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정을 일삼는 봉상왕과 창조리의 반정
(?~서기 300년, 재위기간 :서기 292년 3월~300년 9월, 8년 6개월)
서천왕 사망 후 성정이 포악하고 사치를 좋아하던 봉상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 조정은 난국을 맞는다. 더구나 선비족 모용부의 강성으로 전란에 휘말리기까지 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기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왕 폭정은 멈추지 않는다.
봉상왕은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상부[相夫, 혹은 삽시루(歃矢婁)]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태자에 책봉된 연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시기도 정확하지 않으나 숙부인 달가를 죽인 서기 292년 3월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의심과 시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 같은 성품은 왕위에 오른 이 후 곧 친족 살해도 서슴지 않는 악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292년 3월, 봉상왕은 왕위에 오르자 탈상도 하지 않은 몸으로 안국군 달가를 살해한다. 달가는 서천왕의 동복 아우로 그의 숙부였다. 달가는 서기 280년에 숙신을 물리친 공로로 안국군에 책봉되었고, 그 이후에도 행정 및 군사에 관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또한 서천왕의 명령을 받아 양맥과 숙신 지역을 스스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탁월한 정치력과 덕망으로 자치구를 잘 이끌어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다. 봉상왕은 태자 시절부터 달가의 명망을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왕위에 오르자 달가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인 것이다.
봉상왕이 달가를 죽이자 조신들과 백성들은 폭군이 덕망 높은 달가를 죽였다고 한탄하였다. 백성들은 달가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믿었는데, 달가가 죽자 불안에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같은 불안은 고 민심 이반으로 나타나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 무렵 고구려의 서북방 일대에서는 선비족의 모용부 추장 모용외가 큰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여 왕을 죽인 이래 유주 방면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한 뒤, 진과 고구려의 변방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봉상왕의 즉위로 고구려의 조정이 혼란하고 민심이 이반되자 서기 293년 8월에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밀려들었다.
모용외의 급습을 받은 고구려 조정은 일단 봉상왕을 북방의 신성으로 도피시키고 수비태세를 취했다. 이에 모용외는 말머리를 북방으로 돌려 신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모용외의 군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을 이용하여 봉상왕의 도피 행렬을 추격하였고, 이 때문에 봉상왕과 조신들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신성의 관리로 있던 소형 고노자는 급히 군대를 몰아 봉상왕을 맞이하는 한편 기병 5백을 동원하여 모용외와 대적하였다.
모용 선비는 원래부터 말을 잘 다루었지만 고노자의 기병에 역부족이었다. 고노자의 뛰어난 전술과 통솔력에 밀려 패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용외의 군대가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봉상왕은 고노자의 작위를 대형으로 높이고 곡림을 식읍으로 내려 전공을 치하하였다. 그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환궁한 봉상왕은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는 다시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요인이 된다.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의 친동생인 돌고에게 모반이 혐의를 씌웠다. 그리고 자결명령을 내려 그를 죽게 하였다. 이 때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하여 몸을 숨긴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민간에는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버팀목이던 국상 상루가 죽었다. 봉상왕은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격상시켰다.
창조리가 국상에 올라 조정을 수습하고 민심을 헤아리는 정책을 실시하여 다소간 백성들의 불안은 사라졌지만 봉상왕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고구려가 안정을 되찾지 못하자 서기 296년 8월에 모용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모용외의 군대는 일사천리로 고구려 변방을 통과하여 어느덧 고국원에 도착하였다. 모용외는 그 곳에서 서천왕의 능을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파도록 했다. 이 때 부랴부랴 출동한 고구려군이 풍악을 울리며 몰려오자 모용외는 겁을 먹고 도망하였다(이 때의 상황을『삼국사기』는 ‘무덤을 파헤치던 사람 중에 갑자기 사망자가 생기고 또한 능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겁을 먹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군이 풍악을 울리며 몰려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용외가 물러간 뒤에 봉상왕은 조정 대신들에게 선비족의 침입을 막을 방도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선비족의 침입으로 겁을 잔뜩 집어먹은 봉상왕은 당황했던 것이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신성의 영역을 대폭 확대하고 북부 대형 고노자를 신성의 태수로 삼도록 건의했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에 임명하고 그에게 북부 지역을 맡겼다.
고노자가 신성 태수가 되자 선비는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 고노자는 백성들을 잘 보살펴 덕망이 높았기에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도 드높았기 때문이다.
고노자의 능력에 힘입어 변방은 안정시켰지만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서기 298년 9월, 추수를 앞둔 상황에서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나고 국가 경제는 나락으로 치달았다. 그런데도 그해 10월에 봉상왕은 궁실을 증축하는 공사를 감행한다. 이를 위해 많은 백성을 부역에 도원하고,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농사를 완전히 망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봉상왕이 사치와 향락을 위해 고혈을 짜내자 백성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갔다. 조정 대신들은 누차에 걸쳐 궁실 증축공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했지만 봉상왕은 듣지 않았다. 또한 그는 누군가가 모반을 획책할 것을 염려하여 간신히 몸을 피한 돌고의 아들 을불을 죽이기 위해 전국에 군사를 풀었다. 하지만 을불은 잡히지 않았다.
