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사진(영화)등을 통해 멀리 떨어져서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수 있“(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 혹은 변용)는 기회가 많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주로 말하고 있는 사건/사진은 전쟁사진이다.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사진을 왜 사람들은 보려는 것일까? 본다고 해서 전쟁이 발생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나 또한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전 손택이 그 책을 말하는 것은, 제프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 (매복 뒤의 소련 정찰군 모습. 1986년 겨울, 아프가니스탄의 모코르 근처)」,1992년, 396×228cm)'의 작품을 통해, 전쟁 참화 속의 그들을 전쟁 밖 누구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제프 월의 이 거대 사진작품은 기록물이 아니다. 자신의 작업장에서 만든은 작품이다. 캐나다인 월은 아프카니스탄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전쟁뉴스에서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진에 어떤 진실이 있다. "사진도, 영화도, 회화도, 광고도 아니다. 비록 모든 요소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라고 말하는 제프 월은 작품과 어딘지 연계된 듯한 <그놈 목소리>다. 물론 아주 가까이에서 그 사건 속으로 파고든 감독이라는 차이가 있어, 방향은 다르지만 말이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경계를 넘어서며,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박 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를 살펴볼까 한다. 개봉한지 이틀째, 영화를 보게 됐다. 심기불편하여 피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예상과 달리 늦은 시간인데도, 영화관은 관객들로 꽉 찼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다. 영화가 끝나고나자, 급기야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팠다. 내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라는, 함께 경험할 수 없는 고통 그 간격에서 그렇게 난 무거웠고, 힘겨웠다. 영화 속 각자 그들에게도 그 고통은 자신들의 고통이 아니다. 보고 있는 나에게도 역시나 그건 내 고통은 아니다. 내 고통이고, 내 고통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영화 속 시간은 노태우정권으로 이동한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대통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괴에 관한 뉴스가 오르내리던 시대였다. 1991년 압구정동 어린이 유괴사건에 기초한 이 영화 소재를 두고 시시비비가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나, 왜 그게 영화여야 했을까를 의문하는 글도 봤다. 나 역시 왜 감독이 내용을 가지고 영화로 찍었을까를 의문하면서 보았다.
속칭 뜨는 앵커, 한경배에게도 카메라는 고정된다. 이내 얼굴없는 누군가 그를 목표물로 겨냥하는 걸 카메라는 비춰준다. 그후 그의 아이를 유괴했고, 아이가 유괴된 후 44일동안 그와 아내는 무참하게 무너진다. 유괴범은 참혹하도록 앵커와 그 아내를 괴롭혔는데, 이미 아이는 유괴 후 하루도 안 되어 질식사한 게 나중 밝혀진다.
<그놈 목소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영화화된 작품이다.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에 맞먹을 정도로 그 당시 부모의 고통이 너무도 처절하게 잘 전해진다. 그 당시 보기 드물게 과학수사를 펼쳤던 사건이지만, 결국 아이 부모는 범인에게 돈을 넘겼고, 유괴사건은 과학수사를 비웃듯 미제로 남았다. 이미 공소시효도 만료인 사건이다.
사건 개요를 살펴보자. 아이가 유괴된 후 경찰에 알리면 아이가 죽는다는 범인의 말에, 신고도 못하고 범인과 접선한다. 아이가 보내줄 거라는 기대를 안고서 말이다. 왜 죄없는 아이를 죽이겠는가, 그놈은 돈이 목적이야, 돈만 주면 돼, 그놈이 잡히든 말든 상관하지 마, 라는 마음으로 돈만 주면 돌아오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허나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는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종적조차 잡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정작 돌아온 건 싸늘한 시체 뿐이다.
왜 영화로 찍었을까? 너무도 표면적인 답은 그놈 목소리를 통해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수사가 아니고, 영화는 흥신소가 아니다. <그놈 목소리>에 드러난 누구도 알 수 있는 목적은 바로 그놈 목소리를 통해 범인을 잡고 싶은 것이다. 한사코 그게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 목적으로만 영화가 될까? 보기 전, 그게 의문이었다. 추적 60분류의 사건사고를 다룬 시사프로그램이 아닌 영화라면, 과연 그 목적을 말하는 영화라는데, 영화를 통해서 관객을 또 무엇을 체험할 수 있을까?
