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4강 1부 대한불교조계종 부산연합회 2011.11.21
上講禮 (상강례)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일심정례 진시방삼세 일체제불
지극한 일심으로 온 시방삼세의 거룩하신 모든 부처님께 예를 올립니다.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일심정례 진시방삼세 일체존법
지극한 일심으로 온 시방삼세의 존귀한 모든 불법에 예를 올립니다.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일심정례 진시방삼세 일체현성승
지극한 일심으로 온 시방삼세의 어질고 거룩하신 스님들께 예를 올립니다.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아제자등 강론삼장 유원삼보 위작증명
저희 제자들이 삼장을 강론하고자 하오니 오직 바라옵 건데 삼보님께서 증명을 해주시옵소서!
南無 本師 釋迦牟尼佛
나무 본사 석가모니불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불께 귀의합니다.
南無 本師 釋迦牟尼佛
나무 본사 석가모니불
南無 本師 釋迦牟尼佛
나무 본사 석가모니불
개경게(開經偈)
無上甚深微妙法
무상심심미묘법
최상으로 깊고도 오묘한 불법의 진리
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난조우
억만년을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워라
我今聞見得受持
아금문견득수지
저희들이 지금 보고 듣고 지녀
願解如來眞實意
원해여래진실의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기를 바라옵나이다.
스님께 삼배올림.
(입정)
(출정)
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復次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부차수보리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則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야
수보리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이 於 燃燈佛前에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 어 연등불전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실개공양승사 무공과자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하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백분 불급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須菩提야
수보리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혹유인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須菩提야
수보리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당지시경 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음악이 무언지 아세요? 상강례하는 소리(일동 웃음)
이제 끝나가려니까 상강례가 조금 부드러워졌군.(웃으심)
아무튼 학인들이 글 읽는 소리, 또 상강례하는 이 소리, 정말 뭐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긴 합니다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저에게는.
오늘은,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第十六(제십육) 할 차롄데요,
업장의 문제, 이 문제도 불교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는 명제죠.
뭐 업이다, 또는 업장이다, 또는 죄업이다, 여기 이제 죄업이란 말이 나오는데 같은 뜻입니다. 또는 번뇌 업장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데, 이런 것을 이제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참, 불교가 왔다갔다하고 불교의 어떤 그 교리적인 차원이 서로 갈리게 되는, 상하로 갈리게 되고, 대· 소승으로 갈리게 되고, 공관· 가관· 중도관 그 관점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많습니다.
일단 경문을 보죠.
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復次須菩提야
부차수보리
또 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若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誦此經(수지독송차경)호대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벼이 여기고 천하게 여기는 바가 될 것 같으면은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 사람은 先世罪業(선세죄업)으로 應墮惡道(응타악도)언마는,
응당히 선세죄업 때문에 악도에 떨어져야하겠지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요즘사람들이 또 지금하고 시대를 같이하고, 또는 이웃에 있거나, 같이 살거나, 또 대중으로 살거나 등등,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이 나를 가벼이 여기고 천하게 여긴다, 이 말이여.
그것이 그러니까, 얼른 듣기는 사실은 불쾌하죠. 나를 무시하고, 뭐 내가 무시당할 경우가 되었던, 되지 않았던 간에, 그거는 관계없이 아무튼 무시하는 소리는 참 기분 나쁩니다. 그 무시하는 소리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도인을 우리가 평가할 때도 八風不動(팔풍부동)주1)이라 해서,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야 된다 하는 그런 그 원칙을 세워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 원칙이 ‘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 ;[팔풍(八風)]’, 인데, 거기 보면 이제 헐뜯는다든지, 반대로 칭찬한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구요. 그만치 자기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데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건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금강경에서 그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그것이 나에게는 업을 소멸하는 아주 좋은 양약이다, 이 말입니다.
先世罪業(선세죄업)이,
則爲消滅하고
즉위소멸
則爲消滅(즉위소멸)이라고 했잖아요.
과거 내가 지은 죄업이 곧 소멸하고 만다, 이겁니다.
누가 나보고 욕을 많이 하고, 많이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가벼이 여기고, 뭐 있는 허물이든지, 없는 허물이든지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와 이거 대단하죠!
금강경의 가르침은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뭐 금강경을 읽었던 안 읽었던 간에, 여기는 이제 此經(차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했다, 그런 사람으로서, 이런 표현을 했지마는 그것 하고 상관없이 사실은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어요.
‘道吾善者(도오선자)는 是吾賊(시오적)’이요,주2) 나보고 훌륭하다고, 잘 났다고, 잘 한다고, 이렇게 찬양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그 사람은 사실은 속에 적심을 품고 있어서 나를 띄운다 말이야.
‘道吾惡者(도오악자)는 是吾師(시오사)라’주3)
나를 나쁘다고 또 온갖 그런 그 약점, 허물, 잘못한 거 이것을 꼬집어서 뭐 그것을 충고 입장에서 하든지, 아니면 악의로 비난을 하든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충고하려고 하든지, 나를 비난하려고 하든지 간에 나의 잘못된 점을 일컬어서 드날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은 나의 스승이다. 하!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그 유교의 말이에요. 불교의 말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불교에서는 차원이 좀 다르잖아요.
