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다듬어 보려고 했는데.. 잘된 것 같진 않네요..
쓸데없는 것 자꾸 올려서 죄송합니다.. (_ _)
프랑스의 외딴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마을의 언덕 마루에 있는 낡은 집 한 채. 이른 아침부터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것은 곧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부서진 돌 틈을 얇은 나무판으로 막아놓고, 깨진 창문 안쪽에는 바람을 막는 용도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지붕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어 비가 많이 올 때면 언덕 위에 있으면서도 한 바탕 물난리를 겪는 듯 하였다.
“늦었다!”
낡은 집 안에서 앳된, 하지만 맑고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망가진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소년의 외침에 대답해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낡은 베레모를 눌러쓴 작은 꼬마는 커다란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메면서, 언덕 아래 자그마하게 보이는 마을을 향해 풀밭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렸다.
아브빌 마을.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이곳은 독일 공군의 요새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독일의 정예 부대인 JG 26 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만큼 군사적 요충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브빌의 주민들은 목숨을 유지하는 대신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고, 독일군의 눈치를 살피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한 세월 속에서도 아브빌의 사람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을에 사는 작은 악마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을은 더없이 조용했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 사는 곳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가 주체를 이루는 전형적인 생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정적이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헥헥…."
숨을 헐떡이며 마을에 다다른 소년은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매일같이 언덕을 전력질주 했건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고르지 못한 폐활량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뛰기 시작했을 때 보다 더 힘이 들었다.
충분히 쉬고 난 뒤, 소년은 항상 자신이 향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르메르 아주머니.”
“오, 앙리로구나. 마르틴은 벌써 출발했단다.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찾아 오거라. 쿠키를 많이 구워 놓았단다.”
아주머니의 말에 앙리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르네르라고 부른 중년의 부인을 돌아보며 얼굴 가득히 크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조만 간에 찾아갈게요!”
앙리는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다시 목적지를 향하여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를 휘저으며 달리던 앙리는 시선을 먼 곳으로 두었다. 그곳엔 앙리 또래의 보이는 두 명의 소년이 나무상자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스, 마르틴!”
앙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소년들은 앙리를 알아보고는 앙리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크게 소리쳤다.
“이 녀석. 오늘도 지각이야!”
베스와 마르틴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앙리는 또 다시 숨을 헐떡거렸다. 베스와 마르틴은 앙리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괜찮겠어? 그러게 모로 할아버지한테 가보라니까.”
앙리는 마을의 유일한 의사인 모로 할아버지에게 진찰 받기를 권유한 베스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웃어 주었다.
"그 노망난 할아버지는 돈 없으면 연고도 안 발라 줘. 늦었으니까 빨리 가자. 칼한테 미리 말해뒀거든."
베스와 마르틴은 못이기는 척 앙리에게 떠밀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뒤에서 생글거리는 앙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송 맺혀있었다.
거대한 창고. 어렴풋이 본다면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제대로 본다면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투기가 격납고 주위에 널려 있었다. 이곳은 프랑스 아브빌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 공군의 격납고였던 것이다.
“밀지 마, 마르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격납고 뒤편의 수풀이 부스럭거리면서 세 명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시 앙리와 그의 친구들일게 분명하였다.
“앙리, 벌써 십 분이 지났는데 칼은 안 보이는 걸?”
마르틴의 물음에 앙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연히 알게 된 성실한 독일군인 칼의 도움으로 이 장난꾸러기들은 자주 독일 군들의 공중곡예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시간보다 항상 먼저 나와서 이들을 기다리던 칼이 오늘은 웬일로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칼이 아픈 건 아닐까?”
베스가 무심결에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앙리가 눈을 부릅뜨고 베스에게 덤벼들었다. 베스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앙리를 보고 당황했지만, 키도 작고 왜소한 앙리는 덩치도 크고 힘도 좋은 베스에게 주먹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간신히 마르틴이 앙리를 잡아당겨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왜이래 앙리.”
다짜고짜 자신에게 덤벼든 앙리 때문에 베스는 화가 많이 났지만, 독일 군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앙리는 계속 씩씩거리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베스가 대답하라는 뜻으로 쏘아보자 앙리는 입을 열었다.
“칼이 아플 리가 없어. 칼은 내 영웅이란 말이야. 프랑스나 영국군들과 싸우러 나가도 하나도 격추시키지 않는다고 했어.”
베스는 앙리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이 바보야, 아무리 네가 칼을 좋아해도 그렇지 세상에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저 빌어먹을 나치들의 우두머리인 히틀러도 감기 한 번 정도는 걸려봤을 거라고.”
