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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2010년 10월 27일, 시화전詩畫展 행사장에서 김남조 선생을 뵙고 시인으로서 살아오신 삶의 편린들을 이야기로 나누었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0년 12월호(2010, December)
□ 김남조(金南祚)시인
1927년 9월 26일 경북 대구에서 아버지 김소도 선생과 어머니 최정욱 여사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하였다. 대구시 남명국민학교 졸업, 일본 후쿠오카 큐슈여고 졸업,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산 성지여고 교사, 마산고 교사, 이화여고 교사 및 서울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하였고,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48년《연합신문》에 시「잔상」,《서울대 시보》에 시「성숙」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시작 활동을 시작하여, 시집으로 1953년『목숨』(정양사), 1955년『나아드의 향유』(산호장), 1958년『나무와 바람』(정양사), 1960년『정념의 기』(정양사), 1963년『풍림의 음악』(정양사), 1967년『겨울바다』(상아), 1971년『설일』(문원사), 1974년『사랑초서』(서문당), 1976년『동행』(서문당), 1982년『빛과 고요』(서문당), 1983년『시로 쓴 김대건 신부』(성바오로), 1988년『바람세례』(문학세계사), 1995년『평안을 위하여』(서문당), 1998년『희망학습』(시와시학사), 2004년『영혼과 가슴』(시와시학사)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1967년『김남조 시집』(상아), 1973년『영혼과 빵』(성바오로), 1975년『김남조 육필시선』(문학사상사), 1983년『김남조 시전집』(서문당), 1983년『마음과 마음』(홍성사), 1984년『눈물과 땀의 향유』(열음사), 1984년『김남조 시선』(마당문고사), 1985년『저무는 날에』(성바오로), 1985년 『너를 위하여』(어문각), 1986년『말하지 않는 말』(문학사상사), 1987년『겨울나무』(자유문학사), 1988년 『새벽보다 먼저』(문학과비평사), 1988년 『깨어나소서 주여』(종로서적), 1990년『겨울꽃』(신원문화사), 1991년『민음을 위하여』(자유문학사), 1991년『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1991년『김남조 시전집』(서문당), 1993년『겨울사랑』(동서문학사), 1997년『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좋은날, 1998년『너를 위하여』오상, 2002년『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문학사상사), 2005년『김남조 시전집』(국학자료원) 등이 있다. 번역시집으로 1985년 일역시집으로 『바람과 나무』(일본 화신사)와 『바람세례』(일본 화신사),『韓國三人詩集』(구상, 김광림 공저, 일본 토요미술사), 1993년 영역시집으로 『Selected Poems of Kim Namjo』(미국 코넬대학), 1996년 독일어 번역시집으로 『Windraufe』(독일 흘레만출판사), 2003년 스페인어 번역시집으로 『Antologia Poetica』( 스페인 Editorial Verbum S.L) 등이 있다. 수필집으로 1964년『잠시 그리고 영원히』(신구문화사), 1966년『시간은 은모래』(중앙출판공사), 1967년『달과 해 사이』(상아출판사), 1968년『그래도 못다한 말』(상아출판사), 1971년『다함없는 빛과 노래』(서문당), 1972년『여럿이서 혼자서』(서문당), 1977년『은총과 고독의 이야기』(갑인출판사), 1979년『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여원사), 1983년『바람에게 주는 말』, 1983년『사랑의 말』(우주), 1986년『사랑을 어찌 말로 다 하랴』(자유문학사), 1999년『사랑 후에 남은 사랑』(미래지성) 등이 있다. 그 외에 1959년 편저『수정과 장미』(정양사), 1984년 꽁트집『아름다운 사람들』(소설문학사), 1985년 편저『생각하는 불꽃』(어문각), 1993년 편저『예술가의 삶․7』(혜화당) 등이 있다. 사랑에 관한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생의 존재론적 탐구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노천명盧天命,모윤숙毛允淑등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자유문인협회상, 제2회 오월문예상, 제7회 시인협회상, 제4회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훈장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이다.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고,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이다.
