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4 입 춘, 세계 암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전 세계 암 환자, 2035년 70% 더 는다 국민일보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 /미디어다음 2014.02.05 02:32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205023224318
2009 - 삼성전자, 세계 최초 40나노 D램 개발 삼성전자 세계 최초 ‘40나노급 D램’ 개발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머리카락 굵기의 3000분의 1가량인 미세 공정기술을 적용한 초소형 반도체를 개발했다. 더불어 삼성전자는 반도체시장의 대세인 친환경(Green) 경쟁력도 보강할 수 있게 됐다. http://www.fnnews.com/view?ra=Sent0701m_View&corp=fnnews&arcid= 090204222920&cDateYear=2009&cDateMonth=02&cDateDay=05
2007 - 제주에 '한국판 폼페이 유적' 지난 2006년 발굴됐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105 일대가 5000여년 전 화산 폭발로 덮였던 ‘한국판 폼페이유적’임이 확인됐다. 조선일보 /문화재보호재단 2007-02-05 05:50:27 http://www.cprc.or.kr/board/board_content.php?board_id=cprc_introduce_news&article_no=46&page=12
2006 - 세계보건기구, [세계 암의 날] 맞아 세계적 암퇴치 노력 촉구 세계보건기구, WHO는 4일, [세계 암의 날]을 맞아 암퇴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전 세계에 촉구했습니다. WHO는 암의 40% 이상이 예방할 수 있으며, 또 암을 예방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앞으로 10년 동안에 800만명의 인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안 심슨 WHO 대변인은 사람들이 암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금연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담배는 최대의 단일 암발생 원인으로 매년 150만명이 암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WHO는 또한 보다 좋은 규정식과 보다 많은 운동을 권장했습니다. WHO 관계관들은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오래 앉아서 일하게 되면서 비만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 데 이것이 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5년에 세계에서 암으로 760만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암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10년동안에 8,400만명이 암으로 사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VOA 미국의소리 2006.02.04 http://www.voakorea.com/content/a-35-2006-02-04-voa17-91245549/1303484.html
2003 - 유고슬라비아 연방, 건국 70년만에 완전 해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건국 70여년만이다. 손영식 기자 /written by 안용운 (ahn1320) 2003-02-09 14:43:35 http://www.bcpark.net/bbs/103940
2000 - 한국, 유엔난민기구 이사국에 선출 [어제의 오늘]2000년 한국, 유엔난민기구 이사국에 선출 ㆍ난민인정 비율 OECD회원국 꼴찌 “한밤중에 여러분의 가정이 공격을 받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이 입고 있는 옷만 걸친 채 도망쳐야 한다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제니스 린 마셜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사무소 대표가 UNHCR를 소개하며 하는 말이다. 어떤 위험 때문에 한밤중에 옷만 걸친 채 도망치더라도 제 나라 정부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국경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옷만 걸쳤을 뿐이라면 여권 같은 서류를 챙기지 못했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가까스로 ‘불법’ 입국을 하게 되더라도 안심하긴 이르다. 그 나라 정부에 보호 요청을 해야 하는, 난민으로 인정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이들을 받아들인 정부와 사회는 올 때부터 ‘불법 이민자’ 딱지가 붙은 이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이 도망쳐 온 경위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않거나, 혹은 사소한 범죄 경력이라도 있다면 이들의 신청은 거절당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잠적하든지, 위험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를 받아줄 다른 나라를 찾아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무국적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2009년 초 현재 UNHCR가 집계한 전 세계 난민은 1000만명이 넘는다. 이 외에도 국경을 넘진 못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국내 실향민이 1400만여명, 무국적자는 650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저개발국에 분포해 있다. 아이티처럼 큰 재해가 일어난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환경난민’들이 생겨나고 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가깝게는 홍세화씨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던 30년 전까지도 있었고, 전쟁으로 무려 수백만명의 피란민이 발생한 것도 불과 60년 전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다. 손제민 기자 /경향신문 2010-02-03 17:39:0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2031739085&code=100100&s_code=ap005
1999 - 존 F 케네디 2세 방한 존 F 케네디 2세 방한 새책 홍보-연대서 특강 존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의 외아들로 정치평론잡지의 발행인인 존 케네디 주니어(38)가 4일 오후 대한축구협회 회장 정몽준(鄭夢準)의원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展] 1995년 2월 5일~3월 7일 장소 : 예술의 전당 전시 : 사진, 유물, 관련 서적 등 최근에 와서 이승만을 다시 평가하고 되살리려는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95년 2월 5일에서 3월 7일까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展>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는데, 온갖 사진, 유물, 관련 서적들을 최첨단 그래픽까지 동원하여 전시했습니다. 같은 해 월간조선 1월호에서는 “우리의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죽어 갔다”는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고, 2월호에서는 “거대한 인물 이승만 90년”이라는 예찬이 실렸습니다. 최근 어느 일간지에서는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요, 건국의 아버지”로 재평가를 하고 있어요. 민족통일의 성업을 달성해야 할 역사적 대전환점에 선 지금, 이승만을 되살리려는 음모 앞에서 4·19 혁명의 정신이 왜곡당하고 있는 것이죠. 분단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인물, 친미독재로 일관하다가 4월 혁명으로 쫓겨나 역사의 심판을 받은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이요 20세기 한국사의 거인이라면 4·19는 반역이란 말입니까?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95년 2월 4일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展>에서 개막 테이프를 끊고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과 함께 전시관을 관람했어요. 4월 혁명 정신을 계승하자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데 참석할 수가 있습니까? 이승만 독재를 계승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정치 활동을 시작한 자유당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인가요? 김재성(한국신학연구소 연구교수) http://www.mindlle.com/spboard/board.cgi?id=mindlle2&action=simple_view&gul=23
고분자 알로이 섬유(Polymer Alloy Fiber) 한국과학기술원 윤한식(1929~)·손태원(1952~)팀이 개발한 초고강도·초탄성률의 신소재. 기존 최강력섬유는 미국 듀폰사가 개발한 아라미드섬유 계통의 KEVLAR로서 강철의 5배 강도를 나타내 비행기·우주선의 내장재, 방탄헬멧 등 군사용·스포츠용품용으로 쓰여왔다. 알로이 섬유는 두 고분자물질을 액정상태에서 혼합, 섬유를 뽑아냄으로써 압력을 받으면 섬유가 갈라지는 케블러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도·탄성률도 크게 개량했다. (동아 시사용어사전) http://www.donga.com/fbin/dict?n=sisa&a=v&l=1890
