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제의극적 연출
연극과 제의는 실상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연극과 제의의 근원이 동일하다는 점과 두 양식이 현재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연극의 기원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연극에까지 연극과 제의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주지하는대로 연극은 제의의 부속양식으로 태동했다. 그런데 현대연극에서는 역으로 연극이 주체가 되고 있다. 제의와 같은 민족지적 양식들을 연극이 흡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연극이 자신의 표현기법을 확대하는 과정에 민족지의 전통연희 양식들을 새로이 이용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 현상으로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아르또(Artaud)의 잔혹연극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전통연희양식들도 현재적 생존 전략으로 연극적 양식들을 흡수하고 있다. 관객과의 관계를 확대하려는 수단으로 현대의 연극적 특성을 많이 이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의와 연극은 상대를 필요로 하며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같은 제의와 연극의 관계는 다름아닌 연출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현대연출이 제의극에서 수용하는 주요한 특징으로는 배우와 관객의 융합, 난장의 혼동적 상황, 원형에 대한 사유, 정화와 충족의 상황 등이 있고 그외에 "대사감각, 배경과 소도구들에 대한 이해, 어떤 말솜씨, 계시적인 구절에 대한 가청력" 등이 있다. 인류학적 전통에 익숙한 연출가들은 민족지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과거와 미래의 사건들과 연결시키고 행동이 이루어지게 연극작품의 여러 행동을 종합하고 통합하며 사회문화적 과정과 관련속에서 이들을 엮어 나간다. 아르또가 제창한 제의극적 연출론은 현대의 사회문제를 근원적 생명의식으로 해결해 나갈려는 것이다. 그는 연극에서 연출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여 기존의 연극을 개인적 사건이나 주제의 문자 해석이었다고 치부하고 이제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시대의 보편적 주제를 무대미술, 극적 상황, 등장인물의 행동과
연결지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아르또의 연출모토 "연극은 인생의 복사"라는 것이 나왔고 이를 통해 연극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실존, 본질, 원형―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로써 제의극적 연출방법은 인간의 근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극과 연결되고 이로부터 연원되는 생명의식으로 사회문제와도 연결되며 인류학적 관점으로 해석된 민족지의 전통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제의극적 연출 방법을 즐겨 쓰는 연출가는 오태석과 이윤택이다. 두 연출가는 그들의 작업에 한국의 원형을 형성하는 설화와 역사, 전통음악과 전통 연희인 판소리, 굿, 탈춤, 기타 민속놀이 등의 기법과 정신세계를 원용하면서 연출에 제의적 특성을 융합하고 있다.
오태석의 경우는 그의 초기작 [초분](1973)부터 지속적으로 이러한 범주내의 작업을 행하고 있다. 굿이나 판소리 등의 연희양식을 제의극적 연출에 직접 이용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형식들과 정신을 작품의 갈등조성과 해결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극장 "아룽구지"개관 기념으로 다시 공연하고 있는 "99년 아룽구지판 [부자유친]"의 경우도 이러한 작업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부자유친]에서 발견되는 제의극적 연출은 한국의 제의적 특성인 원형적 요소들과 아르또의 제의극적 연출이론이 맞물려 있다.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미 춘향전같은 설화가 되어버린 사도세자이야기, 전통윤리덕목, 전통의상과 전통음악, 춤, 악기 등의 원형적 요소들은 한국 제의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르또가 제시하는 제의적 연출론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극적 연출은 고대제의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새롭게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는 특성과 관련되어 관객에게 현시점의 나를 통찰하게 하는 의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자유친]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작품이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으로 옷을 입지 않으려 하였고 이런 문제와 관련되어 비윤리적인 문제도 발생한다. 또 괴팍한 성격으로 아무런 죄가 없