김명원의 시인탐방 11 사랑군단을 이끌어온 위엄의 시인, 김남조(金南祚)
사랑군단을 이끌어온 위엄의 시인,김남조(金南祚)
고유명사가 일반명사가 된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의 이름 자체가 어떤 추상성의 개념을 넘어서서 궁극적 가치와 의미를 포괄하는 특정 단어가 된 경우가 있다. 바로 김남조 시인이 그러한 예例이다. 그 분의 이름 ‘김남조’는 이미 사랑을 지칭하는 환유로 전이되었거나 상생의 모태지향성을 구현하는 허여의 미학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이름 석자 ‘김남조’는 우리가 살아가며 상실하거나 유실했던 모든 원향적인 이데아를 표명하는 지칭 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남조 시인은 우여곡절의 세상에 배반당하거나 그 세상에서 상심하고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을 따스한 손길로 위무해 주셨으며, 쓸쓸하고 무상하고 어두운 마음 갈피마다 찾아들어 위안의 촛불을 켜 주셨으며, 스스로 고통 받는 영혼을 향해 기꺼이 다가가 향유를 붓고 거친 슬픔을 닦아주셨던 연유이다. 그 분의 시속에서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한 형제가 되었고 피를 나눈 이들처럼 뜨거운 자매가 되었으며, 그 분이 결속시켜 준 신과의 만남에서 더욱 통회하고 속죄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이미 우리 모두의 스승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 선생님을 뵙기로 한 날은 가을이 익을 대로 익어가고 있었다. 노란 잎사귀 깃털을 함부로 떨어뜨리는 은행나무가 그러했고, 추위를 타는 듯이 하얗게 질리는 은사시나무가 그러했다. 만추의 장관과 스산이 엇갈리는 가로街路를 향해 선생님께서는 유독 돋보이는 도도함으로 걸어오셨다. 10월을 배경으로 위엄의 지팡이를 짚으시고는 뒤를 따르는 무수한 계절의 곡절을 지휘하시는 원로의 시인! 사랑군단을 이끌어 오신 기품과 위용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으로 길이 숙연해졌다.
“나는 시를 구걸하는 사람” □ 김남조: 나는 살아오면서, 또한 시를 쓰면서 자신의 무력감에 의기 소침하는 일이 많았어요. 권위 있는 분이 지니는 능력의 부스러기를 구걸하는 심정에 내려앉곤 하였지요. “주십시오. 나는 비어 있습니다.”에서 시작하여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라는 술회가 절로 흘러나왔으니까요. 요즈음에도 매한가지예요. 실지로 시를 쓰려는 첫 단계에서 나는 시에 겁먹어요. 차를 따라 천천히 마시면서도 곤두서는 긴장은 누그러지지 않거든요. 그럴 땐 “도와주십시오. 부디 도와주십시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지요. 음악을 들어 보기도 하고 옆방 문을 여닫거나 전기스탠드의 각도를 바꾸어도 보고요. 결국 시를 쓰기는 쓰고 하루 이틀 간 고친 후에 청탁자에게 보내지요. 이처럼 시를 쓰며 살아 온 나날이 아득하고, 넘어 온 산하들처럼 그립기도 하네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백지 앞에서 초라하고 절망적이랍니다. ■ 김명원: 저는 선생님 시집을 거즈 반 다 가지고 있는데요. 첫 시집인『목숨』과 두 번째 시집『나아드의 향유』은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의 초기 시집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두 번째 시집『나아드의 향유』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어드린 향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책명을 미리 정해 두었었지요. 한 주제의 장시를 쓰려던 의도였으나 역부족으로 비교적 긴 이 제목의 작품 한 편을 말미에 배치한 데에 그쳤고요. 그 후에도 시와 산문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사적을 여러 번 그려보았으나 아직 입문도 제대로 안 된 듯해요. ■ 김명원: 막달라 마리아는 선생님의 가톨릭 세례명이기도 하며, 선생님 시의 근간을 이루는 성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데요.
사람에겐, 특히 시인에겐 별다른 굶주림의 자각이 있는 법. 옛날 미국 대륙에서 가축들의 소유권 표시로 불에 달군 강철의 화인火印을 살결에 눌러두듯이 시인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신이 행하시는 입문의 법칙이 이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에요. 나에게도 그 일 인분의 분배가 주어졌고요. 그런데 어떤 대책이 가능했을까요? 결국 나는 작은 울음이 큰 울음 앞에서 눈물을 그치는 이치로 더 치열한 배고픔과 이것조차를 능가하는 거대한 사랑… 뭔가 이러한 모범을 찾아 막달라 마리아의 영토, 그 기슭에 기항했는지도 몰라요. ■ 김명원: 선생님, 참 우연치고는 전율이 이는데요. 저 역시도 세례명이 막달라 마리아거든요. 그리고 그 성녀를 선생님만큼은 아니어도 가슴깊이 듣고 있지요. 그녀의 눈물 서린 곡조를요.
