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4강 3부 대한불교조계종 부산연합회 2011.11.21
第十八 一體同觀分
제십팔 일체동관분
第十八 一體同觀分 (十五, 斷諸佛不見諸法疑)
제십팔 일체동관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第十八 一體同觀分
제십팔 일체동관분
열여덟번째는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한 몸으로 같이 본다’, 이런 뜻인데 여기 이제 ‘五眼(오안)’에 대한, 여래의 ‘五眼(오안)’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五眼(오안)’은 사실은 뭐 굳이 낱낱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그, 그와 같은 ‘五眼(오안)’을 부처님은 다 갖추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모든 존재를 본다. 그걸 어떤 믿음을 주기 위해서, ‘五眼(오안)’을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을 주기 위해서, 물론 이제 뭐 안 믿을 리가 없지마는 그래도 더 강조하는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저 앞에 ‘ 如語者(여어자), 實語者(실어자), 不異語者(불이어자), 不誑語者(불광어자)’뭐 이런 이야기도 뭐, ‘나는 如語者(여어자)다’ 이렇게 해도 되는데 강조하는 그 의미가, 그런데서 잘 드러나죠.
<참고>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여! 여래는 참다운 말만 하는 사람이며,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말만 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며, 사실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제십사 이상적멸분)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3부 중 일부-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든지, 그 불교에는 좀 이제 힘주어서 설명해야할 대목, 그런데에는 그렇게 이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특별히 강조하고 그렇습니다.
여기,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肉眼不(유육안부)아, 여래가 肉眼(육안)이 있느냐?”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肉眼(유육안)이니이다, 여래께서 肉眼(육안)이 있습니다.”
또,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天眼不(유천안부)아, 여래가 天眼(천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天眼(유천안)이니이다, 여래가 天眼(천안)이 있습니다.”
천안이 있습니다.
肉眼(육안), 天眼(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慧眼不(유혜안부)아, 여래가 慧眼(혜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慧眼(유혜안)이니이다, 여래가 慧眼(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부)아, 여래가 法眼(법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이다, 여래가 法眼(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이다,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제 부처님의 五眼(오안), 뭐, 肉眼(육안)은 뭐 다 가지고 있는 거죠.
물론 이제 天眼(천안)도 있습니다. 慧眼(혜안)도 당연히 있고요. 법을 보는 법의 눈[法眼(법안)]도 있고, 부처니까 당연히 부처의 눈[불안(佛眼)]도 있죠.
이런 대목에서 조사스님들은, 사람 사람들이 다~ 눈썹 밑에 눈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눈썹 밑에 있는 눈 하나가 그대로 ‘五眼(오안)’이지, 달리 무슨 눈이 있어서 그렇게 나누겠는가? 뭐, 이런 표현들도 하고 그렇습니다. 사람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참, 천차만별이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이제 공부를 하고 또 책도 읽고 남의 소리도 듣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갖고 있는, 뭐, 心眼(심안)이라고 할까요? 마음의 눈, 그 心眼(심안)속에는 불안(佛眼)도 포함되고, 法眼(법안)도 포함되고, 慧眼(혜안), 뭐 天眼(천안), 肉眼(육안)까지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심안이 자꾸 달라집니다. 차원이 달라지는 거죠. 그 이제, 견해가 달라진다, 이렇게도 이제 말할 수가 있고, 소견이 달라진다, 이렇게도 이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 뭡니까? 소견이니, 견해니, 뭐, 지혜니, 그런 뜻이죠.
아무튼 우리는 기회가 되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그 안목을 높여가야하고, 넓혀가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항하강에 있는 모래, 그 모래에 대해서 부처님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자기 이야기하시죠, 사실은. 항하강의 모래이야기 뭐, 금강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죠.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說是沙(설시사)니이다, 여래께서 이 모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하야,
저 앞에도 있었죠.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복습.
<참고>
第十一 無爲福勝分(제십일 무위복승분)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가 於意云何오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오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수보리여!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그렇게 많은 항하강이 있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의 수는 얼마나 많겠는가?”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어든 何況其沙리잇가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저 모든 항하강의 수만 하여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이겠습니까!”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七寶로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得福이 多不아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 다부
“수보리여!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만약 어떤 선남자,선녀인이 저 항하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가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언 심다 세존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하리라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선녀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 이 일의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第十一 無爲福勝分(제십일 무위복승분)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1부 중 일부-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어든, 항하강에 있는,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 그 모래 숫자,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 모래 숫자와 똑같은 숫자의 항하강, 항하강이 있다고 하자.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가, 그 많고 많은 항하강의, 강에 있는 그 모래, 그 숫자 같은, 佛世界(불세계), 세계, 그냥, 佛世界(불세계)가 이와 같이 있다고 할 경우,
如是寧爲多不(여시영위다부)아, 얼마나 많음이 되겠는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이소국토중소유중생)의,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若干種心(약간종심)을,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을,
여기있는 ‘若干(약간)’이란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약간’하고 다릅니다.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노니, 여래가 다 안다.
이게 이제 앞에서 ‘五眼(오안)’을 든, 그 장황하게 다섯 가지 눈을 들었는데, 이 이야기할라고 그래요. 여래는 그렇게 ‘五眼(오안)’을 갖출 정도로 뛰어난 분이다,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五眼(오안)’으로써, 그 많고 많은 중생들, 그 많고 많은 국토에 있는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항하강, 그 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그런 그 국토, 거기에 있는 또 중생들. 또 한 중생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마음이 또 있잖아요. 그런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
그렇습니다. 이 마음, 이 ‘若干種心(약간종심)’이라는 것은, 그~ 많고 많은 국토, 거기에 있는 무~수한 중생들, 한 중생에게도 무수한 마음이 오고가고 하는데 그 마음까지, 如來(여래)가 悉知(실지)하노니, 오안을 갖춘 입장에서, 이런 말이죠.
실지하노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何以故(하이고)오, 왜냐하면,
어째서 그렇게 여래가 잘 아느냐 말이야. 그 많고 많은 중생들의 그 많고 많은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이 하루 끝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데. 간단하다 이거예요.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如來(여래)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 역시 ‘즉비’입니다.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是名爲心(시명위심), 다 마음이 아니라, 이 이름이 마음이다.
그 마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 텅~ 비어. 非心(비심)이야. 非心(비심)이면서 또 是名爲心(시명위심)이야.
뭐, 우리 흔히 쓰는 말로 진공이면서 묘유야. 묘유이면서 진공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없는 것이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이고.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그래서 거기서 이제 결국은 ‘中道正見(중도정견)’, 모든 사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까지도, 마음의 문제까지도 사실은 그 존재 형식은 중도적으로 존재한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존재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곧 균형입니다. 중도라고 하는 것은 균형을 말하는 겁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조화를 말하는 것이고. 있음과 없음이 균형이 맞아야 돼. 우리가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또 있음과 없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돼. 우리가 불상, 그 부처님이여. 틀림없이 부처님이야. 그렇지만 꼭 부처님이라고만 꼭 고집하면은 그건 또 문제가 생겨.
그래서 거기에 대한 균형, 균형 감각이 있어야 돼, 사람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러면서 다 수용하는, 이게 중도입니다. 중도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균형 감각이고, 조화예요, 조화.
중노릇도 해야 되고 사람노릇도 해야 돼. 이것도 또한 중에 치우쳐도 안 되고 사람에 치우쳐도 안 돼. 또 중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어. 이게 균형 감각이야. 조화라고. 옛말로 하면 중도야 중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또 무엇도 다 부정할 수도 있어야 돼. 중도 부정하고 사람도 부정해.
사람도 긍정하고 중도 긍정한다. 우리의 삶은 그래요.
그래서 중도 이치를 제일 잘 표현했다고, 뭐, 성철스님은 평소에 ‘中道狂(중도광)’, 중도란 말을 하도 많이 써서 ‘중도광’이라고 할 정도로 중도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제가 보기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께서 말씀하신 그 중도가 제일 아주 내 마음에 딱 들고, 제대로 중도를 설명할 줄 아는 분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런 점이 예를 들어서, ‘空華萬行(공화만행)’,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아라].주1) 허공 꽃이라면 육도만행을 닦을 게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알고 열~심히 닦아야 된다.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 이라.[ 15.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주2)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은 그런 도량을 열~심히 건립해야된다. 열심히 건립하되 또한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이 그런 영상인 것으로, 환영인 것으로 알고 건립해야 된다. 건립, 그렇게 알고, 그렇게 알고 열심히 건립하는 거예요.
이게 건립수월도량이야.