는 사람들을 살상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고 게다가 사도세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넓히려는 자들이 있어 국가 통치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영조는 이런 일련의 사태를 해결하고 징벌하려는 의도에서 사도세자를 죽이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의상과 무대미술 위에서 전개된다. 영조는 왕의 복장을 다 갖추었는데 곤룡포는 균형을 잃고 있고 신발은 조금 크게 제작되어 있으며 아랫도리는 반바지를 입고 있어 윗도리를 벗을 때나 움직일 때 다리의 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도세자는 시종 윗도리를 벗은 반나(半裸)로 등장하고 나인들은 일반적인 한복을 대신들은 종이로 만든 흰한복을 입고 있으며 무대 뒤의 단 우측에는 혜경궁홍씨가 좌측에는 선희궁이 극시작전부터 앉아 있다. 혜경궁 홍씨의 무대위 대사는 없으나 선희궁은 극종반에 이르러 목발기능을 하는 쇠로 만든 지지대를 잡고 단에서 내려와 영조의 행동을 지지하는 대사를 한다. 사도세자가 들어가 사망하게되는 뒤주는 네 개의 철골을 커다란 직사각형 모서리에 세우고 그 둘레를 흰색 두꺼운 비닐로 막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뒤주의 윗부분은 아무것도 덮지 않아 열려 있다. 이 뒤주 속으로 사도세자가 들어가 최후를 맞는다. 사도세자가 들어간 뒤주의 빈 공간은 수십 개의 커다란 인형으로 아무렇게나 채운다. 그래서 죽어가는 간 사도세자가 더 고통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작품 제목은 우리의 전통윤리 덕목에서 빌려오고 있는데 이 제목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화두처럼 던지고 있다. 전통의 윤리덕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부자의 관계는 인간의 원형적 특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부자관계라는 원형성을 빌어 제의극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부자관계가 등장한다. 두 개의 부자관계는 상반된 원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와 증오의 관계가 그것인데 상반된 원형성은 원작의 그것보다 강조되어 공연된다. 주제전달을 위해
연출이 고려하는 지적가치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대비되는 상황을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에는 증오의 원형이 존재하고 있고 사도세자와 세손과의 관계에는 사랑의 원형이 존재하고 있다. 증오의 관계는 노론과 소론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결과이기도하고 사도세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랑의 관계는 삶을 옥죄어 오는 주변 상황의 억압속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근원적인 부정(父情)을 발견하게 한다. 증오의 관계에서 가해자는 영조이다. 그는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는 사도세자의 간절한 용서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하는가 하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아들(영조의 세손)을 안아보려는 사도세자의 희망을 단호히 꺽어버린다. 이를 통해 사랑의 관계가 증오의 관계에서 부수된다는 점을 표현한다. 사랑보다는 증오가 확대되어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의식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이러한 증오의 관계와 사랑의 관계 사이에서 양가감정으로 혼란을 겪고 슬픔으로 절개되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현대인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이다. 양가감정으로 실제 생활에서 고통받는 우리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맞는 젊은 남자의 비극적 모습을 통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다시 사유해 보게 되는 것이다.
연출의 이와 같은 작품 해석은 배우들의 연기와 동작, 의상, 춤에 의해 뒷받침된다. 아르또가 제시하는 제의적 연출이론에서 중요한 표현수단은 의미가 박탈된 몽상적 대사이다. 그래서 음향을 중시한다. 언어 이외의 표현수단을 탐색하고 배우의 육체를 무대언어로 사용한다. 뿐만아니라 빛·색·소리·음악·무용·몸짓·가면·장신의 인형들도 무대언어로 사용한다. 그리고 격렬·흥분·강렬·난폭·에로티시즘·잔혹 등의 분위기로 관객의 감각을 충동시킨다. 이러한 연출이론은 굿제의가 연행될 때 발견되는 특징들과 연결되어 있다. 고대제의의 광란상태나 무당이 굿을 주관하면서 보여주는 여러 신이현상, 예를 들어 공수나 강신상태의 동작과 춤, 그리고 무악반
주 등을 생각해보면 아르또의 연출이론의 제의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오태석은 [부자유친]에서 여러 배우가 동시에 대사를 토해내는 듯한 상황을 많이 쓴다. 대사를 의미전달용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도는 음향을 중시하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사도세자의 패악한 행동을 표현할 때가 그 경우인데 이 장면에서는 제금, 장고, 꽹과리, 북 등 타악기를 이용하여 무대전체를 음향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린다. 언어에 의한 의미전달을 거부하는 기법으로 음향의 혼합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명의 배우들이 등장하여 춤을 추거나 뒤쪽의 높은 단 위로 또는 단 아래로 급하게 이동시켜 배우들을 동적 존재로 만들어 이들에게 의미전달의 한 부분을 맡도록 한다.
