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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도량 소식....♧ 스크랩 용문사(경남 남해)
길상정(포항11기) 추천 2 조회 1,383 13.04.24 23:12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남해 호구산 자락에 위용있게 자리잡은 용문사

 

 

2013.  4. 24.

 

 

 

2013. 4. 22. 07:00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에서 남해의 금왕사와 용문사, 그리고 화방사로 가기 위하여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절에서 출발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 법회를 하며 남해로 향한다.

대포고속도로를 달려 구마고속도로 경유해 현풍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문산휴게소에서 한번더 휴식 후 창선대교를 달려 경치좋고 인심좋은 남해를 들어서서 금왕사에 도착하니 고운 햇살이 우리를 맞아준다...

 

금왕사에 도착 후 지봉 주지스님의 안내로 사찰관람 후  BBS불교방송 '행복한 미소'를 진행하시는 성전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용문사로 출발 12시 40분경 용문사 주차장에 버스가 도착했다....

용문사 공양간에서 준비해준 정갈하고 맛있는 비빔밥을 공양 후 용문사 순례를 한다.

 

용문사 입구에는 ‘미국마을’이 나온다. 미국의 아름다운 단독주택을 옮겨놓은 듯하다.

 

 

 

? 용문사 입구 미국마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 아래쪽에 있는 미국마을에는 그야말로 미국냄새가 난다. 자유의 여신상· 주택 모양· 정원까지 마을 입구에 커다란 자유의 여신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더욱 그렇다.

 

 

 

 

용문사길 입구에 자리한 미국빌리지

 

여신상 옆 표지석에는 미국마을에 입주하고 있는 주인장들의 이름과 주택 호수가 적혀 있다.주택의 모양새와 정원, 주차장까지 미국판이다. 정원이 넓어 잡초를 뽑고 잔디를 깎는 일이 힘들겠지만 가족이나 친지들과 간간이 벌이는 야외 삼겹살 파티는 힘든 피로감을 씻어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미국마을은 남해군에서 지역특화발전특구법에 따라 자치단체에서 가장 차별화된 시책을 모색하던 중 미국에서 생활하는 교포들에게 건강한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실질적인 인구 유입 효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다.

 

 

겨울에도 따뜻하고 전국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천혜의 관광자원과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이동면 용소리 일대에 30억여원을 투입, 2만4790㎡(7500여평)규모로 미국식 주택 21채와 복지회관, 체육시설 등을 조성했으며, 특히 주택은 모두 목재구조로 만들어 미국의 작은 마을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또한 미국의 전통주택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각 주택은 민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문화와 전통 주택 체험의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용문사

 

호구산에 자리 잡은 용문사는 신라 문무왕 3년(1663년)에 원효대사께서 보광산(금산) 에 건립한 보광사(일명 봉암사)를 그 전신으로 하고 있다. 원효대사 께서 그곳에 첨성각을 건립하고 선교의 문을 열어 그 명성을 떨쳤으나 그후 보광사의 사운(寺運)이 기울어지자 조선 현종원년(1660년)에 백월대사께서 용소리 호구산에 터를 정하고 사찰을 옮기게 되었다.

 

이후 신운화상이 첨성각 근처에 탐진당을 세우고 상법화상이 적묵당을 건립하는 등 중창을 그듭하여 오다 현종 7년(1666년)에 백월대사 께서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이어 숙종 34년(1708년)에는 염불암이 중창 되었고 절의 서쪽에는 백련암을 신축하였다. 조선 숙종 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왕실로 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와 번 그리고 수국사 금패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 부터 나라 를 구해 냈으며 그 때 사용하였던 삼혈포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지금의 사찰은 중흥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 께서 서기 1993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 용문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으로 한 줄로 늘어서 있다하여 일주문이라고 한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 문 안을 진계라 하는데 성(聖)과 속(俗)을 공간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일주문은 속세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용문사 일주문의 현판은 창암 이상만 선생의 글씨이고 현재의 일주문은 영주스님이 중건하였다.

 

 

 

 

'용문사' 시비

 

 

 

 

지장도량 표지석을 지나니

 

 

 

 

? 용문사 부도탑

 

 

 

조선조에 12명의 고승을 배출하여 조촐한 부도밭이 절 입구에 단장되어 있다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언덕에 있는 12기의 부도는 이 절이 선사를 많이 배출한 전통 사찰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멋진 부도를 발견했다. 하단부에 사람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월정사부도비 거북머리가 사람얼굴과 닮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부도에 이렇게 사람 얼굴이 여럿 나온 것은 처음 본다. 그 표정 하나하가 제각각이다.