夢中大作佛事(몽중대작불사)주3), 이런 말도 있어요. 꿈속에서 불사를 대작해야 돼. 크~게 대작불사를 일으켜야된다. 꿈속에서 대작불사를 일으켜봐야 뭐요, 허망한 거라.
그렇게 허망한 것인 줄 알고 열심히 대작불사를 해야 한다. 참~! 기가 막힌 표현이야. 그게 중도야.
중도적인 안목으로 뭐, 우리 육바라밀이라든지 일상에 우리 불교적으로 행해지는 온갖 것들이, 중생을 제도하는 문제라든지, 수행하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그야말로 참, 가장 잘 중도적 견해를 잘 표현했다, 이렇게 저는 평소에도 믿고 있습니다.
여기 이제 마음이라고 하는 것[是名爲心(시명위심), 이 이름이 마음이다.], 여기는, 왜 다른 대목에는 그냥 뭐 ‘즉비’라고 하는 그런 표현으로 간단하게 했으면서, 여기는 왜 ‘五眼(오안)’을 앞에다 두고 그런 그 조건을 내걸고,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이렇게 했느냐?
뭐니 뭐니해도 불교에서는 이 마음이 참, 무게가 있는 용어야. 아주 무게가 있는 용어라구요. 마음· 心(심)자, 이거 무시못합니다.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상당히 신중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마음을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 라고 할 때는 뭘 지가 뭘 알고 하느냐, 아 감히 말이야, 마음의 문제를 갖다가 그렇게 말해? 다른 것 뭐 32상이나 80종호니 무슨 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 거라든지, 미진이라든지, 세계라든지 그런 건 뭐 그렇다 손치자. 마음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五眼(오안)’을, 오안을 열거한 거야.
여래는 이와 같이 오안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문제를 내가 이렇게 단호히, 단호하게 내가 말한다 말이야.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다.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왜냐하면 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니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런 대목에 오면 으레이 우리, 예를 든 그런 어떤 사연이 있는 구절이죠.
소위 그 덕산스님[德山宣鑑(덕산선감,782-865) 선사]과 용담스님[龍潭崇信(용담숭신,? ~838) 선사]의 이야기주4), 평생, 금강경을 열~심히 연구해가지고 소초[금강경강해 청룡소초(靑龍疏鈔)]가 그냥 논문이, 연구논문이 그냥 한 걸망이야. 요렇게 짧은 경전인데, 연구 논문이 그냥 한 걸망이야. 그래서 성이 ‘周(주)’씨라. 별명이 ‘周金剛(주금강)’이라.
‘저 사람은 그저 입만 뗐다하면 ‘금강경’, ‘금강경’하니까 우리가‘周金剛(주금강)’이라고 부르자.’이랬죠.
그런데 뭐 어느 저 남방에 무슨 선법이 있어가지고 일체 경을 막 무시하는 그런 외도가 있다는데 이걸 내가 한번 가서 깨부숴야지, 이런 그 마음을 먹고, 이제 남방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에, 잘 아시다시피 시장기가 동해가지고 시장에서 어떤 노파를 만나서 잠깐 이제 요기를 하고 갈라고 그게 ‘點心(점심)’이야.
아침, 저녁을 잘 먹는 거여. 그 점심은 일하는 중간이라. 그 점심 그렇게 잘 먹는 게 아니라고. 잠깐 요기만 하는 정도라, 중국 사람들 점심은, 본래.
아침을 잘 먹고 저녁을 잘 먹지. 그래, 마음의, ‘중심에 點(점)을 찍는다’는 뜻이라, 마음이 아니고. 중심, 하루의 중심, 정오, ‘하루의 중심에 點(점)을 찍는다’는 뜻에서 ‘점심’그렇게 한다고요. 근데 그게 이제 우연히 마음·‘心(심)’니까, 중심·‘心(심)’자도 되지만, 마음·‘心(심)’자도 되니까.
그래서 이제 잠깐 이제 떡을 사서 요기를 하려고 하는데 마침 떡을 파는 노파가 있었다. 노보살이 있었는데, 아, 노보살인데 떡 걸렸어.
‘스님 그 걸망에 뭘 그렇게 붓통같이 지고 다니냐?’
‘아 내가 이 금강경이라’고, ‘무슨 금강경 연구를 그렇게 하셔서 그러냐?’‘나 금강경이라면 박사라고. 박사를 받아도 수백 개 받을 정도라고.’이렇게 이제 그~ 자랑을 하는 거야.
아주 기개가 뛰어나고 아주 막 입을 벌리면은, 말할려고 입을 벌리면 입속이 그냥 큰~ 그냥 무슨 버지기에다가 피를 잔뜩 담아놓은 큰~ 버지기와 같다. 이런 표현을 했잖아요. 그 덕산 스님에게 대해서, 아주~ 그 아주 그릇이 남다른 그릇을 타고난 스님이라. 그러니까 막 그냥 기운이 펄펄 넘치고 기개가 그냥 하늘을 찌르고 하는 그런 스님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노파가 이제, 노보살이
‘아, 금강경이라면 내 궁금한 점이 있는데, 금강경 한 구절 내가 물어도 좋겠느냐? ’
‘아, 물어라. 금강경에 대해선 뭐든지 물어라’고. 그래,
‘금강경에 18품에 가면은‘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런 말이 있죠?’
‘아, 있고 말고지.’‘그런데 ‘點心(점심)’이라고 했으니 모두가 불가득이라는데, 과거· 현재· 미래 마음이 전부 불가득이라고 했는데,
-이걸 찾는다, 해도 좋아요. ‘얻을· 得(득)’자이지마는, ‘찾을 수 없다’, ‘찾는다’는 속에는 ‘득’자가 들어있고, 득 속에도 찾는다는 뜻이 들어있어요.-
그래, ‘ 어느 마음에다가 點(점)을 찍으렵니까?’
점찍을· 點(점)자니까.
그러니까 그만 꽉 막힌거야. 세상에 경전에 그런 질문은 없었거든.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어? 점을 찍는다면 이미 불가득인데...’
그래서 결국은 이제 떡도 못 사먹고 그 용담스님 있는 데로 가르쳐 준 거 아닙니까?
용담스님, 용담숭신(龍潭崇信)이라고.
그래, 이제 아직도 그~ 그냥 펄펄한 그 기가 그 노보살인데(에게) - 그 당시 떡 파는 노보살의 수준이 그 정도야. 그 정도라 구요. 당시 하~ 대단했어요. 중국 천지는.-
그래도 한 방망이 맞았지만 아, 타고난 그 기질을 어떻게 꺾을 수 있나요? 그래, 막 그냥 기가 펄펄 넘쳐 가지고 그건 뭐 노보살한테 한 방망이 맞은 건 어디 가버리고, 그대로 이제 용담스님에게 가면서 척~ 들어서면서 그냥 막 우레 같은 소리로 그냥
“용담에 왔는데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구나!”
담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냥 소리를 그냥 고래고래 치니까, 저기 법당 뒤에서 어떤 노스님이 턱 이렇게 나오면서
“그대야 말로 참으로 용담에 왔도다! 네가 못 보지마는, 용도 못보고, 담도 못보지마는 그야말로, 그대야 말로 진정으로 용담으로 왔다.”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거기 또 한 방망이 맞은 거야.
용이 있어야 뭐 꼭 용인가?
못이 있어야 꼭 못인가?
다~ 그 의미가 있는데 그 의미 모르고, 현상적인 것만 가지고 따지니까 그래서 이제 거기서 이제 그날 저녁에 용담스님인데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그야말로 그 밖에 나가보니까 캄캄해가지고 신을 찾으니까 도저히 신을 못 찾겠거든. 그래서 이제 용담스님이 촛불을 이제 붙여줬잖아요. 촛불을 붙여주니까 초를 들고 이렇게 막 신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용담스님이 그 불을 확~! 꺼버렸어. 촛불을 눈앞에 대고 이렇게 찾다가 불을 껐으니 얼마나 캄캄하겠어요? 그 순간.
불이 눈앞에 떡 꺼져버리면 캄~캄하거든요. 거기서 이제 덕산스님이 눈이 환~히 밝아졌다.
‘明(명)과 暗(암) ’ ‘밝음과 어둠의 관계’ 그것은 ‘煩惱(번뇌)와 菩提(보리)의 관계’죠. ‘眞心(진심)과 妄心(망심)의 관계’.
그래 이제 거기서 진정으로 참, 이 ‘번뇌와 보리의 문제’, 이것을 이제 환~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뭐, 一切通(일체통) 이죠.
그게 통하니까 일체가 통해.
저도 사실은, 옛날에 송광사에 그 참선하러 가가지고 그때 마침 이제 그 수선사에서는 3년 결사를 하고 있었고, 총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다음, 그 해 부턴가 그래.