1980 - 고속철도 건설계획 보고 [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고속철 건설계획 보고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고 서울의 집에 돌아오는 일이 가능하다. 고속철도 덕분이다. 광주에 가려고 아침 일찍 탔는데 졸다가 깨 보니 열차가 나주 벌판을 지나 목포를 향하고 있어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대전에서 내리지 못하고 대구나 부산까지 갔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204/8691697/1
제12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 [The 12th Olympic Winter Games] 1976년 2월 4일부터 15일까지 개최, 37개국에서 1,123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제9회 동계대회 개최지인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12년만에 다시 개최되었다. 원래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환경파괴를 우려하는 현지주민의 여론에 굴복하여 인스브루크로 변경되었다. 개회식에서는 2번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여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2개의 성화대가 세워졌다. 참가선수의 25%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약품복용 규정을 까다롭게 조사했다. 이로 인해 소련의 한 동메달 리스트는 IOC에서 금하는 감기약 복용 사실이 드러나 동메달을 반환해야 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아이스하키팀은 전체 선수가 약을 복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경기몰수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단 1개의 세계신기록도 나오지 않아 동계대회 무용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1976년 오늘! /YTN 2011-02-04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22048034770&s_mcd=0422&s_hcd=
롤스로이스사(社) 파산 영국 자동차 품질의 상징인 롤스로이스사(社)가 `커다란 국가적 비극`이란 정치적인 표현처럼 1971년 2월 4일 파산 선고를 받았다. 록히드 항공사의 새로운 트라이스타 여객기를 위한 제트엔진 개발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회사는 발표했다. 영국정부는 롤스로이스사의 제트엔진 사업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콩코드 초음속 정기 여객기를 위한 엔진의 개발을 포함한 거대한 국제적 계획와 국가 방위를 위한 것이라고 재빨리 발표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과학기술분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 산업기술개발과 기술지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1966년 2월 4일 발족됐다. 이후 화학연구소, 해양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 대부분의 정부출연 연구소가 KIST에서 분리돼 독립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파병의 대가로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미국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부는 해외에서 유학중이거나 자리를 잡고 있던 우리 과학자들을 유치, 당시 대학교수 월급의 세배를 지급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았고 박대통령도 불시에 KIST 연구원들을 방문해 사기를 북돋아줬다. /조선
[오늘의 역사]한국과학기술연구소 발족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뒤처져 있던 한국의 과학 기술 개발을 목표로 설립돼 1966년 오늘 활동을 시작했다. 최규남 박사와 김용완, 박철재, 성좌경, 송대순, 안동혁, 이량, 이우용, 이종진, 장예준 등 1960년대를 대변한 한국과학기술자들 상당수가 설립 준비 자문위원회원으로 활동했다. 미국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서울 성북동에 만들어진 KIST는 세계 최초로 네트워크 기반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등 한국 과학 기술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화학연구소, 해양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 대부분의 정부출연 연구소가 KIST에서 분리돼 독립했다. 한국과학기술소로 처음 문을 연 KIST는 1981년 한국과학원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합쳐졌다. 1989년 6월 12일에는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연구를 수행하는 종합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충청투데이 2010.02.04 00:01
1962 - 베트남전 미군 헬기 첫 추락 [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베트남전 美헬기 첫 추락 “타다다다다다….” 베트남전쟁은 헬리콥터 편대의 굉음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육군은 총상을 입고 정글에 고립된 병사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리고 정글 깊숙한 곳에 전투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헬기를 사용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에선 미군이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키는 동안 헬기의 확성기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물론 상상력의 산물일 테지만. 갑자기 정글 위에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하는 미군 헬기는 베트콩에겐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 베트남전쟁은 명실 공히 최초의 ‘헬기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미군에 헬기가 도입됐고, 6·25전쟁 때 구조 작전에도 투입됐지만 시험 단계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쟁에서야 이른바 ‘공중 기동력(air mobility)’이라는 전투 개념이 도입됐다. 수직 이착륙, 후진 비행, 제자리 비행이 가능한 헬기의 탁월한 기동 능력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 중 투입된 헬기는 모두 1만1827대. 100여 대의 헬기가 한꺼번에 기동하기도 했다. 헬기가 없었다면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을 지키는 데는 3배 이상의 미군 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가장 많이 투입된 기동헬기 ‘UH-1 휴이’는 베트남전쟁의 심벌이 됐다. 미 육군은 나중에 UH-1에 기관총을 달아 공격용으로 활용했고 이를 ‘AH-1 코브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 헬기는 ‘CH-21 쇼니’였다. 굽은 바나나처럼 생겨 ‘나는 바나나(flying banana)’로 불린 CH-21 33대가 1961년 12월 수송함에 실려 남베트남에 도착했고, 주로 남베트남 병력을 전장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1962년 2월 4일 이 중 한 대가 메콩 삼각주 지역의 홍미라는 마을 근처에서 추락했다. 베트남전쟁 최초의 헬기 추락이었다. CH-21은 속도가 느리고 소총에도 격추되는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베트콩이 던진 창(槍)에도 추락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고 곧 UH-1로 대체됐다. ‘헬기 전쟁’이 낳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투입된 헬기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5086대가 파괴됐다. 조종사 2197명과 승무원 2717명이 숨졌다. 베트남전쟁 중 미군 사망자 5만8148명의 8%가 넘는 수치다. 당시 첨단 전투를 주도했던 미군. 하지만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베트남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6-02-04 03:06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204/8272075/1