극도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백성들에겐 또 하나의 재앙이 닥쳤다. 서기 299년 12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민가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이 때문에 유랑민은 더욱 늘어나고 백성들의 원성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져갔다. 그런데 이듬해 정월에 다시 지진이 일어나더니 2월부터 7월까지 무려 5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지속되었다. 흉년이 심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이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사치와 향락을 멈추지 않았고, 궁실 증축공사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 증축공사에 동원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이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유랑하거나 산 속으로 찾아들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국상 창조리는 목숨을 걸고 봉상왕에게 직언을 하였다. 그러나 봉상왕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창조리에게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창조리와 조신들은 더 이상 방치했다간 나라가 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정을 계획하였다. 서기 300년 9월, 드디어 반정을 감행하였다.
조신들과 함께 반정을 감행한 창조리는 우선 군사를 일으켜 궁성 호위군을 제압하고, 봉상왕을 붙잡아 별궁에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봉상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자결하였으며, 그의 두 왕자도 함께 자결하였다. 이로써 봉상왕이 폭정은 종결을 고하였다.
창조리는 반정을 도모하면서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게 했다. 그리고 봉상왕이 폐위되자 을불을 받들어 왕위에 앉혔다.
봉상왕의 능은 봉상의 언덕(原)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봉상왕(烽上王)’이라 하였다.
봉상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봉상왕이 자결할 당시에 두 아들이 함께 자결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봉상왕에겐 왕후와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증명된다.
2. 창조리의 반정과 그 의미
봉상왕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숙부를 죽이고, 친동생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조카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백성을 괴롭혔다. 그에겐 백성은 단지 억압의 대상이었고, 조신들은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왕의 폭정이 계속되었지만 조정 대신들은 뾰족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봉상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눈에 거슬리는 신하는 언제든지 죽일 태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을 이끌고 있던 국상 창조리 역시 봉상왕의 폭정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창조리는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지냈다. 그런 가운데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가뭄과 지진으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는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 변방에서는 모용 선비의 침입이 염려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봉상왕은 오직 자신의 사치와 향락만을 추구하며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창조리의 반정은 바로 이 같은 극도이의 어려움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창조리는 반정을 감행하기 전에 봉상왕과 독대하여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한다. 이와 관련한『삼국사기』의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천재가 연속하여 일어나고, 흉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계곡과 수렁을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같은 사정을 생각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데려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같은 처사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말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 주변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의 피폐함을 기회로 침범해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떠받들어야 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권위를 내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필시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함이 아닌가?”
창조리가 대답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언을 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제가 이미 국상의 빈 자리를 이었으니 말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감히 백성의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다시는 내게 그 같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왕 앞에서 물러나와 군신들과 의논하여 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창조리는 처음부터 반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봉상왕의 마음을 바로잡아 민심을 수습하고 국정을 정상화하려 했다. 하지만 봉상왕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충간을 했다. 그런데 봉상왕은 충간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봉상왕으로부터 협박을 받은 창조리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판단을 하고 자구책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신들과의 협조 속에서 반정이란 형태로 드러났다.
반정을 감행하기 위해 창조리는 미리 을불을 찾았다. 반정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새 왕을 옹립해야 할 것이고, 그 적임자로 을불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후 세 번째 폐위사건을 경험했다. 제5대 모본왕이 폐위될 때 반정을 도모한 사람은 모본왕의 측근이던 두로였고, 제7대 차대왕을 폐위시킨 사람은 연나부의 조의로 있던 명림답부였다. 이 두 번의 폐위 사건은 국정을 주도하고 있던 인물이 아닌 조정 외곽의 인물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국정을 도맡고 있는 국상이 직접 반정의 선봉에 선 것은 창조리의 사건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봉상왕은 조신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거의 대부분의 조신이 반정에 참여했고, 모든 백성이 봉상왕의 폐위를 당연시했다. 이는 봉상왕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다.
이처럼 창조리의 반정은 봉상왕의 폭정으로 인해 민심이 떠나고 국가 존립에 어려움이 닥치자 국상 창조리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구국적 차원에서 함께 감행한 정치혁명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봉상왕은 반정을 염려하여 돌고의 아들 을불을 찾기 위해 군사를 풀었다. 을불만 제거하면 모반의 위협은 거의 사라진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을불은 가까스로 몸을 숨겨 잡히지 않았고, 결국 창조리의 반정이 성공하자 왕위에 오른다.
출처 : SKS'S HOUSE 2008/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