나를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그 쪽에선, 예를 들어서 나의 스승이고, 나를 훌륭하다고 잘 났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다 그래요.
그런데 여기는 업장이 소멸 한다 그랬어요, 업장이 소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업 소멸, 뭐 참회 산림, 뭐 업장 소멸한다는 이야기가 불가에는 너무 많은데 그 간단한 일이에요.
누가 나보고 비난하라고 해서 그 비난소리만 좀 들으면 저절로 죄업이 소멸된다, 뭐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금강경의 차원이 그게 아니죠, 사실은 뭐 그렇게 해서 업장 소멸되는 것 보다, 공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선이든, 악이든, 찬탄하든, 비난하든 그 모든 것은 전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은 전부 공인 까닭이다, 그런 뜻입니다. [則爲消滅(즉위소멸)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업장이 소멸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이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아념과거무량아승지주4)겁)하니,
저 앞에 그‘ 歌利王(가리왕)’ 이야기, ‘割截身體(할절신체)’ 했을 때
[제십사 이상적멸분],‘念(념)’, 자에 대해서, 여기 ‘ 又念(우념)’<참조>, ‘또 기억해 보건데’, 그렇게 내가 해석을 했는데,
<참조>
第十四 離相寂滅分
제십사 이상적멸분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 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이 應離一切相하고 發阿?多羅三?三菩提心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第十四 離相寂滅分(제십사) (이상적멸분) 又念 ~>
- 무비 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3부 일부 -
여기도(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억하건데[我念(아념)]’, 過去無量阿僧祇劫(과거무량아승지겁)이야.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과거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두 가지 이야기라고 내가 분명하게 짚어서 말씀드렸어요.
아무튼 아승지겁전에,
於燃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어연등불전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수보리야,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에)
燃燈(연등)부처님 이전에 팔백 사천만 억 那由他(나유타)주5)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 뵙고[得値(득치;만나 뵙다)],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실개공양승사 무공과자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모두 다 찬탄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서)
無空過者(무공과자)호라, 헛되게 지나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찬탄하고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고 그렇게 했노라[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 라고 한 여기에는 상당히 이제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데, 특히 ‘燃燈佛(연등불)’이라고 하는 거, 이게 이제 경전상의 연등불을 이해하지, 사실은 경전이 아니면 ‘燃燈佛(연등불)’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어느 역사서에도 안 나와요.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은 인도역사에도 나오고, 인류사에 다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대승경전에서 뭐 연등불이니 무슨 불이니, 수~많은 부처님, 또 그 다음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제불, 이렇게 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정말 뭐라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많은 부처님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연등불과 아울러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그 부처님에 대한 그 관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는가? 그 저, 화엄경을 해석한 과거 선지식들 보면 그걸 ‘見佛差別(견불차별)’주6)이런 표현을 했어요. 부처를 이해하는데, 부처님을 보는데 대한 그런 차별적인 견해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어떤 경전은 부처님을 뭐라고 봤고, 어떤 경전은 부처님을 뭐라고 봤다. 그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여기 이제 금강경은, 위선(우선),
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을 만났다, 그래서 그들을 다 供養承事(공양승사)했다, 이런 표현입니다.
먼저, 이 ‘燃燈佛(연등불)’, 이게 ‘부처님의 스승’으로 돼 있는데, ‘燃(연)’자는 태울·‘燃(연)’자 아닙니까, 여기서. 그 등불이란 ‘燈(등)’자고, ‘등불을 밝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속뜻을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가 된 것은 여기서 ‘燃燈佛(연등불)’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燃燈(연등)’이란 말은,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나서,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또 부처로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았다.’ 하는 그런 그 의미는 결국은 ‘지혜의 등불을 밝혀 놨다. ’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을 다 만나서 供養承事(공양승사)했다’, 이런 말도, 이게 이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보면은 ‘모든 사람이 전부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게 지혜가 없으면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人佛思想(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각자 자기의 견해대로,
불교는 무슨 뭐 ‘기도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고, 불교는 ‘천도(遷度)다’, 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불교는 ‘中道(중도)사상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불교는 ‘아니야, 空(공)사상이다’, 또는 불교는 ‘緣起(연기)사상이다’, 이렇게 각자 본대로 불교를 정리를 해서 이해를 하고, 그런 경우, 모든 경전을 또는 어록을 대할 때마다 자기 사상 쪽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서, 中道(중도)로 불교로 이해한 사람은,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전부 중도로 그걸 해석해요. 중도로 해석합니다.
空(공)사상으로 보는 사람은 전부 공으로 해석합니다. 뭐 화엄경을 봐도, 법화경을 봐도, 금강경을 봐도, 저기 저 아함부 경전을 봐도 전부 空(공)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 내가 어떤 스님이라고 지적은 안 하겠는데, 평생 ‘唯識(유식)’주7)을 공부하셨어요. 아주 唯識(유식)의 대가 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그 스님께서 선문염송을 어느 절에서 강설을 한달 간 했었습니다, 여름에.