1959 - 여적 필화 사건 [어제의 오늘]1959년 여적 필화 사건 ㆍ부활하는 ‘필화의 망령’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 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1959년 2월4일자 경향신문의 칼럼 ‘여적(餘滴)’에 실린 일부분이다. 자유당 시절 한국의 정치 현실이 다수의 의사를 공정히 반영해야 하는 선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방치할 경우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혁명으로 표출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글로 인해 경향신문은 4월30일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폐간 명령을 받았고 필자인 주요한과 사장 한창우는 사법처리됐다. 정부 당국이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필자를 사법처리한 근거는 미군법령 88호를 위반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내란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독립국가의 언론을 미군정 법령에 근거하여 없애버린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으로 기록됐고 한국 언론사에서 지울 수 없는 수치로 남았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2-03 18:19: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2031819595&code=100100&s_code=ap005
1958 - 국무회의. 원자력원 설치안 의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1954년 12월 유엔총회에서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협력에 관한 결의(안)인 국제원자력기구 설치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 개최가 통과되어 1956년 9월 유엔 산하기관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가 설립되었다. http//www. khnp.co.kr
- Independence Memorial, Colombo
16세기부터는 유럽 열강의 침입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우선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해안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1602년에는 네덜란드인이 침입하여 포르투갈인을 몰아냈고, 1795년에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마지막 신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1946 - 중국에서 광복군 6백여명 환국 광복군 6백여명 환국(1946.2.4) 조국광복의 역사적 수레바퀴가 매진하고 있는 오늘 건국의 초석이 되어 조국만년의 흥륭에 이바지 하려는 우리들의 광복군은 전번에 지대원의 일부 입국을 보았는데 오늘까지 귀국의 날을 기다리던 중국 각지의 광복군은 드디어 4일 약 3백명이 서울에, 또 약 3백명은 인천에 도착하였다. 보무당당한 입국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못하였으나 그들의 입국이 앞날 우리 건국도상에 얼마마한 도움이 될 것인가는 퍽 기대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6.2.5)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http://www.pcic.go.kr:8088/pcic/pdsBoard.do?action=view&boardId=docs&main= pds&sub=docs&pageIndex=4&searchKey=&searchValue=&articleId=231
미국, 영국, 소련 정상 얄타회담 개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수뇌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정식명칭은 크림회담이다. 이 회담에서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원칙 재확인, 소련의 대일전 참전 결정, 유엔의 거부권 문제가 토론됐다. 주요 의제는 독일문제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의 항복 후 분할 점령한다는 것을 논의했다. 또한 소련의 대일참전에 관한 `비밀협정`도 체결됐는데, 거기서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하는 대가로 사할린, 쿠릴열도를 획득하고 일본의 보유지처리와 관련하여 다롄항의 국제화, 소련의 뤼순 조차권회복의 회복, 만주철도의 중·소공동운영 등의 권익을 보장받았다. 이들 일련의 협정 가운데, 3개국 수뇌 코뮈니케만이 1945년 2월 12일에 발표됐으며 얄타비밀협정은 1년 뒤인 1946년 2월 11일, 얄타협정은 1947년 3월 24일 각각 미국무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조선
1938 -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미국 극장에서 상영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937 film) Release date(s) December 21, 1937 (1937-12-21) (premiere)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is a 1937 American animated film based on Snow White, a German fairy tale by the Brothers Grimm. It was the first full-length cel-animated feature in motion picture history, as well as the first animated feature film produced in America, the first produced in full color, the first to be produced by Walt Disney, and the first in the Walt Disney Animated Classics canon.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premiered at the Carthay Circle Theatre on December 21, 1937, and the film was released to theaters by RKO Radio Pictures on February 4, 1938. The story was adapted by storyboard artists Dorothy Ann Blank, Richard Creedon, Merrill De Maris, Otto Englander, Earl Hurd, Dick Rickard, Ted Sears and Webb Smith. David Hand was the supervising director, while William Cottrell, Wilfred Jackson, Larry Morey, Perce Pearce, and Ben Sharpsteen directed the film's individual sequences. ... http://en.wikipedia.org/wiki/Snow_White_and_the_Seven_Dwarfs_(1937_film)
제3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 [The 3rd Olympic Winter Games] 미국 뉴욕주 애디론댁 산맥에 있는 해발고도 549m의 레이크플래시드에서 1932년 2월 4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개최, 17개국에서 252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1923년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IOC) 로마 총회에서 미국의 제10회 올림픽 경기대회 유치를 결정함에 따라 함께 열리게 되었다.
야히아 칸 [Yahya Khan, Agha Mohammad, 1917.2.4~1980.8.10] 파키스탄의 대통령(1969~71). 직업군인으로서 1966년 파키스탄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야히아 칸은 18세기에 델리를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통치자 나디르 샤 군인가문에서 태어났다. 펀자브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후에 데라둔에 있는 인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이탈리아와 중동 지역에서 복무했으며, 인도가 분할된 후인 1947년 파키스탄 참모학교를 창설했다. 인도와의 카슈미르 전쟁을 치른 뒤, 그는 나이 34세로 파키스탄의 최연소 여단장이 되었으며, 40세에는 대장, 1966년에는 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아유브 칸 대통령의 부하였던 그는 시가지 폭동이 발발했을 때 군의 지휘를 맡았다. 아유브 칸은 그에게 정부의 명령에 따라 파키스탄의 평정을 유지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계엄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무질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라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아유브 칸이 1969년 3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야히아 칸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71년 중앙 정부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동(東)파키스탄 아와미당(黨)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다. 동파키스탄의 지도자는 지리적으로 볼 때 국가의 절반에 해당하는 자신의 통치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해줄 것을 요구했고, 야히아 칸은 그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서 아와미당에 대한 군진압을 명령했다. 그의 진압명령은 잔인하게 수행되었다. 그결과 수백 만 명의 동파키스탄 피난민들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그러한 사태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침략과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서파키스탄인들에 대한 폭동사태를 야기시켰다.