“그래도 칼은 건강할…!”
앙리가 목소리를 높일 뻔 하자 마르틴이 잽싸게 앙리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조용히 해. 그러다가 들키면 어떻게 해. 칼이나 요셉 아저씨가 아니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저벅 저벅. 바로 그때 어디선가 군화의 터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앙리, 베스, 마르틴은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세 소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터벅터벅 하는 소리가 뚝 끊겼다.
“늦어서 미안.”
“….”
놀란 앙리가 발버둥치면서 소리 지를 뻔했지만 아직 마르틴이 앙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비명소리를 막을 수 있었다.
“왜 이러고 있어?”
앙리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마르틴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앙리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칼! 왜 이렇게 늦었어요.”
베스와 마르틴도 상대방이 칼이라는 걸 확인한 다음에 수풀 속에 쪼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요.”
“칼 너무 나빴어.”
베스와 마르틴이 거들자 칼은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미안해. 사정이 조금 있었거든. 대신 오늘은 전망 좋은 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해줄게.”
칼의 한마디에 소년들은 잔뜩 구겨졌던 인상을 피며 미소를 지었다.
칼이 데려간 곳은 격납고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창고였다.
“오늘은 내가 격납고 지붕을 수리해야 돼서 창고 열쇠를 받았거든. 창고 열쇠는 이거 하나 뿐이야.”
그러면서 칼은 열쇠를 던지면서 장난을 쳤다. 창고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격납고 쪽으로 창문이 트여 있었다. 세 명의 꼬마들은 창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야. 다 보인다, 다 보여!”
“BF-109잖아. 유럽 상공의 백상어. 칼, 칼도 저런 걸타고 하늘을 나는 거예요?”
아이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에 칼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난 이만 나가볼게. 이따가 데리러 올 테니까 얌전히 구경하고 있어야 돼. 안 그러면 정말로 다른 사람들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칼은 신신당부했지만,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들의 모습에 넋을 잃은 아이들은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돼서야 칼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창공을 가로지르는 독일군 전투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겠다. 창고 문을 잠가야 하거든.”
“조금만 더 보면 안 돼요?”
앙리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칼에게 부탁해보았지만 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늘 갈란트 단장님이랑 약속이 있거든. 나도 그만 가봐야 해.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오려무나. 그때도 좋은 자리 맡아둘 테니까.”
칼은 빙긋 웃으며 아이들을 타일렀고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남긴 채 창고를 빠져나왔다.
“누구냐!”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앙리, 베스, 마르틴은 깜짝 놀랐다. 칼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숙소로 돌아가거나, 마을로 나가 술집에 갈 텐데 아직까지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갈란트 단장님….”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확인한 칼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칼의 것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제복과 왼쪽 가슴에 달린 많은 훈장들. 비쩍 마른 칼과는 달리 몸집이 큰, 단단해 보이는 남자는 칼을 바라보는 시선을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앙리를 비롯한 세 명의 꼬마들은 매가 사냥감을 노려보는 것 마냥 쳐다보는 남자의 눈빛을 받아낼 재간이 없었다. 앙리는 제복을 비교해 봤을 때, 이 남자가 칼보다 높은 계급에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칼.”
“에, 옛!”
“이 꼬마들은 뭔가?”
칼이 소속된 부대의 단장으로 보이는 이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질책하듯이 말했다. 칼은 조금 머뭇거렸지만 상관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떨리는 입을 열었다.
“저…, 마을에 사는 아이들입니다.”
“프랑스인인가?”
“그러…, 그렇습니다.”
남자는 다시 꼬마들을 쏘아보았다. 지레 겁먹은 베스와 마르틴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꼭 감아버렸다. 하지만 앙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무표정이었으나 마음에 작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앙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냐?”
“앙리.”
유창한 프랑스어였지만 독일어 특유의 억양이 담긴 건조한 말투였다. 갑작스레 추궁하듯이 질문하자, 앙리는 흠칫했지만 떨고 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칼과 다르다. 앙리는 자신을 친구로 여겨주는 칼과 다른 독일인에게 프랑스인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이곳엔 왜 왔지?”
고집스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앙리는 서서히 공포심을 느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거칠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턱수염은 왠지 모르게 앙리에게 두려운 감정을 심어주었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곳에 왜 왔냐고 물었다.”