죄인이 칼을 쓴 채 죽어가는 장면에서도 하얀 천은 언어를 대신하여 의미를 전달 한다. 죄인은 팽팽히 당겨진 두 개의 흰 천 사이로 목을 내밀어 칼을 쓴 것처럼 한다. 무대 앞뒤로 당겨진 흰 천은 좌우로도 넓게 펴져 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흰천이 죽음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전달하기에 적절한 색은 검은색이다. 그럼에도 흰색이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흰색이 조명을 받아 강렬히 빛나는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무대의 많은 부분을 덮고 있는 팽팽한 흰색천이 조명을 받아 강렬하게 반사되면 관객은 뭔가에 압도당하는 분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흰색천은 그 사이로 목을 내민 죄인에게 더욱 잔혹하게 작용하여 그 죄인에게 죽음의 상황을 더 상승시키게 된다. 그래서 흰빛의 강렬함은 죽음의 상황을 표현하는데 검은색보다 더 효과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빛에 의해 강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흰색천이 무대언어로 기능하는 한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이 이유없이 살상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가해자 역을 맡은 배우의 몸에 여러 개의 흉칙한 가면을 부착시켜 등장시키기도 한다. 가면은 두루마
기에 가려져 있다가 옷을 젖혀을 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옷을 젖히는 순간 섬뜩한 긴장이 유발된다. 이런 장면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몸에 붙어 가해자를 따라 다닌다는 상황을 대사를 통해 전달하지 않고 가면언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난폭하고 격렬한 행위들은 더 있다. 첫장면에서 죄를지어 흰천의 칼을 쓰고 있는 여자의 머리를 제금으로 내리쳤을 때 특수장치가 된 여자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 관객들을 놀라게 하며 사도세자가 의대증 때문에 옷 입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도 난폭하고 격렬한 행위들이 광란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음으로 몰려갈 때도 이와같은 광란적 행위들이 이어진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갔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분위기는 계속된다. 붉은 살덩이를 연상시키는 길고 흐느적대는 인형들이 뒤주에 쌓이게 하여 잔혹하고 흥분된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서서히, 그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침체의 상황을 고조된 분위기로 보여주어 광란의 상태를 이뤄가는 것이다.
고대제의가 진행되는 과정에는 배우와 관객의 구분없이 모두가 혼융된 상태를 이루도록 만남의 장을 만들었다. 제의극적 연출도 이와 같은 교류의 장을 만든다. [부자유친]에서도 배우들이 춤추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악기를 두드리고 할 때 관객들은 배우와 관객의 구분없이 몰입해 들어간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경우는 설정되어 있지 않으나 광란의 상태를 유도하거나 격렬하고 흥분된 상태를 고조시키는 행위들이 바로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한 장치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태석이 보여주는 이러한 제의극적 연출에는 어떤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가. 원형성에 근거한 제의적 요소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며 현재의 자기 위상을 조감하게 하고 내면을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현재 이뤄지고 있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갖게 한다. 디오니소스적 제의에서 보여지는 광란과 격렬함
, 난폭함 등은 인간 내면의 악을 씻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마음을 정화시키고 기쁨도 준다. 그리고 사회에서 발견되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도와준다.
2. 2. 사실주의극적 연출
사실주의극은 관객의 몰입을 요구하는 제4의벽 이론에 근거해서 연출된 작품을 의미한다. 스타니슬랍스키에 의해 일반화된 이 연출이론은 사실 그 뿌리를 아리스토탤레스의『시학』에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에서 중시하는 점은 플롯이다. 즉, 구조적으로 완결된 희곡을 중시하는 것이다. 사실주의 극이 요구하는 바가 이와 같은 완결된 플롯의 희곡이다. 희곡의 이러한 특징은 희곡의 문학성과 관련된다. 다른 감각적 소재들 즉, 돌, 나무, 물감, 소리 등으로도 연극이 표현되지만 언어야말로 영혼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요소라는 설명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작가들도 희곡의 문학적 독립성을 중시하는 부류였다. 희곡을 문학으로 중시하는 이론은 모방의 문제와 세계질서의 드러냄과 사상, 철학을 전달하는데 그 무엇보다도 언어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주의 희곡에서는 언어가 중요하다. 그래서 배우의 대사 전달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항들을 연출의 5대요소로 일컫어 지는 구성, 동작, 시각화, 리듬, 팬터마임의 극화 등의 관점과도 관련을 맺는다.