가서 선문염송을 듣는데, 전부 ‘唯識(유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선문염송을 전부 ‘唯識(유식)’으로 해석을 해요.
그렇게 됩니다. 그게.
뭐, 그와 같이 불교의 관점, 또 근세에 이런 어떤, 어떤 스님은 불교를 전~부 中道(중도)로 해석을 했지요. 그래서 스스로 ‘中道狂(중도광)’주8) 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 스님 법문 테잎을 들어보면 ‘중도광’이라고, 전부 중도로 또 해석을 해요.
저는 ‘人佛思想(인불사상)’으로 해석을 합니다. 불교를.
어떤 조사나 어떤 경전의 가르침도 전부 ‘人佛思想(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그런 사상으로 저는 보았고, 또 그렇게 해석을 하고, 무슨 경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어떤 어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人佛思想(인불사상)’에다가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 눈엔 그렇게 보이니까요.
여기에 이런 구절이 너무 반가운 것이, ‘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이라고 했어요. 이게 ‘人佛思想(인불사상)’이 아니면 해결할 열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전부 부처님으로 봤을 때, 이 숫자가 가능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 특~히 법화경이나 화엄경 같은데는 무~수한 부처님, 不可說不可說佛刹極微塵數佛[(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 부처님]을 거론하는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됩니까? 그 많은 부처님을.
이게 ‘人佛思想(인불사상)’, 또 화엄경관점에서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하면은, ‘人佛思想(인불사상)’을 넘어서 모든 생명, 아니, 모든 만물, 삼라만상 천지만물, 전체가 다 부처다’라고 하는 이런 관점입니다, 사실은.
그런 그건 너무 이제 우리하고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쉽게 이제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백보 양보해서 ‘人佛思想(인불사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人佛思想(인불사상)’이 아니고는 이게 해결할 수 가 없는 구절입니다, 이런 구절이.
경전마다 이런 내용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 많~은 부처님을 친견했다, 공양했다, 섬겼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이게, 무슨 부처님이 그렇게 많았느냐 이거야. 그래서 이것은 ‘人佛思想(인불사상)’이라고 하는 그 열쇠로만이 풀 수 있는 문제다, 뭐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커나, 이런 분들에게 ‘불공했다’는 뜻이에요, ‘공양올렸다’
[於燃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호라].
여기 금강경에서 하고저 하는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그냥 부분만 내가 취해서 짚고 넘어가는 거지.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하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백분 불급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약부유인 어후말세
또 예를 들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능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백분 불급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에게 供養承事(공양승사)했지마는, 그만치 엄청난 부처님께 불공을 올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경전을 수지독송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얻은 바 공덕은, 내가 과거에 그렇게 많은 부처님께 공양올린 것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백분 불급일
백분의 하나도 못되고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로도 미칠 바가 못 된다[所不能及(소불능급)], 하는 데에 여기에 이제 주된 뜻이 있습니다.
경전의 주된 뜻은 그거예요. 그만치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과 금강경의 이 이치, 금강경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그 이치는 도대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요 보통사람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우리가 깊~이 공부하고, 거기에 어떤 그 눈이 뜨이고 맛을 느끼고,
‘하~! 금강경! 정말 기가 막힌다! 어떻게 이런 이치를 말씀하셨을까?’이렇게 탄복하게 되면은 이런 말이 수긍이 가요. 무~수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그 공덕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라고 하는 이것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무튼 이런 표현 때문에 뭐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들이 많고 사경하는 사람도 많은 것은 다행인데, 그러나 속뜻은 또 딴 데 있다는 거죠.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다음 말세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이가 있으면)
所得功德을
소득공덕
(그가 얻은 바 공덕을)
我若具說者면
아약구설자
내가 구체적으로 만약에 이야기한다면은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혹유인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或有人(혹유인)이, 혹 어떤 사람이
聞(문)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心卽狂亂(심즉광란)한다, 미쳐버릴 것이다.
마음이 바로 광란해 버릴 것이다, 말이야. 제대로 내가 구체적으로 사실 금강경의 그 수지독송하는 그 공덕을 다~ 이야기할 것 같으면 너거는 모두 미쳐버릴 거다 말이야.
狐疑不信(호의불신)한다, 의심하고 의심해서 도저히 믿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뭐 어마어마한 그런 그 금강경 공덕을 이야기했지마는 그거는 사실은 조~금밖에 내가 맛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죠. 그래서,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당지시경 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當知是經(당지시경)은 義(의)도 不可思議(불가사의)고,
(수보리야, 반드시 알라! 이 경의 이치는 상상할 수가 없으며,
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다.
그 과보(果報)도 역시 상상할 수가 없느니라.”)
그 도리, 그 이치, 금강경의 뜻도 불가사의[義(의)도 不可思議(불가사의)]해.