앙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독일군의 비행기를 구경하러 왔다고 말한다면 눈앞의 남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아니 프랑스인을 판단하려 할지도 몰랐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는 프랑스인 전체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 비행기 때문에요…, 저 비행기들이 나는 걸 구경하러 왔어요!”
앙리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죽일 듯한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마르틴이 외친 것이었다.
“네 부모가 누구냐?”
이번에도 앙리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추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칼이나 친구들에게 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앙리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고아… 입니다.”
“집이 어디지?”
쉬지 않고 계속되는 남자의 질문에 앙리는 서서히 공포심을 느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 마을 전체에 불이익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앙리는 굵은 눈물방울들을 더러운 소매로 닦아 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면서 갑작스레 기침이 흘러 나왔다.
“잘못했습니다. 콜록, 나는… 죽여도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마세요. 콜록 콜록.”
시간이 갈수록 앙리의 기침 소리가 커졌다. 옷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콜록. 집은, 마을 건너편에 있는 언덕 위에… 콜록 콜록. 버려진 작은 집에서… 콜록. 혼자, 살고 있습니다.”
앙리는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이미 해는 져서 이들이 있는 곳에는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베스와 마르틴도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심이 사라진 것이었다. 칼도 긴장한 채로 자신의 상관과 앙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사정을 해서 아이들이 죽는 것만은 면하게 해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앙리에게 도움을 받는 꼴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있던 남자가 다시 칼을 돌아보았다. 칼은 긴장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두려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칼 마르세이유. 이 프랑스인 꼬마들과는 어떤 관계인가?”
칼은 잠시 갈등하게 되었다. 이 아이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면 분명히 칼 자신에게는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목숨을 약속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양심상, 그리고 저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제 친구들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으니 이 아이들을 그냥 보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결국 말하고 말았다.’
칼은 더 이상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오지 못하게 되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칼이 잠시 동안 망상을 하는 사이에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기를 구경하려거든 다음부터는 몰래 다가오지 마라.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으니까.”
“…!”
뜻밖의 말에 앙리는 멍한 얼굴로 갈란트를 바라보았고, 칼은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지, 혹은 꿈이 아닌지, 허벅지를 꼬집으며 재차 확인하였다. 결코 꿈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칼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인 그의 얼굴이 이토록 온화해 보이는 이유를 칼은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앙리를 비롯한 베스와 마르틴도 마찬가지였다. 꼭 죽을 줄로만 알았던 자신들이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것에 크게 감사하였다. 칼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흐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갈란트 단장님!”
칼의 상관이자 JG 26 부대의 총대장, 아돌프 갈란트는 칼의 행동에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게 되었다.
“그만 일어나라. 오늘 나와의 저녁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그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와라. 특히 저 녀석은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테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갈란트는 손가락으로 앙리를 가리키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칼과 아브빌의 소년들은 등을 돌려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칼이 아이들을 다독거렸다. 베스와 마르틴은 죽었다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땀에 흠뻑 젖어버린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앙리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스나 마르틴처럼 긴장감이 풀려서가 아니라 호흡이 곤란해져서 식은땀을 흘리는 거였지만, 앙리는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앙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칼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앙리, 너 어디 아프니?”
“아니에요.”
앙리는 웃으면서 팔을 빙빙 돌렸다. 칼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스런 표정은 지우지 못했다. 마르틴이 힘겨워 하는 앙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앙리, 너 집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니까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마르틴이 권유했지만, 앙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괜찮아. 칼,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 대장 아저씨가 기다릴 테니 어서가 봐요.”
칼은 베스와 마르틴을 돌아봤지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프랑스인 꼬맹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작은 주점.
독일 장교복을 입은 한 사람이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위스키를 음미하고 있었다. 술집에는 어느 정도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그 독일군복을 입은 남자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주점의 문이 열렸다. 그도 역시 독일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술집에 앉아있던 남자보다는 계급이 낮아 보이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갈란트 단장님.”
칼은 갈란트를 발견하고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다가갔다.
“앉게.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그 꼬마들이 가까운 곳에 사나보지?”
“에… 그렇습니다. 한 녀석은 이곳에서 일을 하거든요.”
“주, 주문하시겠습니까?”
칼이 말함과 동시에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소년이 갈란트를 힐끔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베스였다. 칼과 갈란트 단장을 보고 놀라지는 않았지만 갈란트 단장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강인한 느낌은 베스의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단장님, 어떤 걸로 할까요?”
“자네가 알아서 시키게.”