나는 그 결사에 안 들어가고 문수전에 선방이었어요. 문수전에서 몇이, 수좌들 몇이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그때 뭐,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니까 문수전에 있는 사람이 그 옆에 관음전 법당을 맡아서 예불을 하고 법당관리를 했어.
내가 마침 관음전 副殿(부전)주5)을 하면서 문수전에서 참선을 할 때인데, 어느 날 이제 3시에 도량석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까 캄~캄해.
근데 그 항상 하던 일이라. 그냥 눈 감고 가나 눈 뜨고 가나, 워낙 캄캄하니까, 뭐 똑 같았어요. 그래 이제 뭐 대강 세수하고, 그 다음에 이제 몇 발자국 걸어가면 계단이 하나있고, 그 계단 올라가서 어느 방향으로 몇 도 쯤 이렇게 틀면, ‘몇 도’ 계산은 없어요. 그냥 몸에 익은 대로, 어느 정도 틀면은 이제 관음전 문이 나오고,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제 몇 도 방향으로 딱 틀면은 바로 그 성냥이 놓여진 그 자리에 몇 걸음 걸으면 도달한다, 이게 너무 익숙하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눈 감으나 뜨나 똑 같앴어.
그래 내가 딱 걸어가가지고 손을 이렇게 딱 뻗으니까, 몇 번 이렇게 하는데 성냥통이 딱 손에 잡혀. 그래서 성냥을 딱 키는 순간에, 여기에는 이제 밝았다가 어두워졌는데, 나는 어둡다가 밝아진 거야. 반대로.
그렇게 캄캄했는데 성냥불하나에, 온 법당이 환~하게 밝아졌어.
그래 내가 문을 꼭꼭 닫고 들어왔어. 그런데 어둠이 어디 나갈 틈이 없어. 그래서 내가 그 순간 ‘아! 이게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니구나!’
어디에도 나갈 틈이 없고 나간 적도 없고, 설사 문을 열고 나가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인데, 전혀 그런 시간도 없고.
그래서 진정으로 ‘밝음과 어두움은 둘이 아니구나’,‘하나구나!’
밝을 때도 그 법당이고, 어두울 때도 그 법당이야.
그 법당, 그 공간이라구요. 어두우나, 밝으나.
그 우리 ‘煩惱(번뇌)와 菩提(보리)’라고 하는 말을 그런데다 대입시켜서 이제 생각해 보면은 ‘번뇌 그 자체가 보리지, 번뇌 빼놓고 보리가 따로 없다.’
‘어둠 그대로가 밝음’이거든. 어디 물러가는 것도 없어요.
그 우리가 ‘번뇌’니 하는 것은 ‘허상’이라, ‘허상’!
‘번뇌’라고 하고, 무슨 뭐 ‘無明(무명)’이라고 하는 것 하고 이거 전~부 어디서 잘못 배워서 들은 허상에 불과한 거다.
잘못 배워가지고 우리 개념 속에 딱 자리 잡고 있는 거야.
그렇게 이미 굳어져 버린 입장에서, 그걸 털어버리기란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공부가 오히려 어떤 입장에서 보면은 플러스도 되지마는 마이너스도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아요.
그래, 육조스님[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같은 이들은 금강경 한 구절주6) 듣고는 마음이 순식간에 환~히 밝아졌으니 그런 이들에게는 본래 무식하고 들은 바도 없고 불교도 모르고 하니까 마음 밝히기는 아주 그만이에요, 그런 사람은.
그런 심성이, 마음을 밝히는데는 아주 조건이 좋아요. 지식이 많고, 아는 게 많고, 특히 불교교리 많이 알면은 이 마음 밝히기가 어쩌면 더 어려울지도 몰라.
또, 지극히 많이 알면은 이와 같이 덕산스님과 같이, 이런 계기에 마음이 또 환~히 밝아질 수도 있는 거죠.
밝아진다고 해서 뭐 어둠이 어디 물러가는 것도 아닌데, 그 어둡던 마음 그대로가 밝은 것인데, 거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거죠.
아무튼 뭐 여러 스님들도 다 금강경 강의하실 때 이 대목에 와서는 덕산스님과 용담스님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아주 각자가 겪은 듯이 아주 감동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요, 이 대목은, 이런 대목은.
金剛般若波羅密經(금강반야바라밀경)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八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鳩摩羅什) 한문 번역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八 一體同觀分 (十五, 斷諸佛不見諸法疑)
제십팔 일체동관분
제18. 한 몸으로 동일하게 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육안(肉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으십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천안(天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혜안(慧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안(法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으십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에 대해서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컨대 저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들, 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또 있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그 모든 항하강의 전체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것을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을 여래는 모두 다 아느니라.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왜냐하면 수보리여!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아라].주1)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 이라.[ 15.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주2)
夢中大作佛事(몽중대작불사)주3)
출처 永明延壽禪師(904~975)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 / 無比스님강설
[結頌(결송)] 萬善同歸中道頌(만선동귀중도송)
1. 菩提無發而發 2. 佛道無求而求
보리무발이발 불도무구이구
보리심을 발하되 발함이 없이 발해야하고 불도는 구함이 없이 구하며,
3. 妙用無行而行 4. 眞智無作而作
묘용무행이행 진지무작이작
묘한 작용도 행함이 없이 행하며, 참다운 지혜도 지음없이 지을 지니
5. 興悲悟其同體 6. 行慈深入無緣
흥비오기동체 행자심입무연
‘나와 한 몸’이라는 연민[悲心]을 일으키고
인연이 없는데 까지도 깊이 사랑하는 마음[慈心]을 행한다.
7. 無所捨而行檀 8. 無所持而具戒
무소사이행단 무소지이구계
베푸는 것 없이 베풀고 [보시]
가지는 바 없이 계를 갖추며 [지계]
9. 修進了無所起 10. 習忍達無所傷
수진료무소기 습인달무소상
정진을 닦되 일어나는바 없음을 알며[정진]
인욕을 익히되 상하는 바 없음을 통달한다.[인욕]
11. 般若悟境無生 12. 禪定知心無住
반야오경무생 선정지심무주
경계가 본래 生함이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지혜[반야]요
마음이 머물지 않음을 아는 것이 禪定(선정)이다.
13. 鑒無身而具相 14. 證無說而談詮
감무신이구상 증무설이담전
본래 몸이 없음을 비춰보며 상을 갖추며,
본래 설할 것이 없음[無說]을 증득하되 이치[詮]를 설파할 것이며
15. 建立水月道場 주2)16. 莊嚴性空世界
건립수월도량 장엄성공세계
물에 비친 달[청정도량, 空]처럼 도량을 건립하고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할지니라.
17. 羅列幻化供具 18. 供養影響如來
나열환화공구 공양영향여래
허공꽃과 같은 공양구로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며
19. 懺悔罪性本空 20. 勸請法身常住
참회죄성본공 권청법신상주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알고 참회하고
법신이 상주[영구불멸]함을 알며 권청을 드리되
21. 迴向了無所得 22. 隨喜福等眞如
회향료무소득 수희복등진여
끝내 얻을 바 없이 회향이요
진여 자체가 진정한 복임을 기뻐해주며
23. 讚歎彼我虛玄 24. 發願能所平等
찬탄피아허현 발원능소평등
너나 나나 궁극적으로 텅 비었음을 찬탄할지며
나(능·주관)나, 부처님(소· 객관) 궁극적으로 평등함을 발원할지니라.
25. 禮拜影現法會 26. 行道足躡虛空
예배영현법회 행도족섭허공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에 예배하며
발이 허공을 밟는 듯이 행도하며
27. 焚香妙達無生 28. 誦經深通實相
분향묘달무생 송경심통실상
향을 사르면서 無生의 도리를 묘하게 통달하고
경을 공부함은 실상을 깊이 통달하는 일이로다.
29. 散華顯諸無着 30. 彈指以表去塵
산화현제무착 탄지이표거진
꽃을 뿌리는 것[散華]은 집착 없는 도리요
탄지는 번뇌를 버리는 것
31. 施爲谷響度門 32. 修習空華萬行 주1)
시위곡향도문 수습공화만행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바라밀을 닦아야 되며[度門]
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으며
33. 深入緣生性海 34. 常遊如幻法門
심입연생성해 상유여환법문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되
환상과 같은 법문의 세계 노닐지니라.