그리고, ‘果報(과보)’도 또한 불가사의[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하다.
‘果報(과보)’라는 것은 뭐 경전에 따른 결과, 공덕, 또 금강경을 이제 우리가 제대로 깨달으면은 거기에 따르는 우리의 어떤 그 정신적인 그런 그 성과를 말하는 거죠.
금강경이 대체로 이제 여기까지가 사실은 중요한 이야기 다 했어요.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17번부터는 사실 복습입니다.
이걸 뭐 ‘하~ 왜 이 짧은 경전에 이중으로 이야기했겠는가?’ 해가지고 구구해요.
이것을 그냥 복습으로 해 버리면 그냥 간단한데, 복습이라고 하지 않고 왜 이 짧은 경전에 복습하는 글을 여기다 실었겠는가 해가지고 아주 설명이 고래로 아주 구구합니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하는 복습이다, 그렇게 취급하고 맙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이제 보시면 압니다.
金剛般若波羅密經(금강반야바라밀경)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六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鳩摩羅什) 한문 번역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六 能淨業障分
제십육 능정업장분
제16. 업장을 깨끗이 맑히다
復次須菩提야
부차수보리
“또 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반드시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질 것이지만,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則爲消滅하고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금생(今生)에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곧 바로 소멸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느니라.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이 於 燃燈佛前에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 어 연등불전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 겁 전 연등(燃燈)부처님 이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팔백 사천 만 억 나유타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실개공양승사 무공과자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다 공양을 올리고, 받들어 섬겼느니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
만약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末世)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그가 얻은 바 공덕은 내가 저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백분 불급일 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산수와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만약 선남자․선녀인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이가
있으면, 그가 얻는 공덕을 내가 만약 다 갖추어 말한다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혹유인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져서
의심하며 믿지 아니할 것이다.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당지시경 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반드시 알라. 이 경의 이치는 상상할 수가 없으며,
그 과보(果報)도 역시 상상할 수가 없느니라.”
第十七 究竟無我分
제십칠 구경무아분
第十七 究竟無我分 (十一, 斷住修降伏是我疑)
제십칠 구경무아분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백불언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호리라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중생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所以者가 何오 (須菩提)야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소이자 하 수보리 실무유법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十二, 斷佛因是有菩薩疑)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於燃燈佛所에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어연등불소 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
不也니이다 世尊하
불야 세존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佛이 於燃燈佛所에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이다
여아해불소설의 불 어연등불소 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불언 여시여시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 실무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야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인댄 燃燈佛이 卽不與我授記하사대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호대 號를 釋迦牟尼어니와
여어래세 당득작불 호 석가모니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새 是故로 燃燈佛이 與我授記하사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 연등불 여아수기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시니
작시언 여어래세 당득작불 호 석가모니
(十三, 斷無因則無佛法疑)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若有人이 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약유인 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야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니
수보리 실무유법불득아뇩다삼먁삼보리
須菩提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 무실무허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하노니
시고 여래 설일체법 개시불법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 명일체법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하니라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須菩提가 言하사대
수보리 언
世尊하 如來가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이다
세존 여래 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十四, 斷無人度生嚴土疑)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호대
수보리 보살 역여시 약작시언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명위보살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노라
시고 불설일체법 무아인무중생무수자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
수보리야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何以故오 如來가 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하이고 여래 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수보리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여래 설명진시보살
第十七 究竟無我分
제십칠 구경무아분
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이다
이건 이제 뭐 철저히 ‘無我(무아)’다, 이런 뜻입니다. 究竟無我(구경무아)!
철저히 ‘無我(무아)’다!
아~무리 어느 구석 찾아봐야 무아밖에 없다, ‘無我(무아)’밖에 없다. ‘無我(무아)’ 밖에 없다, ‘無我(무아)’뿐이다! 그러니까 ‘無我(무아)’는 뭐 있는 건 아니에요. 있는 건 아닌데 ‘無我(무아)’뿐이다, ‘無我(무아)’밖에 없다, 말인 즉슨 그렇게 말하지만 표현이 아주 모순되죠. ‘無我(무아)’라면 뭐 말할 게 없는 거죠. ‘‘無我(무아)’밖에 없다’하는 말도 모순입니다. ‘無我(무아)’인데, 모~든 존재가 전부 ‘無我(무아)’인데, 이건 모든 존재가 ‘無我(무아)’입니다. 우리 사람만 무아가 아니라, 그 모순이지만 우리말의 한계가 거기까지니까 말이 모순이 많잖아요.
‘無(무)’면 ‘無(무)’지, 뭐 ‘無(무)’다, 라고 할 게 없잖아요.
그렇지마는 ‘無(무)’다, 라고 허물을 뒤집어쓰면서 ‘無(무)’다 라고 하는 거지.
第十七 究竟無我分 (十一, 斷住修降伏是我疑)
제십칠 구경무아분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백불언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되,
世尊하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세존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하리잇고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세존이시여!
