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일 설교 2024년 4월 28일
요한 15:1-8. 1요한 4:7-21
사랑과 생명은 서로의 신뢰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 빛, 양의 문, 착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등으로 천명하십니다. 나는 000이다를 에고 에이미 즉 ‘자기 계시 정식’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정체를 밝힌 이미지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생명의 원천(1:4, 6:57)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이야말로 이 생명이 넘쳐흐르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5:21, 24, 25)
오늘 복음 첫머리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활동의 원천은 곧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들은 가지”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그리스도 신앙인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과 절대로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이 끊어진 후의 삶은 너무도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들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이 비단 신앙을 잘 유지하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15:4)
우리가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도 우리 안에 함께 사신다는 약속입니다. 즉 상호신뢰와 상관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과 신앙인의 삶은 이렇게 주님과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과 활동에서 유지되고 발전되며 성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한 존재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상호 교통하는 사랑 그리고 신뢰,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 신앙인의 자세에 대한 근거가 2 독서로 들은 요한의 첫째 편지에 있습니다.
상호신뢰와 사랑의 출발점은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요한 4:10)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으로 그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생명을 잘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달려 있는 것 즉 그리스도의 삶을 내 안에 늘 살아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을 ‘칼’로 비유합니다. (히브 4:12, 묵시 19:15) 농부이신 하느님은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 즉 제자들은 그 칼로 잘 가꾸시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칼’은 우리의 부족한 것을 도려 낼수도 있고, 아픔과 고통을 잘라내서 새 가지가 돋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은 무엇이고 잘라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생명을 주시고 우리 생활의 근원이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우선이요, 그 앎을 고백으로 그리고 실천으로 옮기도록 우리를 이끄시고 다듬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진리의 말씀 가운데 살도록 있는 힘을 다해 그분에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과도 같은 가르침과 약속을 우리가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함께 묵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다(왜)는 사실을 고백해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어떻게) 라는 고백이 이어서 나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왜’와 ‘어떻게’를 혼동하거나 순서를 바꾸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칙과 당위가 있고 난 뒤에 방법이 나와야 하는데 우리 시대는 너무 ‘어떻게’만을 강조하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오늘 ‘왜’라는 질문의 본질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리고 ‘어떻게’만 강조하다 보면 프로그램 중심, 눈에 보이는 실적 중심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잊는다면,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단단히 설 수도 없고 온통 흩어져 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가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기도로 우리 존재의 이유를 묻고 삶의 방향과 마음가짐을 늘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우리에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인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고 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건축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줄곧 우리는 선교의 비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왜’가 빠지고 ‘어떻게’만 논의되었다면 오늘의 이런 기대와 흥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선교와 사목도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리면 프로그램 중심의 사고만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리라는 확신이 곧 소명입니다. 자신에 대한 부르심과 소명을 잊고 어떻게만 생각한다면 그 결과는 오늘 복음의 말미와 같이 참담할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의 원천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존재하듯이, 하느님도 우리가 있기에 사랑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 신뢰하는 존재임을 고백합시다.
사랑과 생명은 곧 하느님과 우리 간의 신뢰에 있음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