35. 誓斷無染塵勞 36. 願生惟心淨土
서단무염진노 원생유심정토
물들 것이 없는 번뇌, 망상[塵勞]을 맹세코 끊으며
맹세코 惟心淨土(유심정토)에 나기를 원하고
37. 履踐實際理地 38. 出入無得觀門
이천실제이지 출입무득관문
얻음이 없는 관문을 드나들며[出入無得觀門] 진리의 땅을 밟네.[履踐實際理地]
39. 降伏鏡像魔軍 40. 大作夢中佛事 주3)
항복경상마군 대작몽중불사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받아
꿈 가운데 일이라 생각하며 크게 불사를 지으며
41. 廣度如化含識 42. 同證寂滅菩提
광도여화함식 동증적멸보리
꼭두각시와 같은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寂滅菩提를 같이 증득하여지이다.
무비스님 강설 http://cafe.daum.net/yumhwasil/8Gj2/14 중 일부
녹취 釋대원성 http://cafe.daum.net/yumhwasil/HsLO/38 중 일부 요점정리
덕산스님[德山宣鑑(덕산선감,782-865)선사]과 용담스님[龍潭崇信(용담숭신,? ~838)선사]의 이야기주4)
출처 無比스님 직지심경 238 /덕산선감 선사 1 /용담에는 용이 없다
德山宣鑑禪師가 初到龍潭하야 問호대 久嚮龍潭이러니 及乎到來하야는 潭又不見이며 龍又不顯이로다 潭云 子親到龍潭이니라 師가 作禮而退하니라
덕산선감 선사가 처음 용담에 이르러 물었다.
“오랫동안 용담을 부러워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못도 없고 용도 없도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친히 용담에 이르렀도다.” 덕산 선사가 예배를 하고 물러나왔다.
해설
덕산선감(德山宣鑑,782-865) 선사는 중국 당나라 검남(劍南) 출신인데 성은 주(周)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성상(性相)의 교학에 통달하여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였으므로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 하였다. 덕산 선사가 천하의 덕산 선사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유명하여 간략히 기록한다.
어느 날 중국의 남쪽지방에 선불교가 성행하여 교학을 무시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는 남방의 그와 같은 외도들을 쳐부수어 불교를 바로 세우리라는 용맹심을 일으켰다. 그동안 연구하여 기록한 금강경의 연구논소들을 한 걸망 짊어지고 떠났다. 여러 날을 걸려 남방의 어느 도시에 이르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저자를 지나다가 떡을 파는 노파를 발견하고 떡을 사서 점심을 때우리라 생각하였다. 떡을 파는 노파가 떡은 팔지 않고 덕산 선사가 지고 다니는 걸망을 물었다.
“스님은 걸망에 무엇을 지고 다닙니까?”
“예, 금강경과 연구논소들입니다.”
“그렇다면 금강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만약 대답을 하시면 떡을 팔고 대답을 못하시면 떡을 팔지 않겠습니다.”
“금강경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물으십시오.”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덕산 선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떡도 사먹지 못한 채 노파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훌륭한 선사가 있습니까?” “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용담 선사라는 분이 계시니 그분에게 가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직지>에서 소개한 두 선사의 만남과 유명한 대화가 역사에 남게 되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같이 용담숭신(龍潭崇信) 선사에게서 크게 깨닫고 예양(澧陽)에서 30년을 머물며 교화를 폈으며 당나라 무종(武宗)의 파불(破佛)의 난을 만나 독부산(獨浮山)의 석실(石室)에 들어가서 난을 피하였다. 그리고 뒷날 대중(大中) 연간에 불교가 부흥할 때 무릉태수(武陵太守)인 설연망(薛延望)의 부탁으로 덕산정사(德山精舍)에 들어가 종풍을 크게 떨쳤다. 시호는 견성대사(見聖大師)이다.
덕산 선사는 노파에게 자기가 가장 자신이 있는 금강경에 대하여 큰 망신을 당했으나 본래 타고난 기개가 워낙 뛰어난지라 용담 선사의 처소에 이르자마자 위에서 소개한 “오랫동안 용담을 흠모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못도 없고 용도 없도다.”라고 하면서 용담 선사가 안중에 없다는 듯 무시하여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법의 그릇과 기백이 이쯤은 되어야 하리라.
http://cafe.daum.net/yumhwasil/37df/364
출처 無比 스님 직지심경 239 /덕산선감 선사 2 /촛불을 불어 끄다
德山在龍潭하야 入室夜深이어늘 潭曰子且下去하라 師가 珍重하고 揭簾而出이라가 見外面이 黑하고 却回曰和尙이여 外面이 黑이니다 潭이 點紙燭度與라가 師가 才接에 潭이 便吹滅하니 師가 不覺失聲云호대 我가 自今已後로 更不疑天下老和尙舌頭로다하고 遂取疎鈔하야 於法堂前에 將一炬火하야 提起云호대 窮諸玄辯이라도 若一毫를 置於太虛요 竭世樞機라도 似一滴을 投於巨壑이라하고 將疎鈔云호대 畵餠이 不可充飢라하고 便燒하고 於是에 禮辭師하니라
덕산 선사가 용담 선사에게 가던 날 밤 용담 선사의 방에서 밤이 깊었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만 내려가 보게나.”
덕산 선사가 쉬려고 발을 걷고 나가다가 바깥을 보니 캄캄하였다. 돌아서서 말하였다. “화상이시여, 바깥이 캄캄합니다.”
용담 선사가 촛불을 켜서 건네주다가 덕산 선사가 막 촛불을 잡으려고 하는 찰나에 곧바로 촛불을 불어서 꺼버렸다.
덕산 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부터는 다시는 천하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노라.”라고 하고 드디어 금강경의 소초들을 가져서 법당 앞에 쌓아두고는 횃불을 높이 들고 크게 외쳤다.
“모든 현묘한 이치를 다 말하더라도 마치 터럭 하나를 저 허공에다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온갖 중요한 일을 다 하더라도 마치 물 한 방울을 큰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금강경소초를 들고 말하였다.
“그림의 떡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태워버렸다. 그리고 용담 선사에게 예배를 올리고 떠나버렸다.
해설
불교역사에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이 변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고 심지어 천지가 개벽하는 경험을 하였다. 덕산 선사의 경우는 불교사에 두고두고 거론되는 참으로 극적인 장면이다. 평생을 불교교학과 특히 금강경을 깊이 연구하여 금강경에 대한 연구논문인 소초가 무려 수 십 권이었다. 그토록 금강경에 심취하여 천하에 제일이라고 자부하였건만 노파의 한마디 질문을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하도 뛰어나서 부끄러움도 잠시 뿐 곧바로 용담 선사를 깔아뭉개듯 하는 언사를 거침없이 토한다. 그러다가 용담 선사의 촛불 한번 불어 끈 그 사실 앞에 그토록 자부하던 평생 공부가 다 무너져 내렸다. 아니 자신의 삶과 세상과 온 우주가 다 무너져 내려버린 것이다. 그러한 눈뜸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자신이 평생을 기울여 쌓은 연구논문을 일거에 불살라버린다. 참으로 천하의 덕산 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숨이 막히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른 기록에 용담 선사가 그를 표현한 말이 있다. “여기에 한 놈이 있다. 그의 이빨은 마치 칼을 세워 놓은 것과 같고 입은 마치 피를 담아놓은 항아리와 같다. 한 방으로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뒷날 높은 봉우리위에다 나의 도를 세우게 되리라[潭上堂云 可中有箇漢 牙如劍樹 口似血盆 一棒打不回頭 他時異日 向孤峰頂上 立吾道去在].”라고 하였다.
덕산 선사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알았을까? 밝은 방에서 다시 어두운 바깥을 보고, 그리고 다시 밝은 촛불 앞에서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단지 그것뿐인데.
http://cafe.daum.net/yumhwasil/37df/365
副殿(부전)주5)
스님 소임 호칭
회주(會主)스님-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모임을 대표, 이끌어 가는 큰 스님.
법주(法主)스님-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조실(祖室)스님-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되는 스님.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뜻함.
방장(方丈)스님- 총림(선원, 강원, 율원) 의 조실스님. 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도감(都監)스님-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직책이나 스님.
부전(副殿)스님-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 의식집전 하는 스님.
지전(知殿)스님- 전주(殿主)스님이라고도 하며, 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노전(盧殿)스님-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
주지(住持)스님-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원주(院主)스님-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감사(監寺), 감원(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강사(講師)스님-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 강백(講伯)스님이라고도 함.
칠직(七職)스님-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 기획, 호법, 총무, 재무, 교무, 사회 각 국장스님.