선남자,선녀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머물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합니까?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만약 선남자․선녀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호리라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중생
‘나는 반드시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리라!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그리고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실은 제도한 것이 없노라.’라고 하라.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백불언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되,
世尊하
세존
세존이시여!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리잇고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云何應住(운하응주)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하리잇고, 그랬어요.
이게 제삼 대승정종분에 나오는 말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복습이라고 내가 말하는 거예요.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호리라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중생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할지니 ‘나는 반드시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리라!’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이니,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된다.
거기에는[제삼 대승정종분] ‘九類衆生(구류중생)’<참조>을 주욱 들었어요.
<참조>
第三 大乘正宗分
제삼 대승정종분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사되 제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되나니
<九類衆生(구류중생)>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나는 것,
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생기는 것, 변화하여 생기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이 있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은 것들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내가(제보살마하살이) 다 그들로 하여금 무여열반(남음이 없는 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번뇌를 소멸하고 제도하게 하리라(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 할지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실은 제도를 얻은 중생은 없느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相), ‘남’이라는 상(相), ‘중생’이라는 상(相), ‘수명’에 대한 상(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第三 大乘正宗分 제삼 대승정종분> 중
- 무비 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3부 -
그런데 여기[제십육 능정업장분]는 그냥 ‘一切衆生(일체중생)’이랬습니다.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호리라]
복습이니까, ‘九類衆生(구류중생)’ 낱낱이 이름 들 것 없잖아요. 앞에서 구류중생 이야기했는데.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하리라
뭐,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
[所有一切衆生之類(소유일체중생지류)인 若卵生(약란생)과 若胎生(약태생)과 若濕生(약습생)과 若化生(약화생)과 若有色(약유색)과 若無色(약무색)과 若有想(약유상)과 若無想(약무상)과 若非有想非無想(약비유상비무상)을 我皆令入無餘涅槃(아개영입무여열반)하야 而滅度之(이멸도지)호리니],
그거 복습에는 그렇게 거론 안 합니다. 스님들 다 법문하거나 강의하실 때도 늘 그렇잖아요. 뒤에는 생략이 많을 수밖에 없죠.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
내가 응당히 일체중생을 ‘滅度(멸도)’한다, ‘濟度(제도)’한다는 뜻입니다.
이 ‘滅度(멸도)’란 말이 두 가지 뜻이 있어요.
‘涅槃(열반)’을 ‘滅度(멸도)’라고도 하고, 그냥 ‘濟度(제도)’도 결국은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래 ‘제도’하는 것도 ‘멸도’라고 그렇게 합니다. 여긴 ‘濟度(제도)’예요.
내가 응당히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실은 제도한 것이 없노라,라고 하라.)
그런데,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나서는[滅度一切衆生已(멸도일체중생이)],
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요건 고대~로 대승정종분에 있었던 내용 고대로입니다.
<참조>
我皆令入無餘涅槃 하야 而滅度之호리니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第三 大乘正宗分 제삼 대승정종분>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第十七 究竟無我分 제십칠 구경무아분>
그러니까 복습이죠. 이거 뭐 달리 다른 뜻으로 자꾸 다른 뜻으로 ??할 필요없습니다. 합리화 시키려고 할 필요없어요.
그냥 복습이라고 해버리면 간단합니다.
한 중생도 멸도한 사람이 없다! 제도한 사람이 없다!
일체 중생을 제도했으되 그러나 한 중생도 제도한 사람이 없다[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그런데 대승정종분에서 내가 아주 열을 올려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를.
何以故오 須菩提야
하이고 수보리
왜 그런고하니 수보리야!
若菩薩이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약보살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과 남이라는 상과 중생이라는 상과 수명에 대한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기도 똑 같은 내용이죠. 글 그대로, 글자 한자 안 틀립니다. 대승정종분하고.
<참조>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第三 大乘正宗分 제삼 대승정종분>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第十七 究竟無我分 제십칠 구경무아분>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則非菩薩(즉비보살)이다.
‘則非(즉비)’, 또 나왔죠. 곧 보살이 아니다.
所以者가 何오
소이자 하
왜냐하면
(須菩提)야
수보리
수보리야!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실무유법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없다. 어떤 고정된 법이 딱 ‘이거다!’라고 하는 게 있어 가지고서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은 ‘實無(실무)’실로 어떤 원칙, 어떤 법칙, 그게 있어서 부처는 아니다, 깨달음은 아니다, 이런 말인데, ‘본래 부처’라고 하는 그런 의미죠.
‘본래 부처’라고 하는 의미.
그리고 뭐 ‘是心是佛(시심시불)’, 그런 말 하죠. ‘마음이 부처다’, 그건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是身是佛(시신시불)’입니다. 이 몸이 그대로 부처예요. 그렇게 알아야합니다.
이 몸이 부처라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은 영원히 부처 이해 못하고 죽습니다.
그거 알아야 돼요. 마음을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몸 놔두고, 몸 외에 마음을 어디서 찾겠어요? 바로 몸이 마음이에요!
그러므로 몸이 부처다. ‘是身是佛(시신시불)’!