개별적이고 특별할 수도 있는 사건을 체험한 인간서사가 영화화 됐을 때, 보편성을 획득한 경우, 영화는 그 시대의 영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 <왕의 남자>, <미녀는 괴로워>가 영화 속 시대를 벗어나, 지금 시대를 대표적인 영화들이 아닐까? 사건/사연이 있는데 그 사건/사연은 영화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들은 영화를 벗어나 이미 세상 속으로 들어가 관객과 호흡하면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다른 무엇을 환기시킨다. 그걸 알 수도,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놈 목소리>는 유괴사건과 그 후 피폐해진 부모들의 삶을 통해서,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걸 일깨운다. 내가 네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이지 않을까?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을 때, 유괴사건과 살해된 아이의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그 소식을 온 몸으로 고통받으며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입이 말하고, 머리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아이라고 말하는 앵커는 어떤가? 그때는 온 몸이 말하고 있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은 이렇듯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잘못을 말하고, 죄송하다고 말하게 되고, 다른 공간을 포함하는 공감의 눈물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생각과 수동적인 삶이 다르다를 걸 누가 모르겠는가?
내가 아닌 너의 고통, 내가 아닌 너의 즐거움, 내가 아닌 너의 문제에 관해서, 영화는 여러 곳에 등장한다. 1억이라는 돈을 들고서 땀으로 온몸이 젖은 채 뛰는 한경배와 달리, 그 주변 사람들은 야구경기의 여파에 취해있다. 어떤 이는 휴거를 알리는 데 여념이 없다. 한경배가 아파하면서, 조급하면서, 애달아하면서 뛰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알 수가 없다. 그 순간 개인의 아픔을 누구도 알기란 어렵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라해도 우리란 어떤 조건(관계)에서 우리이지, 결코 하나일 수 없다. 개인은 단지 개인일 뿐이다.
개인과 개인은 만나 가족이 되고, 둘이 이룬 가족은 혈연이란 이름으로 엮어 다른 가족을 만든다. 가족은 공유한 시간, 경험, 유전자, 환경 등으로 인해 분명 다른 타인들과는 다르다. 하여 가족의 고통은 타인이라기보다는 가족의 고통이 된다. 그러나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모라 할지라도, 아내라 할지라도, 남편이라 할지라도,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될 수는 없다. 나마저 나일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상대의 고통을 온전히 함께 아파할 수는 없다.
고통이 그렇다면, 기쁨은 또 어떤가? 고통이 함께 하기 어려운 데 반해, 기쁨은 전염성을 지니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듯 보인다. 하여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이 등장한다. 옆에 있을 때 살 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를 더욱 행복하게 해줬다면, 있을 때 바쁘다 핑계대지 않고 좀더 아이와 놀아줬더라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건 인간의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지금 이 자리를 너무도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늘 이 자리는 제외한 채로 살아가니 말이다. 지금 여기에 아들이 있고, 지금 여기에 아내가 있지만, 지금 여기 있는 아내와 아들보다는 지금 없는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게 바로 삶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잃지 않을 때까지는 그렇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떠난 뒤, 벗어난 뒤, 상실된 뒤에서야, 그때서야 놓친 걸 알게 되는 게 바로 삶이다. <그놈 목소리>는 관객에서 그걸 상기시켜준다.
<그놈 목소리>는 아주 불편한 영화다. 개봉 첫주 극장소식은 <그놈 목소리>가 화제가 됐음을 말하고 있다. 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한다면, 타인의 고통은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실화에서 극은 탄생됐는가에 대한 평가보다는 불편한 마음에서 가능한 반성이 아닐까? 그 사이, 앞으로도 나는 얼마나 또 타인의 고통을 무감히 지나칠 것인가?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한 타인의 고통이 얼마나 많은가? 그 알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할 수는 없다 해도, 알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한경배가 마지막에 절통해하며 내뱉는 “잘못 했습니다”는 사실은 내가 뱉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잘못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그당시 나는 몰랐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니까...
사실과 사실에서 비롯된 정작 사실일 수 없는 다른 얘기를 말하는 길로 박진표는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93쪽, <타인의 고통>)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하고 있다. 정확한 사실, 진실이 되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라면, 그 사진의 특성과 유사한 맥락으로 기록영화가 있을 수 있다. 박진표는 이제껏 실제 발생된 사건사고에서 영화적 소재를 찾는다.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노년의 성과 사랑을 다룬 <죽어도 좋아>이다. 박직표는 <죽어도 좋아>를 통해, 박치수와 이순예의 쉽게 '이해하지 않으려던' 노년의 섹스/사랑을 얘기한 다. 그 다음 영화 소재는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시골 총각의 운명화적인 사랑 영화로, <너는 내 운명>이다. <죽어도 좋아>가 실제 그분들의 삶을 추적하는 기록영화적 성격이 강했다면, 점차로 박진표는 실제에서 비롯됐지만 실제를 떠나/넘어 (만든) 얘기가 가능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화는 영화이다에 근접한다고 할까?...사실에서 비롯된 영화를 통해 박진표가 말하고 싶은 걸 어느정도 실었다고나할까? 말하고 싶은 바가 확실한 <죽어도 좋아>였는데, <너는 네 운명>에서는 곡절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으려는 운명적인 사랑만을 얘기한 듯 보였다.