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독립국이 되었으며, 야히아 칸은 동파키스탄 지역을 상실한 후 1971년 12월 20일 사임했다. 그의 자리는 외무장관 줄피카르 알리 부토에게 넘어갔으며, 부토는 그를 가택연금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히아 칸은 뇌졸중으로 마비증세를 나타냈으나 곧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1913 -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Parks, Rosa) 출생 파크스 [Parks, Rosa Louise McCauley, 1913.2.4~2005.10.24] 로자 리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년 2월 4일~2005년 10월 24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가이다.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그녀는 “현대 민권 운동의 어머니”라고 칭송되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382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이 때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민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하루일을 마친후 로자는 오후 6시쯤 클리블랜드 거리에서 버스를 탔다. 요금을 내고 유색칸으로 표시된 좌석들 중 가장 첫 줄의 빈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정류장을 계속 지나는 동안 앞에 있는 백인 전용칸의 좌석들이 점차 차게 되었고 엠파이어 극장 앞의 세 번째 정거장에서 몇 명의 백인들이 승차하였다. 버스 운전기사인 제임스 F. 블레이크는 두세 명의 백인 승객들이 서 있게 되자 유색 칸의 표시를 로자가 앉은 자리 뒤로 밀어내고 중간에 앉은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하였다. 세 명의 다른 흑인들은 움직였으나 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왜 일어나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였다. 버스운전기사인 블레이크는 경찰을 불러서 로자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의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녀가 앉을 때에는 유색 칸이었으므로 혐의가 풀려 저녁때에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 조례는 1900년에 제정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로자 파크스의 친구인 E.D. 닉슨은 앨라배마 주립 대학 교수인 조 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또한 여성 정치 위원회(WPC, Women's Political Council)는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12월 4일 일요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각지의 흑인 교회가 동참한다고 발표하였다. 버스 안에서 흑인이 충분히 평등하게 존중되고 흑인 운전사가 고용되며 먼저 탄 사람이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기로 하였다. 4일 후에 로자 파크스는 질서를 어지럽힌 행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유죄를 선고 받아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물게 되었다. 그녀는 이에 항소하여 무죄와 인종 분리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5일 월요일, 성공적으로 하루 동안의 보이콧 운동을 마친 후 지온 교회에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만들어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 모임의 회장으로 젊고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덱스터 애비뉴의 침례교회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선출되었다. (발췌) /위키백과
1906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Tombaugh, Clyde) 출생 톰보 [Tombaugh, Clyde William, 1906.2.4~1997.1.17] 미국의 천문학자. 명왕성(冥王星)에 대한 다른 천문학자들의 예측에 자극을 받아 체계적인 조사 끝에 명왕성을 발견했다(1930). 또한 그는 몇몇 성단과 은하단을 발견했고 외부은하의 겉보기 분포에 관한 연구와 화성(火星), 금성(金星), 목성(木星), 토성(土星), 달의 표면을 조사·관측했다. 톰보는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에 있는 로웰 천문대에서 보조 천문학자로 일했고, 애리조나주립대학교에서 과학강사, 화이트 샌드 미사일 지구에서는 광학물리학자·천문학자로서, 그리고 뉴멕시코주립대학교 지구과학과의 부교수(1961~65), 정교수(1965~73), 그리고 1973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톰보는 수많은 천문학회의 회원이었으며, 〈지구의 미소위성 탐사 The Search for Small Natural Earth Satellites〉(1959)·〈우주항공의학 강의 Lectures in Aerospace Medicine〉(1960, 1961)를 포함한 몇 권의 책을 출판했고, 패트릭 무어와 함께 〈암흑으로부터:행성 명왕성 Out of the Darkness:The Planet Pluto〉(1980)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본회퍼 [Bonhoeffer, Dietrich, 1906.2.4~1945.4.9]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1906년 2월 4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Wroclaw)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도 였다. 그는 8명의 형제 중 6번째였다. 튀빙겐대학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나약하며 그 나약함으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강림했다고 역설했다. 당시 그의 신학사상은 직선적이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하였다. 1931년 베를린 공과대학의 강사가 되어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반(反)나치스의 자세를 고수하였으며, 1935년 비합법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교수자격이 박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강연여행 중이던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1940년에는 강연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1942년 국방군의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몰트케 백작 등과 함께 반나치스 지하조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며 베를린의 터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된 동안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우고, 1944년 7월 20일 스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였다. 폭약이 터졌지만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본회퍼는 1945년 4월 미군의 진출 직전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1951년 《옥중서간》이 출판되었다. /naver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거든, 욕망과 지위에 의해 이리저리 끌리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워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그대가 찾은 목표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는 이와 같은 훈련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 디트리히 본회퍼(1936)
린드버그 [Lindbergh, Charles Augustus, 1902.2.4~1974.8.26] [역사속의 오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출생 항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찰스 린드버그가 1902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의 단독 무착륙비행에 성공한 인물이다. 린드버그는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2년 동안 정규교육을 받은 뒤 비행술에 관심을 가지고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하는 항공우편 조종사가 되었다. 이때 현상금 2만 5천 달러가 걸린 뉴욕과 파리 사이의 무착륙비행에 도전하기 위해 한 사업가 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특별기를 주문·제작했다. 1927년 5월 린드버그는 단엽기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했다. 33시간 39분 동안 약 5천800㎞를 비행한 끝에 파리에 무사히 도착, 세계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단독비행에 성공해 전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의사 카렐과 협력하여 인공심장을 시험제작했고 독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받았다. 다시 미국으로 귀국, 제2차 세계대전때 미국의 중립을 지지하는 연설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는 군의 고문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군과 항공회사의 고문직을 맡았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8년 02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26&yy=2008