구성의 첫 번째 요소는 강조이다. 강조는 관객의 눈을 머물게 하기 위한 인물의 선택과 배치를 말한다. 인물이 등장하는 수에 따라 배치되는 높이와 서로 마주보는 각도도 관객에게 연출자의 의도된 의미를 잘 전달하도록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화의 문제는 연극의 각 순간의 시각적인 해석이다. 그것은 등장인물을 제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상호간에 정신적·감정적 태도를 암시해야 하고 또한 대화와 동작없이 주어진 상황의 극적인 성격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동작은 무대위에서의 일어나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극의 흐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겁게 움직일 것인지, 천천히 움직일 것인지 팔을 높이 들 것인지 등의 움직임까지를 포괄한다. 리듬은 극의 분위기를 전하고 극의 정서와 인상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된다. 또 리
듬은 극의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매개한다. 판토마임의 극화는 극을 완전히 시각화 시키는 단계로 연출가들이 얼굴표정·몸동작·손동작 등 일상적인 움직임을 이용해 인물의 상황을 드러내고 극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북어 대가리」는 이강백 작에 김광림 연출로 93년 2월 11일부터 3월 28일까지 성좌소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창고안에 살면서 창고안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창고지기 두 사람이 있다. "자앙"과 "기임"이다. 자앙은 철저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나 기임은 그렇지 못하다. 내용물을 알 수 없고 번호만으로 상자를 분류하는 연유로 치밀하게 일을 처리 해야 한다. 자앙은 기임에게 동성애적 연민을 갖는 듯 하며 또 모성애적으로 기임을 돌보기도 한다. 기임은 창고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많은 창고지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트럭운전수의 딸 다링과 결혼하여 창고를 벗어나게 된다. 창고 밖에는 창고 밖대로의 삶의 법칙이 있다. 창고 밖은 창고 안보다 더 가혹한 삶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임은 그런 상황까지를 예상해 볼만큼 치밀한 인물은 아니다. 자앙은 기임이 떠난 창고에 홀로 남아 넋두리의 독백을 한다.
창고는 세계이다. 한 개인의 세계일 수도 있고 특정집단이나 특정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만의 세계일 수도 있다. 창고지기는 그 중 어느 한 세계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규격화 되고 일률화된 체제에 지극히 순응하는 사람과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두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창고를 벗어난 바깥에도 보이지 않는 지배논리가 있어 창고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창고를 벗어났다고 하여 세상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지배논리와 정해진 삶의 법칙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북어 대가리」는 세상 논리에 인간이 억압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점을 갖는다.
자앙은 창고와 기임사이에서 방황하고 기임은 창고안과 창고 밖 사이에서 방황한다. 인간성은 메말라가며 통제되고 규격화되는 현대사회 속에서 자기 정위를 찾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상반된 성격으로 갈등하는 두 창고지기의 사는 모습이 희극적으로 나타나면서 세상과 인간 사이의 주종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둘의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화해하지 못하고 고립화되는 현대인들의 갈등이 치열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전체적 흐름은 희극적이다. 기임역과 자앙역 모두 희극적 설정이다. 심각한 척하는 자앙도 실제는 조소의 대상이다. 융통성 없고 지나치게 체제 순응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발전을 꾀하지 못하는 바보인 것이다. 현학적인 척하는 모습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 과장된 어투, 엉뚱한 답변, 무모한 성격을 가진 기임도 희극적 인물이다. 특히 트럭운전수와 기임의 도박 장면에서는 기임의 성격이 잘 드러나 많은 웃음이 유발된다.
이 도박에는 승자와 패자가 너무도 분명히 정해져 있다. 트럭운전수는 전문도박꾼이고 기임은 그렇지 않다. 도박은 창고 밖의 세상을 동경하는 기임의 미래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창고 밖이라 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가질 수 없으며, 변함없이 억압되는 생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기임은 창고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집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패배가 예정된 나약한 인간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장치로 도박장면이 쓰이는 것이다.
「북어 대가리」는 침잠된 분위기, 희극적 분위기, 심각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연출의 세심함에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 특히, 기임이 떠난 창고가 자앙에게 더 큰 무게로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극 후반부에 무대 뒤편으로 조명을 확대하여 쌓아놓은 박스가 한 층 더 보이도록 한 점은 뛰어난 효과를 나타냈다. 또 극장입구와 객석 일부에도 상자를 쌓아 놓아 관객 모두에
게 창고의 현장성과 중압감을 더하는 데 효과적이었고 우리 모두가 극 속에서와 같이 창고 속에서 한 배역을 맡아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케 한다.
자앙(전무송扮), 기임(최종원扮), 트럭운전수(정운봉扮)로 분장한 배우들은 이미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인 데 이 연극에서도 변함없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소화하는 데 능숙하였다.
