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은 영원하리 이것은 모든 산악인이 그에게 보내는 합창이리라 . 외로히 홀로 유럽에 머물면서 알프스의 여러산봉을 차례로 오르며 조용한 가운데 절세의 크라이머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가 그리도 소망이었던 꿈을 이루지못한채 , 정열의 화신이요 , 꽃같은 젊음을 알프스의 계곡의 눈속 깊이 묻어야 했던 처절한 운명의 그날 , 아마도 알프스의 산봉이 눈물지었으리라 . 이 수기는 고유재원선배가 1973 년에서 1977 년 조난때까지 그가 알프스연봉을 오르내리며 기록했던 등산일지에서 발췌한것으로서 고인의 동창이며 산우였던 경동고교 OB 산악회 조성대씨에 의해 공개된것이다 . 월간 " 산 "1979 년 1 월호 (113 권 66p-69p) 1973 년 파리에서의 나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운것이었다 . 그러면서도 나는 다음시즌의 알프스 등반을 위하여 몸을 궅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근교에서 계속 록크라이밍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2 월에 프랑스산악회 (C.A.F) 의 Paris -Chamonix section 에 등록을 하고 프랑스 산악회의 정식 회원이 되었다 . 그리고 퐁뗀느블로 (Fontaine bleau) 로 향하는 첫날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은 Ecole Ecoalade 의 Moniteuy( 록크라이밍교사 ) 인 크리스티앙 본네 (Christian Bonnet) 였다 . 그후로부터 매주 일요일 그의 자동차를 타고 퐁덴블로 주위에 흩어져 있는 암장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록클라이밍 (Varappe) 에 열중할 수 있었다 . 퐁뗀느블로는 파리에서 남쪽으로 50 여 Km 떨어진 아름다운 도시로서 그 주위의 둘레가 90Km 나 되는 방대한 숲속에 사암 (Gres 그레 ) 덩어리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는 숲속의 요정들이 살고 있는듯한 그런곳이다 . 그러므로 퐁뗀느블로라는 이름은 곧 퐁뗀느블로 숲을 의미하게끔 되어졌다 . 지도에 등고선이 하나 , 또는 둘로 표시된 평탄한 숲속에서 6 급까지 페인트로 표시된 4-5m, 또는 10 여 m 높이의 바위 덩어리들을 수십개씩 페인트로 표시 , 각 급수별로 컴비네이션하여 , 연습할 수 있는 곳이 36 개 지역이나 된다 . 쟈일이나 피톤등 장비는 전혀 쓰이지 않고 탄력 있게 구부러지고 바닥의 마찰을 크게 하기 위하여 요철부분이 없이 창이 밋밋한 구두만 있으면 된다 . 그리고 풍화작용에 의하여 바위가 부서져 바닥의 모래사장 같이 되어 있으므로 구두바닥을 털기 위한 따삐 ( 융단 ) 한조각과 POF( 송진가루주머니 - 바위를 오르기 전에 스탠스에 송진가루를 떨어서 묻히거나 신바닥에 묻힌다 ) 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것은 퐁뗀느블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외에 C.A.F 회원들과 또는 크리스티앙 보네와 함께 노르망디 세느 (Seine) 강변의 백악암 (Crais 크레 ) 으로된 바위벽과 파리에서 2-300Km 떨어진 프랑스 중부 석회암 (Calcaire 깔께르 ) 지대의 쏘스와 (Saussois) 획셍 (Fixin) 등지에서 벽등반 연습을 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벽들은 평야지대의 낮은 단애에 불과 한것이어서 나에게는 언제나 알프스에 가야만 한다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 여름이 되자 , 나는 모든일을 집어치우고 샤모니로 달려 왔다 . 샤모니에 다시올 수 있었던 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나는 회원들과 함께 Mont Blanc normal 코스로 한번 걸어 올라간것 외에는 알프스에 대하여 별로 아는것이 없었고 , 같이 등반할 파트너도 없었다 . 차양재군은 당시 파리에 남아 있었다 . 그러므로 비교적 쉬운 몽블랑의 그랑뮬레 코스로 단독등반을 하려고 하였다 . 무수한 쎄락과 크레바스들은 산으로 떠나가전에 나를 겁나게 하였다 . ENSA 의 Stage 중 Vallet Blanche 에서 크레바스들을 경험 하였지만 그곳은 평탄한 설원에 불과한 곳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다른것이었다 . 그랑뮬레로의 두번째 몽블랑을 등반한후 부터는 차츰 벽등반으로 등반폭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 나의 알프스등반이 이렇게 두려움속에서 시작된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그러나 최소한 부딪쳐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것은 나의 주의에 알맞는 것이 아니다 . 알프스의 눈덮힌 산록을 쳐다보며 서서히 크레바스를 피해 그곳을 오른다는것은 한 없이 즐겁고 행복하였지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던만큼 한번의 등반을 위한 출발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알프스등반이 빙설벽에 치중 하였던 것은 우리나라에서 해 보지못한 내적욕구이기도 하지만 단독등반이 강요되어지는 환경적 상황에서 경쾌하고 스피디한 빙설벽 등반은 정말 매력적인 것이다 . 그러나 엄청나게드는 생활비와 등반비를 마련하기위하여 나날을 일터에서 노동을 해야하고 휴일이면 일에 지친몸으로 산을 오르는 일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 전위등반이나 , 아주큰 북벼들을 위해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소비할 능력이 없음이 아쉽다 . 몽블랑산군의 맞은편 2-3,000m 급의 낮은 산에서의 록크라이밍도 계속했고 ,Pension 에 모여있는 각국의 크라이머들끼리 모여 하루정도에 끝낼수 있는 바위코스는 언제라도 떠날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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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 뉴스
고 유재원 선배 등반기
박종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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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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