생전에 중생을 교화하지 못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스님의 덕을 받은 민초들의 얼굴일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

 

 

 

 

 

 

 

 

 

 

 

 

 

 

 

 

 

 

 

 

 

 

 

 

 

 

 

 

 

 

 

용문사 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 대사비

 

 

 

 

지금의 사찰은 용문사 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이 서기 1993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부도를 지나니 오른쪽 길가에는 길손들 목축일 샘물도 있었다.

 

? 용문사 장승각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각을 가기전에 우측으로 조그마한 전각이 있다. 무엇인지 궁금하여 들여다 보니 나무로 된 장승이 하나가 있다

 

 

 

장승각에 있는 목장승

 

 

위정대장군(衛正大將軍)이라 쓴 장승도 스치듯 지나고

 

가장 먼저 맞이 해주는 것이 장승이다. 비바람에 머리털이 삐쭉 올라 섰지만 생긋 웃는 모습에서 남해인의 천진난만함을 읽을 수 있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이란다.

그 옆엔 우렁차게 생긴 남근석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불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토속 신앙의 산물들이다. 권위보다 민초와 함께 하는 모습이 정겨워보인다

 

 

? 용문사 천왕각(龍門寺 天王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50호

 

장승각 좌측의 천왕교를 지나면 천왕각이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처음 만나는 건물로 용문사의 관문 천왕각이다.

 

 

 

대나무밭 사이에 놓여진 돌계단이 참 아늑하다. 딱딱한 돌이 모여 생동감있는 구조물로 바꾸어 놓았다. 밟을수록 돌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돌다리 하나를 건넌다. 나는 지금 내 안에 가득한 속됨을 떨쳐버리고 성(聖)의 세계로 한 발을 내뻗는 중이다. 돌다리는 내게 속삭이듯 말한다. 버리고 오라고, 세상의 누더기 따위는 다 버리고 맨 몸으로 건너오라고 말한다.

첫 번째 다리를 다 건너고 나면 사천각이 나온다.

 

 

 

왕각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은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면서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수호하는 호법신장(護法神藏)이다. 사방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용문사 입구에 위치한 이 전각은 1702년 (숙종28)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상은 목조상으로 그 크기는 300cmx230cm이며, 왕관을 쓰고 비파 . 검 . 용 . 창을 각기 들고 있는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천왕각의 사천왕상

 

 

 

 

용문사의 사천왕상은 왕관을 쓴 목조상이며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비파, 칼, 용, 창을 각각 들고 있으나 발밑은 다르다.

전국 3대 지장도량의 하나로 불리는 용문사의 독특함은 천왕각의 사천왕 발밑에서 잘 드러난다. 다른 절의 사천왕 발밑에는 마귀가 있는 반면 이 곳 사천왕 발밑에는 양반과 탐관오리가 짓눌려 있다. 이런 모습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초들의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네분의 천왕은 수행을 방해하는 악귀대신 양반 벼슬아치인 탐관오리를 발 밑에 밟고 있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중생들의 고통에 분노하며 그들의 편에 서려한 스님들의 자비심을 읽을 수 있다.

 

 

 

 

용문사 사천왕의 발밑에 밟혀있는 것은 권력을 탐하거나 아첨하던 양반과 관리들이다.

여기서, 용문사의 정신이 잘 들어난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으며 민초들 곁에 있고자 했던 그 정신말이다.

 

 

천왕각을 들어서니 좌측 대나무밭 아래에 이런 비석도 보인다.

 

 

사천왕이 두 눈 부릅뜨고 관리와 양반을 밟고 있는 사천각을 지나면 거의 직각으로 꺾어진 두 번째 돌다리가 나온다.

 

 

 

이번에는 돌다리가 약간 언성을 높여 타이르듯 속삭인다. 그깟 속세의 묵은 찌꺼기 따위를 버리기가 그토록 어렵냐고. 두 번째 석교를 건너고 나면 봉서루라는 매우 위엄 있는 2층 누각이 기다리고 있다.

 

 

 

용문사는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거쳐 봉서루로 진입하기까지의 동선이 매우 짧다. 아마도 용문사를 설계했던 사람은 이 도입부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2개의 석교를 만들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두 번째 석교에 이르러서는 거의 직각에 가깝게 꺾어지게 함으로써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도입부가 매우 긴 것처럼 느끼도록 극적인 반전을 꾀했을 것이다.

