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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웃음유모어♣ 스크랩 챕터 8 [위선에 대하여]
시공 추천 0 조회 25 06.09.11 15: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챕터 8 [위선에 대하여]


(1) 이미지 조작의 명수, 예수


무소불위의 전투 능력을 갖춘,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는 모습이  원래 기대하던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이었다. 그러나 기독인들은 평화의 왕이란 새로운 메시아 상을 조작해 내려고 하다 보니, 여기 저기 출몰하는 예수의 험악한 행태 때문에 진땀 깨나 흘리는 모양이다. 평화란 화두에 대해 갈팡질팡 헷갈려 하는 예수의 모습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하자.


1)출병전야 예수의 갈등

누가문서를 보면, 전쟁을 앞둔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 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누가 22:36)


출병 전야, 군수품과 무기를 확인하는 장수의 모습을 닮은 예수의 심각한 얼굴이 상상되지 아니 한가? 돈주머니를 준비하라. 식량자루도 챙겨라. 무엇보다 중요한 칼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필히 간직하여라.....상기 예수의 명령은 어떻게 보면 예수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만찬 석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으며, 유다의 배신도 암시를 한 바 있는 예수는, 그 후 세 가지 당부를 제자들에게 하는데 그 장면이 상기 문장이 되겠다.


9,10장에선,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던 예수가, 이제는 돈주머니도 준비하고 식량 자루도 가지고 다니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칼은 왜 준비하라고 했을까? 게다가 겉옷까지 팔아서라도 칼을 지닐 것을 강조해야만 했을까? 결국 이 당시 예수의 심리 상태는 극히 불안정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동안  말빨과 사깃빨로 제자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었지만, 이제 그 효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칼을 준비하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 되겠다. 지금껏  나름대로 설교도 하고 이적쇼도 보여줬지만....이제는 한바탕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도피를 해야만 하지 않나 등등의 생각으로 예수는 꽤나 갈등을 했었음에 틀림없다. 그 당시 열심당의 무력시위도 기억났을 터이고 에세네파처럼 그 어딘가 동굴 하나 찾아 도피 생활을 할까하는 유혹도 있었을 터이고....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배척하던 아니, 독설과 폭언으로 저주를 퍼부었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파 사람들과의 야합은 양심상 도저히 허락을 못하겠고....이래저래 예수는 고민 꽤나 했을 터이다.


그래 고민만 하지 말고, 일단 할 수 있는 준비는 최대한 하기로 하자....그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기겠지....그래, 칼부터 준비시키자....아마 이러한 갈등의 결론으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명령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의 예수는 투쟁이나 도피처를 마련하는 피곤한 선택을 최종적으론 거부하고, 그저 되어가는 데로, 기독인들의 요망대로 말하자면,....예언대로....자살을 선택한다.

예수의 명령대로 칼을 준비했고, 그칼을 사용하여 예수를 구출하고자 했던 제자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이율배반적인, 도저히 이해 못 할 예수의 행동을 함께 추적해 보기로 하자.


2)제자에겐 악역을 자기는 천사 흉내 내는 예수

[예수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일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를 알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버릴까요?" 하고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뜨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만해 두어라." 하고 말리시며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주셨다.] (누가 22:49~51)


이 장면을 보면 예수는 틀림없이 두 가지 이상의 잘못을 저질렀음에 틀림없다. 첫 번째, 그는 제자들에게 칼을 준비하라고 시키고는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두 번째, 제자들이 칼로 쳐 버릴까요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즉답을 했었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주의자가 되어 버렸고 예수는 평화를 사랑하는 성인으로 조작되었으며, 게다가 떨어진 귀도 붙여 주는 신통력도 부렸다 한다.


예수는 왜 칼을 준비하라고 했을까? 그대도 한번쯤 그 해답에 대해 생각해 보시길 권유 한다.





