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의 하나가 고택, 종택을 찾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냥 좋아서요" 라고 궁색한 답변을 하지만 내외구분이 엄격한 배치와 그에 따른 건축부재의 조화, 풍수지리적 양택 조건, 종가집의 내력, 중시조를 비롯한 집안의 선비의 사상, 제례 및 음식 문화 등 전공분야에 따라 접근하는 시각과 관심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도저도 아니기에 질문에 충실한 답을 할 수 없기에 참 난감한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고택을 답사하는 나의 작은 바램은 한결같다. 편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몰입,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는 재미,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누각 계자난간에 기대어 낮잠을 즐기고픈 소박한 욕심, 별당의 애기씨가 띠살문 창살에 앙증맞게 나있는 눈꼽채기 창을 통해 나를 보고 있다는 유쾌한 착각, 솟을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쳐 보고 싶은 동심, 비 내리는 날 정자에 올라 연지의 연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처연한 즐거움도 좋지만 역시 최고의 기대감은 종손의 말씀을 듣는 것이리라.
친구 놈들은 이런 나의 취미를 빗대 야! 그게 돈이 되냐, 밥이 되냐 라지만 난 피식 웃으며 답한다 야! 이눔아 최소한 똥은 안돼!!!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학봉 김성일의 종택 솟을대문 앞에서 잠시 의성 김씨 집안을 더듬어 보면, "영남의 명문가는 안동에 몰려 있고 안동의 명문가는 퇴계의 진성 이씨, 서애의 하회 류씨, 입바른 선비가 많은 의성 김씨를 말하지만" 이 글을 읽는 가족들이 오류방에 몰려와 연좌하며 나는 물론 운영자인 늑대별님에게 책임지고 카페를 폐쇄하라는 항의 농성이 염려되어 안동의 양반 집안을 더 언급하자면 안동 장,김,권씨, 예안 이씨, 고성 이씨, 광산 김씨, 가일 권씨도 알아주는 명문가이며 그 외에도 여러 집안이 있겠지만 나의 한계임을 인지하시어 사대부 집안 출신 가족들의
큰 이해와 용서를 바란다. 휴! 큰일날 뻔했다.
아무튼 의성 김씨 집안은 독립 유공자를 29명이나 배출한 집안답게 500년 내려오는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지 않겠다는 정신과, 선비 집안에는 금부도사가 3년에 한 번씩 체포영장을 가지고 찾아와야 한다"(조용헌, 조선일보)는 각오를 가지고 살았던 강골 집안이며 그중에서도 학봉이 대쪽 선비로 가장 유명하며 학봉종택은 선생이 의성 김씨 종택이 있는 임하의 내앞 마을에서 582년 입향한 곳이다.
학봉 종택 홍살문이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같마당에는 녹색의 잔디가 환상 적이고 온갖 화초와 나무가 봄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 상감마마님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진찍기에 발걸음이 분주하다.
하지만 난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사랑채 지붕에 드러난 합각마루에 눈을 떼지 못하며 정원 조경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흔히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게 다듬은 공원 등지의 조경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신 경험이 있겠지만 그건 일본식 조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일본식이라서 나쁘다,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조경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통 조경은 인위적이 아니라 정원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여 인공적 요인을 최소로 줄이고, 못을 만들 때도 계곡 등의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고 나가게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정원수를 다듬지도 않고 가지치기 정도가 고작이며 사철 푸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원수를 선별하고 선비의 기상을 대변하는 사군자는 반드시 심는 것이다.
바깥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티없이 순박한 모습의 처자가 중문으로 나오길래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하였더니 주저함 없이 그러하시란다. 하긴 봉제사 접빈객이 양반 집안의 자랑인데 문전박대 할 수 있겠는가.
종택은 설계도를 먼저 그린 후(설계도가 운장각에 지금도 보관중이다) 건축한 까닭에 현재의 가옥배치도 본디의 모습과 거의 일치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랑채, 안마당, 안채가 ㅁ자형 고택이며 바깥마당에는 풍뢰헌, 운장각,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바깥마당과 물린 사랑채 측면으로 중문을 통해 들어서면 여성의 생활 공간인 안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엄격한 내외구별을 위해 사랑채의 기단이 안채보다 높게 조성되지만 학봉 종택은 거의 차이가 없으며 안채는 넓은 우물마루의 대청, 4각의 방형 기둥, 여러 개의 바라지문, 서까래가 드러나는 삿갓천장(사찰에서는 연등 천장이라고 한다) 이며 안마당에 들어서니 마루에 말리고 있는 노란색의 물체(?)가 보인다. 난 뭔지 알 수 없었는데 안동과 가까운 곳이 고향인 상감님은 금새 알아보고 이거 송구
아닙니까? 라며 처자의 동의를 구한다.
