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빠와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립다는 생각을 한 일은
없었어요. 나를 팔고 오빠가 집을 뛰쳐나오게 만든 건 부모라는
생각을 해 왔어요
이갑진 소령이 소식을 전해 준 날 저녁.
세진 관련 중역들이 북경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소령님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 그때서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빠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리고 오빠는 어딘가에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도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고 했어요. 이 소령님 고맙습니다.
이혜린은 주변 사람이 도리어 놀랄 만치 담담했다.
인사는 강 소령 만나면 하십시요
강 소령 잘 계시지요?
김미현이 물었다.
강 소령 또 훈장 받았습니다. 전선이 재정비되면서 후방으로
전출 오게 될 겁니다. 그만큼 일선에서 싸웠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야지요
이갑진이 웃으며 말했다.
강 소령 내려오면 그때는 지난날 여수시대 동지들 모두 모여
호화로운 환영회 한번 열어 봅시다
박 회장은 돈 쓸 궁리만 하시는 구요
여러분 덕으로 돈을 벌었으니 여러분들을 위해 써야지요
여수 14연대 출시들끼리 모이면 언제나 박 회장이 화제에
오릅니다.
없는 사람 험담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한 마디로 이상한 분이라는 얘기들을 하지요. 세상이
조용해도 돈을 벌고 전쟁이 터져도 돈을 벌고 장의사는 사람이
죽어도 돈을 버니 신기하다는 거지요
모두가 웃었다.
사실은 나도 이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고 사장 덕입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고 사장. 나는 말입니다. 6년 전 해방이 되는 던 그날 스무
살 먹은 영구차 운전수였습니다. 일본이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일본 사람 주인이 돌아가고 장의사가 문을 닫아
버리면 어디 가서 뭘 해 해 먹고 살아가야 할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박억조의 말을 듣고 이갑진 소령은 놀랐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얘기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소탈하게
내 쏟는 박억조라는 사람이 더욱 흥미로웠다.
그 걱정은 시즈요가 덜어 주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김미현
씨를 만났습니다. 참으로 우연이 였습니다. 이건 김미현 씨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 같습니다만
박억조가 김미현을 바라본다.
회장님과 시즈요 부인이 우리 그이 시신을 울진까지 무료로
운구 해 주시고 장례비까지 주셨어요. 난 그때 저 두 분은
사람이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불쌍한 나를 위해 잠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김미현이 그날을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김미현 씨를 만난 덕으로 부산경찰서 일을 하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영구차 한 대를 더 불렸습니다. 새로운 운전사 한
사람이 필요해 귀환동포수용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여기 앉아
있는 고 사장을 만났습니다
귀환동포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나를 운전사로 고용해 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시즈요 부인께서는 아이하고 수용소에서
고생하지 말라며 이층 방을 비어 주시며 같이 살자고
하시더군요. 그날 우리 부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고진영이 감회에 젖어 말했다.
고 형 덕으로 홍콩 마카오 무역을 하게 되면서 또 돈을
벌었습니다. 여수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4연대 장교들은
만났고 그분들 덕으로 군납을 해 또 돈을 벌었지요. 따지고 보면
박억조가 능력이 있어 돈을 번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벌어다
준겁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여러분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만 회장님께 해 드린 게 없네요?
이혜린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혜린이를 만난 덕으로 마사기찌 씨를 알게
되었지. 마사기찌 씨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고 건어물 수출로
돈을 벌게 해 주었잖냐!. 그리고 한경진 씨와 최수진 씨는
고무공장을 선사해 주어 전쟁이 터지면서 떼돈을 벌게 해
주었지요
박억조의 말을 듣는 이갑진은 지금 자기가 기인과 앉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박억조는 자기가 돈을 번 것이 모두 우연이고 남이 도와 준
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해방의 혼란 속에서 처음 만나는 여자를 위해 시신을 울진까지
무료로 운구 해 주고 장례비 일부까지 주고 온 일이나 귀환동포
수용소에서 수용되어 있는 사람을 과거도 묻지 않고 운전사로
고용하고 자기 집 이층까지 내주면서 살게 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운전수 인품 하나만 믿고 거액의 현금까지 맡겨
호남으로 물자 수집을 보내고 나아가서는 멀리 마카오 홍콩까지
보낸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기인이나 하는 행동이다.