시의 수원지, 막달라 마리아
시인에게는 의도적으로라도 시가 그치지 않고 공급되는 도화선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김남조 시인은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막달라 (Magdalene)’ 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대’란 뜻을 가진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 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방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머물 때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라드리며 눈물로 회개하자 예수님이 그녀를 구원하니,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움으로 거듭난다. 그 후 마리아는 헌신적으로 자신을 바쳐 삼 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할 때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리하여 묘지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뜨거운 연모를 끝끝내 실천해낸 막달라 마리아는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희생을 지반으로 한, 험난하지만 고귀한 생명의 길을 택한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째로 언급된다.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를 시인은 ‘죄와 통회의 성녀’라고 표현하면서 그 여인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준 예수의 자세 역시 감동의 숲을 이룬다고 부언한다. 그녀가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붓고 닦기까지 기다려준 예수의 지극함, 그녀가 마음 놓고 애통하게 울도록 기다려준 예수의 허락, 바로 이러한 두 사람의 교감과 통절이 숭고미를 자아내는 장면이 되는 동시에 시인에게 시를 촉발시키는 영원한 시원이 된다. 시인은 감히, 라고 말한다. 감히, 신을 사랑한 여자의 심정을 시로 옮겨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 치명적인 절망과 실의에 찬 고독과 지독한 목마름을 낱낱이 시로 써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 천 년이라는 세월의 파고를 넘어서서도 아직도 예수를 따라가는 검은 머리의 유태 여자, 그 여자에게 압도당하며 그 여자에게 패배당하며, 시인은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역설의 미학을 시로 승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감동의 수원지가 시인에게는 시의 보고寶庫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의 시에서 시인 자신과 시적 화자와 막달라 마리아는 한 여인으로 중첩되어 나타난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아침 기도」일부
당신에게선 손발에 못박는 소리 아슴히 들립니다
사랑하는 분이 눈 앞에서 못박혀 죽으신 후로 당신 몸은 못박는 소리와 그 메아리들의 소리 사당祠堂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건 고통입니다 고통의 반복 앞에 서는 율연한 공포입니다 그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리舍利를 쌓아 태산을 이룰 때까지 선혈을 탈색하여 증류수의 강으로 넘칠 때까지 천지간 오직 변치 않는 건 죽음과 참사랑뿐
하여 당신에게선 어느 새벽 어느 밤에도 손발에 못박는 아픔 그치지 아니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 4」전문
당신처럼 저희도 여러 번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당신처럼 저희도 일곱 마귀가 들어 일곱 가지 굿판을 벌입니다
당신은 옥합의 향유를 거룩한 분의 두 발에 따르고 눈물에 적신 머릿단으로 공들여 오래오래 닦았습니다 저희도 그 비슷이는 하였습니다/ (중략)
맨발의 유태 여자 영원한 참회자신 이여 주님은 만민의 구세주 되셨으나 당신은 이천 년 오늘까지 유태의 목마른 우물이며 온세상 여인들의 실못 박힌 마음들을 그 여윈 물거울에 비춥니다
이런 까닭으로 저희는 당신의 제자 당신의 딸 되기를 굳이 청하나이다 -「막달라 마리아 · 5」일부
사랑과 기도의 영혼 배양자로서의 시인
김남조 시인은 1950년《연합신문》에 시「성수(星宿)」,「잔상(殘像)」등을 발표하여 시단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 1953년 첫 시집『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랑의 편편한 그리움을 노래한 이 시집은 가톨릭이 견지하는 계율의 경건성과 참신한 정열의 표출이 조화를 이룬 초기의 대표시집으로 평가된다. 이후의 시집『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는 구원에 대한 애저린 갈급이 심화되면서도 부단한 절제와 인내가 내면화된 가운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이 지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 다소의 정감과 감상으로 충일하게 되는데, 이에는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의 세계가 혼유하며, 시집『풍림의 음악』(1963)과『겨울바다』(1967)를 비롯하여『설일(雪日)』(1971),『사랑초서』(1974),『동행』(1980),『빛과 고요』(1983) 등으로 이어져가게 된다. 이 중에서도『사랑초서』는 시집 전편이 사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함의하고 있어서, 이 시절부터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는 시세계를 공고히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시인이 현재까지도 놓치지 않는 화두가 된다.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중략)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너를 위하여」일부