출처 및 참고
http://cafe.daum.net/geojeseoye/
http://blog.naver.com/venuslv/1233383
육조스님[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 금강경 한 구절주6)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금강경,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0분>
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대사가 解悟(해오)하신 금강경 구절
4강 3부(2011.11.21) 마침
第十八 一體同觀分
제십팔 일체동관분
第十八 一體同觀分 (十五, 斷諸佛不見諸法疑)
제십팔 일체동관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第十八 一體同觀分
제십팔 일체동관분
열여덟번째는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한 몸으로 같이 본다’, 이런 뜻인데 여기 이제 ‘五眼(오안)’에 대한, 여래의 ‘五眼(오안)’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五眼(오안)’은 사실은 뭐 굳이 낱낱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그, 그와 같은 ‘五眼(오안)’을 부처님은 다 갖추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모든 존재를 본다. 그걸 어떤 믿음을 주기 위해서, ‘五眼(오안)’을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을 주기 위해서, 물론 이제 뭐 안 믿을 리가 없지마는 그래도 더 강조하는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저 앞에 ‘ 如語者(여어자), 實語者(실어자), 不異語者(불이어자), 不誑語者(불광어자)’뭐 이런 이야기도 뭐, ‘나는 如語者(여어자)다’ 이렇게 해도 되는데 강조하는 그 의미가, 그런데서 잘 드러나죠.
<참고>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여! 여래는 참다운 말만 하는 사람이며,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말만 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며, 사실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제십사 이상적멸분)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3부 중 일부-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든지, 그 불교에는 좀 이제 힘주어서 설명해야할 대목, 그런데에는 그렇게 이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특별히 강조하고 그렇습니다.
여기,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肉眼不(유육안부)아, 여래가 肉眼(육안)이 있느냐?”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肉眼(유육안)이니이다, 여래께서 肉眼(육안)이 있습니다.”
또,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天眼不(유천안부)아, 여래가 天眼(천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天眼(유천안)이니이다, 여래가 天眼(천안)이 있습니다.”
천안이 있습니다.
肉眼(육안), 天眼(천안).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여래)가 有慧眼不(유혜안부)아, 여래가 慧眼(혜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慧眼(유혜안)이니이다, 여래가 慧眼(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부)아, 여래가 法眼(법안)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이다, 여래가 法眼(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이다,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제 부처님의 五眼(오안), 뭐, 肉眼(육안)은 뭐 다 가지고 있는 거죠.
물론 이제 天眼(천안)도 있습니다. 慧眼(혜안)도 당연히 있고요. 법을 보는 법의 눈[法眼(법안)]도 있고, 부처니까 당연히 부처의 눈[불안(佛眼)]도 있죠.
이런 대목에서 조사스님들은, 사람 사람들이 다~ 눈썹 밑에 눈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눈썹 밑에 있는 눈 하나가 그대로 ‘五眼(오안)’이지, 달리 무슨 눈이 있어서 그렇게 나누겠는가? 뭐, 이런 표현들도 하고 그렇습니다. 사람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참, 천차만별이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이제 공부를 하고 또 책도 읽고 남의 소리도 듣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갖고 있는, 뭐, 心眼(심안)이라고 할까요? 마음의 눈, 그 心眼(심안)속에는 불안(佛眼)도 포함되고, 法眼(법안)도 포함되고, 慧眼(혜안), 뭐 天眼(천안), 肉眼(육안)까지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심안이 자꾸 달라집니다. 차원이 달라지는 거죠. 그 이제, 견해가 달라진다, 이렇게도 이제 말할 수가 있고, 소견이 달라진다, 이렇게도 이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 뭡니까? 소견이니, 견해니, 뭐, 지혜니, 그런 뜻이죠.
아무튼 우리는 기회가 되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그 안목을 높여가야하고, 넓혀가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항하강에 있는 모래, 그 모래에 대해서 부처님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자기 이야기하시죠, 사실은. 항하강의 모래이야기 뭐, 금강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죠.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說是沙(설시사)니이다, 여래께서 이 모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하야,
저 앞에도 있었죠.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복습.
<참고>
第十一 無爲福勝分(제십일 무위복승분)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가 於意云何오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오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수보리여!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그렇게 많은 항하강이 있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의 수는 얼마나 많겠는가?”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어든 何況其沙리잇가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저 모든 항하강의 수만 하여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이겠습니까!”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七寶로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得福이 多不아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 다부
“수보리여!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만약 어떤 선남자,선녀인이 저 항하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가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언 심다 세존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하리라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선녀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 이 일의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第十一 無爲福勝分(제십일 무위복승분) 금강경 핵심 강좌 3강 1부 중 일부-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어든, 항하강에 있는,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 그 모래 숫자,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 모래 숫자와 똑같은 숫자의 항하강, 항하강이 있다고 하자.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가, 그 많고 많은 항하강의, 강에 있는 그 모래, 그 숫자 같은, 佛世界(불세계), 세계, 그냥, 佛世界(불세계)가 이와 같이 있다고 할 경우,
如是寧爲多不(여시영위다부)아, 얼마나 많음이 되겠는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이소국토중소유중생)의,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若干種心(약간종심)을,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을,
여기있는 ‘若干(약간)’이란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약간’하고 다릅니다.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노니, 여래가 다 안다.
이게 이제 앞에서 ‘五眼(오안)’을 든, 그 장황하게 다섯 가지 눈을 들었는데, 이 이야기할라고 그래요. 여래는 그렇게 ‘五眼(오안)’을 갖출 정도로 뛰어난 분이다,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五眼(오안)’으로써, 그 많고 많은 중생들, 그 많고 많은 국토에 있는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항하강, 그 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그런 그 국토, 거기에 있는 또 중생들. 또 한 중생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마음이 또 있잖아요. 그런 많고 많은 종류의 마음!
그렇습니다. 이 마음, 이 ‘若干種心(약간종심)’이라는 것은, 그~ 많고 많은 국토, 거기에 있는 무~수한 중생들, 한 중생에게도 무수한 마음이 오고가고 하는데 그 마음까지, 如來(여래)가 悉知(실지)하노니, 오안을 갖춘 입장에서, 이런 말이죠.
실지하노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何以故(하이고)오, 왜냐하면,
어째서 그렇게 여래가 잘 아느냐 말이야. 그 많고 많은 중생들의 그 많고 많은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이 하루 끝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데. 간단하다 이거예요.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如來(여래)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 역시 ‘즉비’입니다.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是名爲心(시명위심), 다 마음이 아니라, 이 이름이 마음이다.
그 마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 텅~ 비어. 非心(비심)이야. 非心(비심)이면서 또 是名爲心(시명위심)이야.
뭐, 우리 흔히 쓰는 말로 진공이면서 묘유야. 묘유이면서 진공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없는 것이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이고.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그래서 거기서 이제 결국은 ‘中道正見(중도정견)’, 모든 사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까지도, 마음의 문제까지도 사실은 그 존재 형식은 중도적으로 존재한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존재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곧 균형입니다. 중도라고 하는 것은 균형을 말하는 겁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조화를 말하는 것이고. 있음과 없음이 균형이 맞아야 돼. 우리가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또 있음과 없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돼. 우리가 불상, 그 부처님이여. 틀림없이 부처님이야. 그렇지만 꼭 부처님이라고만 꼭 고집하면은 그건 또 문제가 생겨.
그래서 거기에 대한 균형, 균형 감각이 있어야 돼, 사람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러면서 다 수용하는, 이게 중도입니다. 중도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균형 감각이고, 조화예요, 조화.
중노릇도 해야 되고 사람노릇도 해야 돼. 이것도 또한 중에 치우쳐도 안 되고 사람에 치우쳐도 안 돼. 또 중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어. 이게 균형 감각이야. 조화라고. 옛말로 하면 중도야 중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또 무엇도 다 부정할 수도 있어야 돼. 중도 부정하고 사람도 부정해.
사람도 긍정하고 중도 긍정한다. 우리의 삶은 그래요.
그래서 중도 이치를 제일 잘 표현했다고, 뭐, 성철스님은 평소에 ‘中道狂(중도광)’, 중도란 말을 하도 많이 써서 ‘중도광’이라고 할 정도로 중도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제가 보기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께서 말씀하신 그 중도가 제일 아주 내 마음에 딱 들고, 제대로 중도를 설명할 줄 아는 분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런 점이 예를 들어서, ‘空華萬行(공화만행)’,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아라].주1) 허공 꽃이라면 육도만행을 닦을 게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알고 열~심히 닦아야 된다.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 이라.[ 15.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주2)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은 그런 도량을 열~심히 건립해야된다. 열심히 건립하되 또한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이 그런 영상인 것으로, 환영인 것으로 알고 건립해야 된다. 건립, 그렇게 알고, 그렇게 알고 열심히 건립하는 거예요.
이게 건립수월도량이야.
夢中大作佛事(몽중대작불사)주3), 이런 말도 있어요. 꿈속에서 불사를 대작해야 돼. 크~게 대작불사를 일으켜야된다. 꿈속에서 대작불사를 일으켜봐야 뭐요, 허망한 거라.