그의 대답은 항상 간단명료하였다. 칼은 베스에게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였다. 그 와중에도 갈란트는 위스키 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갈란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스키만 마시고 있자, 초조해진 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저를….”
칼은 갑자기 단장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꼬리를 흐렸다. 갈란트 단장은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깍지를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칼 마르세이유.”
“예, 단장님.”
갈란트 단장은 눈이 침침해졌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우리 JG 26 사단에 입단한지 얼마나 됐나?”
“아, 저… 그러니까, 올해로 2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1년은 넘었다는 소리로군.”
칼은 갈란트가 보던 보지 않던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곳에서 몇 번이나 전투에 참전했나?”
“그, 글쎄요. 이런 시기에 전쟁에 나간 횟수 같은 건….”
칼이 힘 빠지는 미소를 띠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예상했던 것이 있었는지, 칼은 상관의 질문에 곧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갈란트 단장의 개입으로 그의 대답은 끝을 맺지 못했다.
"1939년 5월 1일 JG 26 부대 창립. 현재까지 총 834번의 공중전을 벌였으며 그 동안 2600여 대의 연합군 전투기, 폭격기들을 격추. 평균 격추기록 6.2대."
갈란트 단장의 무거운 음성이 이어질 때마다 칼은 점점 고개가 숙여졌고,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칼 마르세이유. 1942년 3월 JG 26 부대의 대원으로 입단. 1943년 9월 28일 현재 시각 오후 10시 30분까지 총 출전횟수 74회. 총 격추기록…, 2대. 혹시 변명거리가 있다면 말해보게.”
“…없습니다.”
“어려서 눈을 다쳐 시신경이 매우 무뎌졌다는 것은 인적사항을 봐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을 베푼다고 해서 뭔가 이뤄지리라는 생각은 버려라. 여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데가 아니야.”
칼은 갈란트 단장의 쏟아지는 질책을 피할 수 없었다. 허약하고 자신감 없이 살아온 자신이 살아생전에 딱 한 가지를 노력하여 파일럿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칼은 스스로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고로 눈을 다친 후부터, 남보다 현저히 뒤떨어지는 동체시력을 가지고서는 정확한 사격은 고사하고 오랜 시간 조종간을 잡고 있기조차 버거웠다. 엉뚱한 곳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실수로 같은 편 전투기를 맞출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관대한 갈란트 단장은 칼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다. 기회를 주고 또 주었지만, 칼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갈란트 단장은 칼의 처분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선택해라. 계속 BF-109를 탈 것인지, 아니면 다시 수리공으로 돌아갈 것인지. 요셉 프릴러와 같은 에이스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네가 하늘을 날았다는 증거를 보여라.”
칼은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갈란트 단장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눈감아 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조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날로 끝이었다. 칼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하늘을 날고 있을 때가 다른 어떤 때 보다 더 행복했던 칼 마르세이유. 하지만, 군인으로서 조종간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했다. 날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칼은 대답도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잔에 담겨있는 커티삭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이들에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갈란트는 칼에게 시간을 주려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한 건 다름 아닌 칼의 음성이었다.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매우 흥분된 상태라는 것을 떨리는 목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타겠습니다. 우리들의 백상어에.”
며칠이 지났다. 아브빌의 주민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언제나 마을을 뛰어다니던 그 낡은 신발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것 정도였다.
언덕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집의 형체를 한 것이, 외로운 산바람의 속삭임과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스럽게도 깨어진 창문을 심하게 두드렸다. 슬픈 일이라도 있는 듯이, 오늘은 그렇게 쓸쓸한 지붕을 마구 훑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스며드는 깨어진 창문 안쪽으로, 다리하나가 부러져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침대가 보였다. 초췌한 모습을 한 소년이 매우 위태위태한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는 소년은 다름 아닌 앙리였다. 매일같이 별을 세며 잠을 청했던 그 침대가 오늘따라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앙리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쪽 구석에서 물수건을 든 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앙리, 이제 그만 고집피우고 모로 할아버지께 가자.”
“콜록. 하아…, 너도 알잖아. 그 노인네… 콜록 콜록. 나 같은 가난뱅이는……, 죽어도… 진료 따위, 해주지 않아…. 콜록.”
앙리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베스는 계속 앙리를 설득시켰다.
“돈은 걱정하지 마. 레퐁아저씨의 주점에서 일한지 벌써 10년이야. 그 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것도 없는 줄 알아.”