(2) 한입으로 두말하는 예수의 설교


예수의 입술은 그럴듯하게 포장이 된 말들로 넘친다. 한편 그의 말과 행동이 전혀 다름은 바이블을 정독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이상대로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란 것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위선적인 말 따로 행동 따로 정도는 이해해 줄 수도 있겠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 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느니...성인이라느니...하는 오해들은 배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까지 이해를 해주고 용서해야만 할까? 예수의 일구이언 중 소위 악한 종의 비유라는 삽화를 예로 들어 보자. 마태문서 18장에 나오는 이 삽화의 주제는 죄와 용서 정도로 이해된다. 즉 신은 인간이 짊어진 거의 무한대의 죄를 용서해주니, 너희 인간들도 이웃과 동료의 죄를 용서하여 주어라...이 정도의 교훈인데, 이러한 가르침에야 필자 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가 시비를 걸겠는가?


그러나 이 삽화는 구성상으로도 문제가 많으며, 내용 자체도 아주 심각한 반사회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자 그러면 그 문제의 현장으로 안내하겠다.


1)악질 경제범도 예수의 비위만 잘 맞추면 모든 빚이 탕감된다는 논리.

이 이야기의 주제는 죄와 용서임에 틀림없다. 그러하다면 어떠한 게 죄인가라는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예수는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채무라는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부언하자면 신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차용한 인간 그리고 채권자로서의 신을 등장시켰다는 뜻이다.


상당히 유치한 발상이지만, 일단 이해해 주기로 하자....고대인의 상상력 부재를 어떻게 자꾸 딴지 만을 걸겠는가? 문제는 그 빚을 해결하고 탕감하는 절차에 심각한 반사회적 행태를 조장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우선 지적한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마태 18:23~25)


그대는 일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아시는가? 일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고,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약 오만 원 정도로 계산하겠다.)이라고 하니 한번 계산을 해보시라.....약 3조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전제봉건시대의 왕이라고 하나 3조원 정도를 통치권자 임의로 탕감해 준다면 그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엄청난 돈을 탕감시켜주는 이유도 불명확하다. 처음에는 마누라와 자식까지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라하고 독촉을 하더니...이것도 도덕적인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그렇고 자기 몸 팔고 마누라 자식을 노예로 팔아봐야 얼마나 될까? 다음 장면을 보자.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18:26,27)


아무튼 그렇게 강압적으로 빚 독촉을 하자, 그 종은 분명 갚을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나  왕은 단지 가엾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빚을 탕감해 주었다 한다. 한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할 왕이 이렇게 자기 멋대로 빚을 탕감해 주어서야 그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운영이 될까? 하늘나라를 이 지구촌에 세우겠다는 일부 기독인들의 소망이 혹 이루어진다면, 그 하늘나라는 무조건 부도 공화국이 되리라 확신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2)너무나 쪼잔한 자산가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18:28~30)


3조원의 자산가 혹은 자산가였던 사람이 겨우 오백만원 정도의 채권 때문에 채무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게다가  소송을 걸었다?....사실 이 정도의 소액은 설령 사기죄로 판명이 되더라도 인신 구속까지는 갈 수 없음이 오늘 현재의 법령인데, 하늘나라는 채권자만의 천국인가 보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일수 놀이하는 악질 사채꾼도 더러는 있으니까.....


3)고발만이 능사일까?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18:31)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종들은 모두 동료로 설정되었다. 그렇다면 동료의 악행을 보고 쪼르르...주인에게 달려가 고발을 했어야만 했을까? 3조원 자산가는 분명 악랄한 행태를 부렸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다른 종들의 행태도 도저히 이해 못하겠음은 필자의 아둔함인가?


그들이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산가를 설득하던가, 아니면 그들이 오백만원 정도 갹출하여 동료를 감옥에서 빼주던가 했어야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4)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긴 그리고 일구이언하는 왕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18:32~35)


왕은 이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다른 이의 고발을 듣고 그 조치를 무효화하였다 한다. 예수 당시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법령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 왕은 적어도 일구이언하는 쫌팽이가 된 셈이 되어 버렸다. 사실 왕은 처음부터 그 재벌의 채무를 탕감해 주지 말았어야 했다. 더욱이 그 채무자는 분명히  갚을 의사를 표명했었지 않았던가....