그렇게 허망한 것인 줄 알고 열심히 대작불사를 해야 한다. 참~! 기가 막힌 표현이야. 그게 중도야.
중도적인 안목으로 뭐, 우리 육바라밀이라든지 일상에 우리 불교적으로 행해지는 온갖 것들이, 중생을 제도하는 문제라든지, 수행하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그야말로 참, 가장 잘 중도적 견해를 잘 표현했다, 이렇게 저는 평소에도 믿고 있습니다.
여기 이제 마음이라고 하는 것[是名爲心(시명위심), 이 이름이 마음이다.], 여기는, 왜 다른 대목에는 그냥 뭐 ‘즉비’라고 하는 그런 표현으로 간단하게 했으면서, 여기는 왜 ‘五眼(오안)’을 앞에다 두고 그런 그 조건을 내걸고,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이렇게 했느냐?
뭐니 뭐니해도 불교에서는 이 마음이 참, 무게가 있는 용어야. 아주 무게가 있는 용어라구요. 마음· 心(심)자, 이거 무시못합니다.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상당히 신중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마음을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 라고 할 때는 뭘 지가 뭘 알고 하느냐, 아 감히 말이야, 마음의 문제를 갖다가 그렇게 말해? 다른 것 뭐 32상이나 80종호니 무슨 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 거라든지, 미진이라든지, 세계라든지 그런 건 뭐 그렇다 손치자. 마음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五眼(오안)’을, 오안을 열거한 거야.
여래는 이와 같이 오안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문제를 내가 이렇게 단호히, 단호하게 내가 말한다 말이야.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다.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왜냐하면 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니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런 대목에 오면 으레이 우리, 예를 든 그런 어떤 사연이 있는 구절이죠.
소위 그 덕산스님[德山宣鑑(덕산선감,782-865) 선사]과 용담스님[龍潭崇信(용담숭신,? ~838) 선사]의 이야기주4), 평생, 금강경을 열~심히 연구해가지고 소초[금강경강해 청룡소초(靑龍疏鈔)]가 그냥 논문이, 연구논문이 그냥 한 걸망이야. 요렇게 짧은 경전인데, 연구 논문이 그냥 한 걸망이야. 그래서 성이 ‘周(주)’씨라. 별명이 ‘周金剛(주금강)’이라.
‘저 사람은 그저 입만 뗐다하면 ‘금강경’, ‘금강경’하니까 우리가‘周金剛(주금강)’이라고 부르자.’이랬죠.
그런데 뭐 어느 저 남방에 무슨 선법이 있어가지고 일체 경을 막 무시하는 그런 외도가 있다는데 이걸 내가 한번 가서 깨부숴야지, 이런 그 마음을 먹고, 이제 남방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에, 잘 아시다시피 시장기가 동해가지고 시장에서 어떤 노파를 만나서 잠깐 이제 요기를 하고 갈라고 그게 ‘點心(점심)’이야.
아침, 저녁을 잘 먹는 거여. 그 점심은 일하는 중간이라. 그 점심 그렇게 잘 먹는 게 아니라고. 잠깐 요기만 하는 정도라, 중국 사람들 점심은, 본래.
아침을 잘 먹고 저녁을 잘 먹지. 그래, 마음의, ‘중심에 點(점)을 찍는다’는 뜻이라, 마음이 아니고. 중심, 하루의 중심, 정오, ‘하루의 중심에 點(점)을 찍는다’는 뜻에서 ‘점심’그렇게 한다고요. 근데 그게 이제 우연히 마음·‘心(심)’니까, 중심·‘心(심)’자도 되지만, 마음·‘心(심)’자도 되니까.
그래서 이제 잠깐 이제 떡을 사서 요기를 하려고 하는데 마침 떡을 파는 노파가 있었다. 노보살이 있었는데, 아, 노보살인데 떡 걸렸어.
‘스님 그 걸망에 뭘 그렇게 붓통같이 지고 다니냐?’
‘아 내가 이 금강경이라’고, ‘무슨 금강경 연구를 그렇게 하셔서 그러냐?’‘나 금강경이라면 박사라고. 박사를 받아도 수백 개 받을 정도라고.’이렇게 이제 그~ 자랑을 하는 거야.
아주 기개가 뛰어나고 아주 막 입을 벌리면은, 말할려고 입을 벌리면 입속이 그냥 큰~ 그냥 무슨 버지기에다가 피를 잔뜩 담아놓은 큰~ 버지기와 같다. 이런 표현을 했잖아요. 그 덕산 스님에게 대해서, 아주~ 그 아주 그릇이 남다른 그릇을 타고난 스님이라. 그러니까 막 그냥 기운이 펄펄 넘치고 기개가 그냥 하늘을 찌르고 하는 그런 스님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노파가 이제, 노보살이
‘아, 금강경이라면 내 궁금한 점이 있는데, 금강경 한 구절 내가 물어도 좋겠느냐? ’
‘아, 물어라. 금강경에 대해선 뭐든지 물어라’고. 그래,
‘금강경에 18품에 가면은‘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런 말이 있죠?’
‘아, 있고 말고지.’‘그런데 ‘點心(점심)’이라고 했으니 모두가 불가득이라는데, 과거· 현재· 미래 마음이 전부 불가득이라고 했는데,
-이걸 찾는다, 해도 좋아요. ‘얻을· 得(득)’자이지마는, ‘찾을 수 없다’, ‘찾는다’는 속에는 ‘득’자가 들어있고, 득 속에도 찾는다는 뜻이 들어있어요.-
그래, ‘ 어느 마음에다가 點(점)을 찍으렵니까?’
점찍을· 點(점)자니까.
그러니까 그만 꽉 막힌거야. 세상에 경전에 그런 질문은 없었거든.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어? 점을 찍는다면 이미 불가득인데...’
그래서 결국은 이제 떡도 못 사먹고 그 용담스님 있는 데로 가르쳐 준 거 아닙니까?
용담스님, 용담숭신(龍潭崇信)이라고.
그래, 이제 아직도 그~ 그냥 펄펄한 그 기가 그 노보살인데(에게) - 그 당시 떡 파는 노보살의 수준이 그 정도야. 그 정도라 구요. 당시 하~ 대단했어요. 중국 천지는.-
그래도 한 방망이 맞았지만 아, 타고난 그 기질을 어떻게 꺾을 수 있나요? 그래, 막 그냥 기가 펄펄 넘쳐 가지고 그건 뭐 노보살한테 한 방망이 맞은 건 어디 가버리고, 그대로 이제 용담스님에게 가면서 척~ 들어서면서 그냥 막 우레 같은 소리로 그냥
“용담에 왔는데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구나!”
담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냥 소리를 그냥 고래고래 치니까, 저기 법당 뒤에서 어떤 노스님이 턱 이렇게 나오면서
“그대야 말로 참으로 용담에 왔도다! 네가 못 보지마는, 용도 못보고, 담도 못보지마는 그야말로, 그대야 말로 진정으로 용담으로 왔다.”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거기 또 한 방망이 맞은 거야.
용이 있어야 뭐 꼭 용인가?
못이 있어야 꼭 못인가?
다~ 그 의미가 있는데 그 의미 모르고, 현상적인 것만 가지고 따지니까 그래서 이제 거기서 이제 그날 저녁에 용담스님인데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그야말로 그 밖에 나가보니까 캄캄해가지고 신을 찾으니까 도저히 신을 못 찾겠거든. 그래서 이제 용담스님이 촛불을 이제 붙여줬잖아요. 촛불을 붙여주니까 초를 들고 이렇게 막 신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용담스님이 그 불을 확~! 꺼버렸어. 촛불을 눈앞에 대고 이렇게 찾다가 불을 껐으니 얼마나 캄캄하겠어요? 그 순간.
불이 눈앞에 떡 꺼져버리면 캄~캄하거든요. 거기서 이제 덕산스님이 눈이 환~히 밝아졌다.
‘明(명)과 暗(암) ’ ‘밝음과 어둠의 관계’ 그것은 ‘煩惱(번뇌)와 菩提(보리)의 관계’죠. ‘眞心(진심)과 妄心(망심)의 관계’.
그래 이제 거기서 진정으로 참, 이 ‘번뇌와 보리의 문제’, 이것을 이제 환~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뭐, 一切通(일체통) 이죠.
그게 통하니까 일체가 통해.
저도 사실은, 옛날에 송광사에 그 참선하러 가가지고 그때 마침 이제 그 수선사에서는 3년 결사를 하고 있었고, 총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다음, 그 해 부턴가 그래.