-.송구가 뭐요?
-.소나무 껍질이란다.
-.뭐할려고 말리는 거죠?
-.(아가씨의 답) 송구를 물에 끓여 소다와 떡가루를 혼합하여 송구떡을 만들며 송구는
떡의 색깔을 곱게 하기 위한 거라며 냉장고에서 송구떡을 가져온다.
우리의 성질 급한 상감님은 얼어붙은 떡을 입으로 가져간다 ㅋㅋㅋ
-.아가씨 종택 안내 좀 해주이소
-.지는 모르고 설명하시는 아저씨가 오늘은 안 와요
-.왜요?
-.일요일은 쉬셔야죠
-.혼자 사십니까?
-.어르신이 사랑채에 계십니다.
-.時자 寅자 어르신 말씀입니까?
그렇다며 어르신은 요즘은 오후가 되어야 사랑에서 가끔 나오신다는 말을 덧붙인다.
큰일이다. 종손을 뵈을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해보지만 안개 속이다.
안방 위에 光風齋月의 현판이 보이지만 상감님이나 나나 자랑스런 한글 세대라는 고급tic한 우아한 핑계로 의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중에 아가씨의 목소리가 우릴 바보tic 서럽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다.
" 저 글씨요 빛 光 바람 風 齋(의미는 모른단다) 달 月, 광풍재월이며 비가 개인후의 햇빛과 달빛을 말해요"
어찌 알았냐고 물었더니 종택을 안내하시는 아저씨의 설명을 여러 번 들었단다.
쥐구멍이 어디 없나?
고급tic한 우리 둘은 한방의 펀치에 그로끼가 되어서도 알랑한 자존심으로 뭉쳐진 우린 나중에 종택 답사를 마친 후 담배 한 대씩 물고 상감님이 그 아가씨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은 거지요? 하여 어데예! 식당개 삼년에 라면을 끓인 것이지 라고 맞장구를 쳤다.
三人行 必有我師(3명이 모이면 그 중에 1명은 분명 나의 스승이 있다)를 망각하고...
다시 바깥마당으로 나오면서도 종손 어른을 뵐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풍뢰헌 운장각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초조한 맘 가눌 길 없어 촛점을 잃은 눈동자로 안내문만 응시하고 있는 중에 사랑채 문이 열리면서 무인풍이 역력한 모습의 어르신이 나오신다.
학봉의 14대 종손 김시인 어르신이 분명할 것 같아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여기서 잠깐 13대 김용환이 아들이 없어 시인 어른이 학봉의 종손으로 입적되는 과정을 진위 여부보다는 흥미진진해서 윤학준의 양반 문화 탐방기에서 발췌해 보겠다.
[종통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양반 집안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양자를 들여야겠는데 썰렁한 집안에 양자로 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문중의 유지들이 안달이 나서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재산도 없고 찬바람이 감도는 덩그런 기왓집과 사당이 있을 뿐인 집에 오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명가를 잊는 자가 아무라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봉 종손으로서 체통을 유지할 수 있는 인격과 풍채를 겸비한 인물, 일족을 통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학봉 종가는 시인 어른의 선친은 물론 조부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었기에 가까운 친척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칠촌에게 양자 빌 듯 한다" 라는 속담이 있다. 안되는 것을 억지를 써서 애걸복걸하는 것을 비유해서 하는 말인데, 양자를 들일 때는 그야말로 손발이 닳도록 빌어야 한다.
'아무튼 학봉 종손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을...' 하고 장기간에 걸쳐 물색을 한 결과 문중 어른들의 눈에 든 어떤 사람에게 점이 찍혔다. 그 마을에 갈려면 안동읍을 거쳐서 70리를 더 가야하는 두메산골이었다.