프레베르 [Prévert, Jacques-Henri-Marie, 1900.2.4~1977.4.11] 프랑스의 시인. 뇌이쉬르센 출생. 파리에서 자랐으며, 1930년까지는 초현실주의 작가 그룹에 속하는 시인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이후 그 관심을 영화로 돌려 《악마는 밤에 온다》 《말석 관람객들》 등의 명작 시나리오를 썼다. 초기의 시에는 쉬르레알리슴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샹송풍의 후기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열(愚劣)과 불안의 시대에 대항하는 통렬한 풍자와 소박한 인간애가 평이하고 친근감 있는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롤 Paroles》(1948) 《스펙터클》(1951) 등은 그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표작이다. J.코스머가 작곡한 샹송 《낙엽》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네이버
- Emilio Aguinaldo
필리핀의 역사 - 미국식민지 시대(1898년~1942년)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 USS Maine호가 쿠바의 하바나항에서 스페인군에 의해 침몰, 260여명이 사망하게 되자 쿠바의 독립전쟁에서 미국과 스페인이 격돌하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1일 조지 드웨이(George Dewey) 제독이 마닐라만 입구인 코레히도르섬 인근에서 스페인 군함을 격침시켰다. 그후 유럽의 열강인 영국, 독일, 프랑스의 군함들은 물론 일본의 군함까지 마닐라만에 몰려들어 마닐라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1898년 6월 12일 에밀리오 아귀날도(Emilio Aguinaldo)는 망명지인 홍콩으로부터 마닐라 남부 카비테(Cavite)에 상륙하여 카비테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불라칸(Bulacan)주의 말로로스(Malalos)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1998년 7월 하순경 12,000명의 군대를 마닐라에 상륙시켜 스페인 총독 Fermin Jaudenes로부터 필리핀 통치권을 넘겨 받고 1898년 8월 13일 정식으로 필리핀을 접수하였다. 미국은 189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스페인과 협상 결과 미국이 스페인 측에 2천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쿠바의 독립과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넘겨 받기로 결정하였다. 필리핀이 이미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였지만 미국은 필리핀이 자치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할 것을 주장하고 1899년 1월 20일, 미국의 맥킨리 대통령은 초대 필리핀 신탁통치 위원장으로 슈만(Schurman)을 임명하고 필리핀 측에 추천장을 보냈지만 아귀날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아귀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899년 1월 23일 마롤로스에서 정식으로 필리핀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1899년 2월 4일부터 2년여에 걸친 미국과 필리핀 간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미국은 126,000명의 군대가 필요했으며, 미군 4천여명과 필리핀 독립군 16,000명이 희생된 것은 물론 2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하였다. 계속되는 미국의 진압으로 아귀날도의 독립군은 와해되고 아귀날도는 중부 루손지방에서 계속 게릴라활동을 하다가 1901년 3월 23일 마닐라에서 미국에 체포되어 미국에 충성하기로 맹세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1903년까지 필리핀인들은 산발적으로 미국에 대한 저항활동을 하였지만 새로 조직된 필리핀 경찰에 의해 저지되고 만다. /필리핀 제비둥지
에르하르트 [Erhard, Ludwig, 1897.2.4~1977.5.5] 독일의 경제학자·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장관(1948~63)을 지내면서 독일(서독)의 경제복구를 주도했으며, 1963~66년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나치에 오염되지 않은 전문 경제학자로서 전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 당국에 의해 뉘른베르크-퓌르트 지역의 산업을 재건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후 프랑켄 중북부 지방의 경제고문, 바이에른 주 경제장관(1945~46), 화폐신용문제 담당 자문위원회 위원장(1947~48), 영·미 공동 점령지역 경제위원회 의장(1948~49)을 차례로 역임했다. 1948년말에 이르자, 지난해 여름에 그가 실시한 화폐개혁이 효과를 발휘하여 재기불능의 독일경제가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다. 1949년 9월부터 그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독일의 경제장관으로서 재건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후 그는 경제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적용하여, 흔히 독일의 '경제기적'으로 불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57년 부총리로 임명되었고, 1963년 10월 아데나워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의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내각의 사퇴로 위기를 맞아 1966년에 그는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그는 기독교민주당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브리태니커
- Belgium, 200 Francs (Banknote)
1894 -벨기에 태생의 색소폰 발명자 아돌프 삭스(Sax, Adolphe) 사망 삭스 [Sax, Antoine Joseph Adolphe, 1814.11.6~1894.2.4] 벨기에 태생 프랑스의 악기제조업자, 색소폰 발명자. 피아노·하프·기타·목관악기·금관악기 제조업자인 샤를 조지프 삭스(1791~1865)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뤼셀 음악원에서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공부했고 1842년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개량해서 색소폰을 발명했는데, 이 악기는 홑리드로 된 금관악기로 원추형 관과 옥타브에서의 올려불기(overblowing) 등이 특징이었으며, 1846년 특허를 얻었다. 아버지와 함께 뷰글 혼을 개량한 색스혼(1845 특허), 뷰글과 트럼펫 사이의 음을 내는 색스 트롬바, 색스튜바 등을 발명했다. 또는 공명관 속에서 진동하는 공기 기둥의 길이가 음색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57년 파리 음악원의 색소폰 강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여러 악기들을 상업적 목적이 없이 개량·발명했다. 그의 많은 악기들은 프랑스 군악대 악기로 채택되었는데, 그의 특허권을 뺏으려는 다른 악기 제조업자들로 인해 10년 동안 법적 투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80세 되던 해 그는 아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에마뉘엘 샤브리에, 쥘 마스네, 카미유 생 상스 등이 그를 돕기 위해 문화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93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고생물학자, 인류학자 레이먼드 다트(Dart, Raymond) 출생 다트 [Dart, Raymond Arthur, 1893.2.4~1988.11.22] 인류의 화석을 발견하여 인류진화의 기원을 밝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24년 당시에는 아시아를 인류의 발상지로 여기고 있었는데 다트가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대사막 가까이에서 타웅 두개골을 복원하고 인간적인 특징을 밝혀냄으로써 이같은 원인(原人) 유형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될 것이라던 찰스 다윈의 예언을 사실로 입증했다. 다트는 이 두개골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라는 새로운 속(屬)과 종(種)의 표본으로 삼았다. 