연출에 있어서 관객들의 눈을 끌어들이기 위한 구성적 측면의 특징으로는 무대를 구역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측에는 침대와 조리실이 배치되었고 가운데에는 책상이, 무대 뒤쪽에는 창고를 상징하는 박스들이 아래에서 천장까지 가득차 있다. 박스의 높이와 침대의 높이를 대조시키며 일에 억압받는 현대인의 모습이 부각되도록 장치했다. 그리고 배우들의 높이도 대조적 상황에 놓인다. 게으른 기임은 주로 누워있거나 앉아 있기 때문에 낮은위치를 형성하고 있으나 선채로 움직이며 일하는 자암은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위치의 현격한 차이가 두 인물의 대조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연출의 배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박장면에서 무대 중심에 위치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트럭운전수와 기임이 마주앉고 자앙 무대 좌측에서 계속 작업을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위치를 낮게하여 창고 박스 운반 작업을 하느라 혼자 서있는 인물과의 배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연출이 맡은 부분인 시각화의 문제와 동작 팬터마임의 극화가 비교적 동시에 해결되고 있다. 데이트를 하고 온 기암에게 자앙은 테이트 상황을 시시콜콜히 물어본다. 그리고 결혼하게될 과정에 대해서도 물어본다. 자앙에 의해서 창고물품의 변동과정에 대한 설명도 세밀히 이뤄진다. 작품을 시각화하는 단계에서 이와같은 작업은 필수과정이 된다. 자앙과 달리 기암은 모든 면에서 대강대강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조양상은 각 성격의 해석을 나름대로 보여주는 동작의 요소에 의존해 처리되고 있다.
2. 3. 서사극적 연출
김광림 작.연출의 [그여자 이순례]는 거대한 사회체계에 희생되어 개체의 사고와 행동이 거세당한 현대인의 자아찾기를 시도하는 작품이다. 보험회사에 거액의 보험금 지불 사건이 발생하자 조사부 직원들이 지불액을 최소화하려는 사건 조작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직원이 자아를 찾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량급의 사랑이야기이다. 한국전쟁동안 하룻밤의 인연이 평생의 굴레가 된 사랑과, 같은 사무실의 기혼남과 미혼녀의 비정상적 사랑이야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호기심 자극과 욕망의 대리충족을 의도하는 연극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통속적이지 않고 비정상적 사랑이지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연출의 면밀한 계산과 연기의 조화가 통속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개인문제, 가정문제, 사회문제가 극에 녹아들어 필연성과 설득력을 확보하면서 해결점을 찾아간다. 해결점이 연극에서 완전히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잊었던 것, 있어야 했는데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주는 연극이다. 20세기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위상탐구, 실존의 모습, 진실의 존재방식 찾기가 의도되고 있다. 역으로,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 허위성, 몰가치성을 엄중히 지적 비판하는 연극이다. 표현양식은 서사극적 기법에 의존한다. 현대 사회의 병폐와 비리 부정을 비판하는 최고의 연극양식으로 인식되어 온 서사극적 기법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거액의 보험을 든 주인공 김억만이 갑자기 사망하자 보험회사 조사부는 이 죽음을 의심한다. 보험금을 지불받을 사람이 즉은 김억만이 아니라 이순례의 남편 박영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보험금을 노린 타살이나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정해진 결론을 향해 죽음의 발단을 추정, 조작한다. 그렇지만 자살이 확정적이다. 직원들이 직접 배우가 되어 보험금을 노린 희대의 자살극을 꾸며 나간다. 화사부장이 박영만역을 맡고 김대리는 김억만역을 미스리는 이순례역을 각각
맡아 회사직원의 역할과 극중극의 역할이 수시로 호환되면서 극은 진행 된다.
보험금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한국 전쟁중 북한군 군관 김억만이 쫓기던 중 외딴 집에서 이순례를 만나 같이 하룻밤을 보낸다. 총살 위험에 처한 김억만을 살려주고 이순례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포로가 됐던 김억만은 이순례를 찾기 위해 석방때 남쪽을 택하게 되며 외딴집 하룻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보낸 30년후 어느 날 둘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다. 김억만은 이순례에게 용서를 빌고 잘못을 꼭 갚겠다고 한다. 용서의 댓가로 거액의 보험통장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순례의 남편 박영만은 두 사람의 밀화를 목격하고 이야기를 엿듣는다. 이순례는 괴로워하다가 우여찮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조문온 김억만은 통장을 내놓는다. 그 후 김억만이 죽고 박영만이 보험금을 받게 된 것이다.