□ 김남조: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지요. 나의 작품에 사랑시 성향이 짙다고 말해지는 듯 하나 서정시 모두가 일단은 사랑시 범주에 들며 시인 개개인의 기호와 기법의 옷을 입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시류의 작품은 이 또한 현실성 허약이나 관념 과잉을 지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실지로 나의 사랑은 피상적이며 가공의 설계 도면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사랑의 포식을 해보지 못했으며, 저편 사람에게 담대히 나를 개방한 적도 없어 왔거든요. 그 매번 기묘한 제한 요인으로 관계의 차단이 왔고 나 스스로의 소심증, 비겁함도 보태어져 결국 아무 형상도 만들지 못했고요. 여기에 부득이한 이별이 닥쳐들곤 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마음의 끈 한 올은 이어졌기에 가슴 후벼 파서 출혈하는 힘겨운 뒷감당이 매번 내 몫이었는데, 나의 시편들은 어이없게도 그 잿더미 속에서 나온 것들이었지요. 기이한 점은 부재와 공석의 덧없는 연분들이 아직도 긍정적 요소로 가슴 깊이에 살아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번도 환멸이나 분노, 권태나 배신감 등이 개입하지 않은 사실에서 오늘까지 아니 나의 끝 날까지도 남성 애호의 심정이 이어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저들이 사랑스럽고 애처롭고 신기하고 신비하게 여겨지는 이 아이러니를 나는 사랑의 유산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다분히 전시대적 순정의 입자들이 내 안에 가라앉아 유착되었는지요. 따라서 실지로 사랑시 등속의 작품이 아주 편하고 행복하게 씌어 지며 뒤를 이어 아주 많이 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시인에겐 기행시가 그의 특기라고 할 때 나의 특기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편 스스로 한심스러워 억제하는 면이 없지도 않고요. ■ 김명원: 선생님 시에서 또 하나의 굵은 지류가 ‘기도’입니다. 즉 신앙시로서의 맥락이라고 읽혀지는데요. 선생님의 신앙과 시의 연관성이랄까요, 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기도의 부분도 시인이라면 천주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글을 쓸 때는 기도의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과학자여도 실험을 하면서 진지할 때는 그 영혼의 밑바닥에 기도의 마음이 깔려야지요. 그러나 그런 보편적인 얘기를 떠나서 저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령 제가 자식이 넷이 있는데 한 가지 유산을 골라서 줄 수 있다고 할 때 무엇을 주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신앙을 주겠다고 답하려 합니다. 저는 평생 예수님에 잠겨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취라고 할까요. 거의 익사할 정도인데, 그것은 제가 신앙심이 두텁다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모든 이들을 부르신 가운데 나도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대해서 내가 자석에 못이 가듯이 그렇게 가게 된 거죠. 또 하나 지금 떠오르는 것이 니코스 카잔차키스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의 작품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신이 내 가슴을 향해 ‘나 좀 도와주게’ 라고 한다.”는 구절이지요. 의사가 환자를 고치려면 환자의 협조가 있어야 됩니다. 신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의 협조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처럼 시는 가녀린 풀이나 상처 입은 참새를 봐도 살려주고자 두 손위에 놓으면서 “참새야, 나 좀 도와줘. 내가 너를 살리고 싶다.”하며 도처의 모든 것에 마음을 여는 행위거든요. 신께서 “나 좀 도와줘. 내가 너를 새롭게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 무수한 말 중에 하나가 제 시의 영혼에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눈물은 큰 눈물 안에서 치유되는 것, 거인의 수모와 고통과 고독 속에는 모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게 다 들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곧바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사랑시는 신앙시이고, 신앙시는 사랑시입니다. 그 둘을 뒤집어 보면 믿음이고요. 주를 향한 믿음과 삶의 존엄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내 시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 김명원: 선생님 인생에서 지극한 후원자이셨던 어머니 이야기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신앙심이 돈독하셨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며 특별한 영성 선물을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 김남조: 어머니에 대해 말하려 하면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대학 시절에 어설픈 글들이 간혹 활자로 찍혀 나올 때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내 글을 기뻐하고 아껴준 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문인으로 설 수 있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둘이서만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그 시절은 이 세상 사람의 절반쯤이나 되는 비중이었지요. 췌장암으로 작고하셨는데, 예수고상을 늘 손에 쥐고 계셨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땐 바로 나 자신이 죽은 듯한 느낌이었고요.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김성태 신부라는 젊은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 신부에게 당부하여 신부가 죽는 날까지 날마다 기도 중에 딸을 위해서, 건강하고 좋은 문학을 하라는 것, 가정이 행복하라는 것 등 네 가지 축원을 보태어 줄 약속을 받으셨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짧게 다듬은 기도 구절을 아예 만들어 그 신부에게 내주셨고, 수중에 남아있던 돈의 전액을 미사 예물로 바치시며 부탁하셨던 거예요. 천주교회에서는 한 사제와 죽은 이와의 서약은 영원히 신성할 수밖에 없으며, 오늘에 이르도록 어김없이 지켜져 온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래서 이 일은 공표와도 같은 숙연함을 언제나 나에게 일깨워 주지요. 나는 아직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식으로 유언을 하고 기도를 부탁했다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건강한 것이 어머니의 축복이 크다고 생각되고, 특히 제가 신앙을 잃지 않는 것도 어머니의 축복 덕분이라고 여겨지지요. 어머니는 1967년 6월 20일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짚을 때 숨을 거두셨지만 그 이후 내 몸 속에서 나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내 삶의 모든 불태움과 봉헌들은 내 어머니와 나와의 두 사람 몫인 것을 나의 하느님만은 아실 것입니다.