 

 

 

두 번째 석교를 지나니 봉서루 왼쪽으로 돌 축대 위에 기와장으로 한껏 멋을낸 흙담이...

 

 

 

 

 

 

 

 

천왕각을 지나서 나타나는 건물이 '봉황이 산다'는 봉서루다.  이 전각은 용문사의 정문으로 대웅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설법전으로 활용되어 왔다.

 

 

산지중정 가람의 누하 진입이 가능한 산지가람의 전형이다. 봉서루는 용문사에 보관중인 ‘호구산용문사봉서루병서(虎丘山龍門寺鳳棲樓序)’에는 전각의 내력이 전해온다고 한다.

봉서루 현판은 1720년에 썼는데, 용문사는 1720년 이전 여러 차례 불이 나 전각이 전소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결국 스님들은 그 이유를 용문사의 풍수지리형국에 기인 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호거산 호랑이며, 용문사는 용이 들어선 절이기에 용호상박의 한 치 양보없는 형국으로 기운이 강해 화재가 빈번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용과 호랑이의 성정을 다스려 기를 누르려는 비보책으로 봉황을 설정하여 누각 이름을 봉서루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어두운 봉서루 밑을 지나간다. 계단으로 된 누하문(縷下門) 한 발짝 두 발짝 딛고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양이 많아지고 사위가 점점 환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계단 중간에 올라서자 대웅전이라 쓰인 현판이 보이고 날아갈 듯 떠 있는 대웅전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빛은 극명한 대조를 빚어낸다. 어둠은 사람을 긴장시키며 빛은 그 긴장으로부터 놓여나게 한다.봉서루 누하(樓下)의 엷은 어둠은 절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잠시 긴장을 유발한다. 그렇게 해서 속(俗)의 공간에서 성(聖)의 공간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몸을 들여놓으려는 사람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던져준다.

 

 

 

 

그리고 은연중 몸을 구부리지 않으면 누하(樓下)의 계단을 오를 수 없게 한다.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로 들어가려는 자에게 다시 한 번 겸양과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다.계단은 오르는 자에게 가벼운 상승감을 안겨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두가 절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욱 극적인 감동을 안겨주려는 건축적 장치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봉서루는 계단을 막고 봉서루 밑을 지나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도록 하고 있다...

 

 

 

봉서루 밑에는 '구유(일명 구시통)'이 길게 잘리잡고 있다. 많은 대중들의 밥을 퍼주는 함지통이라 할 수 있다.

 

 

 

 

 

본시 구유는 아름드리 통나무속을 파내고 마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인데,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는 법회나 대작불사를 회향할때와 유사시 승병들의 밥을 퍼주던 용기로 발전하였으며, 1000명분의 밥을 퍼 담았을 정도로 큰 그릇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의 밥을 퍼 담아쓰던 밥통으로도 전해온다. 통나무 몸통 둘레 3m, 길이 6.7m나 되는 거대한 밥통이다.

 

 

 

 

 

 

 

 

 

봉서루를 돌아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기전 물확이 있다.

 

 

물이 좋기로 유명한 용문사 약수가 흐르는 석조 물확

 

 

 

 

수각옆 목조화분의 마가렛 꽃이 길손을 맞는다....

 

 

 

 수각 옆 전경이다...

 

 

봉서루 밑의 계단은 막아두고 봉서루를 돌아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도록 하고 있다...

 

 

 

 

봉서루는 용문사의 정문으로 대웅전 정면과 마주하고 있다. 전칸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2층은 설법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성암스님이 초건한후 수 차례 중건, 중수를 거듭하다 중현스님이 해체 중건하였다.

 

 

? 용문사 대웅전(龍門寺 大雄殿)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끼며 봉서루를 돌아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니 장엄한 대웅전의 위상과 함께 용문사의 위용이 느껴진다.

 

 

돌계단을 올라 화려한 포작을 감상한다. 용이 들어가는 산문답게 용조각이 하늘을 수 놓는다.