극중극의 과거와 현재의 회사임무가 뒤바뀌는 시간의 중층구조에 과거의 사랑과 현재(김대리와 미스리)의 사랑이 복합 중층구조로 맞물리고 있다. 극중극이 완성되고 시연만을 남긴 채 김대리는 회의에 빠진다. 성공적으로 연극을 완성하였으니 판결은 회사쪽에 유리할 것이고 승진도 보장된다. 그러나 김대리는 승리감을 느낄 수 없다. 이순례와 김억만의 사랑을 물신화시킨 자신들의 과학적 논리가 부당함을 느낀 것이다. 10억의 보험금으론 보상 될수 없는 두 사람의 진실된 마음을 확인 한 것이며 10억의 거액보다 훨씬 값진 진실과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본 것이다. 자살 증명극이 끝나면서 김대리는 허무와 진실 두 가지를 함께 본 것이다.
무대는 단순하다. 일반 사무실의 배치와 같다. 우측에 부장 책상이 좌측에 직원들 책상이 있고 뒷편 창문 쪽으로 블라인드가 좌.우.가운데에 늘어져 있으며 가운데 것은 좌.우것보다 뒤쪽으로 장차되 있어 사이를 통로로 이용한다. 가운데 블라인드에는 환등기로 장면전환의 자막을 투사하고 좌.우 블라인드는 새로운 공간 설정을 위해
사용된다. 회사의 미스리와 집에 있는 김대리가 전화할 때, 김억만과 이순례의 다방 밀회 장면을 박영만이 엿볼 때 공간구획으로 블라인드가 사용되며 김대리가 진실과 허무를 함께 보았을 때 뒷편으로 걸어가는 걸인을 진실과 허무의 상징으로 처리할 때에도 사용된다. 연출의 5대 요소에서 구성과 시각화의 문제가 고려된 부분이다.
[그여자 이순례]에서 연출은 배우의 연기에 중점을 두었다. 각 배역이 갖고 있는 성격의 질량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세욕과 목적의식의 과잉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최부장 역과 극중극에서 박영만역을 맡은 배우(우상전)는 특유의 말버릇과 어조로 희극적 효과와 긴장의 완급을 소화했으며 미스터 하 역의 기주봉은 치밀한 계산에 의한 순간동작과 무대활용이 연기의 전체적 균형을 맞추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신체적 조건을 이용한 동선이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연극의 중반이후에는 기주봉의 동작 하나하나에 관객의 웃음이 동반되었다. 동작과 팬터마임의 극화를 능숙하게 유도한 연출자의 의도에서 부산된 것으로 보인다.
판단의 정보제공을 위한 극중극, 장면전환을 알리는 환등기 투사, 관객의 판단을 유도하는 해설자 등장, 객석으로부터의 배우등장, 동시무대사용, 관객을 심판관으로 가정하는 연극진행, 1인다역의 역할 바꾸기, 사실의 추적과정 등은 서사극적 연출의 대표적인 표현기법들이다. 이 기법은 극에의 몰입을 방지해 연극의 변화를 보면서 자신의 관념도 변화시키게 한다. 언급되었듯이 관객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고 관념의 변화도 일으켰다. 서사극은 매우 정치적이다. 그러나 이 연극에 정치적 요소는 많지 않다. 잘못된 사회와 인간의 관념 개혁을 드러나지 않게 시도하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전언의 가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말 서사극의 대부분은 사회, 정치, 경제의 부정과 모순에 대해 발언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극은 시간과 감정의 복합 중층구조와 서사극에 맞물린 정통
극 감정구조를 이용해 존재론적인 인간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점은 서사극의 정치성 후퇴라 생각하며 표현을 위한 기법의 다음적 활용이라 생각 한다. 또 상반된 두 구조의 화해는 시사적(示唆的)인 면이 있다.