<그놈 목소리>의 표면적인 목소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 조연출시절 자신이 취재했던 사건의 범인을 잡고 싶다가 표면이라면, <그놈 목소리>는 그 표면을 향해 가는 숨은 면면들이 또한 돋보인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서사를 따라가는 눈과 달리 사유하는 내면의 눈이 또 생기는 것 같았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영화는 끝 모를 인간의 한계‘들’를 보여준다. 어쩌면 살아있는 인간이 하는 일이란 고작 지금 버둥거리든지, 아님 현재에 감사하는 것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니 내가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유괴되었을 때 아버지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어머니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제발 이해해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보내주세요, 꼭 찾아주세요, 라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바람만이 있는 한계를 말한다.
철저한 기독교 신자를 어머니로 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련에 감사하게 하는 신을 인간은 과연 얼마큼 지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제도권의 관여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제도권은 과연, 경찰 과학수사는 과연 그 할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종교, 제도, 부모가 하는 일이란 사실상 뒷북이고, 다른 것은 할 수 없는 위로와 끝없는 희망 갖기이고, 가슴을 치는 애통함만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종교나 제도나 부모에 반해, 비록 폼 나지는 않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뭘 하는, 있을 때 잘하고자 하는, 영화 속 잠복근무 김형사가 등장한다. 한 아이의 유괴사건을 수사하는 그에게도 한 아이가 있다. 욕망을 추종하는 삶이란 어쩌면 소 잃고서 외양간 고치는 삶인 것은 아닌가를 상기시키는 인물이다. 있을 때 잘해, 폼 없는 말이지만, 결국 삶이란 이렇게 살아야하는 게 아닐까 싶다. 없는 걸 있게 데려올 수는 없는 존재라는 데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부정을 눈감아줄 수 없겠냐며, 너는 내 친구냐며 부탁하는 친구의 부탁을 무정하게 거절하면서 이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한경배를 통해서, 유괴된 아버지 옆에서 자장면 불겠다고 말하는 잠복근무하는 형사를 통해서, 유괴된 건 내 아이이고 그 사람을 위로해주기 위해 온 교회 사람들이라는 데서, 한 사람은 아이를 찾고자 허둥거리는 데 반해 유유히 무표정할 수 있는 낯선 사람들이라는 걸 통해서, 영화는 나는 나고 너는 너다를 무심하게도 여러번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의 아픔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전혀라면 영화도, 사진도, 얘기도 없지 않을까? 다만 너의 아픔은 어찌해도 내 아픔일 수 없고, 같을 수 없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르지 않다는 건 누구도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같이 유한하고, 같이 다르고, 같이 웃고, 같이 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같이는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다는 데서, 결코 한 점에서의 같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 다른 같이는 다른 한 지점이 아니라, 차이를 동반한 공감으로서 같이인 것이다. 하여 공감이 있다.
<그놈 목소리>는 내게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불러냈다. 다루는 소재는 다르지만, 타인의 고통이라는 데서.
얘기가 아닌 사진을 통해서 실제 사건을 본다는 건 뭘까? 사진을 통해 본 고통이 내 고통일 수는 없을까?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프레데릭 와이즈만의 영화 『병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게 이 주제에 다가가게 만든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150쪽, <타인의 고통>)
<그놈 목소리>도 또한 그렇게 내가 지금 겪고 있으면 볼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고통스런 사건이라는 걸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끼게 한다.
만약 사람들이 <그놈 목소리>를 많이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성질이 아닐까?
