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케이트의 기원
중세 시대 장원을 중심으로 영주와 농노는 계약을 맺고 살았다. 농노는 장원을 떠날 수 없었고, 영주가 직접 경영하는 땅의 농사를 지어 줘야 했다. 농노는 방앗간 등 장원 시설에 대한 사용료와 결혼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도 영주에게 냈습니다. 다리를 지나갈 때도 톨tall 이라는 통행료를 냈는데, 이것은 오늘날 톨케이트에서 내는 요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87~88쪽)
독일의 축구 선수 토마스 뮐러
오늘날 서양인의 성 중에는 직업에서 유래한 것이 더러 있습니다. 뮐러는 방앗간 주인에서 유래한 말입니다.(88쪽)
식탁 식사의 기원
중세 식생활에서는 게르만족이 들어오면서부터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방식이 보급되었습니다.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던 고대 로마 습관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88쪽)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세의 많은 것
중세에는 물레방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고, 풍차도 도입 되었다.
유럽에서 고양이를 기른 것도 중세부터입니다.
의생활에서는 단추가 발명되어 널리 쓰였습니다.
속옷은 고대 로마사람은 물론 중세의 하층민도 입지 않았지만 중세의 상류층은 팬티를 갖춰 입었습니다.
안경도 중세에 발명되었습니다.
중세 12세기 후반쯤 명성이 자자한 신학자 주위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처음으로 대학이 나타났습니다.
제본한 책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중세입니다. 양피지로 지금의 책과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중세 정치에 의회가 생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길에서 보이는 방의 커튼을 항상 열어 두고 실내를 잘 정돈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고 누가 보든 떳떳한 것, 이는 금욕적인 칼뱅주의 영향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뜻의 '더치페이 Dutch Pay'라는 말 대문에 괜히 인색한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더치'가 네덜란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치페이의 풍습은 네덜란드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서양에서 흔하다. 오히려 네덜란드는 가난한 나라들을 잘 돕는 나라로 꼽히곤 한다.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열심히 벌고 돈을 절약하되, 돈을 좋은 일에 많이 쓰고 있는 것이다.(171쪽)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가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교황청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한 일이었습니다. 면벌부는 '면죄부'라고 잘못 번역되기도 하는데, '죄'가 아니라 '벌'을 면제해 준다는 뜻이므로 '면벌부'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지은 죄를 씻으려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뉘우치면 신부가 죄를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죄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벌은 남습니다. 신자들은 그 벌로 성지순례, 금식, 자선 등 참회 고행을 해야 합니다. 면벌부를 준다는 것은 이 벌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지요. 원래는 십자군 전쟁 때 교황이 군인들에게 참회 고행을 면제해 준 데서 비롯되었고, 교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중세 말에는 면벌부가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교회의 돈을 모으는 데 이용됩니다. 이 방법을 가장 요긴하게 쓴 사람이 교황 레오 10세입니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을 다시 짓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면벌부를 판매하게 했습니다. (149쪽)
루터는 1517년에 마인츠의 대주교에게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편지와 함께 '95개조 반박문'을 보냈습니다. 라틴어로 쓴 이 반박문은 종교 관계자들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었겠지만,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이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는 신화처럼 각색된 것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루터의 애초 의도가 어찌 됐건, 이 반박문은 일반인도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졌습니다.
루터는 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제후)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농민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은 루터와는 달리 토마스 뮌처는 농민들 편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성령체험을 통해서만 참된 믿음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루터의 성서 지상주의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뮌처는 예수가 재림하여 다스릴 천년 왕국의 도래를 앞당기려면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무력으로 없애야 한다고 믿었습니다.(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