 

 

 

단청이 바래 그 속살이 드러났지만 그 윤곽만으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법당 앞 쪽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했고, 뒤쪽 공포에 용꼬리를 달았다. 그리하여 이 법당은 용이 이끌고 가는 반양용선임을 보여준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반야용선이 앵강만을 거쳐 남해바다를 유영하다가 세존도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봉서루를 돌아 돌계단을 들어서서 마주하게 되는 대웅전은 숙종 29년(1703)에 성화 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전각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용문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의 덧서까래가 길어서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 보이며, 네 귀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기둥 간격이 더 넓어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정면 어간이 협간보다 조금 넓어 어간에는 네 짝 교살 분합문을 달고 협간에는 세 짝 교살 분합문을 달았다

 

 

대웅전은 현종 5년(1666)에 일향스님이 건립하고 제해스님이 윤색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숙종29년( 1703)에 성화스님이 주창한 것이다.

 

 

포작은 외 3출목 내 4출목이며 첨차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다. 출목첨차의 하단부는 교두형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으나 살미첨차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살미첨차는 길게 뻗어 나온 쇠서 위에 연꽃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마치 포작 전체가 연꽃으로 피어나는 듯이 보이게 한다.

 

 

 

대웅전은 팔작 지붕의 목조와가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係) 팔작(八作)건물로 만들어 외삼출목의 포를 짜 올렸다.

 

 

외부의 공포도 가히 환상적이다..

정면 앞 처마 밑의 공포는 용들이 남해를 집어 삼킬듯 으르렁 거리고..

측면의 포작들은 연꽃으로 수놓아져서 연화회상을 연상케 한다..

 

 

 

 

 

 

수많은 용(龍) 조각이 새겨진 대웅전

 

대웅전 처마 밑을 눈여겨 살펴보면 용문사라는 절의 이름에 어울리게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처마 아래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머리가 장식돼 있다.

 

 

 

 

 

섬세한 용머리 조각이 일품이다.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의 몸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니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은 한 몸이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크나큰 원력은 구름같이 항상 다함이 없어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디넓은 깨달음의 세계 아득하여 끝이 없네

 

 

 

 

 

남해 용문사 공포(?包)

우리 나라 등지의 전통목조건축에 쓰이는 조립부분일반적으로 궁궐·사찰·기념적 건축에 쓰이며, 기둥과 보, 기둥과도리 등의 수직재(垂直材)와 횡재(橫材)가 맞추어질 때 장식적 또는 구조적으로 짜여져서 여러 부재가 결속된 것을 말한다.

 

용문사 공포는 건물 내부에서 낮은 도리와 높은 도리 사이, 또 동자주(童子柱)와 종보〔宗梁〕와 종도리의 맞춤에도 사용될 수 있고, 대공(臺工)과 종도리 사이에도 짜일 수 있다.

또, 외부로는 창방(昌枋)·평방(平枋)과 처마도리 사이, 외목도리(外目道里)와 주심도리 사이에도 짜이는 것이 보통이고, 기둥 위 주두(柱枓 : 대접처럼 널찍하고 네모진 나무)에 놓이는 것과 주두 밑에 놓이는 것 등 실로 다양하다.

 

 

 

 

 

우리 나라에서 공포의 사용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4,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발달된 공포구조로 보아 이보다 훨씬 앞서 공포가 사용되었을 것을 알수 있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용문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46호)

 

이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 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되었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중 경전 ·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되어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삼존불좌상 뒤로 걸린 탱화가 영산회상탱이다.

 

 

 

남해 용문사 건양 2년 영산회상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7호)

 

영산회상탱화는 건양(建陽) 2년(1897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그림 중앙에 있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전방 좌·우측에 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사천왕 2구가 배치되어 있다. 그 상단에는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 4구가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가장 상단에는 제자상, 금강상(4구), 사천왕상(2구)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권속들의 모습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하여 상승감을 주고 있다.

 

 

 

 

 

 

아미타삼존불 위 장엄한 닫집

 

 

 

 

 

 

남해 용문사 삼장보살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52호)

 

이 작품은 용문사 대웅전 반대 측 벽면에 걸려있는 신충탱(1897년)과 동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역시 규모(세로186.3cm, 가로255.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19세기 후반의 삼장탱화로 삼장보살 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형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가운데가 천장보살, 좌측이 지지 보살, 우측이 지장보살..이렇게 세분을 일컫어 삼장탱화라고 한다.

이 중 천장 , 지지보살 신앙은 약화되고, 오늘날 지장보살 사상만 강화되어 지장탱화만 남게 되었다...