뇌의 크기가 원숭이 정도에 지나지 않으나 치아와 자세가 인간에 가까운 특징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는데 처음에는 의심에 찬 반대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모자이크식 진화원리, 곧 몇 가지 특징이 다른 특징에 앞서 발달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트의 주장은 뇌가 커지면서 인류가 진화하기 시작했다는 엘리엇 스미스의 모자이크설과는 크게 달랐다. 오히려 다트의 이론은 뒤이어 발견된 사항들로 확고해졌다. 1940년대말 남아프리카 마카판스가트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類)의 유물을 발견하고 잇따라 L. S. B. 리키의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아프리카는 유인원이 처음 생겨난 지역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트는 퀸즐랜드대학과 시드니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23~58년 요하네스버그 위트워터스랜드대학 의학부에서 강의했다. 이 대학에는 그를 기념한 아프리카 인류연구소가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프랫 [Pratt, E(dwin) J(ohn), 1883.2.4~1964.4.26] 캐나다의 시인.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어릴 때에는 목사 훈련을 받았고 토론토대학교 빅토리아 칼리지에 등록하기(1907) 전부터 이미 가르치고 설교를 했다. 1911년 철학학사로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191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1917년에 펴낸 그의 저서 〈사도 바울로의 말세론 연구 Studies in Pauline Eschatology〉는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것임). 다음에 그를 사로잡은 것은 심리학이었다. 그는 1919년까지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연구했으며, 같은 해 그 학교의 영문학교수가 되어 1953년 명예교수로 은퇴했다. 프랫의 초기 시집 〈라첼 Rachel〉(1917 출판)·〈뉴펀들랜드 운문 Newfoundland Verse〉(1923)은 그의 어릴 적 기억, 특히 바다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어부의 용기와 고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여기에 실린 시는 이야기체 기법에 대한 관심과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마녀의 양조법 The Witches' Brew〉(1925)·〈거인 The Titans〉(1926)에 잘 드러나 있다. 후자는 2편의 장시 〈향유고래 Cachalot〉·〈반목(反目) The Great Feud〉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고래잡이에 관한 이야기인 〈마녀의 양조법〉은 가장 뛰어나고 또한 널리 읽히는 작품이다. 세 작품은 모두 8음절 2행연구로 되어 있으며, 풍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생생한 해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매혹시켰던 난파선이라는 주제는 〈루스벨트호와 앤티노호〉(1930)·〈타이태닉호 The Titanic〉(1935)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으며,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자연의 무심함을 어두운 느낌으로 그리고 있다. 〈브레뵈프와 그의 형제들 Brébeuf and His Brethren 〉(1940)에서 프랫은 시인으로서 최고의 절정기에 이르고 있다. 약강5보격(弱强五步格) 무운시 12권으로 된 이 연대기는 이로쿼이족의 손에 죽은 예수회 선교사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출간된 프랫의 글들은 주제별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퇴각하는 연합군을 그린 〈덩커크 Dunkirk〉(1941), 단편시 모음집인 〈정물화 외(外) Still Life and Other Verse〉(1943), 종전(終戰)의 상황을 다룬 〈그들은 돌아온다 They Are Returning〉(1945) 등이 있다. 〈항해일지 뒷이야기 Behind the Log〉(1947)는 제2차 세계대전중 무르만스크에 보급품을 날랐던 캐나다 호위함의 영웅적인 행적을 기념한 글이다. 프랫의 다음 작품 〈마지막 역을 향하여 Towards the Last Spike〉는 캐나다-태평양 철도 건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여러 상을 받았으며 그중에는 캐나다 시민으로는 가장 높은 영예인 '성(聖) 미카일과 성 게오르기우스 명예훈장'(1946)도 있다. /브리태니커
- Fernand Leger - 'Leisure'
- 'Flowers in a Vase' - 'Three Musicians'
- 'Les Constructeurs'
- 'Swedish Ballet' Booklet
1881 - 프랑스의 화가 페르낭 레제(Léger, Fernand) 출생 레제 [Léger, (Joseph-)Fernand(-Henri), 1881.2.4~1955.8.17] 조제프 페르낭 앙리 레제 (Joseph Fernand Henri Léger, 1881년 2월 4일 ~ 1955년 8월 17일) 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인물을 그렸다. 뒤에 무대 장치와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순수 영화를 제창함으로써 전위 영화의 길을 열었다. 1930년 전후부터 곡선을 자주 사용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식〉, 〈아담과 이브〉, 〈트럼프놀이〉등이 있다. /위키백과
보로실로프 [Voroshilov, Kliment Yefremovich, 1881.2.4~1969.12.2] 소련의 군인·정치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협력자인 요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 당원으로 활동한 그는 10월혁명의 뒤를 이어 발생한 내전에 참가했다. 내전 기간 동안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보로실로프는 1919년 여름 차리친(지금의 볼고그라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 지역 담당 정치위원인 스탈린과 교분을 쌓았다. 1925년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국방인민위원으로 등용했으며, 이듬해에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발탁했고 1935년에는 연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보로실로프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패배로 말미암아 국방위원직에서 물러났으나 1941년 6월 독일과 소련의 개전 이후 국정을 통괄하던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7월 10일에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어임무를 띤 북서군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결연한 의지와 영웅주의적 행동 과시에도 불구하고 보로실로프는 레닌그라드 방어전에서 독일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9월에 사령관직에서 축출되었지만 대전 말기까지 주요직책에 유임되었다. 1945~47년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특명을 받고 헝가리의 공산정권 수립을 감독했다. 종전 후 그는 군사전문가로서 정치국에 계속 남아 있었으나 그의 역할과 권한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고 1953년경에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난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그해 3월 스탈린이 사망하고 보로실로프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1957년 간부회의(이전의 정치국) 위원들의 흐루시초프 축출기도에 가담, 정국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1961년 10월에야 공개된 이 '반당분자' 사건에도 불구하고 보로실로프는 계속 정부와 당의 고위직책에 머물렀으며 1960년 공직에서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에베르트 [Ebert, Friedrich, 1871.2.4~1925.2.28] 독일의 정치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1889년 사회민주당(SPD)에 입당, 실무가로 인정을 받아 1905년 이래 중앙당에서 주요 책무를 수행하였다. 1912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3년 당수 A.베벨의 사후에는 H.하제와 함께 당 의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독일 국내외에서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제정(帝政) 군부의 재건에 의한 군비강화에 노력한 결과 우익 제정파의 힘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1920년 3월 카프 봉기(Kapp Putsch)를 초래하였다.
