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포는 1629년 교동에 수영이 설치되고 읍성이 축조된 후 사용되었던 읍성 앞쪽의 포구다. 한때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교동으로 와서 날씨를 살핀 후 서해로 나갔으며, 동진원이라는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교동팔경 중 동진송객이 있으니, 이곳에서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동진포를 뒤로 나들길은 지난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롭게 들어선 전원주택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전원주택 마다을 통과하며 교동읍성으로 올라선다. 교동읍성에 우뚝 선 느티나무가 반갑다. 길동무와 많은 추억거리를 남겼던 느티나무는 수령 35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교동읍성으로 내려선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남양의 화량진을 옮겨 경기수영이 읍내리에 설치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된 것이다. 삼도(경기·황해·충청) 수군통어영을 관장하였으며 안해루(현종9년1667년)의 석주가 2개 남아있고, 객사 터와 북문과 서문, 동문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가 제법 남아있다고 한다.
길목에 연산군적지지 표지석이 서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옮겼는지 보아지 않는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 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 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인 폐비 윤 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 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조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죽은 터다. 또한 인근에는 부근당이 있는데 이 곳에 연산군과 그 부인 신 씨의 화상을 모신 것이라고도 한다. 연산군과 그 부인 신 씨의 묘는 서울둘레길 8코스에서 만날 수 있다.
마을길을 따르다 보면 황룡우물을 볼 수 있다. 교동 수영 앞에 있는 우물로 그 안에서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종 때 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418년 3월 13일 수군첨절제사 윤하가 수영 앞에 있는 우물에 황룡이 나타났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황색의 큰 용이 우물 가득 차게 보였는데 허리가 기둥과 같이 굵었다고 했다.
교동읍성 남문이다. 교동읍성에는 삼문에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은 통삼루, 북문은 공북루, 남문을 유량루라 불렀으며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연대조차 알 수 없고 남문도 1921년의 폭풍우로 아취형의 남문만이 남아있던 것을 1982년에 강화군수를 지낸 교동 읍내리 출신 김충호 군수가 경기도청 재직 시 붕괴된 남문(아치형)과 치첩을 보수하여 원형은 되찾았는데 남문위에는 유량루로 추측되는 네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었는데 남문은 1974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56호로 지정되어 1975년에 해체 복원에 이어 현재 문루가 복원되었다.
교동읍성을 뒤로 남산포로 향한다. 남산포는 삼도수군통어영지로 1633년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여 경기도는 물론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관장하던 부대의 터이기도 하다.
삼도수군통어영지는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적하여 해안을 방어하였다. 근세에 선착장을 개축하여 이 일대의 경관이 상당히 변했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없다.
잠시 진망산(남산) 사신당으로 밧줄에 매달려 오른다. 이곳에 예전에는 큰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 신당이 있었는데 이를 사신당이라 불렀는데 6.25때 없어진 것을 1969년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사신당 내부에는 임경업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송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배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예전 길동무와 추억거리가 참 많은 곳이다. 남산포선착장에서 보는 얼음바다는 정말 장관이었는데 요즘 겨울 큰 추위가 없다보니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쉽다.
남산포선착장을 뒤로 대룡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금은 지루한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겨울 나들길에는 너른 평야에 철새들이 멋진 광경을 보여주곤 했었다. 그사이 건물도 군데군데 새롭게 들어선다.
대룡1리 표지석을 만나면서 대룡시장으로 들어선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가득찬 대룡리의 시장은 예전과 달리 1960~70년대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대룡시장은 해방 후 면사무소를 비롯한 주요 시설이 읍내리에서 옮겨오면서 대룡리는 교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0년 6. 25 전쟁 이후 황해도 지방의 피난민들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 연락장소로 이용하면서 먹을거리를 비롯한 장터가 생겨났다. 피난민들이 그곳에 정착하면서 점포수가 늘어나고 업종도 다양해지면서 대룡리 시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룡시장은 교동이발관, 거북당, 동산약방, 교동정미소, 제일다방, 강화상회 등 가게 이름이 딱 옛날 그대로였었다. 곳곳에 벽화도 그려져 있었는데, 그리고 1960~1980년대의 빛바랜 사진 같은 모습이 곳곳에 간직되어 있어 골목에 들어서면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했었는데 교동대교가 연결되면서 해마다 옛 풍경이 사라져 아쉽다. 친구와 함께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