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전야 숨죽여서
가을 들머리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발생해 대만 근처에서 방향을 틀어 북상 중인 구월 초순이다. 구월 첫째 화요일 우리나라 제주도 동쪽을 스쳐 경남 통영과 고성 연안에 상륙해 부산과 경주 포항의 영남 동남부를 관통해 동해로 빠진다는 진로다. 그렇지만 태풍 영향권의 반경이 워낙 넓고 세력이 강해 우리나라나 전역이 태풍 내습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어제 일요일은 고향의 큰형님이 펴낸 문집 ‘운강산고’를 펼쳐 내용을 음미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작년에 큰형님의 육필 원고를 건네받아 한글로 입력해 한자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완수했더랬다. 이후 큰형님의 구술을 바탕으로 칠언율시와 문장을 한글로 주석을 다는 일까지 마무리 지어 편집 자료를 출판사로 넘겨 책으로 제본이 되어 나온 큰형님의 필생 역작 ‘운강산고’였다.
태풍 엄습이 염려되어 일요일은 집에 머물며 큰형님이 펴낸 문집을 살펴보며 아우와 인연이 닿은 몇 분에게 보내려고 발송 준비를 마쳐 놓았다. 아직 현직인 대학 교수가 있고 정년 이후 시골로 낙향한 선배 교수도 있었다. 그밖에 고향 의령과 연고가 있는 원로 문인을 비롯해 몇몇 지기들에게 큰형님의 문집을 보낼 생각으로 봉투 겉봉에 수취인의 주소와 우편번호를 적어 놓았다.
월요일 새벽에 잠을 깨니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는 조짐이 전혀 없는 태풍 전야였다. 텔레비전을 켜질 않아 재난 방송이나 기상 속보는 알 수 없었다. 노트북을 켜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하니 태풍 진로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오키나와와 규수를 스쳐 제주도 근역까지 접근하는 중이었다. 우리 지역은 월요일 늦은 밤부터 화요일 아침이 태풍이 통과하는 최정점이 될 듯했다.
월요일 날이 밝아오길 기다리며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버나뎃 머피의 ‘반 고흐의 귀’를 펼쳤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술사를 전공했던 저자는 성인이 된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 남부에서 살았다. 그는 친언니 죽음과 자신의 병을 계기로 반 고흐의 삶을 연구하기 시작해 귀를 자른 소동이 일어난 아롤에서 7년간에 걸친 방대한 조사와 연구의 결과물로 나온 책이 ‘반 고흐의 귀’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목회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대부분 프랑스에 정주하면서 남긴 작품은 사후에 주목받은 화가다. 그는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 프랑스 남부 아롤에서 왼쪽 귀를 스스로 자른 충격적 자해 소동을 벌였고 이태 뒤 자살에 이른다. 그에게 혼란스러운 생의 후반부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를 평생 괴롭힌 정신과적인 병력에 기인 되어 안타까웠다.
반 고흐가 귀를 자른 전후 과정을 추적한 내용을 완독하지 못하고 아침나절 용무가 있어 잠시 외출해야 했다. 월요일 아침 우편 업무 개시 시각에 맞추어 반송동 우체국으로 나가기로 되었다. 강력한 비바람을 동반한다는 태풍 힌남노는 아직 우리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때였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목에 반송시장 마을금고 창구에서 판매한다는 창원사랑 상품권을 사기 위해서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때때로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해 창원사랑 상품권을 판매했다. 상품권 판매 대행사는 지방 은행과 제2 금융인 마을금고와 신협이었다. 내가 가려는 우체국 근처에 ‘누비전’을 판매하는 창구가 네 군데였는데 구매자들이 길게 줄을 이었다.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해 20만 원어치를 샀더니 2만 원은 현금으로 돌려주어 백수에게 반나절 수당을 확보하게 되었더랬다.
마을금고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유통하는 상품권을 산 뒤 우체국 창구에서 소포를 발송했다. 이후 집으로 오는 길인 반송시장에서 아까 사두었던 상품권으로 송편과 맛국물을 우려낼 때 쓰일 멸치를 샀다. 만물상회 다이소를 지나다가 문득 뭔가 하나 사야 할 것이 떠올랐다. 깊은 밤 태풍이 닥쳐 정전이라도 된다면 촛불을 켜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성냥 대용의 라이터였다. 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