3조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단순히 가엾다고 탕감해주고, 그리고 그 채무자가 다른 채무자에게도 빚을 탕감해주길 바라는 통치권자라....그 나라의 경제는 어떻게 될지...에혀, 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 삽화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왕, 3조원 자산가, 5백만 원을 빚진 자, 그리고 동료....그런데 그들 모두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3조원이라는 거대한 채무를 임의로 처리하는 왕, 단돈 5백만 원 때문에 폭행을 가하고 당하는 게다가 인신 구속까지 불사하는 채권, 채무자, 그것을 고자질하는 동료들....이런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배울 수 있을까?


5)채무와 용서의 불균형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18:36)


예수는 조금 앞 절에서 베드로에게 거의 무한정의 용서를 베풀라고 가르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22)


베드로보곤 무한정 용서를 베풀라고 해놓곤 자기는 단 한 번의 용서로 끝났으니 이것도 일구이언한 셈이다. 역시 예수는 성령이라는 애비 그리고 요셉이라는 의붓 애비를 가진 즉 두 애비를 가진 자라서 일구이언을 쉽게 하나 보다. 그건 그렇고, 이 삽화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의 대상을 물질 즉 채무관계로 묘사했다는 점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3조원 정도의 죄를 용서해주는 신 그리고 5백만 원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는 인간....그 인간의 몰염치 때문에 이미 용서한 인간을 재차 벌주는 신......예수 그리고 마태문서의 편집자들의 상상력 부재에 그저 한숨만 나온다.


한편, 이 삽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심각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즉 재벌들의 무차별 차입 경영으로 인해 도산 시, 재벌들은 어떻게든 자기들의 생존을 위한 발판은 마련하지만, 피해 중소기업 사장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도태되어 버리는 현실의 모습이 상기 삽화에서 연상됨은 필자만의 과민함일까?


실제 IMF시 그리고 그 이전, 이후의 전례를 보더라도, 대기업은 부도가 나더라도 법정관리니 화의니 채무  탕감이니,,,등등의 방법으로 생존하지만 종이쪼가리가 된 어음용지를 가진 하청업자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던가? 예수의 허접한 비유 설교가 대기업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혹 어떠한 변명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도 제기하는 바이다.


바이블 그리고 예수가 쏟아낸 화려한 말의 성찬들은 그 포장만 한 겹 벗겨내면 언제나 악취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독인뿐만 아니라 보통의 시민들도 이제는 알아 차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3)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하는 예수의 가르침


종의 의무 혹은 무익한 종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문서 17장의 삽화를 주제로 설교를 할 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고대의 유대 사회가 배경이라는 연막을 우선 쳐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독인들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는 표명일까? 그러하다. 이 삽화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전혀 용납할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인들의 요망대로 고대 신분 사회라고 무대를 설정해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삽화 주인공들의 인간관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은 고대 봉건 사회건 오늘의 노사 관계이던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큰 조직 사회가 아니고 소규모 집단일수록 이해와 신뢰는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묶어 주는 끈의 역할을 해준다고 확신 한다. 이 삽화에 등장하는 주인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거나 혹은 아주 영세한 목축업자임에 틀림없다. 이 점을 우선 인식하고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가 17:7)