때문에 '양자빌이'의 노인 일행은 어떤 때는 3, 4명 어떤 때는 10여 명이나 되는 대부대였다 노인들이 당사자의 집에 도착하면 사랑방 문 앞에 멍석을 펴 놓고 앉아 버틴다. 요즘 말로 연좌농성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의식을 거추장스럽게 하면 할수록 또한 횟수가 거듭되면 될수록 더 권위가 서는 것이다.
어떤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 마을에 가려면 조그만 내를 건너야 하는데 좀 돌아가면 다리도 있고, 또 양반들의 행차라 동네의 젊은이 동원 업혀서 건널 수도 있었건만 이 노인 일행은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바지 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내를 건넜다.
얼음에 정강이를 베어 피가 흘러 내려도 노인 일행은 철철 흐르는 피를 딱지 않고 그 후보 자의 집에 당도하여 문 앞에서 앉아 버티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맞는 주인측의 대응이 또한 걸작이다. 피가 흐르든 말든, 살을 에일 듯한 추위에 떨고 있든 말든 모른 체 하고 내버려두었다.
도무지 일가의 노인들에게, 더구나 장유유서를 지상 명제로 삼고 있는 유가의 법도로 봐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태도인데, 이 것 역시 권위를 격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김시인 어른은 이런 과정을 거쳐 대부분의 양자들이 미혼으로 입적하는대 비해서 두 아들과 같이 한 가족이 입양된 것이라 한다.
마루를 내려오신 종손 어르신이 경상도 전형의 무뚜뚝한 톤으로 말씀하신다.
-. 어디서 왔어요
-.대구서 왔습니다.
-.말라꼬 왔어요
-.학봉 어른신 종택 공부하러 왔습니다.
-.보고 가소!
그러시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화초에 물을 주려는 듯 물을 받고 계신다.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난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게 질문을 여쭌다.
-. 불천위 제사는 언제 모십니까?
-. ..........
-. 사당은 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습니까?
-. 정침 동쪽으로 하게 되 있어
-.주자가례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요놈 봐라 하는 듯이 처음으로 눈길을 내게 주신다)
또다시 대화는 단절되고 무거운 침묵이 뜰에 내려앉는다. 어르신 제 고향이 성주인데 동강 김우옹 선생님과 심산 김창숙 선생님도 의성 김씨 아닙니까? 하였더니 우리 일가 맞지! 하시곤 입을 다무신다.
할 수 없다. 종손 어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욕심에 외람되지만 자극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병호시비 까지는 아니더라도)
-. 윤학준 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노기를 띤 큰 목소리로) 그 사람 빨갱이야!!!
윤학준이 누구인가?
그는 경북 예천이 고향으로 학봉종택이 있는 금계가 외갓집으로 그 시대의 풍습에 의해 (맏이는 외갓집에서 낳는다) 외가에서 태어났으니 학봉 집안이 외가의 친척이며 1953년 6.25를 피하여 일본으로 간 후 좌익에 가입 반한 운동을 한 인물로 오랫동안 조총련계에 몸담은 관계로 귀국을 하지 못하였다.
윤학준이 안동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현 종손의 선친 김용환 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1994년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책에서 '파락호 김영환' 이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으니 김시인 어른의 노기도 이해할 만하다.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길 바라며 발췌해서 옮기겠다.
[김용환 씨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다. 외갓집이 그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치맛자락에 매달려 외가에 갔을 때 길다란 수염을 드리운 할아버지가 벽장에서 곶감을 내주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만년에는 아주 점잖고 기풍이 있는 호호야였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친 방탕아였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전형적 破落戶(파락호)였다. 파락호는 양반집 자제가 몰락해서 난봉을 피우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의 해석을 좀 더 보태자면 파락호란 "니힐"을 품은 "로맨티스트" 이며, 호걸인 동시에 지성의 소유자라야만 한다.
김용환 씨는 그런 의미에서는 파락호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노름꾼이며, 오입쟁이였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안하 무인 격으로 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의 기행 난행을 행장기로 남긴다면 아마 몇 권의 책은 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난봉꾼의 행동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기행과 난행은 학봉의 종손이라는 것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기미도 없지도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한데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노름판에서도 예사로 속임수를 썼는데, 그리 변변치 못한 솜씨여서 쉽게 들키고 만다.