나는 그 결사에 안 들어가고 문수전에 선방이었어요. 문수전에서 몇이, 수좌들 몇이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그때 뭐,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니까 문수전에 있는 사람이 그 옆에 관음전 법당을 맡아서 예불을 하고 법당관리를 했어.
내가 마침 관음전 副殿(부전)주5)을 하면서 문수전에서 참선을 할 때인데, 어느 날 이제 3시에 도량석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까 캄~캄해.
근데 그 항상 하던 일이라. 그냥 눈 감고 가나 눈 뜨고 가나, 워낙 캄캄하니까, 뭐 똑 같았어요. 그래 이제 뭐 대강 세수하고, 그 다음에 이제 몇 발자국 걸어가면 계단이 하나있고, 그 계단 올라가서 어느 방향으로 몇 도 쯤 이렇게 틀면, ‘몇 도’ 계산은 없어요. 그냥 몸에 익은 대로, 어느 정도 틀면은 이제 관음전 문이 나오고,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제 몇 도 방향으로 딱 틀면은 바로 그 성냥이 놓여진 그 자리에 몇 걸음 걸으면 도달한다, 이게 너무 익숙하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눈 감으나 뜨나 똑 같앴어.
그래 내가 딱 걸어가가지고 손을 이렇게 딱 뻗으니까, 몇 번 이렇게 하는데 성냥통이 딱 손에 잡혀. 그래서 성냥을 딱 키는 순간에, 여기에는 이제 밝았다가 어두워졌는데, 나는 어둡다가 밝아진 거야. 반대로.
그렇게 캄캄했는데 성냥불하나에, 온 법당이 환~하게 밝아졌어.
그래 내가 문을 꼭꼭 닫고 들어왔어. 그런데 어둠이 어디 나갈 틈이 없어. 그래서 내가 그 순간 ‘아! 이게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니구나!’
어디에도 나갈 틈이 없고 나간 적도 없고, 설사 문을 열고 나가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인데, 전혀 그런 시간도 없고.
그래서 진정으로 ‘밝음과 어두움은 둘이 아니구나’,‘하나구나!’
밝을 때도 그 법당이고, 어두울 때도 그 법당이야.
그 법당, 그 공간이라구요. 어두우나, 밝으나.
그 우리 ‘煩惱(번뇌)와 菩提(보리)’라고 하는 말을 그런데다 대입시켜서 이제 생각해 보면은 ‘번뇌 그 자체가 보리지, 번뇌 빼놓고 보리가 따로 없다.’
‘어둠 그대로가 밝음’이거든. 어디 물러가는 것도 없어요.
그 우리가 ‘번뇌’니 하는 것은 ‘허상’이라, ‘허상’!
‘번뇌’라고 하고, 무슨 뭐 ‘無明(무명)’이라고 하는 것 하고 이거 전~부 어디서 잘못 배워서 들은 허상에 불과한 거다.
잘못 배워가지고 우리 개념 속에 딱 자리 잡고 있는 거야.
그렇게 이미 굳어져 버린 입장에서, 그걸 털어버리기란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공부가 오히려 어떤 입장에서 보면은 플러스도 되지마는 마이너스도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아요.
그래, 육조스님[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같은 이들은 금강경 한 구절주6) 듣고는 마음이 순식간에 환~히 밝아졌으니 그런 이들에게는 본래 무식하고 들은 바도 없고 불교도 모르고 하니까 마음 밝히기는 아주 그만이에요, 그런 사람은.
그런 심성이, 마음을 밝히는데는 아주 조건이 좋아요. 지식이 많고, 아는 게 많고, 특히 불교교리 많이 알면은 이 마음 밝히기가 어쩌면 더 어려울지도 몰라.
또, 지극히 많이 알면은 이와 같이 덕산스님과 같이, 이런 계기에 마음이 또 환~히 밝아질 수도 있는 거죠.
밝아진다고 해서 뭐 어둠이 어디 물러가는 것도 아닌데, 그 어둡던 마음 그대로가 밝은 것인데, 거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거죠.
아무튼 뭐 여러 스님들도 다 금강경 강의하실 때 이 대목에 와서는 덕산스님과 용담스님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아주 각자가 겪은 듯이 아주 감동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요, 이 대목은, 이런 대목은.
金剛般若波羅密經(금강반야바라밀경)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八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鳩摩羅什) 한문 번역
무비[如天無比]스님 한글 번역
第十八 一體同觀分 (十五, 斷諸佛不見諸法疑)
제십팔 일체동관분
제18. 한 몸으로 동일하게 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육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육안(肉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육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으십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천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천안(天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천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혜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혜안(慧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유혜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법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안(法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불안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으십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에 대해서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는가?”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여시 세존 여래 설시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컨대 저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들, 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또 있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그 모든 항하강의 전체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것을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甚多니이다 世尊하
심다 세존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을 여래는 모두 다 아느니라.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왜냐하면 수보리여!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아라].주1)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 이라.[ 15.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주2)
夢中大作佛事(몽중대작불사)주3)
출처 永明延壽禪師(904~975)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 / 無比스님강설
[結頌(결송)] 萬善同歸中道頌(만선동귀중도송)
1. 菩提無發而發 2. 佛道無求而求
보리무발이발 불도무구이구
보리심을 발하되 발함이 없이 발해야하고 불도는 구함이 없이 구하며,
3. 妙用無行而行 4. 眞智無作而作
묘용무행이행 진지무작이작
묘한 작용도 행함이 없이 행하며, 참다운 지혜도 지음없이 지을 지니
5. 興悲悟其同體 6. 行慈深入無緣
흥비오기동체 행자심입무연
‘나와 한 몸’이라는 연민[悲心]을 일으키고
인연이 없는데 까지도 깊이 사랑하는 마음[慈心]을 행한다.
7. 無所捨而行檀 8. 無所持而具戒
무소사이행단 무소지이구계
베푸는 것 없이 베풀고 [보시]
가지는 바 없이 계를 갖추며 [지계]
9. 修進了無所起 10. 習忍達無所傷
수진료무소기 습인달무소상
정진을 닦되 일어나는바 없음을 알며[정진]
인욕을 익히되 상하는 바 없음을 통달한다.[인욕]
11. 般若悟境無生 12. 禪定知心無住
반야오경무생 선정지심무주
경계가 본래 生함이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지혜[반야]요
마음이 머물지 않음을 아는 것이 禪定(선정)이다.
13. 鑒無身而具相 14. 證無說而談詮
감무신이구상 증무설이담전
본래 몸이 없음을 비춰보며 상을 갖추며,
본래 설할 것이 없음[無說]을 증득하되 이치[詮]를 설파할 것이며
15. 建立水月道場 주2)16. 莊嚴性空世界
건립수월도량 장엄성공세계
물에 비친 달[청정도량, 空]처럼 도량을 건립하고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할지니라.
17. 羅列幻化供具 18. 供養影響如來
나열환화공구 공양영향여래
허공꽃과 같은 공양구로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며
19. 懺悔罪性本空 20. 勸請法身常住
참회죄성본공 권청법신상주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알고 참회하고
법신이 상주[영구불멸]함을 알며 권청을 드리되
21. 迴向了無所得 22. 隨喜福等眞如
회향료무소득 수희복등진여
끝내 얻을 바 없이 회향이요
진여 자체가 진정한 복임을 기뻐해주며
23. 讚歎彼我虛玄 24. 發願能所平等
찬탄피아허현 발원능소평등
너나 나나 궁극적으로 텅 비었음을 찬탄할지며
나(능·주관)나, 부처님(소· 객관) 궁극적으로 평등함을 발원할지니라.
25. 禮拜影現法會 26. 行道足躡虛空
예배영현법회 행도족섭허공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에 예배하며
발이 허공을 밟는 듯이 행도하며
27. 焚香妙達無生 28. 誦經深通實相
분향묘달무생 송경심통실상
향을 사르면서 無生의 도리를 묘하게 통달하고
경을 공부함은 실상을 깊이 통달하는 일이로다.
29. 散華顯諸無着 30. 彈指以表去塵
산화현제무착 탄지이표거진
꽃을 뿌리는 것[散華]은 집착 없는 도리요
탄지는 번뇌를 버리는 것
31. 施爲谷響度門 32. 修習空華萬行 주1)
시위곡향도문 수습공화만행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바라밀을 닦아야 되며[度門]
헛꽃으로 알고 온갖 만행을 닦으며
33. 深入緣生性海 34. 常遊如幻法門
심입연생성해 상유여환법문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되
환상과 같은 법문의 세계 노닐지니라.