 

 

 

 

남해 용문사 건양 2년 신중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53호)

 

건양 2년 신중탱은 1897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19세기 신중탱화로서 규모(세로194.5cm)가 비교적 큰 편이며, 작품제작에 많은 사람이 관여하였다고 하며, 조형성이 였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하단 중앙에 위태천을 중심으로 12신장상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좌우측에 배치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천녀. 천동과 제권속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대웅전 내부의 천장은 더욱 화려하다.

 

 

측면 도리에서 시작된 우미량은 용신(龍身)으로 조각돼 중앙을 향해 힘껏 날아오르다가 대들보에 이르러 용의 머리로 변하는데 용의 눈썹과 뿔, 다리 등이 어찌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던지 마치 천장에 몇 마리의 용이 살아서 날아다니는 양 착각을 일으키게까지 한다.

 

 

수많은 용 조각이 새겨진 대웅전은 보는 이를 감탄케 한다. 특히 여의주를 움켜잡고 있는 용의 다리 묘사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섬세함이다.

 

 

 

 

 

 

 

 

용문사는 호국 사찰이기 때문에 많은 대중이 모이므로 야외집회할때 사용하는 괘불탱화가 있다.

 

 

남해 용문사 괘불탱 (보물 제1446호)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중앙의 본존불상을 위시하여 좌측(向右)에는 정면을 향한 채 똑바로 서서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向左)에는 좌협시보살상과 동일한 자세로 서서 연꽃가지를 받쳐 든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7개의 화기가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전체크기는 가로 613.7㎝, 세로 925.5㎝, 그림크기 가로 584.0㎝, 세로 864.0㎝ 이다.

 

 

 

 

대웅전 목조아미타삼존불 뒤쪽에는 괘불탱을 넣어 보관하는 괘불함이 있었다.

 

 

 

대웅전 뒤에 눕혀놓은 괘불탱 걸이대

 

 

 

 

 

 

 

 

 

 

 

 

용문사 동종

 

남해 용문사 동종은 음통과 용뉴가 1개씩 있으며, 편평한 천판은 세장방형의 12개 연판으로 구성 되어 있고, 鐘形은 견부에서 鐘口로 내려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용뉴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의 머리와 3개의 발가락을 가진 두 발이 모두 천판과 맞닿아 있고, 몸의 형태는 ‘∩’자형으로 1개의 여의주를 받치고 있으며, 꼬리 부분은 음통을 2번 휘감고 있다. 용의 두부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 크게 벌린 입, 뿔 표현이 생동감 넘치고 비늘 표현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음통의 구연부분은 4개의 연잎이 만개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은 사선문으로 처리하고 있다. 상대는 돋을새김의 원권(圓圈)에 梵字文을 삽입하여 배열하였으며, 신부에는 4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유곽과 유곽사이에는 합장형 보살입상 4구를 배치하고 있으며, 당좌는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유곽은 사다리꼴 형태로 그 안에 총 9개의 볼록한 乳와 유좌가 위치하며, 유곽대에는 연속 당초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사다리꼴의 틀 안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 하였는데, 두부에는 2조의 선으로 구성된 원형 두광을 구비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상호는 코와 입 표현이 비교적 사실적이며, 군의 위에 천의를 걸쳤으며 의습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대는 종구에서 약 5cm 떨어진 위치에 연화당초문을 둘러 나타내고 있다.

 

 

용문사 대웅전 종

 

 

 

대웅전 중정의 야회 법회용 불화를 걸었던 2조가 한 쌍인 괘불대

 

 

대웅전 밑 돌

 

 

 

건물에 비해 공포가 화려하다.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 용문사 명부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용문사 명부전은 조선 현종 3년(1662년)에 건립되었으며,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에 육도의 중생을 교화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매우 정교한 솜씨로 표현되었으며,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직접 조성하여 백일기도를 드려서 대도성취의 기운을 삼았다는 설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용문사 목조지장시왕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6호)

 

 

 

 

 

 

 

 

 

 

 

 

 

 

? 용문사 용화전

 

 

 

 

 

명부전을 돌아 나와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아주 작은 전각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용화전이다.

 

 

 

이 용화전에는 석조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용문사를 중건할 때 경내를 파다가 발견하여 용화전에 모셨다 한다.

 

 

후대에 오면서 백회로 덧칠을 하는 바람에 본래의 자연스런 모습을 잃었다. 보살상의 상호는 조금 각진 듯하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다. 얼굴에 비해 상체가 상당히 긴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풍만한 느낌을 준다.

