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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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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교양 스크랩 전주이씨 송월구택 이야기
의종(광평18) 추천 0 조회 17 13.10.19 2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송월재(松月齋)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명동마을
(원소재지 : 안동부 풍정)
건 축 주 :  이시선(李時善, 1625∼1715)
건축시기 :  1600년대 후반 추정
소 유 자 :  미상(관리자 : 미상)

건축 이야기
골짜기 입구에 소박하게 자리 잡은 정자

봉화읍 소재지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동쪽 태백 방향으로 가다가 다덕약수탕을 지나쳐 고개 마루에 올라서서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에 시드물, 풍정리라고 하는 조그만 안내판과 그 옆으로 우측으로 난 작은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쭉 따라가면 약 1.8km 쯤 가서 조그만 냇가 곁 오른쪽 산허리에 몇 채의 집이 보이고 그 곳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200m 쯤 가면 오른쪽으로 아담한 송월재가 보인다. 송월재는 작은 산으로 폭 감싸인 펑퍼짐한 골짜기 입구 아담한 터에 자리 잡았다. 건물 주변은 뒤로는 밭이, 앞으로는 풀밭이 된 공터가 있고, 그 바깥으로 떡버들·소나무 등이 둘러 있다.

송월재는 손질이 많이 된 듯한데 기단을 시멘트로 마감한 이외에도 나무에 주칠을 했다든가 하여 상당히 원형을 잃은 모습이다. 건물 마루 밑엔 정비를 하면서 자른 떡버들이 두꺼운 판재가 되어 놓여 있었는데 속이 썩은 나무를 켠 탓인지 판재도 많이 상해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서재로 쓰였다는 이 송월재에서 서재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관리의 손길조차 넉넉하지 않아 보였다. 주위의 산이 동산 같은 작은 산이어서 큰물이 몰려들지는 않겠지만 물이 모여드는 지세 탓에 건물과 건물 주변은 눅눅한 느낌이다.

이 종택은 ‘음지마’를 대표하는 전통주택으로 도로 건너편 ‘양지마’의 봉화법전강씨종택(민속자료 제40호)과 함께 법전리 마을의 전통적 풍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판
송월구택(松月舊宅)
군자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월재의 뜻.

창설재 권두경이 쓴 ?이시선 행장?에 따르면, “송월재는 소나무의 늘 푸른 절개와 달이 늘 일정하게 밝음을 취해서 송월이라 이름 붙였다.[取松之後凋月之有常]”고 한다. 소나무의 늘 푸른 절개[松之後凋]는 『논어』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서 따온 것이다.

 