베스는 막무가내였지만 앙리의 힘없는 미소 앞에서 번번이 설득에 실패하고 있었다. 베스와 앙리는 마을의 유일한 고아이다. 그만큼 베스에게, 또는 앙리에게 서로의 존재는 각별했다. 됨됨이가 다부진 베스였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앙리는 베스의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고도 손조차 뻗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오묘한 느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죽는 것,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독일군 기지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서쪽 3km 전방에 적기 출현! 연합군의 공격입니다!”
관제탑의 오퍼레이터의 수신을 받아든 갈란트 단장은 모든 병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뛰어난 지휘능력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았다.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곧장 자신의 전투기로 향하던 갈란트는 조종간을 잡고 있는 칼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칼도 고개를 돌렸고 둘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갈란트 단장과 눈이 마주친 칼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져갔다. 갈란트 단장은 칼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보겠다.”
그 한마디를 남긴 채 갈란트 단장은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칼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그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뒤통수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칼은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확인하였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요셉! 제 1중대는 먼저 출발한 거 아니었어?”
칼은 자신의 친구인 요셉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제 1중대의 대장인 자가 이곳에서 느긋하게 햇볕이나 쐬고 있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너 때문이다. 이 바보 멍청아.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내, 내가 뭘?”
“적어도 너는 자신이 갈 길은 아는 녀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꼴이 뭐냐? 하늘을 나는 게 싫다면 그만둬. 당장 내리라고. 너보다 뛰어난 파일럿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칼은 요셉의 말에 처음에 당황해했던 모습과는 달리 미간을 좁히며, 그의 말에 대꾸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난 너보다도 더 좋아한단 말이야, 이 하늘을 나는 걸!”
요셉은 생각지 못한 칼의 반응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 꼬리를 올리며 칼을 노려보는 시늉을 내었다.
“그럼 어젯밤에 단장님과 나눈 대화는 뭐지?”
“드, 들었어?”
“우리 같은 인간이 술집에 없으면 어디 있겠냐?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걸 어떻게 하냐. 혹시 그 말썽꾸러기들 때문인 거냐?”
칼은 직접 말은 못했지만 고개를 숙여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요셉은 그런 칼의 모습을 안쓰러워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여 칼을 더욱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하늘을 나는 게 좋아. 하지만 조국에 몸 바칠 각오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아. 어제 단장님이 권유했을 때, 그 때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건데…. 괜한 욕심에 조국도, 내 자신도 모두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듣는 사람이 시무룩해지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칼은 얼굴 한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요셉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칼을 흘겨보았다.
“잘도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는군. 그런데 욕심이라니, 무슨 욕심?”
부아앙.
칼과 요셉의 머리를 휘날리게 하면서, BF-109 기가 하나 둘 씩,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노란 코를 구름 속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요셉은 칼의 음성을 토시하나 놓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었다.
“꿈 많은 말썽꾸러기의… 희망사항이라고나 할까?”
칼이 벨트를 매는 모습을 보며 요셉은 그의 전투기에서 멀리 떨어졌다. 요셉은 칼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칼은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요셉 프릴러는 그 동물적인 감각으로 칼 마르세이유의 죽음을 예감했고,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는 연합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이 JG 26 사단의 인간 같지 않은 녀석들 중에서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한 남자를 멀리 떠나보내야만 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알면서도 그의 행동을 막지 못했던 이유를 대라면 과연 자신은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요셉 프릴러의 일기장 맨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창공을 가르는 노란 코의 사생아들을 보며 마르틴은 앙리의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갓 구운 빵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엄마가 구워놓은 빵은 모조리 쓸어왔다. 이건 모두 앙리의 몫이었다. 전력 질주를 하는 두 다리와는 다르게 마르틴의 머릿속에는 어려서부터 앙리, 베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추억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새삼스레 생각나는 그 추억들 때문에 마르틴은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했다. 미친 듯이 달리며 혼자 히죽거리던 마르틴은 언덕을 오르고 나서도 멈추지 않고 앙리의 집으로 향했다.
항상 달리기를 하고 나서 서지도 못할 만큼 지치곤 하는 앙리를 보면서, 마르틴은 부축은 해주지 못할망정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냐며 비난을 하기 일쑤였다.
레퐁 아저씨 몰래 베스가 감춰놓은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헛구역질을 하는 앙리를 보며 마르틴은 취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제길, 제길!”
앙리는 언제나 웃어주었다.
“앙리!”
꽈당.
문고리를 돌릴 틈도 없이, 벌레 먹은 문은 마르틴의 어깨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먼지와 함께 바닥을 뒹군 마르틴은 차곡차곡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피해 창문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앙리는 별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전에 별을 세어본다고 했다. 마르틴은 한번도 앙리의 집에 들어와 본 적은 없지만 앙리는 그곳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앙리! 나야, 마르틴이야!”
