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
중앙청 철거 직후 모습
4년 늦게 착공된 일본 국회의사당 건물과 외관과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1953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중앙청 태극기 게양
1948년 제헌국회선포식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건물. 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이라고 불리며 정부수립 직후에 대한민국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부민관을 거쳐 1975년 완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빠져나갔고, 정부 부처들도 정부서울청사나 정부과천청사로 빠져나간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사진에서 우측 하단에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은 옛 경기도청으로, 수원으로 이전 후 치안본부 청사로 쓰이다 1989년경에 철거되어 그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 이 건물 뒷편 산 속에 푸른색 지붕으로 된 작은 건물이 있는데, 1991년에 철거된 청와대 옛 본관으로, 노태우 대통령까지는 이 건물에서 대통령들이 업무를 수행했다. 2.1. 청사 건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청사로 사용하였지만, 1908년에 건립된 용산구의 통감부 건물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하였다. 그러나 직원수의 증가와 많은 사절의 내방, 그리고 각종 기관의 통괄로 인한 사무량의 확대로 넓은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신청사의 부지로는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채택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한국인의 문화적/역사적/민족적 심리를 압도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였다. 원래는 서울시청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었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당시 건축가였던 이토 주타(伊東忠太)에 의해 지금의 위치가 정해졌다. 1912년에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1914년에는 이듬해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헐려버렸다. 1912년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하였으나 1914년에 기초설계만 남긴채 사망하였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인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했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에서 3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최신 기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장식은 유럽에서 수입해와 만든 호화판 건물이기도 했다. 1916년에 시작된 공사는 처음에는 5년의 시간과 300만엔의 비용이 예상되었지만, 결국 1926년에 완성되어 10년이 걸렸고 돈은 675만 1,982엔이 소요되었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2배씩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일본인 석공 300명과 한국인 노동자 200 명이 년마다 투입되었다. 경복궁의 입구 역할을 하던 광화문 역시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 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광화문 문서 참고. 일제는 광화문을 옮긴 후 그 자리를 '총독부 광장'이라 부르면서 각종 옥외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 곳은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까지 군정청 광장, 중앙청 광장 등 이름만 달리하며 여러 관제행사의 개최 장소가 된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37년에 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이곳은 8.15 광복 이후 경무대를 거쳐 지금의 청와대 부지가 된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에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 군단장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과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조선총독부 청사는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앙청(中央廳)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가 캐피탈 홀을 직역하여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중앙청 중앙홀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국회를 개의하였고, 그해 7월 17일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공포식을 열고 헌법을 공포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정부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용하던 형국이었다. 본래는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청사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6.25 전쟁 때는 인천 상륙작전 후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그 때문에 서울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파괴되진 않고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아무튼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태극기 게양 사진이 찍힌 장소이기도 하다. 이 게양대는 중앙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남아있었다. 수복 당시에 태극기를 걸었던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옹(당시 소위)도 생전에 중앙청을 해체하더라도 게양대는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게양대도 사라졌다. 이 태극기는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이 사진은 전투가 끝난 뒤에 행사용으로 촬영한 것이다. 전투 중에 실제로 태극기를 게양했던 장소는 저 정식 깃대가 아니라 사진에도 보이는 지붕 위 첨탑이었다. 1962년 11월 22일에 6.25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다. 또 이때 중앙청 건물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회의장소로 쓰일 벙커가 세워지기도 했다. 1979년에는 경복궁 마방 터에 중앙청 내 공무원들의 복지를 위해 후생관이 들어섰다. 이후 1968년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어 콘크리트 광화문이 복원되고 1970년에는 바로 건너편에 정부서울청사가 설립되어 대다수 기관들이 이전하고 1982년에는 정부과천청사까지 신설되면서 법무부, 보건사회부, 농림수산부, 건설부, 과학기술처 5개 기관이 과천시로 이전함에 따라 정부청사로써의 기능이 이양되었다. 이후 구 중앙청 건물이 일제 침략의 상징이라 정부청사로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의견에 다다르자 1982년부터 박물관 개조 계획이 실시되어 1986년 8월 21일에는 청사의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3년에 안보회의장소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 이후 1985년에 서울 지하철 3호선 중앙청역이 개통되었고, 후에 경복궁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구 중앙청 후생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사회교육관으로 개편되었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게 육군 공병감인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빌고 빌어서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기에 대체할 건물이 마땅치 않다는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는 것. 그 이후 수십년 동안 해체에 대한 논의는 없다가 그 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었으나 비서진이 바뀌면서 또 다시 유야무야되었다. 그 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 해체 계획이 입안되었다.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정부는 구총독부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축제'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옛 총독부 건물을 헐어낸다고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라고 천명했다. 정 관장은 이어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작업을 마친 뒤 광복절을 기해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내년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경복궁 복원 계획도 같이 천명했다.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 오전 9시, 옛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중앙돔 첨탑 분리에 앞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제 상징의 제거를 호국영령들에게 고하는 고유문을 낭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작업과 새 문화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그리고 9시 21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고리에 1인치 굵기의 쇠밧줄 다섯 개를 걸고 서서히 첨탑을 들어올렸다. 첨탑 중에서도 11.4톤짜리 첨탑 윗부분이 먼저 들어올려진 것이다. 첨탑의 일부분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광복절 경축행사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부채를 흔들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환영했다. 이어 건물 주변에 설치된 수백발의 폭죽과 불꽃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첨탑이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경축행사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찾은 빛>이 장엄히 울려퍼졌으며 이내 잘려진 첨탑은 15분만인 9시 35분에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졌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누가 저 탑이 잘려나가리라 생각했냐"며 "이젠 철거-보존을 둘러싸고 갈라진 국론을 새 민족박물관 건립으로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첨탐 철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보관소로 옮겼다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 이후 1996년 초부터 차근차근 기계식으로 절단해서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그해 말에는 완전히 해체했다. 한편 잘린 첨탑은 1995년 8월 말까지 구총독부 앞 마당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모셔온자료입니다 |
첫댓글
생각나요
철거하는 모습도 티비로 봤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