학창시절, 김세중 조각가와의 결혼, 그리고 숙명여대 교수직 □ 김남조: 나는 일제시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이므로 일본어를 국어라 부를 시절 일본어를 쓰라는 강압에 어린 마음에도 분노와 비애가 치받곤 했습니다. 대구에서 남명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규슈여고에는 입학생과 졸업생이 1,500명 정도였는데 한국 학생은 나밖에 없었지요. 전쟁 말기여서 봉사활동도 많이 시키고 공장에 가서 실 감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는 정신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시책으로 지각과 조퇴가 없는 출석률 100%를 경합적으로 시키는 시대였으므로 장기 결석이 불가피한 학생들은 조건부로 자진 퇴학을 요청받았고요. 나는 몸이 약해서 폐결핵을 앓아 장기 결석을 하게 되니 학교에서 퇴학을 권했습니다. 전체적인 출석률 때문이었지요. 두 달 동안 권고 퇴학 상태에 있었는데, 학적마저 잃은 열일곱 살의 병든 나는 종이 질이 매우 거끄러운 연습장에 어수선한 잡문 수기를 여러 권 쓰면서 참담한 한 시절을 견뎌냈습니다. 식민지의 아이로 소외감과 역경에 억눌린 자아인식의 필연적 폭발 같은 그런 충동으로 무엇인가를 쓰게 된 듯합니다. 그때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시집을 읽었어요. 병석에서 나는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善은 문을 두드리나 사랑은 문이 열려 있음을 안다.”라는 타고르의 시를 읽고 너무나 감격스러웠죠. 그는 서양이 아닌 동양 사람인데, 숲 그늘 같은 아름다움이나 으슥한 품의 그늘진 골짜기와 같은, 안식과 더불어 있는 감동을 내게 주었습니다. ■ 김명원: 그 후 대학에는 어떻게 진학하셨는지요?
■ 김명원: 이제는 세기의 이상적인 결혼 귀감이 되었던 선생님의 결혼 이야기를 여쭤보아야겠는데요. 남편이셨던 작고 조각가 김세중 교수님과는 신앙 뿐 아니라 예술적 교감 관계가 어떠하셨나요? □ 김남조: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너무 바빴습니다.김세중 교수는 과중하리만치 일이 많았고, 나는 나대로 분주했지요. 내 경우엔, 첫 딸 정아晶雅, 장남 녕寧, 차남 석晳, 막내아들 범範이까지 커가면서 차례로 수험생이 되어 진학하게 되자 네 아이들을 돌보는 일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매일 글을 써야 했으니까요. 방학이면 수필집을 하나라도 더 내려고 나는 글쓰기에 매달렸습니다. 둘이 다 착각을 가졌던 셈이에요. 그는 그대로 나는 나 나름대로 작업하느라 바쁘면서 둘이서 나눌 시간이 미래에 있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결국 둘이 여행 한번 제대로 간 적이 없어요. 그러다 한 사람이 세상을 뜬 것이지요. 남편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이 완성된 직후 업무의 과로와 병발증으로 돌연 사망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미술관만 지으면 되는 줄 알지만, 미술관을 꽉 채워서 초대 전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력이 작으니까 그 좋은 작품들을 가져올 때 보험이라든지 힘든 일들이 많아서 준공식 전에 어느 날 갑자기 떠났죠. 밤 12시가 되어 귀가하는 그이를 나는 대체로 많이 기다렸고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가 나를 기다리게 했다고 거꾸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어쩌다 일찍 들어오게 되는 날도 나는 사람이 없는 방에 가서 불을 켜고 글을 쓰곤 했는데, 그것이 그에게 편했겠는가 싶은 게지요. 아들들을 결혼시키고 보니까 결혼 후에 측은하고 외로운 쪽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고 보니 내가 김세중 교수한테 해 준 것이 없더라고요. 손뜨개 장갑 한 켤레 떠준 게 없고, 맛있는 음식도 해준 게 없어요. 우리는 그냥 사무적인 동료였던 셈인데, 요즘 와서 생각해 보면 부부연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손자에게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말하게 하리라 다짐하고 있어요. 부부의 위상, 부부의 본질이 참으로 운명적인 끈이라는 것을, 그것도 인생의 인연 중 가장 지독한 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잠언집에 보면 “참으로 훌륭한 여자는 좋은 남편을 만드는 천재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와 내 남편은 서로를 만들어준 부분은 없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서로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지요. ■ 김명원: 두 분께서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 김남조: 피난지였던 마산의 성지여고에 근무할 때였어요. 그 학교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연극 지도를 맡았고, 그 사람은 무대 장치와 무대 그림을 맡게 된 인연으로 만났지요. 