옛날이야 뭐 ‘是心是佛(시심시불)’, 해가지고 마음을 대~개 숭상했죠.
아니야, 그건 옛날 이야기야.
‘是身是佛(시신시불)’이야. 이 몸이 마음이야, 부처야!
조사스님들 마다 ‘無修無證(무수무증)’,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없다! 그랬어요.
본래 알고 보면은, 알고 보면은, 이 몸 그대로가 부처인 까닭에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는 그대로의 부처다, 라고 하는 그런 어떤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八風不動(팔풍부동)주1)
출처 지묵 스님 (칠보산 아란야 선원장) 선가귀감 중 일부
http://bulkwang.co.kr/bbs/board.php?bo_table=ca_month&wr_id=212
선가귀감
제21장
工夫 若打成一片, 則縱今生, 透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惡業所牽.
공부가 만일 타성일편이 된다면, 비록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임종시에 안광이 사라질 때 악업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니라.
제22장
大抵參禪者, 還知四恩, 深厚陵? 還知四大醜身, 念念衰朽陵? 還知人命, 在呼吸陵? 生來値遇佛祖陵?
及聞無上法, 生希有心陵? 不離僧堂, 守節陵? 不與隣單, 雜話陵? 切忌鼓扇是非陵?
話頭 十二時中, 明明不昧陵? 對人接話時, 無間斷陵? 見聞覺知時, 打成一片陵? 返觀自己, 捉敗佛祖陵? 今生, 決定續佛慧命陵?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陵? 此一報身, 定脫輪廻陵? 當八風境, 心不動陵?
此是參禪人, 日用中點檢底道理,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참선자는 다음과 같이 돌아보아야 하느니라.
1.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줄을 알고 있는가?
2. 지수화풍 사대로 된 추한 이 몸이 찰나에 쇠퇴해 썩어가고 있는 줄을 알고 있는가?
3. 사람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줄을 알고 있는가?
4. 살아오는 동안 부처님이나 조사를 친견한 적이 있는가?
5. 또한 위없는 법문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낸 적이 있는가?
6. 승당을 떠나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7. 곁에 있는 사람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있지 않는가?
8. 분주히 시비거리 일삼는 것을 멀리하고 있는가?
9. 화두가 하루 중 어느 때나 명명백백한가?
10.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중간에 끊어지지는 않는가?
11.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견문각지 시에도 타성일편이 되는가?
12. 시선을 유턴(U-turn)하여 자기의 본래면목을 돌아보고 불조(佛祖)를 붙잡을 만한가?
13. 금생에, 꼭 부처님의 혜명을 잇겠는가?
14. 앉고 서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15. 이 업보의 한 몸뚱이가 윤회에서 해탈할 자신이 있는가?
16. 팔풍의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부동한가?
이것이 참선자가 일상생활 중에 때때로 점검해야 할 내용이니라.
옛 사람이 말씀하셨느니라.
“금생에 이 몸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 건지기를 기약하랴!”
八風(팔풍)은 크게 나눠 순역(順逆) 이풍(二風)으로 순경계와 역경계의 둘이니라.
*스스로 경책하는 법문 열여섯 조항은 참선자의 평생 좌우명이다.
팔풍(八風)과 번뇌
팔풍을 나누면, 네 가지 순풍 사순(四順)은 이예칭락(利譽稱樂)이고, 네 가지 역풍 사위(四違)는 쇠훼기고(衰毁譏苦)이다.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① 이풍(利風)
이(利)로운 바람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 이익에 팔려서 마음이 흔들린다.
② 쇠풍(衰風)
쇠(衰)퇴, 쇠멸하는 바람이다. 내 소유에 손해가 되어 마음이 흔들린다.
③ 훼풍(毁風)
훼(毁)방하는 바람이다. 기분 나쁘게 등 뒤에서 딴 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며 헐뜯고 훼방하여 마음이 흔들린다.
④ 예풍(譽風)
예(譽)찬하는 바람이다. 기분 좋도록 등 뒤에서 미담을 퍼뜨려서 우쭐해지고 마음이 흔들린다.
⑤ 칭풍(稱風)
칭찬하는 바람이다. 면전에서 좋은 말로 칭찬하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다.
⑥ 기풍(譏風)
기(譏)롱하는 바람이다. 면전에서 꾸짖고 악담하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다.
⑦ 고풍(苦風)
고(苦)통의 바람이다. 핍박한다는 뜻이다. 악연악경(惡緣惡境)을 만나 심신이 핍박을 받아 마음이 흔들린다.
⑧ 낙풍(樂風)
희락(喜樂)의 바람이다. 희열의 뜻이다. 호연호경(好緣好境)을 만나 심신이 희열을 느껴 마음이 흔들린다.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에 八風(팔풍)이 나와 있다.
불지경론(佛地經論)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신체와 수족은 침묵 속에 안정되어 부동하나니, 팔풍이 불어도 부동하느니라(身體及手足 寂然安不動 八風吹不動).”
