 여기에 우리 전통 춤의 혼을 불어넣어주었다.
최승희는 1930년대 중반 국악인들과 음반 녹음 위해 도쿄를 방문한 '근대 전통춤의 아버지' 한성준에게 승무를 비롯한 전통춤을 배웠고, 이를 토대로조선 전통춤과 현대무용을 결합한 신무용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난 작품이 1933년 작 ‘에헤라 노아라’였다.
「에헤라 노아라」(1933)
「에헤라 노아라」는 장삼옷에 관을 쓴 조선의 한량이 술에 얼큰히 취한 채로 몸을 흔들거리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팔자 걸음을 걸으며 배를 불룩하게 내놓고 추는 웃음을 자아내는 춤으로서, 최승희 무용 생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위 사진은 최승희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무용 작품 발표회의 공연 포스터로, 언론은 혜성처럼 나타난 무용가 최승희를 대서특필했고 평론가들도 그녀의 춤을 극찬했다.
"춤추는 것이 자기 개인이나 무용 자체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 반드시 그 위에는 커다란 조선이라는 민족과 그 속에 흐르는 따뜻한 혈류가 그 원동력이 되어있다. 그녀의 머리에, 그녀의 가슴에, 그리고 그녀의 혈관 속에 충만한 민족애야말로 그녀를 찬양하게 된 조건이 된다."
-니시가와 다다히로, 「음악 선율」
"최여사는 일상 생활에서 명랑하고 애교가 있는 여성이다. 이는 「에헤라 노아라」같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에헤라 노아라」는 조선 사람의 상징인 백의의 춤인데 여기서 온화하고 애교가 있고 낙천적인 그녀의 감정이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 이 춤은 최 승희 데뷔 작품으로 성공적이었다."
-나카다 다쓰오, 「홈라인」
「검무」(1934)
신라시대 화랑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한 데서 유래된 춤으로, 조선 시대 기생들이 추었던 검무를 나름대로 재창작한 춤
"조선풍의 춤을 특히 아름답게 느꼈고 「검무」는 대단히 좋았다. 그녀의 춤에서 하나의 시를 맛볼 수 있어서 즐겁게 보았다."
-도구도미 소호
"최승희의 춤에서「검무」는 그녀다운 커다란 선을 살린 힘이 있는 무용이었다. 최승희의 춤은 무양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받은 표현이 우리들을 움직이게 한다. 이러한 표현력을 가진 무용가로서의 그녀는 내일이 약속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카무라 슈이찌, 「음악 구락부」
「왕의 춤」(1935)
왕의 춤은 고려 시대 전기에는 「신라왕의 춤」이라고 불렸던 춤으로 당시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다. 최승희가 이러한 테마 위에 새롭게 창작하여 왕의 위력과 고귀함을 표현해 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최승희가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조선춤에 나는 매혹되었다."
-하세가와 시구레
"무엇보다 당신의 대륙적인 좋은 체격을 찬미한다. 그 체격에서 나온 강한 힘이 타인에서는 볼 수 없는 좋은 예술이 되어 나온다."
-가미시 쇼오겐
「승무」(1934)
"육체의 활력을 최여사처럼 무대에서 살리는 무용가는 볼 수 없다. 최여사가 추는 조선 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 무용가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는 조선 무용을 그대로 추는 것이 아니라 옛날 것은 새롭게 하고 약한 것은 강하게 하고 없어진 것은 재생케 하는, 자기 스스로 창작한 조선춤인 것이다. 그녀의 머리, 그녀의 가슴, 그리고 그녀의 혈관과 춤 속에 어느 때나 충만한 민족애야말로 조선 속에 가장 찬양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가와바다 야스나리, 「문예」
「무녀춤」(1936)
무당의 신내림을 극적으로 표현한 춤
「초립동」(1937)
어린 사내아이가 장가를 드는 옛 풍습의 한장면을 즐겁고 익살스럽게 표현한 춤
"한편으로 명랑한 젊은이를 표현한 「초립동」이라는 춤도 잊을 수 없는 춤이었다. 나는 이 춤에서 장공 맞추어 추는 최승희의 용태에 완전히 혼이 나가 버렸다. 일본 사람인 내가 조선 사람의 낭만적인 표현에 완전이 하나가 되어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정말 춤이란 이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무용가 미유스미 세스코
1937년, 일본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선보인 최승희의 공연 광고지
이 공연에서 최승희를 짝사랑해오던 한 일본 남성이 공연장을 습격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는 섬숭남)
최승희의 세계 순회 공연 때 쓰인 공연 팸플릿
최승희는 1937년부터 4년간 북미, 유럽, 남미 등지로 세계 순회 공연을 나섰으며, 이때에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등의 칭호로 불리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전성기 당시 최승희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 예술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 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소설가 존 스타인벡, 루이스 레나, 존 그로프,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 소설가 로맹 롤랑, 미셀 지몽, 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녀와 친교를 맺었다. 파리 공연 때 최승희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기도 했다.
(*사진 속 '사이 쇼오키Sai Shoki'는 최승희의 일본식 이름)
「보살춤」(1937)
최승희의 춤으로는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았던 춤
그 시절로서는 파격적인 '반라'의 컨셉이었다.