그 후 우리 두 사람은 1955년에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앞서 말한 바대로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열심히 생활한 대가로 가계의 궁핍은 면했으나 바쁜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외로움이나 의기소침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후회로 남기도 했지요. 가족을 위한 시간은 절대로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 김명원: 숙명여대에서 평생 봉직하셨는데요. 교수로서의 보람은 어떠셨나요? □ 김남조: 나는 숙명여대에서 38년간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못했어요. 책에 있는 것은 학생들이 읽으면 된다고 생각해서였지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Pearl Sydenstricker Buck이라는 작가는 백치인 딸아이의 치료비를 벌려는 일념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녀의 글 중 명문이 있어요. “끝이 있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라는 것이에요. 슬픔은 끝이 없어야 성립이 된다는 뜻이지요. 이 말은 다른 언어에도 허용이 되요. 예를 들면, “끝이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는 등이지요. 그녀는 딸이 40세 되던 해에『자라지 않는 아이』를 출간했는데, 그 책에서 “내 자식은 이제 40을 넘어선다. 해변의 요양소에서 재즈를 들려주면 고개를 가로젓고,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 고개를 끄덕인다. 내 자식은 그 영혼 속에 고결함이 있어서 예술의 진수를 안다.”라고 했거든요. 전 학생들에게 그런 예술의 진수를 사랑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에겐 희망이 주어졌으며 학생들에게 “기쁨을 만들어 내어라, 사랑을 만들어 내어라”고 가르쳤습니다. 보답을 못 받는 경우에도 솟구쳐 오르는 사랑을 그치지 아니함이 사람다움이라고 말했지요. 아울러 “먼저 사랑하기 시작하고 더 나중까지 사랑하라”고도 거듭 말했고요. 자신은 못 가진 덕목을 후진에게 원한다는 말이 이에 적중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촉매에도 큰 의미 부여를 하고 토양을 굴착하여 자양분을 저장하며 새털 같은 잔뿌리조차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으니까요.
노년의 행복, 은혜로운 생
김남조 시인은 세상 모든 삼라만상에서 시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평생 많은 이가 가는 길을 따라 이른 신앙의 변두리와 주옥같은 감동의 즙을 짜내는 시집들과 어머니와 남편이 작고했을 때 몸소 체험한 대지의 비의성, 그리고 세포까지 침투하여 적셔주는 음악과 놀라울 뿐인 자연 앞에서의 외경감 등, 이들 모두가 시인에게는 존귀하고 소중한 교과서의 페이지였다고 한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의 명운과 앞서 간 불행한 시대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문인들과 다시금 태어나는 빛나는 생명들에게서 눈부신 감흥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모든 원천지에서 시인의 시들과 삶은 비롯되었고, 존속되었으며, 항상성을 이루었다.
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깊고 높은 것 그 확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을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하여 고독한 의지와 사랑 준령의 등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먹이고 기르는 자연을 위하여 죽은 후에도 영원히 안아 주는 대지를 위하여 땅의 남편인 하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태어날 아기들과 미래의 동식물을 위하여 이름 없는 거 잊혀진 거 미지의 것을 위하여 가급적 다수를 위하여 그러고 보니 모든 걸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전문
■ 김명원: 적지 않은 선생님의 시력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이랄까요, 비법이랄까요, 그런 것이 있었다면요? 신앙의 힘을 제외하고서요. □ 김남조: 시집『겨울바다』와『雪日』을 낸 후 언어의 절제를 더해야 할 자각으로 5행 전후의 단장 102편을 묶은『사랑草書』를 펴내었고, 비로소 나 자신의 작품에 다소간 자부를 갖게 되었지요. 허지만 그 후에도 시란 쓸수록 부담이 더 실리는 난업임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중년기는 겉으로 보기에 순탄한 발전기였으나 나 자신은 너무 많은 출혈을 해버린 환자처럼 기력이 달리고, 가끔은 스스로 위중하게 여겨졌고요. 살기 위해서, 그리고 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자구책이 시급했고, 이때 스스로 내가 나 자신의 감성을 더 실하게 배양해야 되겠다는 욕구를 마음 깊이 다지게 되었어요. 