마르틴의 눈에,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앙리의 모습이 보였다. 마르틴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끼며 손에 들고 있는 빈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바닥을 뒹굴면서 빵을 모두 떨어트린 것 같았다. 마르틴은 자고 있는 앙리에게 다가가 침대 옆에 슬며시 앉았다. 앙리가 깨지 않도록.
마르틴은 앙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어느 샌가 베스가 다가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부아아앙.
다시 한 번 전투기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투명한 것이 앙리의 얼굴에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것들이 앙리가 덮고 있는 얇은 천 쪼가리의 한쪽 귀퉁이를 적시고 있었다.
“앙리!!”
마르틴의 울부짖음이 언덕을 넘어 아브빌 마을에 까지 울려 퍼졌다. 태양은 우리의 머리위에 있었고, 가득히 빛을 받은 앙리의 몸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창공을 가르며 접전을 벌이는 전투기들의 포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며칠 후, 아브빌의 마을에서는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바로 앙리의 장례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앙리가 살던 집 근처에 홀로 서있던 소나무 앞에다 앙리를 묻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항상 말썽만 피우고, 독일 군인과 어울려 지내곤 해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그게 아닌 듯싶었다.
“흐흑, 세상에….”
“불쌍하기도 하지.”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다고 데려가는지 원….”
마을 사람들은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죄책감으로 서있는 듯 하였다. 베스와 마르틴은 묘비를 붙잡고 오열을 토하고 있었다.
“얘야, 그만 일어나야지.”
르메르 부인이 마르틴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도 마르틴은 계속 묘비만을 바라보았다. 꼭 앙리를 마주보는 것처럼. 흐느껴 울고 있던 베스도 주점주인인 레퐁씨에게 이끌려 언덕을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하나 둘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던 한 노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 한 남자가 앙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자넨 누군데 아직도 여기 있남?”
노인의 목소리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법한 분위기가 흐르는 남자였다.
“그 녀석에게 따로 볼일이 있었다면 르메르나 레퐁을 찾아가게. 그 악마 같은 녀석에게 신경써주던 건 그들뿐이니까.”
노인은 계속 앙리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농장을 망가뜨렸다느니, 널어놓은 빨래를 전부 흙탕물로 범벅을 해놨다느니…. 하지만 남자는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만 노인의 시선이 계속 앙리의 묘비를 향해 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노인의 악담이 끝나자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남자였다.
“이 아이가 죽은 이유를 아십니까?”
강한 억양, 왠지 모르게 발음이 뒤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독일인이구먼. 매일매일 독일군 기지로 찾아가 소란을 피우기도 했었으니, 당신네들이랑 어느 정도 친분이라도 쌓았겠구먼.”
노인은 아무렇게나 판단하고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눈을 뜨며 소나무 뒤쪽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노인의 손가락 끝을 쫓아 고개를 돌린 곳에는 마녀가 숨어살고 있을 것 같은 집이 한 채 보였다.
“앙리가 15년 동안 살았던 집이네. 잘 찾아보면 쥐나 바퀴벌레가 수십 마리는 있을 걸세. 자네라면 저기서 그만큼이나 살 수 있겠나? 모두 우리 탓이야. 안 그래도 허약한 아이를 세균이 득실거리는 저런 곳에 혼자 내버려두다니 말이야. …진작 나한테 찾아왔으면 한 번쯤은 무료로 치료해 줄 수 있었는데…, 나도 저 녀석을 죽인 사람 중 한 명이지. 자네들도 잘한 것 없네. 그 놈 죽던 날, 여기 하늘에서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웠지 않나.”
노인은 더 이상 이런 곳에 있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돌려 짚었다.
“당신은 왜, 이 아이를 악마라고 하는 겁니까?”
남자의 질문에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언덕 중턱을 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앙리의 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더니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노인은 뭐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악마처럼 순수한 녀석은 난생 처음 봤지….”
한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 노인이 밟고 지나간 잔디 조각이 바람에 날려 앙리의 묘 앞까지 날아갔다. 노인은 바람에 날려가는 작은 풀빛을 보며, 마음으로 그것에 실려 자신의 말이 저 남자에게 전해지길 바랬다.
삶에 대해, 미래에 대해, 또는 추억에 대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아브빌의 언덕에는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집 한 채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며, 언덕너머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