문중 이야기
- 이시선의 학문과 저술
이시선은 독학으로 학문을 이루었다. 어린 시절 문리를 터득한 후 특별한 스승 없이 다양한 책들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 당시 경당 장흥효에게 『논어』를 배우고 있던 중형(仲兄)이 스승 없이 공부하는 아우가 걱정되어 몇 대목을 뽑아 그 깊은 뜻을 묻자 밝게 분석하여 경탄을 자아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가 비록 독학을 했으나 학문 내용은 독실하고 치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집중하는 학문 태도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시선은 해독하기 어려운 서적을 대하면 한번 읽을 때마다 빈 바가지에 콩알을 던져 넣어 바가지에 콩이 가득 차도록 거듭해서 책을 읽곤 했다. 아마 만 번 이상 읽었으리라. 그래서 “글에 있어서 그 뜻을 끝까지 연구하지 않음이 없다.[於書 無不究極趣]”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찍이 남에게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겠노라.”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나갔다.
이시선의 학문 내용은 육경 사서와 성리서를 우선으로 하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등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횡으로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나아가 그는 노장사상에도 일가견을 이루었고 병서·지리서·복서에까지도 정통하였다.
고금의 서적과 다양한 학문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그는 또 남달리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여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만년에 자신의 저작을 무익하다 하여 대부분 없애버렸기 때문에 약간 편만이 『하화편(荷華編)』에 수록되어 전한다. 하화(荷華)란 그가 가꾼 연못에 심겨진 연꽃의 자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연꽃[荷華]이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사람이 보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향기를 품어내는 기상이 자신의 처사적 분위기와 들어맞아서 붙인 이름이다. 편저로 『경서훈해(經書訓解)』, 『칠원구의(漆園口義)』, 『사략보(史略補)』, 『역대사선(歷代史選)』, 『시전남과(詩傳濫課)』, 『서전참평(書傳參評)』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이시선은 당시에 유행하던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따르지 않고,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글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관련인물
- 교유 인물
김태기(金泰基),이유장(李惟樟),김여만(金如萬)
- 벼슬길에 눈길을 두지 않는 청담한 선비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의 자는 자수(子修), 호는 송월재(松月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 태종의 후예이다.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의 6대손이다. 연산군 때, 그의 6대조 이종 및 고조 형제 6부자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죽거나 귀양을 갔다가 중종 때 비로소 신원되었다. 아버지는 전주이씨 풍정리 입향조인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이다. 어머니는 닭실 군자감정 권래(權來)의 딸이다. 그는 이영기의 4남으로 닭실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시선은 일생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간 적이 없었다. “과거공부는 남아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니 과거를 위한 공부는 그만두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말씀대로 명리 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길이 못된다고 하여 일찌감치 과거를 단념했다. 그런 그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길이 전해진 것은 그의 독특하고 탁월한 학문과 뛰어난 행실이 당대 사림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시선은 원래 호방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그는 가까이는 청량산·태백산·소백산 좀 멀리는 주왕산·금오산·속리산, 아주 멀리는 삼각산·금강산·구월산·지리산 등을 비롯한 명산대천과 동남쪽 바닷가 절경을 두루 답사하였고, 평양·경주·개성 등 옛 사적의 자취를 일일이 밟았다. 이는 그가 비록 뜻을 세상에 펼치지는 못했지만 가슴 속에 큰 기상을 가득 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라 안을 두루 돌며 가슴 속 큰 기상을 달랬던 이시선은 향리의 숲속에 송월재라는 3칸짜리 작은 서재를 짓고는 두문불출한 채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송월재 방 1칸 사방에 서가를 두르고 책상 하나만을 들여 놓은 채 독서에 몰두했다. 잠은 언제나 두 식경 정도만 잤고, 음식은 흰죽으로 아침저녁으로 두 끼만 먹었다. 한겨울이 돼도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 아무리 무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의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예닐곱 길 푸른 산 아래 / 靑山六七丈
초가 두세 칸. / 白屋二三間
그 속에 물정 모르는 한 선비 / 中有一迂士
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 / 平生述與刪
그는 『송월재전』(松月齋傳)을 지어 스스로의 이러한 삶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평생 명리다툼을 멀리한 그는 성품 또한 고고하여 사귀는 벗은 언제나 당시의 유명한 학자 몇몇 뿐이었다. 칠원(漆園) 김태기(金泰基),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기산(箕山) 김여만(金如萬), 졸와(拙窩) 권이시(權以時)가 그들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는 평생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흉금을 터놓았다.
이시선은 늘 제자들에게 “선비의 행실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불괴심(不愧心)’ 3자에 지나지 않는다.[士之爲行, 不過不愧心三字]”고 하여,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대로 그의 평생의 신조이자 학문 정신이기도 했다. 그는 남달리 건강하여 91세라는 장수를 누렸는데, 운명하면서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반드시 삼가고, 벗 사귀는 일을 반드시 살펴서 하고, 혼인은 때맞추어 하라.”고 가르친 다음 『중용』의 첫장과 『주역』의 건괘를 들릴 듯 말 듯 외우면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봉화 > 법전춘양권 > 풍정리
- 좁은 골짜기가 모여 이루어진 풍정리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는 36번 도로의 아래쪽, 서쪽으로 창평, 동쪽으로 척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봉성·양곡·도천 등이 있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갈방산의 남동쪽 산록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36번 도로를 타고 봉성 쪽에서 동행하면 다덕 고개를 지나면서 풍정리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 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은 갈방고을이다. 갈뱅이라고도 한다. 갈방산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갈방인데,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성할 때 이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갈방마을에서는 남쪽으로 좁은 골짜기가 남행한다. 길도 그 사이를 가르며 봉성 쪽으로 남행한다.
갈방마을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불미골이다. 전주이씨 마을로, 야동이라고도 불린다. 불미골의 아래쪽으로는 명창골이 있다. 명동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명청동이라고 하였다. 명월청풍에서 온 이름이다. 숙종 때 선비인 이시선이 여기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 맑은 연못과 소나무가 있어서 정자이름을 송월재라고 하였다.
명창골에서 길은 3갈래로 갈라진다. 동쪽으로 샛길이 만들어져 척곡 쪽으로 나간다. 그대로 남행하는 길은 삼거리를 지나서 시드물에 이른다. 풍정이라고도 하며, 풍정리의 본동이다. 마을 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 근방에 큰 신나무가 있어서 시드물이라 한다. 우물가 바위에는 풍정이라는 글자가 명각되어 있다. 시드물의 서쪽에 있는 것은 엉고개이다. 아현이라고도 한다. 그 서쪽으로는 좀 떨어진 지점에 봉성역이 있다. 아현은 500년 전에 봉화금씨가 개척하였다.
시드물의 남쪽으로는 가마고개가 있다. 부현(釜峴)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부고개촌이었다. 이수라는 선비가 여기 와서 살면서 앞산 봉우리가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현으로 고쳐 불렀다. 전주이씨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는 1940년대에 번창하였던 다덕광산의 광구가 여럿 남아 있다.
시드물의 남동쪽으로는 심수가 있다. 심새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우물이 없어서 냇물을 식용하였는데, 질병이 많이 생겼으므로 여기 저기 샘을 찾다가 마을 한구석의 큰 향나무 밑을 파서 샘을 얻었다고 하여 심수라고 한다.
심수의 동남쪽으로는 돌다리·석교가 있다. 옛날 비가 와서 냇물이 불었을 때 홍장군이라는 장사가 큰 돌을 놓아 딛고 건널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서 돌다리로 불렸다. 시드물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노림이다. 노리미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영모당과 사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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