운동선수가 체력을 단련하듯, 시인은 민감성과 감수성 전반을 훈련시키고 고양시킬 필요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우선 생각하게 된 것은 한 개비 성냥에 입혀진 유황은 극소량이며, 한 자루 백랍 속의 불심지도 겨우 몇 올의 무명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구경한 겨자씨에 있어선 백지에 스카치 테잎을 바른 속에 연필 끝으로 찍은 듯이 미세한 점 하나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자라면 4미터에 달하는 큰 식물이 됩니다. 또 말馬을 조련할 때 잘 달리게만 하는 것은 절반에 머무르는 조련법이며, 배고파도 달릴 수 있게 길들여야 제대로 하는 일이라는 사실였습니다. 이를 다시 나에게 적용시켜 내가 배고픈 중에도 달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위장을 먹지도 못한 가운데 힘내어 달리게 할 비책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였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나는 음악에 잠겨 지냈던 시절을 통해 상당한 도움을 수확했습니다. 가히 ‘음악 요법’이라 할 만했는데, 음반에 바늘 끝을 갖다 대는 구식 전축에서 카세트 테잎을 듣는 녹음기, 그리고 근래에 알게 된 CD에 이르기까지 그 곡목에 있어서도 성가류, 클래식, 가곡, 팝송 등 모든 음악이 일단 놀라웠으며 따뜻한 목욕물처럼 나를 적셔 주었어요. 어떤 음악은 더욱 특별하였고, 분명코 영혼적인 수분을 공급해 주었기에 오랜 시간 눈물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량한 아름다움이 그 안에 담겼지요. 나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어떤 수증기가 서려 올랐고, 연유하고 감미로운 기류가 나를 감싸주었어요. 심지어는 내가 지금 “달다, 달다, 달다”라고 소리 없는 연호가 치받아 올랐으니까요. 스스로 내 감성을 개발하여 질과 양을 부풀리려는 도모…. 다양한 음미와 근면한 반추, 가려진 부분들을 함께 접하고자 잠을 깨운 청각, 그 이전에 오성悟性의 전감각이 열려야 할 일이었어요. 나는 이러한 모든 좋은 것을 갖추진 못하였으나 최소한 갖고 싶은 열망에는 매달렸지요. 오직 하나 내가 황량해지지 않은, 바로 이 한 가지만은 자신하고 싶어요. ■ 김명원: 음악이 동반적 기쁨을 선사한 시의 첫 동력이었군요. 게다가 황량해지지 않으려 열망하신 노력이 주력하였고요. 참, 선생님 수필집을 읽으니 초를 모으시는 취미도 있으시던데요. 잠잠한 밤에 촛불을 켜고 성탄절 캐럴이나 성가 등 음악을 들으시는 모습의 경건함이 느껴졌고요. □ 김남조: 한때 초를 수집도 하고 만들어보는 시늉도 했습니다. 요즘은 초가 화려해져서 색깔이 알록달록해지니까 제가 좀 피곤해서 치우고, 지금은 저희 집에 그림 같은 건 안 걸고 벽을 그대로 둡니다. 책들도 전부 한 쪽에 치워놓고, 방에 별로 안 두고요. 숙명여대에 제 책을 60에서 70박스 정도를 기증해서 전부 주고 나왔지요. 동양화를 보면 밑에 그림이 조금 있고 나머지는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 여백도 그림에 속하는 것처럼 비어있는 것의 가득함이 아름다웁지요. 나이가 드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김남조: 작금의 우리 사회는 불미한 면모를 연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때를 같이하여 이를 꾸짖는 목소리들이 크게 울리고 있습니다. 문인들도 비판의 대열에 서서 줄기차게 붓과 행동으로 항거하고 있고요. 지금 이에 관한 시비를 논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의 현대문학이 너무 많이 희망의 수사학을 포기한 점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시인은 그 시대의 산소량을 측량하는 존재라는 말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산소란 생명에게 없어선 안 될 기본 에너지라고 풀이할 때, 기쁨과 희망이 이 에너지에서 불가결의 요소임을 또한 인지해야 할 것이에요. 그렇다면 부정부터 해놓고 인색하게 긍정 요건을 찾아보기보다는 이해의 시각으로 따뜻하게 보는 가운데 시정할 점을 신중히 들추는 쪽으로, 기쁨이나 희망, 나아가 산소라는 성분에 시선을 맞추는 일이 좋을 듯 싶어요. 생태계의 훼손을 논할 때에도 그 신비한 치유력과 자생력을 함께 제시함이 절망에의 좌초를 방지하는 일조가 될 것 같습니다. 극한 의식에서는 범죄도 더 흉악함을 우리가 알거니와 오늘의 사회 전반이 참으로 긍정에 굶주려 있음을 상기해야 할 듯 해요. 시인들까지 부정주의 일변도에 빠진다면 정녕 누가 이 세상에 희망의 언어를 공급하겠습니까. 저는『동행』,『빛과 고요』,『바람세례』 그리고『평안을 위하여』의 시집들에서 화해와 쉼과 위로를,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평안을 나누자고 제안하는 나 나름의 일관된 목소리를 담았으며, 이 후에도 이 방향을 따라 흐를 일이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가령 다른 여러 시인들이 희망 성향으로 목소리를 맞추었더라면 나는 단연코 위기감을 자극하여 심한 긴장을 종용했을 것이에요. 그만치 나의 희망론은 어떤 절대 취지라기보다 우리의 현대시에 있어 너무나 눌려 있고 가려졌기에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어보자는 의도였지요. 또한 무균 상태의 이상적 희망론이 아닌, 바위를 뚫어 생명수를 얻음과 같이 힘겹고 긴요한 필요성임을 뜻하고 있고요. 그리고 문학은 때에 따라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문학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얻어내야지요. 