앉은 키가 81cm, 어깨 넓이 38cm, 무릎 폭 66cm 의 보물급 석불이라고 한다.

 

 

 

 

? 용문사 영산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모시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상수제자인 가섭과 아난을 모시기도 하나 대개 열여섯분의 나한을 좌우로 모신다.

 

 

 

이 영산전에는 모두 스물두분의 존상이 모셔저 있으며 수도하는 스님에 대한 신앙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용문사 칠성각

 

 

 

칠성각은 수명장수신인 북두칠성을 신격화하여 봉안한 당우이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를 모셨다

 

 

여래의 증명을 거치고 칠여래의 화현으로 나타낸 칠성신앙으로 1970년 염불암의 칠성각을 이건하고 2003년 중앙스님이 중건하였다.

 

 

산신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 용문사 범종루

 

 

 

 

범종과 함께 법고, 목어, 운판 등 불전 사물을 비치하는 사찰당우로 범종루 라고도 한다.

 

 

 

범종은 사찰에서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 이며,지옥의 중생에게 불음을 전한다라는 뜻도 담겨있다. 법고는 홍고라고도 하며 아침, 저녁 예불때와 법식을 거행할때 친다.

 

 

 

이 절의 범종은 보석 스님이 조성하고 종각은 영주스님이 건립 하였다.

 

 

 

 

 건륭이십오년명운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9호

 

 

 

 

동종

 

 

 

법고

 

 

 

목어

 

 

 

 

 

 

 

 

 

 

 

? 용문사 적묵당

 

 

 

적묵당은 본래 선당으로 건립되어 선방으로사용 하였으나 후세에 들어서 사대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수행하며 산중 회의도 개최하는 등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형호스님이 초건한후 수 차례 중건 하였다

 

 

 

 

 

 

 

 적묵당에서 우리가 먹은 비빔밥이 너무 맛 있었다..

 

 

 

 

 

 

 

 

 

 

? 용문사 탐진당

 

 

 

 

 

탐진당은 승당으로 학승들의 수행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신운스님이 건립한후 여러차례 중수 하였고 2003년 중암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

 

 

 

 

 

 

 

탐진당 주련

一輪明月映天心 (일륜명월영천심) 한바퀴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서 비추니,

四海生靈荷照臨 (사해생령하조림) 사해(四海)의 중생들이 그 빛을 받는구나.

何必西風?丹桂 (하필서풍감단계) 하필이면 서풍은 계수나무를 흔들어,

碧?重送九秋音 (벽소중송구추음) 푸른 하늘 늦가을의 소리를 거듭 보내는가?

五湖多少未歸客 (오호다소미귀객) 오호(五湖)를 떠다니는 나그네들은

人把釣竿 (인파조간) 한가한 사람의 낚시대를 당기게 하네

 

 

? 용문사 사찰 뒷 뜰의 녹차밭

 

 

 

대웅전 뒤 녹차밭

 

 

 

절 뒤편에 아담하게 만들어져 있는 차밭과 정원

 

 

절 뒷편의 차밭과 삼나무숲

 

정원처럼 잘 꾸며진 용문사 뒤뜰과 차밭은 고찰의 운치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산사의 정취에 푹 빠져본다....

 

 

 

영산전 뒤로 오르면 자생식물단지가 있다..

 

 

 

 

 

 

남해 용문사 영산전 뒤 열린 휴식 공간에 있는 삼 나무다

 

 

 

 

 

 

 

 

 

 

 

 

 

저 길을 따라 오르면 야생화단지를 지나서 백련암에 갈 수 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현실을 떠나 산사에 몸을 맡기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바로 용문사란 절이 그런 곳이다.   마음속의 남아 있는 휴식처라고 할까?    입구 계곡부터 시작해서 꼭대기 텃밭까지 욕심이 없다.   겸양만을 배울 뿐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가슴속에 시원한 생명수가 쏟아진다.

용문사....다시 가고픈 절집이다. 그 오솔길에 몸을 의탁해 본다.

 

 

 

 

 

? 용문사 노주석

 

 

 

 

야간 행사에 불을 밝혔던 노주석

 

 

 

 

 

? 용문사 요사

 

 

 

 

 

 

 

 

 

 

 

 

 

 

 

 

 

 

 

 

 

 

 

 

 

 

 

 

 

 

 

 

 

? 용문사 야외 지장보살상

 

 

 

여기저기 돌탑을 쌓아놓은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야외 지장보살상앞에서 절을 올렸다..