독립 축하연에서 우연히 한 장교를 만난 인연 때문에 자기
생명의 위험까지 걸고 여섯 사람의 장교를 숨겨 주는 일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갑진은 박억조의 그런 엉뚱한 구석이
상상조차 못할 일을 벌여 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9
한 대의 미군 짚이 광복동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미국 장교와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 속에 에덴 간판이 들어 왔다. 에덴 간판을 본
여인이
에이브. 저기 차 세워 봐!
운전을 하는 미군장교에게 말했다.
여인의 영어는 유창한 편은 아니지만 의사 소통은 가능한
수준이다.
왜 그래?
저기 한번 들어 가 보고 싶어
여인이 카페 에덴의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페?
그래.
에이브 버클레이 대위는 여자가 가리키는 간판이 걸린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에이브. 우리 술 마시자
오케이
먼저 차에서 내려 버클레이 대위가 여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돌아가 군용 찦 차의 천으로된 문을 열었다.
가화는 카페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이 미군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했다.
자기는 영어를 못한다. 그러다가 미군 뒤를 따라 들어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을 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
미국 뒤를 따라 들어오던 여인도 가화를 알아보았다.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화 아냐?
백화 언니!
두 사람은 한 동안 서로 마주 보고서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버클레이 대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옛 친구를 만났을 뿐이야
옛 친구?!. 오우. 그럼 천천히 얘기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 놓을 거야!
언니. 죄송해요
가화가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로즈. 옛 친구 만나 얘기하자면 내가 방해 될 거야. 나
부대에 가 있다 밤에 집으로 갈게
에이브. 미안해
버클레이 대위가 백화 뺨이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나갔다.
언니 무사하셨군요
버리는 귀신이 있으면 돌 봐 주는 귀신도 있다는 옛말이
있잖니
언니. 나를 괘씸하게 생각하셨죠?
아니. 난 한번도 가화가 택한 길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했어. 떠나기 전에 귀뜸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서운함 같은
것은 있었어. 하지만 모두가 지나간 일이야
죄송해요.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 지금도 평양상회 이 사장하고....
이 사장은 정식으로 결혼하자고 그러지만 ...
가화가 싫다 고했다는 거냐?
언니도 알잖아요. 난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는 거요
왜?. 기생 노릇했다고 .기생이 흉될 건 없어. 적어도 기생은
남을 배신하지는 않아. 이 세상에는 기생보다 더 천하고 더럽고
사람을 밤 먹듯 배신하는 인간이 얼마든지 있어
백화가 내 뱉던 말했다.
가화는 그런 백화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언니. 그 동안 어떻게 지났어요?
가화가 겨우 가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네 눈으로 보았잖니?. 난 세상들이
말하는 양갈보야!
백화가 싸늘하게 내 뱉었다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백화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다.
전쟁이 터지던 날 백병진이 우리 집에 있었어. 서울이
점령당하고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빨갱이 앞잡이들이 우리 집으로
밀고 들어 왔더군. 기생은 자본주의 놈들과 한 통속이고 인민의
적이래 나. 놈들이 나를 집에서 쫓아내더구나
그 때문에 백 회장님과 연락이 끊겼군요
그때까지 나는 백병진을 먹여 살렸어. 내 집에서 쫓겨나던 날
백병진은 있을 곳을 구해 보겠다며 떠났어. 다음 날 점심때
파고다공원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다음날 백화는 파고다 공원으로 나갔다.
백병진은 오지 않았다.
백화는 그후 닷새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파고다공원으로
나갔다.