그러나 예술지상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문학은 과학이나 철학 등과 함께 의좋은 형제처럼 삶이라는 대지를 딛고 있으니까요. 다함께 삶지상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은 부모이고 예술은 자식입니다. 시는 그 자식들 중 단지 한 부분이고요. 예술, 과학, 철학 모두가 각자 최고가 아니고, 모두 어우러져서 최고의 삶 마름을 하는 것입니다. ■ 김명원: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까이 보다가 요즘처럼 조금 띄어서 보니까 훨씬 그윽하게 느껴지네요. 내가 쓴「원경」이라는 시에도, 경치를 멀리 볼 때 저 뒤 끝에 흐려있는 거기가 지상의 끝 땅이고, 모든 아픈 이들은 거기 가서 쉬는 방이고, 허리 아픈 바람도 거기서 쉬고 있을 것이다, 라고 썼듯이, 아슴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시에서는 젊은 목소리 쪽으로 가고자 하는데 저는 일부러 나이만큼의 목소리를 내려고「느슨한 기도」라든가「저문 세월」같은 시도 시집에 써 넣었습니다. 이 나이를 위해 하느님이 싸두었던 선물 보따리가 있어서 참 좋아요. 한 모임에서 신부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을 들어서 메모를 했는데요.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으리라.”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죽는 시간이 아니지만 죽음처럼 치열하게 아끼고 절실하게 살면 죽을 때는 초연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에 욕심을 내다가 이제 몇 해 있다 가게 될 때는 그냥 편하게 만족하면서 나는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 산 것도 참 괜찮았던 것 같아요. 세월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 출판사에서 수작업으로 천 권의 시집을 출간하자고 하면서 첫 장에 대표 문구 하나를 써야 한다고 해요. 저는 이렇게 써 보냈지요. “그가 있기에 내 영혼을 스스로 귀중히 여김, 이런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기를!”이라고 말이지요. 제 인터뷰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삶은 신비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세계와 결혼하는 것이지요. 허락된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을 말해 볼까요? 삶을 좋아합시다.
신비스러운 주술처럼 선생님의 음성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났다. 읍소할 수밖에 없는 단호와 열정이 그 음성에 들어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선생님께서 믿고 따르셨던 신앙의 세계가 빛으로 휘황한 절대 공간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끝까지 사랑하라는 사랑론을 설파하시면서 선생님 자신이 사랑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벅차오르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신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충실과 헌정만이 신을 포함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올바른 시적 삶임을 시로써 입증하고 살아 오셨다. 겸허하여 차라리 우아해지는 반어의 미학을 단아한 시어의 조탁을 통해 아름다움으로 드러내셨으며, 절망의 시대일수록 희망을 밝히셨으며, 예술지상주의로의 시가 아니라 삶지상주의로의 시로서 겸손을 찾아내어 고결한 영혼의 시세계를 완성하셨다. 한 편의 시마다 문학적 양심을 비추어보시는 이, 시란 ‘일종의 도착점’이므로 끊임없이 연마하며 닳도록 시를 수정해가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이, 사후 백년이 지난 후에도 독자에게 거듭 읽히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를 즙으로 짜 방울방울 떨구는 고행이 시업이라고 정의하시는 이, 그리하여 유사한 영혼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안식에 대해 고심하며 이 밤에도 시의 촛불을 켜고 계실 분이 바로 김남조 시인이시다. 고통을 통찰한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고, 예수의 발에 엎디어 나아드의 향유를 붓듯이 우리네 고된 삶의 배면에 시인은 향기 어린 그의 시를 축복으로 부어주고 계실 것이다. 선생님의 건승하심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그 분에게 받은 은혜에 다소나마 닿을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란다. 가을이 깊다. 눈물겨운 감동도 속절없이 깊어간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0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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