상대방이 화를 내어 냅다 따귀를 갈기면 용환 씨는 때린 사람이 아닌 옆사람의 뺨을 냅다
갈긴다. 맞은 사람이 대들면 "아니 이거 돌림매가 아니었던가?"라고 능청을 떤다는 것이다
조상 전래의 논밭이나 산림도 난봉질하는 바람에 깡그리 없어졌다. 조상의 산소가 있는 선산이나 살고 있는 종택을 팔아 먹은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하나의 물건을 되풀이하여 팔아먹었다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학봉종택에서는 학봉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그것이 남에 손에 넘어갔다고 하면 김씨 일문의 수치이며 체면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문중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지손들은 만사 제쳐놓고 돈을 모아 되찾아놓는다는 것이다.
용환 씨는 종가에 보물로 내려오는 학봉이 남긴 유물, 유품... 이런 것들이 전당잡힐 물건으로는 안성마춤인 것이다. 전당포 주인도 이런 것이라면 무제한으로 빌려준다.
돈 떼일 염려는 추호도 없고 학봉 유물이라면 양반의 신분 상징이며 김씨 일문으로서는 더 없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거듭되니, 아무리 종손이라 하지만 자손들도 방어책을 강구한다.
그러면 김용환 씨도 강력한 대응책을 쓴다. 제사를 보이콧하는 것이다. "불초한 이 몸 조상 뵈올 면목이 없다"라며 제법 숙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골방에 틀어박힌다.
원래, 명문 집안의 종손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맡아 지낸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종9품의 벼슬인 참봉이 제수된다. 이것을 세습 참봉이라 하는데 용환 씨도 물론 참봉 어르신이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은 당주가 농성을 하게되니 자손들은 꼼짝없이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행을 세워 제사를 모실 수도 있기는 하지만 , 제주인 종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헌을 하지 않으면 명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며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양반의 체통이 떨어진다는 것이며, 그들 일족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인 것이다. 결국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영남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럴테면 종손이란 에헴! 하고 유세부리면서 떵떵 울리고 지낼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허기야 종손이라도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손이라야 그렇지만...
어쨌든 김용환이라는 인물은 근대의 보기 드문 쾌남아 였으며 호걸이었다.
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와 더불어 나는 김용환을 근세이후의 3대 호걸이자 파락호로 보고 있다. '김용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봉건적인 질서나 유습을 아무 거리낌없이 깨버리는 그의 파격적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갈채를 보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김용환씨가 남긴 말 중에 최고는
"할배는 학봉이고 나는 난봉이다. 대대로 봉이 나니 집구석은 되는 집구석이다."라는 말이니
역시 걸물은 걸물이었다.]
근디 윤학준의 글이 왜 노종손의 심기를 건들었을까요?
어르신의 노기가 지속되면 말씀이 끝날까 두려워 슬쩍 거들었다
-. 어르신 그래도 용(자)환(자) 어르신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표정이 풀리시며) 그 어른이 말이야 13(?)세 때 선친이 왜놈에게 수모를 당한 것을
눈으로 목격했거든,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 그러니 죽으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가셨어.
그러니 그분의 숨겨진 이야기를 누가 알겠나? 우리도 몰랐었는데 도움을 받은 지사들이
보훈처에 탄원을 해서 그렇게 된 거지 아마 1995년도인가...
그렇다. 천하의 파락호로 알려졌던 김용환은 거의 모든 재산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낸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모르게 하려고 난봉질, 노름꾼으로 생활하셨지만 그분의 깊은 속은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종친들에게 군자금을 모금했다며 감히 누구가 동참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팔고 학봉의 유물을 처분하고 이러한 모든 것이 군자금을 만들기 위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경우야 다르지만 대원군 이하응이 안동 김문 들에게 비굴하게 미치광이 노릇을 했듯이...
1995년 정부는 김용환 어른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그분의 명예를 회복해주었다.
-. 어르신 학봉 선생의 명예도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이 국사시간에 배웠던 것이 모두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얼굴에 기분 좋은 표정이 역력하다) 조선왕조실록 읽어봤어요! 실록에 나와 있는 것도 제대로 해석 못했으니... 학봉 할배가 언제 왜놈들이 안쳐들어 온다고 한마디나 했어?