브란데스 [Brandes, Georg (Morris Cohen), 1842.2.4∼1927.2.19] 덴마크 비평가·학자. 코펜하겐 출생. 1864년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뒤 1865∼1871년 유럽 여행 중 J. 르낭·H. 테인·J.S. 밀 등의 영향을 받아 덴마크를 문화적 고립과 지방적 편협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871년 귀국하여 코펜하겐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을 《19세기 문학의 주류(6권, 1872∼90)》로 출판하여 유명해졌다. 그것은 세계문학적 견지에서 서유럽 각국 문화의 교류와 상호 영향을 파악, 작자의 개성을 선명하게 그려낸 뛰어난 문학비평이다. 1880년대 후반에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 급진주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주요 저서로는 《덴마크 시인들(1877)》 《현대 약동기의 사람들(1883)》 《귀족적 급진주의(1889)》 《셰익스피어(1895∼96)》 《괴테(1915)》 등이 있다. /야후 백과
아데르 [Ader, Clément, 1841.2.4~1926.3.5] 독학으로 성공한 프랑스의 공학자·발명가. 라이트 형제 이후 비행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유년기부터 항공기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870년의 전쟁중에 자신의 돈으로 기구(氣球)를 제작했다. 그의 전기통신 분야의 초기발명으로는 마이크로폰·확성장치 등이 있다. 뒤에는 중(重)항공기(가벼운 기체를 이용해서 뜨는 기구와는 다른, 엔진을 이용한 비행체)에 대해 열중했다. 1890년 그가 ' 에올레'(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 명명한 증기동력기와 날개 모양이 박쥐의 모양과 비슷한 단엽기(單葉機)를 만들었다. 10월 9일에 파리 근처의 친구 사유지에서 50m 정도 비행했으나, 증기기관은 가솔린 기관에 비해 비행을 유지·조절하는 데 부적절했다. 그러나 그의 단거리 비행은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체가 자체의 동력으로 이륙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넴초바 [Nemcová, Bozena, 1820.2.4~1862.1.21] 보제나 넴초바 (체코어: Božena Němcová), 바르보라 노보트나(Barbora Novotná), 바르보라 판클로바(Barbora Panklová) (1820년 ? 2월 4일 비엔나 - 1862년 1월 21일 프라하)는 체코 작가이며 현대 체코 산문의 창시자로 인정 받고 있다. 생애 1820년 그의 어머니 테레지에 노보트나(Terezie Novotná)가 요한 판클(Johann Pankl)과 결혼하였다. 1821년 판클로바 가족은 라티보르지쩨 (Ratibořice)로 이사를 가고 1825년 그의 할머니 막달레나 노보트나 (Magdaléna Novotná)가 뒤따라 이사를 온다. 할머니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성인이 된 후에 할머니를 매우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다. 1826년부터 흐발코비쩨 (Chvalkovice)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1830년부터는 체스카 스칼리쩨 (Česká Skalice)에서 학교를 다닌다. 1837년 그는 요세프 네메츠 (Josef Němce, 1805년 - 1879년)와 결혼한다. 요세프 네메츠는 재무 감독관으로 요즘의 세관원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적 행동이 상관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자리를 옮겨야 했고 따라서 가족들은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1840년 체이키 (J. Čejky) 박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그와 친구가 되고 박사는 넴초바에게 당대의 민족주의 작가들을 소개시켜 준다. 일년 후 프라하로 이사하여 바츨라프 볼레미르 네베스키(Václav Bolemír Nebeský)와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Karel Jaromír Erben)의 영향을 받아 체코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1843년 남편과 함께 도마줄리쩨 (Domažlice)로 떠나고 이곳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민족 계몽가로 활동한다. 1847년 도마줄리쩨에서 돌아온다. 1848년 요세프 네메츠가 반역 모의 혐의를 받고 이곳 저곳으로 강제 이주를 다닌다. 1850년 요세프 네메츠가 우흐리 (Uhry)에 이송되었을 때 그녀는 네 아이와 함께 프라하로 옮겨가서 즉시 문학 활동을 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한다. 1852년 남편을 찾아 우흐리로 가는 길에 슬로바키아를 보게 된다. 다음 해에 우흐리까지 남은 여정을 마친다. 1853년 요세프 네메츠는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처음에는 월급이 절반을 주어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중단된다. 요세프 네메츠는 일자리를 잃어버렸고 보제나 넴초바는 프라하의 아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부터 넴초바의 편지는 경제적으로 얼머나 어려웠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Babička (할머니)를 썼다. 모라비아의 신문 출판업을 하는 프란티셱 카쩰 (František Kácel)을 알게 되고 그는 넴초바의 작품을 카롤리나 스베틀라 (Karolína Světlá)와 소피에 포들립스카(Sofie Podlipská)와 함께 출판한다. 1853년 아들 히넥(Hynek)이 죽은 후 남편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요세프 네메츠는 이혼을 제안하기에 이르지만 거두어 들인다. 넴초바는 멀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가까워진다. 이 시기에 넴초바는 (Májovci)와 어울린다. 하지만 보제나 넴초바는 연금되고 카렐 하블리첵 보롭스키 (Karel Havlíček Borovský)의 장례식 (1855년)에만 참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넴초바는 비셰흐라드 (Vyšehrad)에 묻혔고 사후에 유명해 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중 하나는 어떤 전기 작가들은 1816년에 출생했다고 하고 몇몇은 1817년에 출생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의 어머니는 겨우 15살밖에 되지 않았었고 편지와 작품을 통해서도 사실을 알 수 없다. 가설 중 하나는 카테르지나 자한스카(Kateřina Zaháňská) 공작 부인 또는 자매인 (Dorethei)의 혼외 딸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그녀가 가난한 가족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위키백과
슈트로스마예르 [Strossmajer, Josip Jurai, 1815.2.4∼1905.4.8] (영)Joseph George Strossmayer.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로마 가톨릭 주교. 강경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국민당을 격려하고 이끌었다. 몰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 1838년 사제서품을 받아 빈에서 신학강사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황실의 지도신부가 되었다. 1850년에는 다코보에서 보스니아와 시르미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애국심이 투철한 그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달마치야, 오스트리아 남부에 있는 슬로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슬라브 민족주의의 성장을 도왔다. 크로아티아의 정치적·군사적 지도자인 요시프 옐라치치의 반(反)헝가리 운동을 지지했으며(1848~49), 뒤에는 크로아티아 민족의 권리를 지배하고 간섭하는 헝가리에 대항하는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860~73년 크로아티아 국회의원이었고, 1876년에는 남(南)슬라브아카데미라는 대학을 창설했으며, 달마치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모든 교육제도를 재조직하는 데 힘썼다. 다코보에 주교관저와 성당을 지었으며,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했다. 많은 민족노래집과 이야기집을 출간했으며, 수도원·학교·도서관을 설립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의 사서, 역사학자·교회법 학자였던 아우구스틴 타이너를 도와 그의 〈남슬라브의 역사를 밝히는 고대의 증거 Vetera Monumenta Slavorum Meridionalium Historiam Illustrantia〉(1863)를 편집했다. 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에서 교황 무류설을 반대한 주요인물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재통합을 위해 러시아의 에큐메니컬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솔로뵤프와 함께 일했다. /브리태니커