 

 

 

 

 

 

스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 용문사 전경

 

용문사 요사채 뒤란에 있는 장독대

용문사의 돌계단과 돌담은 참 아늑하다. 질박한 남해사람의 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돌담안에는 공양에 쓸 된장 항아리가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용문사에서 바라본 전망

 

 

용문사는 남해 앵강만을 굽어보며 용소계곡을 끼고 양지 바른 산기슭에 단정히 앉아 있다.

 

용문사는 수행자들의 일상과 삶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사찰 문화체험을 한다.

조용한 숲길을 거닐며 차밭에서 한웅큼 따낸 차 맛을 음미하며 진짜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템플스테이를 한다는데 향기로운 시간이 고여 있어 한번쯤 와보고 싶은 맘이 인다.

BBS불교방송 '행복한 미소'를 진행하시는 성전스님과 밥세워 스님의 귀한 말씀도 듣고 프다... 

 

어느 때 쯤일지????   '언젠가 한번쯤은 꼭 와 보고 싶다.......' 는 희망 사항 같은거........

 

 

요사,  칠성각, 대웅전의 화려한 공포의 조화... 

 

 

 

대웅전의 장엄한 공포와 탐진당의 조화...

 

 

 

 

대웅전 처마와 적묵당 처마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풍경은 어디 있는가, 추녀 끝에 있는가, 내 마음 속에 있는가?

 

영산전을 둘러보고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아주 나직이 뎅그렁,   울리는 풍경 소리를 들었다.

풍경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 절집 어느 전각의 추녀 끝에도 풍경은 달려 있지 않다.

소리가 나는 곳을 더듬어 들어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었다.   내 마음의 추녀 끝에도 풍경이 하나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수시로 내 어리석음을 경계하며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냈지만 난 여태껏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난 언젠가 살다보면 번뇌도 한 여름 날의 불두화처럼 피어나 탐스러운 꽃송이가 될 줄 알았으며 오만가지 망상조차도 궁극에 이르면 몸에 이로운 곰팡이 균이 될 줄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돌아보면 내 일생이 얼마나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인가!!!  이 때 늦은 뉘우침이 더욱 무거운 적막 속으로 가라 앉는다.....

 

 

 

 

 

 

 

 

 

 

 

? 용문사를 나서며

 

 

 

 

용문사는 미륵이 탄생하여 맨 처음 몸을 씻었다는 용소마을 위쪽의 호구산 계곡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전국 3대 지장도량의 하나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갈한 가람의 배치와 다소곳한 신도들의 발걸음이 은은한 느낌을 주는 용문사를 뒤로 하고...

 

 

 

 

잠시나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심신을 가라앉히며 나를 수양할 수 있는 계기가 된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일주문도 지나니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의 속계로 나간다.

 

 

 

용문사 일주문을 뒤로하고 아쉬운듯 도반들과 기념 촬영하고...

 

 

 

 

그러나,  바라다 보이는 앵강만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앵강만 가운데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며 〈사씨남정기〉를 저술하고 생을 마감한 작은 섬 노도(櫓島)가 있다.  숙종의 미움을 받고 유배생활을 하던 그의 마음은 이와 같았다.  ‘저 용문사 위 한 뿌리에 자라난 나뭇가지가/  병들어 사경에 있듯이/  인간의 풍산도 서로 바꾸지 못하는것/  도끼로 나무를 찍듯/ 죽음만 머뭇거리는 구나/  아! 헤어지게 되는 제형들이 무고들 하던 그 때/ 오색비단 옷 입고 즐거이 놀던 그 때 그 얼굴들이 그립구나/  홀로 외로이 계시는 팔십 노모의 사무친 한은 언제나 풀리려나…. -김만중의 〈서포집〉중에서 어머니를 그리워 하던 그는 노모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남해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동안 앵강만을 바라본다.   파란 바닷물이 끝없이 달려가다가 안개속으로 빨려들고 불쑥 솟아오른 남해의 봉우리들은 어느새 파란 바다가 된 것이다.

 

 

 

 

한참 동안 서포 김만중의 적소(謫所)였던 노도를 바라보다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해 장평 튜립축제장을 잠시 들러 보기로 한다. 

 

 

 

 11기 도반들과 함께...

 

 

 

 

 

 

 

 

 

 

 

 

 

 

 

 

 

 

 

튜립을 실컨 보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화방사를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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