-. 그게 다 백성들이 공포심을 가지고 생활을 못할까봐 깊은 애민사상의 발로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는 전운이 감돌자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일본에 파견했다. 이들이 귀국 보고를 하면서 황윤길은 전운이 임박했다고 말하고 김성일은 걱정할 일이 못 된다고 보고하였다. 결국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가 전란을 일으켰다고 학봉을 역적이라는 것이 종래 교과서의 일관된 논조였다.
이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선조(수정)실록과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풍신수길의 무례한 행동에 분개하여 3일을 기다린 후 국서를 받아낸 분이 학봉이며 귀국보고 후 서애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약 병화가 있게되면 어찌할려고 그러나?" 하고 물으니 "저도 어찌 왜적이 쳐들어 오지 않는다고 단정하여 말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할까봐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의 보고는 진심이 아니었다. 국가정책에서 정직하게 보고하지 않는 것은 문제였지만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바랐든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 할 선조의 무능함이 어쩌면 더 큰 책임인지도 모르다. / 신복룡 교수. 동아일보]
-.순직한 진주성에는 사당이 없습니까?
-.없어. 처음에는 선조가 학봉을 옥에 가두었지만 진심을 알고 왜병을 막는데 힘쓰도록 했어 그러다 결국 진주성에서 돌아가셨지(다른 이야기도 많았는데 기억의 한계로 상술하지 못함이 아쉽다. 대마도, 풍신수길, 유성룡 등에 관해 말씀이 있었지만 말씀을 기록한 작은 수첩을 그날 분실하여서...)
-.운장각 구경 해볼래요? 하시더니 사랑채로 가셔서 열쇠 꾸러미를 들고 오신다.
(雲章閣운장각은 시경의 한 구절로 '저 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맑게 빛난다' 라는의미며 학봉의 유품과 고문서 등을 보관한 전각이다)
운장각의 8개의 열쇠를 여는 동안 슬쩍 학봉 선생님은 대쪽이셨죠 라고 여쭈었더니
-.그렇지 선조 임금이 경연장에서 자신을 옛날 왕에 비교하라 하자 모두들 '요순 같은 성군이라' 했어나 학봉은 '천자가 고명하니 요순 되기가 어렵지 않으나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는 폐단이 있으니 걸부 같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라고 했었지.
운장각은 온 통 고서의 천지로 목판은 물론 임란 시 학봉이 사용했던 칼 등의 유품이 가득하다. 겨우 알 수 있는 것은 주자의 무이구곡 그림 한 점 정도 밖에 없다. 옛님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종손 어르신이 슬며시 책 한 권을 건네신다. 고마웁다, 최소한 쌍놈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의미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서를 팔아 넘기지만 않았어도 달성의 남평 문씨들 보다 많았을텐데...라며 입 속으로 말씀하신다.
'어르신 아무리 접빈객이라 하지만 사람들이 찾아오면 번거롭지요' 라고 시건방진 질문을 하였더니 '그라만 안되지....' 하시더니 조금 뜸을 들이신 후 '소란스러워서 성가셔'라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의 답사문화에 대해서 시사한 바가 큰 말씀이시다. .
상감님이 큰 발견을 한 듯이 어 한글이네요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시인 어른으로부터 받은 책에 의하면 한글 편지는 학봉선생이 임란이 일어난 1592년 경상우도 감사로 산청에 계실 때 안동본가의 정부인 권씨에게 보낸 서찰로 진중에서 최후로 부인에게 보낸 비장한 내용의 편지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이르르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하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들 있으라 하오.
감사라 하여도 음식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지 모르지만 기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이 이만 섣달 스무나흗 날"
운장각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양반, 종손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이 종택은 앞으로 누가 보존하고 지킬 것인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지고 역사의 장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종택 솟을문을 나서면서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상념으로 머리는 복잡하건만 긴장이 가신
다리는 갈지字 행보다.
金時(자)寅(자) 어르신 내내 건강 하소서....
2003.05.11
첫댓글 병기친구야 덕분에 역사를 다시 공부하게하고 많은것을 느껴본다 고마버~~~~~
올만에 공부 잘 ~~하고 감다..병기칭구야 자랑스럽다참말로.. 이렇게 유식한칭구가 잇다는것이
기분조오타 , 내 아들이 의성 김 이거던 ㅋㅋㅋㅋㅋㅋㅋㅋ 공부 자알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