35. 誓斷無染塵勞 36. 願生惟心淨土
서단무염진노 원생유심정토
물들 것이 없는 번뇌, 망상[塵勞]을 맹세코 끊으며
맹세코 惟心淨土(유심정토)에 나기를 원하고
37. 履踐實際理地 38. 出入無得觀門
이천실제이지 출입무득관문
얻음이 없는 관문을 드나들며[出入無得觀門] 진리의 땅을 밟네.[履踐實際理地]
39. 降伏鏡像魔軍 40. 大作夢中佛事 주3)
항복경상마군 대작몽중불사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받아
꿈 가운데 일이라 생각하며 크게 불사를 지으며
41. 廣度如化含識 42. 同證寂滅菩提
광도여화함식 동증적멸보리
꼭두각시와 같은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寂滅菩提를 같이 증득하여지이다.
무비스님 강설 http://cafe.daum.net/yumhwasil/8Gj2/14 중 일부
녹취 釋대원성 http://cafe.daum.net/yumhwasil/HsLO/38 중 일부 요점정리
덕산스님[德山宣鑑(덕산선감,782-865)선사]과 용담스님[龍潭崇信(용담숭신,? ~838)선사]의 이야기주4)
출처 無比스님 직지심경 238 /덕산선감 선사 1 /용담에는 용이 없다
德山宣鑑禪師가 初到龍潭하야 問호대 久嚮龍潭이러니 及乎到來하야는 潭又不見이며 龍又不顯이로다 潭云 子親到龍潭이니라 師가 作禮而退하니라
덕산선감 선사가 처음 용담에 이르러 물었다.
“오랫동안 용담을 부러워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못도 없고 용도 없도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친히 용담에 이르렀도다.” 덕산 선사가 예배를 하고 물러나왔다.
해설
덕산선감(德山宣鑑,782-865) 선사는 중국 당나라 검남(劍南) 출신인데 성은 주(周)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성상(性相)의 교학에 통달하여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였으므로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 하였다. 덕산 선사가 천하의 덕산 선사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유명하여 간략히 기록한다.
어느 날 중국의 남쪽지방에 선불교가 성행하여 교학을 무시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는 남방의 그와 같은 외도들을 쳐부수어 불교를 바로 세우리라는 용맹심을 일으켰다. 그동안 연구하여 기록한 금강경의 연구논소들을 한 걸망 짊어지고 떠났다. 여러 날을 걸려 남방의 어느 도시에 이르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저자를 지나다가 떡을 파는 노파를 발견하고 떡을 사서 점심을 때우리라 생각하였다. 떡을 파는 노파가 떡은 팔지 않고 덕산 선사가 지고 다니는 걸망을 물었다.
“스님은 걸망에 무엇을 지고 다닙니까?”
“예, 금강경과 연구논소들입니다.”
“그렇다면 금강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만약 대답을 하시면 떡을 팔고 대답을 못하시면 떡을 팔지 않겠습니다.”
“금강경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물으십시오.”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덕산 선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떡도 사먹지 못한 채 노파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훌륭한 선사가 있습니까?” “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용담 선사라는 분이 계시니 그분에게 가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직지>에서 소개한 두 선사의 만남과 유명한 대화가 역사에 남게 되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같이 용담숭신(龍潭崇信) 선사에게서 크게 깨닫고 예양(澧陽)에서 30년을 머물며 교화를 폈으며 당나라 무종(武宗)의 파불(破佛)의 난을 만나 독부산(獨浮山)의 석실(石室)에 들어가서 난을 피하였다. 그리고 뒷날 대중(大中) 연간에 불교가 부흥할 때 무릉태수(武陵太守)인 설연망(薛延望)의 부탁으로 덕산정사(德山精舍)에 들어가 종풍을 크게 떨쳤다. 시호는 견성대사(見聖大師)이다.
덕산 선사는 노파에게 자기가 가장 자신이 있는 금강경에 대하여 큰 망신을 당했으나 본래 타고난 기개가 워낙 뛰어난지라 용담 선사의 처소에 이르자마자 위에서 소개한 “오랫동안 용담을 흠모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못도 없고 용도 없도다.”라고 하면서 용담 선사가 안중에 없다는 듯 무시하여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법의 그릇과 기백이 이쯤은 되어야 하리라.
http://cafe.daum.net/yumhwasil/37df/364
출처 無比 스님 직지심경 239 /덕산선감 선사 2 /촛불을 불어 끄다
德山在龍潭하야 入室夜深이어늘 潭曰子且下去하라 師가 珍重하고 揭簾而出이라가 見外面이 黑하고 却回曰和尙이여 外面이 黑이니다 潭이 點紙燭度與라가 師가 才接에 潭이 便吹滅하니 師가 不覺失聲云호대 我가 自今已後로 更不疑天下老和尙舌頭로다하고 遂取疎鈔하야 於法堂前에 將一炬火하야 提起云호대 窮諸玄辯이라도 若一毫를 置於太虛요 竭世樞機라도 似一滴을 投於巨壑이라하고 將疎鈔云호대 畵餠이 不可充飢라하고 便燒하고 於是에 禮辭師하니라
덕산 선사가 용담 선사에게 가던 날 밤 용담 선사의 방에서 밤이 깊었다.
용담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만 내려가 보게나.”
덕산 선사가 쉬려고 발을 걷고 나가다가 바깥을 보니 캄캄하였다. 돌아서서 말하였다. “화상이시여, 바깥이 캄캄합니다.”
용담 선사가 촛불을 켜서 건네주다가 덕산 선사가 막 촛불을 잡으려고 하는 찰나에 곧바로 촛불을 불어서 꺼버렸다.
덕산 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부터는 다시는 천하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노라.”라고 하고 드디어 금강경의 소초들을 가져서 법당 앞에 쌓아두고는 횃불을 높이 들고 크게 외쳤다.
“모든 현묘한 이치를 다 말하더라도 마치 터럭 하나를 저 허공에다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온갖 중요한 일을 다 하더라도 마치 물 한 방울을 큰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금강경소초를 들고 말하였다.
“그림의 떡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태워버렸다. 그리고 용담 선사에게 예배를 올리고 떠나버렸다.
해설
불교역사에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이 변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고 심지어 천지가 개벽하는 경험을 하였다. 덕산 선사의 경우는 불교사에 두고두고 거론되는 참으로 극적인 장면이다. 평생을 불교교학과 특히 금강경을 깊이 연구하여 금강경에 대한 연구논문인 소초가 무려 수 십 권이었다. 그토록 금강경에 심취하여 천하에 제일이라고 자부하였건만 노파의 한마디 질문을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하도 뛰어나서 부끄러움도 잠시 뿐 곧바로 용담 선사를 깔아뭉개듯 하는 언사를 거침없이 토한다. 그러다가 용담 선사의 촛불 한번 불어 끈 그 사실 앞에 그토록 자부하던 평생 공부가 다 무너져 내렸다. 아니 자신의 삶과 세상과 온 우주가 다 무너져 내려버린 것이다. 그러한 눈뜸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자신이 평생을 기울여 쌓은 연구논문을 일거에 불살라버린다. 참으로 천하의 덕산 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숨이 막히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른 기록에 용담 선사가 그를 표현한 말이 있다. “여기에 한 놈이 있다. 그의 이빨은 마치 칼을 세워 놓은 것과 같고 입은 마치 피를 담아놓은 항아리와 같다. 한 방으로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뒷날 높은 봉우리위에다 나의 도를 세우게 되리라[潭上堂云 可中有箇漢 牙如劍樹 口似血盆 一棒打不回頭 他時異日 向孤峰頂上 立吾道去在].”라고 하였다.
덕산 선사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알았을까? 밝은 방에서 다시 어두운 바깥을 보고, 그리고 다시 밝은 촛불 앞에서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단지 그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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副殿(부전)주5)
스님 소임 호칭
회주(會主)스님-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모임을 대표, 이끌어 가는 큰 스님.
법주(法主)스님-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조실(祖室)스님-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되는 스님.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뜻함.
방장(方丈)스님- 총림(선원, 강원, 율원) 의 조실스님. 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도감(都監)스님-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직책이나 스님.
부전(副殿)스님-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 의식집전 하는 스님.
지전(知殿)스님- 전주(殿主)스님이라고도 하며, 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노전(盧殿)스님-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
주지(住持)스님-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원주(院主)스님-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감사(監寺), 감원(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강사(講師)스님-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 강백(講伯)스님이라고도 함.
칠직(七職)스님-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 기획, 호법, 총무, 재무, 교무, 사회 각 국장스님.
출처 및 참고
http://cafe.daum.net/geojeseoye/
http://blog.naver.com/venuslv/1233383
육조스님[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 금강경 한 구절주6)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금강경,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0분>
六祖慧能(육조 혜능,638~713)대사가 解悟(해오)하신 금강경 구절
4강 3부(2011.11.21) 마침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