2. 4. 포스트모던극적 연출
가치폭발, 균형과 절제의 상실, 혁신의 절망, 이성의 거부, 개방, 통일, 광고의 폭주, 세기말적 징후들의 꿈틀거림, 후기산업사회, 대중의 홍수, 총체성의 상실 등 20세기의 끝을 규정짓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엄청난 두께로 누적된 문화의 총량, 고도의 산업문명, 포화상태의 인구, 대(大)의 초(超)의 범람 등은 인간의 수사력마저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 만수위의 정신적 물질적 지구총량이 이전의 어느 세기말보다 전면적인 충격으로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삶의 유기적 내연관계는 찾아지지 않고 무감동한 파편들만이 존재하여 의미의 사슬들이 무가치 속에서 해체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확대는 긍정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지만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상상작용이 방관적 태도만을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의미의 사슬들은 다시 묶여지고 제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전에 대한기억, 현재의 합리적 긍정적 수용, 과거를 변형한 현재적 재창조 등이 새로운 의미연관 만들기에 받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가 포스트모던의 경향을 보인다. 5∼60년대부터 서구에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수용되어 표현되고 있는지 논의 할만 하다. 이 흐름이 앞으로 연극계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나타날 것도 분명하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는 바다 속에 있어야할 용왕이 20세기말 육지 위를 활보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현대판 심청전이 되는 것이다. 심청이라는 어린 여자 주인공과 인당수만을 빌려온 매우 돌출적인 연극이다. 한국 고전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예를 보면, 해학적 요소와 판소리적 요소를 이용한 것이 많았으나 이 연극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의 현대적 감수성에 의지한 채 패로디로 흥미유발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던의 연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극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심청이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심청이도 복잡 다단한 현대 사회의 한 파편에 불과하므로 연극을 구성하는 소(素)집합이라고 해석함이 옳겠다.
무대는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관객을 맞는다. 특정 회사명이 그대로 노출된 크고 작은 박스들이 불규칙적으로 뒷무대에 버티고 있고 타이어도 있으며 그물침대가 조명기기 사이로 연결되어 있으며 얼굴만이 쇠창살 사이로 드러나도록한 박스도 있다. 무대 뒷편의 가운데는 좁은 통로가 무대를 따라 나있고 무대 앞쪽에는 핏물이 가득한 큰 통이 있으며 무대 좌우편은 약간 높게 장치되어 있다. 우측에는 컴퓨터가 있으며 위에는 연꽃이 매달려 있으며 군데 군데 인형들이 미신처럼 걸려있다. 핏물 가득한 통위에는 장난감 앰블란스가 놓여있다. 구동장치가 없는 장난감 앰블란스이지만 차주가 오태석인만큼 어떻게 해서라도 움직여 질것이라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 외에 장면에 따라 무대 앞쪽에서 그물이 올라가고 무대 뒷쪽에서 문자판이 내려 오기도 한다.
오태석의 연출은 익숙한 연극기법 범주에서 벗어나 있으며 때로는 철학적이기도 하다. 이 연극은 운명의 우선 멈춤으로부터 시작된다.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올라 황후가 되어야할 심청은 자신의 운명변화를 거부한다. 고향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세상 구경을 하기로 한다. 용왕과 함께 남장을 한 심청은 현대 서울에 등장한다. 둘은 혼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스타킹, 후라이팬을 파는 가판원, 풀빵장수등이 등장하여 상품판매에 열을 올리고 가운데에서는 여자가 자극적인 춤을 추며 작은 손수레를 밀며 장사하는 불구자도 지나 간다. 인간사 만화경이고 혼란한 현대의 모습이다. 이 혼란함속에 넋을 잃고 있던 두 사람은 소매치기를 당할뻔하고 와중에 후라이팬 장수 윤세명은 소매치기들한테 발뒤꿈치를 난자당한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윤세명은 작은 수레에 잡화를 싣고 기어다니며 물건을 팔게된다. 그는 시장에서 만난 인수의 유혹에 넘어가 화염병제조에 참여하게 된다.
심청은 윤세명의 파괴적 사업을 방관할 수없어 용왕의 지시대로 화염병제조자인 비닐하우스에 방화한다. 다리의 움직임이 불편한 윤세명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용왕은 방화교사죄로 수감된다. "나다니지 못할"정도의 흉직한 화상을 입은 윤세명은 심청에게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털어 놓는다. 땅 팔아 산 소 다섯마리가 서른 세마리로 늘어 나면서 행복했던 그의 기억은 홍수에 소와 함께 떠내려 갔고 그는 행복을 되찾고자 재기의 도약대로 시장의 가판원이 된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 놓는다. 다리에 이어 얼굴마저 불구가 된 윤세명은 백가면을 쓰고 인간타켓이 된다. 사람들이 던지는 공의 표적이 된 것이다. 공을 맞으면 가슴으로 피를 뿜어내는 숨쉬는 이동표적이 되어 서른 세 마리의 환원에 의지한 채 처절한 돈벌이를 한다.