홉킨스 [Hopkins, Mark, 1802.2.4~1887.6.17] 미국의 교육자, 신학자. 홉킨스의 제자인 제임스 A. 가필드 미국 대통령은 그에 대해서 "참된 스승의 가치에 대해 논하지 않고 이 토론을 끝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홉킨스는 1824년 매사추세츠 주 윌리엄즈타운에 있는 윌리엄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829년 매사추세츠 주 피츠필드에 있는 버크셔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뉴욕 시에서 잠깐 의사로 개업했으나 1830년 윌리엄스대학교로 돌아와 4학년을 대상으로 도덕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 1836~72년 윌리엄스대학교의 총장으로 봉직했다.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1836년 조합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한 종교적 확신이 지적 성취보다는 신앙과 도덕적 가치를 훨씬 강조하는 가르침에 반영되었다. 또한 독학을 강조하면서 독단적이고 설교적인 교수법보다는 소크라테스식의 교수법을 더 선호했다. 물질적인 부의 축적은 신앙심에 배척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교도로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았다. 보스턴의 로웰 협회에서 했던 강의내용이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관한 강의 Lectures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1846)·〈윤리학 강의 Lectures on Moral Science〉(1862)·〈사랑의 법과 법으로서의 사랑 The Law of Love and Love as a Law〉(1869)·〈인간학 개론 An Outline Study of Man〉(1873) 등으로 발간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윌리엄스대학교 밖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책들은 여러 번 재판되었다. /브리태니커
가레트 [Garrett, João Baptista da Silva Leitão de Almeida, 1799.2.4~1854.12.9] Visconde de Almeida Garrett라고도 함. 포르투갈 작가·웅변가·정치가. 포르투갈의 가장 훌륭한 산문작가 중 하나이며, 탁월한 극작가,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이다. 1820년 코임브라대학 법학부를 졸업할 당시 이미 극작가이자 열렬한 자유주의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했기 때문에 1823년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으며, 이 시기에 2편의 애국 서사시 〈카몽스 Camões〉(1825)와 〈도나 브랑카 Dona Branca〉(1826)를 통해 포르투갈 국민에게 새로운 낭만주의 운동을 소개했다. 1832년 포르투갈로 돌아와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치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834년 브뤼셀 주재 총영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1837년에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곧이어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다. /브리태니커
1789년 2월 4일 조지 워싱턴(Washington, George, 1732~1799)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775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아메리카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그는 영국군과의 여러 차례 격전 끝에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 장군을 항복시켜 사실상 전쟁을 끝냈다. 1787년 그는 버지니아 주 대표로 연방정부 헌법 제정을 위한 필라델피아 모임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제헌회의를 이끌면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으며, 결국 1789년 2월 4일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첫 내각의 국무장관에 토머스 제퍼슨, 재무장관에 알렉산더 해밀턴, 국방장관에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 에드먼드 랜돌프를 임명했다. 1792년 워싱턴은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제2대 대통령에 또다시 선출되었다. /브리태니커
- 'St. Marinus Raising the Republic' - 'Virgin and Child'
1787 - 이탈리아의 화가 폼페오 바토니(Batoni, Pompeo) 사망 바토니 [Batoni, Pompeo Girolamo, 1708.1.25~1787.2.4] 이탈리아의 화가. 루카 출생. 1728년 로마에 가서 라파엘로의 작품과 바티칸궁전의 고대조각 등을 연구하고, 고전주의의 작풍을 익혀 산그레고리오성당과 산체르소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명성을 얻었다. 이후 1740년경에 《막달라 마리아》《프로메테우스》《메레아그로스의 죽음》(1740∼1743), 베를린미술관의 《푸슈케의 결혼》(1756), 산타마리아 데리 앙제리성당의 《마술사 시몬의 타락》(1760) 등을 클래식풍의 화려한 필치로 그려 당시 로마에 있던 독일화가 라파엘로, 멘구스와 신고전주의미술의 정상을 다투었다. 자연에 즉응한 정묘한 초상화가로서도 호평을 받아 교황 ·황제 ·귀부인 등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네이버
코시치우슈코 [Kosciuszko, Tadeusz Andrzej Bonawentura, 1746.2.4~1817.10.15] 폴란드의 군인. 자유와 독립의 국민적 영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존경받고 있다. 리투아니아 브레스트현(縣)의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바르샤바의 기병학교를 나온 뒤 프랑스의 베르사유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776∼1783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웨스트포인트 싸움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귀국 후 1789년 새로 편제된 폴란드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1792년의 대(對)러시아 전쟁에도 활약하였으며, 자유와 애국주의의 전사(戰士)로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후 국외로 망명하여 조국재건에 힘썼고, 1794년 3월 폴란드 국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크라코프시(市)에서 ‘봉기의 포고’를 발표하여, 정규군 및 무장농민을 거느리고 러시아군 및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동년 10월 마치에요비체의 싸움에서 부상으로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송치되었다. 1796년 러시아의 파벨 1세로부터 망명허락을 받고 프랑스에 머물렀으나, 나폴레옹 1세를 신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폴란드 정책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 후 스위스에서 죽었다. /네이버
벨만 [Bellman, Carl Michael, 1740.2.4~1795.2.11] 스웨덴의 시인. 웁살라대학을 나와 국립은행에 근무했으나, 방종한 생활로 부채 때문에 국외로 탈출한 일도 있다. 귀국 후 말단 관리를 하면서 시를 썼는데, 구스타브 3세의 인정을 받아 궁중에 한직을 얻어 유유한 시작(詩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민요에 착안하여 거기에 청신(淸新)한 생명을 불어 넣었으며, 또 술집 같은 데서 자작시를 기타에 맞추어 노래로 들려 주어 인기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술이나 사랑의 노래, 풍자적인 시 등 매우 다양하지만, 모두가 유머러스하고 명랑하면서도 애수(哀愁)가 깃들어 있다. 대표 시집은 《프레드만의 서신(書信)》(1791)과 《프레드만의 노래》(1792)이다. 지금도 해마다 문인들 사이에서 그를 기리는 벨만제(祭)가 그의 생일날에 열리고 있다. /네이버
마리보 [Marivaux, Pierre (Carlet de Chamblain) de, 1688.2.4~1763.2.12]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파리 출생. 랑베르 부인과 탕상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여 B.퐁트넬 등 문인들과 사귀었으며, 신구문학논쟁(新舊文學論爭)에서는 근대파의 입장에 섰다. 1720년 《사랑으로 연마된 아를르캥》을 이탈리아 극장에서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그 이후 대부분의 작품을 이 극장을 위해서 썼다. 몰리에르식 전통적 희극을 개혁하여 여성의 연애심리에 대한 미묘하고 섬세한 분석을 특색으로 하는 희극을 창조하였다. 《사랑의 기습》(1722) 《사랑과 우연의 희롱》(1730) 《거짓 고백》(1737) 등이 대표작이며, 후에 A.뮈세, G.포르토리슈, J.지로두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우아하고 세련된, 그리고 때로는 고답적인 문체는 마리보다지(marivaudage)라는 일반명사로 불린다. 또 《스펙타퇴르 프랑세》지(紙) 등을 단독으로 집필 ·간행하여 사회비평가로서도 활약하였다. 소설의 주요 작품인 《마리안의 생애》(1731∼1741) 《벼락부자가 된 농부》(1735∼1736) 등은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풍속을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프랑스 근대 사실소설(寫實小說)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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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