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한민국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생명의 존중함을 깨닳아 사형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가들이 '사형법이 그대로 존속되어야 하느냐? 폐지되어야 하느냐?라는 문제로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각 나라마다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라"는 모세의 율법에는 엄연히 사형법이 있습니다. 무고하게 남의 생명을 빼앗은 흉악범이라면 아무리 관대한 사회라 할지라도 행위의 보응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2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편에 강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멸망받은 강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를 주님의 왼편강도라고도 합니다. 이는 아무리 극한 형벌을 가할지라도 동정의 여지없이 죽어야 마땅할 죄인입니다. 더 큰 불행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대속의 은혜를 외면한 일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존중받고 살아야 하고 또 자기 수명은 다하고 죽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오래 살고 또 부를 누린다 할지라도 죽음은 면할 수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이 날을 맞느냐 보다도, 어떻게 맞느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죽었다고 소망이 없었고, 홍해를 건너간 후손들이라 하여 소망이 있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느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며 믿지 않고 죽은 자라면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대속의 기회를 잃어버린 왼편 강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눅23:39절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합당한 묘사로 보겠습니다. 또한 그 순간이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데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이 강도의 말은 진심에서가 아닌 희롱하는 원수 무리의 말과 같았습니다.(41-44절) 이는 최후까지 주님께 고통을 더하기 위한 마귀의 충동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못박힌 십자가일지라도 이렇게 멸망받는 죄인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저 범죄한 인생의 목숨을 빼앗는 심판의 형틀일 뿐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영원한 불행이요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죄값으로 받는 심판이라면 우리와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동일한 범죄로 동일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죄인들이기에 이러한 극형에 처한 줄압니다. 그런데도 그 중 한 사람은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애정 섭리를 잘못 해석 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혹자는 멸망받기로 예정된 자이기에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다가 죽을 때에 주를 부인하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구원받은 강도와 같은 기회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 강도는 멸망에 이르고 말았으나 다른 강도는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렸을 지라도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골고다의 세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최후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양편의 죄수들은 자기 죄값으로 받는 형벌로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합니ㅐ다.
물론 멸망받는 사람에게라면 무의미할 뿐이지요, 그러나 구원받을 사람이라면 이때의 복음은 그대로 영생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자기 죄값으로 멸망 받는 강도에 비해 구원받은 강도는 특별한 공로가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주의 긍휼을 믿고 간구한 것 뿐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 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0-43절),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실한 구원입니까? 과연 죽어가는 인생에게 이보다 더 절박하고 귀중한 문제가 있을 까요?
영생을 보장받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구원을 보장받은 이 강도는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마음에 자유를 얻게 되었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그의 욕된 삶은 부끄러워움이었고
죄값으로 받는 형벌은 더 견디기 어려웠을 지라도 이제는 모두가 해결되었습니다. 도리어 더 크게 감사드리고 영광을 주님 앞에 돌릴 수 있는 극적인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형틀에서 받는 고통은 그대로요, 외부적인 환경은 그대로 일지라도 구원을 보장받은 그 심령은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네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오늘 이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대속의 진리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만일 주님 대신 다른 죄수가 그 곳에 있었다면 2천년 전 골고다에 세 십자가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죄수를 못박아 죽인 형틀일 뿐이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셨기 때문에우리는 거기서 대속의 은혜를 힘입게 됩니다.
1)종교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회로 대제사장 앞에서 받는 재판입니다. 이때에 적용된 법 조항은 모세의 율법으로서 주님을 죽여야할 죄목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하므로 이것은 신성을 모독한 죄라하여 국형에 처하도록 심판하였습니다.
진리를 사수하겠다는 열심이 지나쳐서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심판하였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어느 때고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등장하여 양들을 짓밟고 죽인 일들은 많았습니다. 충성된 목자라면 양을 바로 지켜야 하는데도 청지기가 선한 목자와 이리도 분별 못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이 죄는 철저히 회개하고 용서받기 전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2)세상 재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권이 보장된 상태라면 종교 재판으로 그리스도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결국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게 되었습니다.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왕 중의 왕인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게 된 이 장면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진리가 어떻게 세속 법정에서 정죄 받을 수 있을 까요? 진리가 세상법의 저촉을 받는다면 진리가 바뀌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런 모순이 있을 수가 없으나 엄연히 시행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법정에 고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백성을 미혹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눅23:2절), 했습니다. 어떠한 연유로든 점령지의 통치자로서는 백성을 선동하고 미혹한다는 일은 반역에 해당되므로 방치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미혹이라는 말의 성격이 어떤 경우에 해당됩니까? 이는 바른 길에서 잘못된 길로 오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덴에서와 같이 생명길에서 사망길로 빠지게 한다면 이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멸망에 처한 인생을 구원얻게 한다면 이는 유혹이 어닌 구원입니다.
그대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복음 외에 우리에게 어떠한 장애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눅23:2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이도 역시 백성을 미혹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올무는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제공했을 뿐 주님이 백성에게 탈세하라고 가르친 말씀은 없습니다.
도리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국세는 나라에, 성물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합니다. 진리에 순응해야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 법도 준행할 때에 보호 받게 됩니다.
셋째는 "자칭 왕 그리스도라" (눅23:2절), 고 했다는 것입니다. 순금은 순금으로 평가되는 것이 진실이고 도금은 도금으로 평가 받아야 진실입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등장할 때는 그의 음성을 알아 듣고 그 품에 안겨야 복이 됩니다.
눅23:2절에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도 성령을 떠난 위선자들이 진리를 매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하고 놓으려하자 결국 무리들이 소리소리 질러 십자가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신 십자가가 왜! 그렇게 귀할까요? 그의 상함과 그의 찔리심이 곧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후 무한 영광일세"주님이 지신 십자가 이는 영원한 진리요 참 생명입니다. 이 진리 이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시기를 원하십니까?
사53:5-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무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대속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를 믿고 영접하였습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홀로 짊어지고 고통스러워 하시던 문제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시고 우리 주님께서 넉넉히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격과 감사로 화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