현대의 강렬한 충격과 무모성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더 격앙된 놀이를 요구하여 인간타켓의 목에 증오하는 사람의 이름을 개패처럼 걸어 증오의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 윤세명은 이를 거부 했지만 어쩔수 없이 따라 가게된다. 어느 날 직장상사의 배신행위에 흥분한 손님이 백가면을 직장상사로 착각하여 살의마저 나타내자 보조원이 이를 진정시키려다 손님에게 살해 당한다. 실의에 빠진 윤세명은 인간타켓 놀이에 회의를 느끼지만 소의 환원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신을 다시 격정적으로 몰아 간다. 윤세명의 이상행동을 눈치 챈 심청과 용왕은 그를 새우잡이 배로 끌고 간다. 도착한 곳은 어느 항구이다. 용왕이 감옥에서 만난 포주와 동업하기로 한곳을 찾아 간 것이다. 인신매매 당한 여자들이 상품으로 팔리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앨범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고 여자를 부르면 여자는 큰 상자 위로 나타나 야릇한 몸짓으로 인사한다. 그러다 심청이 갑자기 사라진다. 용왕은 심청을 찾기위해 여자상자를 전부 싣고 섬지역을 돌며 매춘을 시작한다. 용왕은 윤세명의 소매입자금 확보를 위해 "돈 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자팔기에 회의를 느낀 윤세명이 포주를 살해 한다.
이 때 경비정이 나타나 배 강제 탈취와 여자유괴죄로 체포하겠다. 하자 TV 기자회견을 요청하여 여자들의 빚을 갚아줄 독지가를 찾는다. 많은 빚과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자들이 소개되나 원하는 독지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동정유발을 위해 심청이 물에 뛰어 들고 다른 여자들도 뛰어 든다. 그래도 독지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윤세명의 소에 대한 집착은 숭고하기 까지 하다. 가판원, 소매치기, 무희, 매춘부 모두는 삶의 한 끝을 잡고 놓지 않으려는 가련한 인간상이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스러움과 불법적 상황에 비판의식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세상을 이용한다. 현대 문명속에서 살아가기 급급할 뿐이지 개혁의지는 물론이고 꿈마저 상실한 시대를 대하는 연극의 태도도 나타난다.
복잡 다양한 사회처럼 연극도 그 표현이 복잡 다양하다.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보여주는 일련의 징후들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번잡한 무대, 컴퓨터 사용, 궤도를 이용한 앰블란스의 이동, 회사명이 노출된 상자 등 모두 작품속에 패로디화 되고 있다. 심청의 서울 등장, 움직이는 인간타켓, 용왕의 감옥행, 인신매매단의 TV기자회견 등은 모두 인간의 패로디화이며 관객동원을 위한 흥미유발이다. 즉 대중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대중주의는 상업성과 통한다. 상업성은 예술로서의 연극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예술화되고 예술이 상품화되는 현실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현실 순응적 연극이 된 것이다. 비판적 거리가 다분히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은 부정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어조를 구축하는 연극이다. 관객들은 연극관람후 부패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보다 다양한 표현방식, 예상을 뛰어넘는 무대움직임을 생각하며 극장을 나서게 된다.
정서의 퇴조, 패로디화, 현체제에의 순응, 대중주의의 우세, 상업화되는 연극, 표현방법의 확대 시도, 행복의 만연, 총체성의 거부 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이다. 오태석은 작품의도를 심청의 순수한 눈을 통해
세기말적 징후를 느끼고 그 속의 인간정체를 찾고자 한다고 했는데 이점이 포스트모던극적 연출방법인 것이다.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두 번 몸을 던졌는가] 의 무대는 매우 장식적이다. 화려함의 장식이 아니라 표현을 위한 소품들의 복잡함이다. 너저분한 소품들 모두 표현작용을 위해 결합된다. 관객의 수보다 많을 자잘한 소품들은 극장을 폐물창고처럼 만들어 버린다. 흉물같은 후기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에서 연극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도한 것이다. 극장입구부터 포스트모던의 색채를 갖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태석이 보여주는 연극적 상상력은 한국연극계에 늘 문제적이었고 정공법이 아닌 반짝이는 연극감각으로 관객의 허기진 감수성을 넉넉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극적 연출은 그의 문화에 대한 앞선 감각만을 증명하는데 그칠 수 있다. 연극이 생경한 박래품같이 되버릴 수 있고 비판적 거리의 감소는 시대의 퇴폐를 방조하는 것으로 경계되어야 마땅하다. 포스트모던은 앞선 문화의 흐름일 뿐 관객의 공허한 감수성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