"얼핏 보기에 전혀 표정이 없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변화되는 얼굴의 아름다움,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손짓, 리드미컬한 음악의 반주, 그이가 표출해 내는 조각적이고 색채적인 아름다움ㅡ최승희의 춤은 이처럼 독창적이면서도 매혹적이어서 위대한 인상을 준다"
-암스테르담 텔레그래프(1939. 4. 13)
"최승희는 위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진주처럼 매력적이다. 그 춤을 보고 있으면 주술적인 몸짓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정을 표출하여 주변에 미묘한 바법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의 성공은 세계에서 인정된 것이다"
-니숀 베르쥬 지
「천하대장군」
마을 입구에 서워진 천하대장군과 천하여장군과 같은 장성의 풍속을 무용화 한 춤
"그 춤은 정교하고 의상이 화려하다. 동양의 낭만적인 춤에서 전쟁 춤에 이르기까지 있어 다양하며 저마다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가면을 쓰고 하는 코믹한 유랑패의 춤과 「천하대장군」이었다. 최승희의 공연은 그 시즌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 앤드 익스프레스
“무용을 환상으로 바꾸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똑똑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한 장군의 놀라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애본드포스트(1939. 4. 18)
「화랑의 춤」(1941)
신라 시대의 화랑 정신을 나타낸 춤.
세계 순회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도쿄의 가부끼좌에서 열린 귀일 신작 무용 공연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삼년 동안 외유를 하고 돌아온 최승희의 가부끼좌 공연을 보니 스페인 무용가 아르헨티나와 같이 향토적 조선 무용을 훌륭하게 무대 예술로 높였고, 그 뛰어난 자세와 눈의 표정을 통해 보여주는 무용을 완전히 습득했다고 하겠다. 특히 발표된 열세 가지 작품 중에서「신노심불노」와 「화랑의 춤」은 단연 뛰어난 작품이었다. 조선 악기의 반주는 무용에 한결 힘을 강조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의상도 좋았다."
-시라이 데쓰소, 요미우리 신문
"구미의 무대에서 세계 일류 무용가들과 함께 활동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관록이 붙어서인지 예술이 세련되었으며 표정도 훨씬 매력적이었다. 몸의 움직임도 한층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아이지마 시오, 아사히 신문
「장고춤」(1942)
장고의 흥겨운 리듬을 타고 멋을 부리며 노는 기생의 모습을 표현한 춤
「석왕사의 아침」(1942)
석왕사에서 본 승려들의 염불 외는 모습을 나타내는 춤.
함경남도에 있는 석왕사는 최승희와 남편 안막이 신혼 여행을 갔던 절이다.
"최승희는 자기의 무용 작품에서 일상생활이나 민화뿐만 아니라 종교에서 나온 영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 춤은 우리 서양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 가장 매력적인 표현의 신섬함을 가지고 있다."
-브뤼셀 리브르 베르쥬 지
"손동작 표현에서는 최승희의 무용이 인도에 뒤지지 않는다. 최승희도 특히 종교적인 무용작품에서 선보였듯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손가락 선을 우아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레시덴터보드
최승희의 야외무용
사진 작가들을 위해 야외에서 이와 같은 실험적인 동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첫 번째 사진인 ‘적구흔무(赤丘欣舞)’는 ‘1840~1945 일본 100년 사진사’에 춤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수록된 작품.
최승희의 무용 동영상
<출처>
글: 춤추는 최승희, 한국 근대사 산책(8, 9권)
사진: 구글
사실 최승희는 일제 말기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 월북한 사실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로서만 평가받기에는 한계가 있는 인물이긔.
해방 이후 친일 행적이 문제시되자, “그동안 자의든 타의든 일제에 협력을 했다는 것은 변명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속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것으로 이바지 하겠다”(부산일보, 1946. 6. 21)라며 덤덤하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도 하고,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 그리고 우리 민족이나 민족의 형과 선과 색과 음까지도 빼앗아 가려 했을 때에 나는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 음악으로 조선의 형과 선과 색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 줄기 영광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이것이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내가 조선의 딸로서 걸어왔던 유일한 길이었다."(민주일보, 1946. 7. 21)라며 본인의 입장을 비호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긔.
개인적인 의견으로, 남편 안막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구속된 전력, 또 일제 말기 연안 독립 동맹에 가담한 정황, 전시 체제에 알맞은 정책적인 예술을 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순응하지 않은 점,
"태평양 전쟁이 치열할 때 다른 무용가들은 전부 국책에 순응하여 전의 양양을 위한 무용을 하였는데, 최승희는 이러한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춤을 하나도 추지 않았다. 공연에서도 프로그램에 국책적인 작품은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고 조선 무용이나 동양의 불교적 춤만 추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선택은 정말 현명하고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극작가 무라야마 지요
장고춤을 출 때에도 기모노를 입고 추라든가, 선전 영화의 주역을 맡아달라든가 하는 지속적인 압박을 받자 북경으로 도피한 점을 봤을 때 그녀의 행적이 단순 친일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긔.
월북 후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설립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며 북한 무용계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했지만,
1958년 남편 안막이 ‘종파분자’ 혐의로 숙청되면서 최승희도 북한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었고 지위도 추락했긔.
북한은 2003년이 돼서야 1969년 8월 8일 최승희가 세상을 떠났다고 공식 발표했고, 그에 따라 묘지도 애국열사릉으로 옮겨졌다고 하긔.
최승희는 당시 가수, 광고모델, 영화배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아주 센세이널한 인물이었는데요.
예전에 최승희가 1936년에 발표한 곡 <이태리의 정원>에 대해서 글 쓴 적이 있긔ㅎㅎ
관심있으시면 한 번 들어보시긔. 예전에 나름 공들여가며 썼던 <일제강점기 대중가요> 시리즈 중 하나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