八風不動(팔풍부동)주2)
출처 무비스님 초발심자경문 제14강
기록 無憂手 http://cafe.daum.net/yumhwasil/7xzM/17
譏毁讚譽에
기훼찬예
그 다음 예(譽)도 역시 칭찬하는거 가까이서 칭친하는거 또 예(譽)는 또 멀리서 뭐 면전에 없어도 아~! 그 사람을 아주 높이 추앙해서 하는거 그게 예(譽)고, 찬(讚)은 면전에서 뭐 노래나 또 어떤 말로 하는 것을 찬(讚)이라고 그럽니다. 기(譏)는 앞에서, 훼(毁)는 또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하는게 훼(毁)고
何憂何喜리요
하우하희
그런 일들에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기뻐하리오. 본래 그 道가 어느 정도 됐나? 道가 어느 정도 찼나? 하는 것을 알아보는데 뭐 道人이 아니면 道人을 어찌 알 수 있나? 그런 소리 무책임하게 하지만은 도인 아니라도 알 수 있어요. 그게 팔풍(八風)이라는게 아닙니까? 八風不動(팔풍부동)이라 그런 말을 잘 쓰는데 여덟 가지 바람을 보내보면 알아.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 이라고
이익을 줘 보는거야. 그래도 아무 동요가 없으면은 그 일차 통과야.
그 다음에 쇠(衰)라고 손해를 보여보는 거야. 그래도 아무 동요가 없으면은 그런 바람에 이익과 손해의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면 이차 통과라.
그 다음에 훼(毁), 예(譽)라고 여기도 훼(毁), 아주 헐뜯는 거 비방하는 거죠.
그리고 아주 그 칭찬하는거 예.
그 다음에 칭(稱), 기(譏) 또 칭찬인데 면전에서 하는게 칭(稱)이고,
기(譏)는 면전에서 비아냥거리는거. 아주 앞에서 막 칭찬해 본다던지, 아니면은 막 그냥 무슨 그 비난을 해 본다든지 그래도 아무 동요가 없으면 그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죠.
그 다음에 고(苦), 락(樂). 아주 고생스러운 어떤 상황에서 아니면 아주 즐거운 상황에서 거기에 아무런 동요(動搖)가 없으면은 그 여덟 가지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하면은 일단 道人이라고 간주해도 좋다. 그런 우리 관례(慣例)가 있지요.
八風不動(팔풍부동). 뭐 치문에서도 나오고 곳곳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 남의 말에 안 흔들리는 것 참 중요해요.
‘道吾善者(도오선자)는 是吾賊(시오적)’이요,주2)
나를 칭찬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요≪明心寶鑑≫〈正己篇〉
‘道吾惡者(도오악자)는 是吾師(시오사)라’ 주3)
나를 나쁘게 (잘못된 점)을 말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라.≪明心寶鑑≫〈正己篇〉
阿僧祇(아승지) 주4)
10의 56승 [10^56]
항하사(恒河沙)의 1만 배. 셀 수 없이 많은 수, 또는 그런 시간. 승기, 아승기라고도 한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억-천억-조-경-해-자-양-구-윤-정-재-극-항하사-아승지(아승기)-나유타-불가사의-무량-대
那由他(나유타)주5)
인도의 수량단위. 10의 60승[10^60], 나유다(那由多), 나유타(那由), 나술(那述)이라고도 한다. 아승기(阿僧祇)의 1만 배 ,
(억)은 10의 8승
(조)는 10의 12승
10의 16승은 (경)
10의 20승은 (해)
10의 48승은 (극) (극)보다 큰 수도 존재한다.
10의 52승은 (항하사)
10의 56승은 (아승기;아승지)
10의 60승은 (나유타)
10의 64승은 (불가사의)
불가사의에 0을 4개 -> 10의 68승 (무량대수)
‘見佛差別(견불차별)’주6)
출처 무비스님의 화엄경 강설 중 일부
19-1 세계성취품 8. 세계불출현-9.세계겁주
기록 慧明華 (화엄경 노트) http://cafe.daum.net/yumhwasil/Gnl3/67
청량스님의 현담에는 출현차별(出現差別)이라고 해서 경전마다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 다른 것을 이야기 한다.
통현장자의 화엄론에는 부처님은 같은 분인데 보는 사람의 소견에 따라서 각각 차별하다는 뜻으로 견불차별(見佛差別)이라는 표현을 쓴다. 소승경전에는 부처님을 어떤 모습으로 보았고, 대승시교경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았으며, 아미타경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았고 결국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을 어떻게 보았다. 등등 견불차별(見佛差別)을 그렇게 여러 각도로 이야기 하고 있다.
‘唯識(유식)’주7)
유식사상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출처 혜거 스님 유식삼십송
唯識(유식)의 개요
일(事)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이치(理)에는 법칙(法則)이 있어서 천하의 사가 순환되고 만법이 동시에 존재한다. 일의 본말과 이치의 법칙을 깨달아 아는 것을 부처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사상이 유식(唯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은 일의 본말 곧 생멸의 이치를 밝힌 것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이치의 법칙 곧 만법의 주체를 밝힌 사상이라 하겠다. 따라서 유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바로 아는 일이 되고 부처님의 사상을 이해하고 부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요문(要門)이라 하겠다.