남산타워를 올라가는 관광객들과 아이를 찾기 위해 혼이 나간 부모가 극명하게 대립되어 나오는 장면이나, 돈가방을 들고 롯데월드를 찾아가는 아버지가 헤치고 지나가야하는 야구팬들, 휴거를 알리는 팻말,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 결국 회전목마 아래 쓰려지는 아버지를 가만히 내버려둔 채 돌아가는 회전목마 장면은 어쩌면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놈 목소리>를 본다는 것은 불편하다. <사진에 관하여> 이후 수전 손택 스스로도 의문하지만, 사진이 가져오는 영향에 관한 두 가지의 사고방식을 말했다. 하나는 주목시키는 사건화/현실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역인 보고 앎을 통해서 이미지에 뒤덮힌 세계로 인해 무감각한 세계로 이끈다는 그것이다. 후자가 지금 내가 사진 이미지를 보고 있다는 것은 내 고통이 아니라는 관점이라면, 전자의 사건화/현실화는 내 고통이기도 하다는 통증이다. 그런 이유로 고통스럽고 불편한 영화를 보는 게 아닐까? 고통은, 이미지/얘기를 통해 보여지는/알게되는 타인의 고통은 고통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놈 목소리>를 생각해봤을 때, 폐부를 건드리는 건 바로 두가지다. 하나는 현상수배극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공소만료된 사건이라는 데서, 잡는다보다는 알린다는 표면적 목소리가 있다면, 다음 하나는 언제나의 함의가 있다. 그건 ‘어쩌면 지금뿐일 수도 있는 사방이 혼란스런 삶’에 관한 사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끝까지 폼나게, 아님 말고"라는 가훈/인생관보다는, '있을 때 잘해'라는 인생관이 더 와닿는 것 아닐까?
첫댓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아프게 고민하게 됩니다. 대학 1학년 때. 의문사로 발견된 3학년 선배의 장례식 장에서 우린 엄숙했고,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나와 친한 선배는 잘알았으며 아주 친했던 그를 떠올리며 그가 주검으로 발견될 수 밖에 없었던 92년도의 상황에 대해 한스럽게 생각하며 펑펑 눈물을 흘려 대기는 했지만 저는 그런 저의 모습이 한없이 낯설었습니다. 어쨌든 죽은 그는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요. 일년 전 저는 딸아이가 다니는 놀이방의 딸아이 친구의 아버지가 돌연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 싸늘한 또 다른 타인인 나 자신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애절한 감정이 드는 것이 정상일까요. 그냥 안됐다 정중한 안쓰러움을 갖는게 정상일까요. 그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복수는 나의 것]이 다루고 있는 소제도 유괴였지요. 유괴하는 사람들이 천진하기까지 했던 좀 이상한 영화였지만, 이 영화와는 아주 대조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사회적 환경과 뗄레야 뗄 수없는 개인들이 나옵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이념을 대표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괴는 유괴만으로 읽히지 않고 사회적 제도와 이념과 함께 읽혔지요. 하지만 냉소적인 설정에 정신병적인 결말에 더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걷어버렸던 기억이 나는 군요. 어쨌든
이 영화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정원처럼 놓치지 말고 말입니다.
제 아는 사람은 불편 할 것 같다고, 영화보길 피하더군요. 돌아가는 세상(혹은 영화)을 보자니 여기에서 얘기하지만, <오래된 정원>과는 달리, 저 역시도 꼭 권하고 싶은 영화는 아닙니다. 안다는 것보다는 편하게 영화보고 따뜻하게 사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을 얘기하시는 사자(思者)님이시니, 시간 되시면 함 보시고, 비롯하여 나아간 사유과 얘기를 올려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폭주기관님의 글을 읽고 나면 항상(어쩌면 대부분) 나를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몇 번 얘기나눈 지현님이시군요? 설마 발 목 잡는 건 아니지요?(농담입니다^^) 사실상 저 스스로 제대로 가보자는 마음에서 쓰는 건 줄 아시지요?^^
오랜만에 읽고 갑니다. 사실 군대에 와서 폭주 기관차 님의 글을 처음 접하는 군요. 이곳에선 유독 이 영화광고만 반복되는 통에 무감각하게 여기어지더군요. 목소리의 주인공인 강누구씨를 너무 강조한 탓인지(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단지 이 영화가 껄끄럽게만 받아들였습니다.. 생일 축화 영화 관람에 참석한 후임에게 부탁한 영화 포스터에서도 현상수배범 인상착의및 특징을 함께 실린 것도 걸립니다. 아차 군부대 전산망(인트라넷)에서도 책에대한 홈피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유독 독서 감상문들..중 인상깊은게 수잔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더군요. 아직 친척에게 반환받지 못한탓인지...
소경님, 오랜만에 뵙네요. ^^영화에 관한 글을 통해 몇번 얘기나눴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강모씨는 강동원이죠? 저 역시도 걸리고 불편한 게 많은 영화입니다. 더불어 아직도 생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꼼꼼하게 영화의 속내를 펼쳐서 보여주시니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