백병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때야 백화는 백병진이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화는 그 길로 광나루로 갔다.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백화는 무작정 남쪽으로 향해 걸었다.
인가를 만나면 얻어먹기도 하고 빈집을 만나면 들어가 주인
없는 집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 연명했다.
그러면서 계속 걸었다.
며칠 동안이나 걸었는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어느 산 속
빈집에 들어갔다가 미군과 맞닥뜨렸다..
금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부대와
연락이 끊긴 에이브 베클레이 대위였다.
두 사람이 말이 통 할 리가 없었어. 그러나 버클레이 대위는
내가 자기를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차렸어. 외국인인
에이브를 산 속에 버리고 갈 수 없었어. 우리는 그때부터 같이
행동했지. 군인인 에이브는 낮에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을 보고
밤에는 별을 보고 남쪽이 어느 방향인지 알아내더군
미군을 대리고 마을로 내려 갈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백화는 버클레이 대위와 비탈진 산길만 택해 걸었다.
백화가 마을로 내려 먹을 것을 구해와 버클레이를 먹였다.
정말 이상하더군. 그렇게 한 보름 같이 걷는 사이 정 같은 게
생기고 생사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산 속에서 몸을 섞었어. 서로
몸을 섞는 사이 정은 더욱 깊어 가고 서로 말도 통하게 되었어.
에이브는 이름이 뭐냐고 묻더군. 백화라고 했지만 에이브는
백화가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때 들장미가 보였어. 그래서 그걸
가리켰지. 에이브가 오! 로즈 하고 말했어. 그때부터 에이브는
나를 로즈라 부르기 시작했어
산길을 헤맨지 한달 만에 그들은 미군 전선을 만나
수용되었다.
그때 버클레이 대위는 자기를 수용한 후방부대 지휘관에게
백화는 자기 생명의 은인이고 우리는 산 속에서 결혼을 약소한
사이라고 했다.
그후 에이브는 어디를 가건 나를 대리고 다녀. 에이브에게는
미국에 아내가 있어. 에이브는 전쟁이 끝나면 아내와 이혼하고
나와 결혼에 한국에서 살겠다고 해 .지금 부산 후방
기지사령부에서 근무해. 에이브와 나는 초량에 방을 얻어 함께
살고 있어. 우리는 결혼 하기로 약속한 사이지만 한국 사람
눈으로 보면 나는 여전히 양갈보일 뿐이야.
언니! 왜 그런 말을?
누가 뭐래도 좋아. 나는 에이브를 만나고 인간의 진정한
정이라는 게 뭔지 알았어. 에이브는 그걸 나에게 가르쳐 준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에이브를 사랑하고 있어. 남이 손가락질해도
좋아. 내가 에이브를 사랑하고 에이브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 하나로 나는 만족해
두 여자가 마주 바라보았다.
백화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참 박억조 사장 잘 있니?
백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매일 오세요
나 말야. 한 때 박억조 사장에게 홀랑 반했던 시절이 있었어
백화가 웃으며 말한다.
어마. 언니가요?
박 사장은 여자를 반하게 하는 그런 구석이 있지
정말 그런가 봐요. 모두가 박 회장 일이라면 죽기 살기로
나서니 말예요
모두라니....?
언니는 모르실 거예요. 해진물산 이혜린 사장 세진산업
김미현 사장이예요
헤린이가 좋은 남자 만났구나.
어마. 언니는 이 사장을 아는 모양이네요
잘 알지. 가화야?
예. 언니
이게 내 전화 번호야. 박 사장이나 혜린이 오면 내가 한번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 전해 줘 .여기로 연락하면 돼
기다리면 오실 거예요
아니야. 오늘은 너무 늦었어. 에이브가 기다릴 거야.
백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첫댓글 오랫만 벌거벗은 야망을 보내요
야망
넘 재미있습니다...작가님 감사.
감명이네요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