唯識(유식)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하신 부처님 사상을 토대로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의 불가분리한 관계를 규명해낸 학설이다.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선 심(心)·의(意)·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심(心)은 아뢰야식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이라 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六識)이라 한다.
모든 법은 이 마음[唯識]에 의해 존재한다. 인간의 심성을 깨닫게 해준 유식은 불교의 핵심사상으로서 반야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지주가 되어 왔다. 반야(般若)사상은 공(空)으로써 만법의 실상을 밝히고 唯識(유식)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써 만법의 주제(主帝)를 밝힌다. 얼핏보면 이 두 사상이 상반된 듯 보이지만 깊이 살펴보면 서로 저촉되지 않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절대적인 진리임을 알게 된다. 이 유식학은 부처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인도에서 정리되고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唯識(유식)이란 말은 마음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 등 안팎의 모든 것들이 마음(心識)에 의해서 창조되고 심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사상이다. 유식 사상은 자칫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고 용수(龍樹)의 공(空)사상을 보완하여 공(空)사상이 후세에 공허한 사상으로 잘못 치우쳐 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中道狂(중도광)’주8)
출처 無比스님 名言名句 http://cafe.daum.net/yumhwasil/37fj/122
열반송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생평기광남녀군 미천죄업과수미 활함아비한만단 일륜토홍괘벽산
<성철(性徹)스님>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해설
이 글은 성철(性徹,1912-1993)스님의 열반게송이다. 스님께서 이 게송을 남기고 열반에 들자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불교인들에게는 항상 접하는 내용이라서 별 관심이 없었으나 비불교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은 대단히 의아해 하였다. 나아가서 일부 다른 종교인들은 불교를 폄하할만한 꺼리가 생겼다고 하여 이리 저리 글자대로만 해석하여 크게 비방하고 나섰다. 그래도 불교인들은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소치라 생각하고 그러다가 말려니 여겼다. 그런데 10년이 훨씬 지난 요즘에 더 극성이란다. 성철스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선전을 하며 불교를 형편없는 종교라고 비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새삼 이 명구 난에 그 해석을 남기게 되었다.
불교에서 존재 일체를 보는 견해가 교리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중도(中道)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성철스님은 일생의 불교공부를 백일법문이라는 법회를 통해서 거의 모두를 피력하였다. 백일법문의 일관된 사상은 중도다. 그것은 스님역시 일체 존재를 중도로 보았고 불교를 중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중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시다가 스스로를 중도광(中道狂)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일체의 존재원리가 중도며 그것을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도 중도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백일법문 속에는 근본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중도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정리하였다. 중도는 공식이다. 경전과 어록도 모두 중도공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이론은 아무리 짧은 글이라 하더라도 중도가 표현되지 않으면 온전한 글이라고 보지 않는다. 열반송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철저히 중도로써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였다. 중도란 간단히 말하면 절대부정에서 절대긍정을 나타내는 이론이다. 사물이나 인간의 의식세계를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을 쓰지만 성철스님은 자신의 일생을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라고 철저히 부정하였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성자이기에 그 부정은 더욱 빛난다. 자신존재의 그 진공성의 표현은 참으로 숨이 막힐 정도이다. 경전이나 어록에는 공(空)이나 무(無)를 사용해서 중도를 표현한다. 참고로 금강경의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은 세존이 자신의 깨달음과 일생동안의 설법을 철저히 부정한 내용이며, 또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은 제자들의 수행성과(修行聖果)마저 철저히 부정한 내용이다.
다시 절대긍정으로서의 내용은 “산체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一輪]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라고 하였다. 절대긍정의 지극한 표현이다. 선불교에서의 지옥은 극락의 다른 표현이며 한은 기쁨의 또 다른 표현이다. 큰 죽음은 큰 삶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옥과 극락을 소요자재하면서 모든 생명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그들을 제도한다. 또한 산체로 지옥에 간다는 말은 죽을 겨를도 없이 지옥에 빨리 가서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성철스님 같이 법력이 뛰어난 분이 지옥에 가야 지옥의 중생들을 건질 수 있다. 보통의 도력으로는 지옥에 갈 자격이 되지 못하며 가 보아야 지옥의 중생들을 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양”이란 무엇인가? 성철스님 자신이다. 태양이 높이 떠서 세상을 비추다가 지금 이렇게 아름답고도 장엄한 저녁노을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지나친 자기자랑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이 이상의 자신에 대한 절대긍정은 없다. 한편 태양은 우리들의 자신이며, 지금 이렇게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의 근본이며 성철스님의 본래면목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크게 긍정하여 가히 중도광(中道狂) 답게 철저히 중도로서 표현하였다. 천고의 절창이다. 부디 바른 이해가 있었으면 한다.
http://cafe.daum.net/yumhwasil/37fj/122
4강 1부(2011.11.21)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