이 글을 보면 주인으로 명시된 자의 사업 규모를 알 수 있는 바, 첫 번째 증거: 종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a servant)  두 번째 증거: 농사와 목축의 겸업이 아니고 그 중 하나 만을 주업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plowing or feeding cattle) 즉 and가 아니고 or임을 확인하시라는 뜻이다. 세 번째 증거: 식사를 별도로 준비하는 종이 없었다는 것....등을 생각해 보면 소위 주인이라는 자의 농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농장이나 목장 수준의 규모 있는 지주가 아니고 그저 밭떼기 좀 가지고 있거나 양 몇 마리 정도를 가진 자작농 정도라고 봐야할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직원 한두 명 정도를 두고 영위하는 구멍가게 사장 정도가 이 주인이라는 자의 정체라고 보면 틀림없겠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구멍가게 주인이라는 자의 착각을 보시라. 하루 종일 땀 흘리고 온 피고용인에게 수고했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한마디 건네주거나, 혹은 빨리 씻고 식사부터 하라는 당연한 반응을 거부하고, 게다가 이러한 자신의 비인도적 행위가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연히 ...아이고, 수고했다. 빨리 씻고 밥부터 먹어라....는 정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 예수의 착각은 끝이 없나 보다.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누가 17:8)


주인이라는 자의 사고관과 행태가 이 정도라면 그 어느 누가 붙어 있을까? 물론 계급 사회라 종의 신분을 자기 임의대로 극복할 수 없다고 해도, 주인의 횡포가 이 정도라면 그 누가 열심히 일할 기분이 나겠는가? 다음 장면을 보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누가 17:9)


아무리 신분 사회라고 해도 주인이 이정도의 양식을 가진 자라면 심각한 도덕 불감증 환자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종은 기계나 로봇이 아니고 분명 인격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던가....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그 주인이라는 작자는 도무지 모르나 보다.


에이 씨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조그마한 구멍가게 하나 갖고 더럽게 유세하고 있네...

여기 아니면 밥 먹을 데 없을까봐....이 정도가 오늘쯤의 우리네 반응이겠지만, 그래 그때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확정되던 계급 시대였다고 하자, 그래도 마음 속 반응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리라 본다. 그 결과는 필연적인 생산성 저하로 나타났을 거라고 짐작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예수는 고용주의 그러한 행동이 당연하다고 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웃기지도 않는 주문을 요구하고 있다. 아래는 그 본문이 되겠다.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누가 17:10)


열심히 일했고, 더럽지만 주인의 밥상 시중까지 들라는 명령까지 완수했는데도 <저는 그저 제 할일을 했을 뿐이고, 거룩한 주인님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그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종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어쩌면 있기는 할게다....간 쓸개 다 빼 놓고 그저 목숨 줄에만 연연하는 철저한 노예  근성의 무리들...분명히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많은 인원을 거느린 고용인이라면  조직의 질서를 위해 다소간의 엄격한 질서도 필요하리라 본다. 그러나 한두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이라면 그  무엇보다는 인간적인 신뢰가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금동서 이데올로기 등을 떠나 자연스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열심히 일한 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해주는 그리고 그 노력에 고마움을 표명하는 주인(고용자) 일을 할 수 있음에 진실로 고마워하는 종(피고용자) 종은 주인의 인격에 믿음을 그리고 주인은 종에게 신뢰를 표명하는 서로간의 관계...


이러한 사회와 조직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가, 그리고 생산성 역시 얼마나 극대화되겠는가? 예수는 이러한 자연스런 인간관계를 거부하고자 한다. 살맛나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한다. 오로지 권위와 권력에 굴종하라고만 요구한다. 지금까지 상기 삽화를 고용인과 피고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지만, 그것을 예수와 기독교인, 목사와 신도 그리고 예수와 목사로 설정을 해도 그 해답은 마찬 가지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야훼가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자유의지를 남용한 게 원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인류에게 보편적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로봇 정도로 살아라 라고 요구하는 게 기독교의 정체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상기 삽화는 대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접받기를 당연히 그리고 즐기고 있는 목사들이 그래도 자신을 한껏 낮춘다고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할 때이다.


목사들은 그러한 말장난으로 신도들을 우롱할 때, 한번쯤은 상기 삽화를 기억하시길 권유한다. 그리고 자신은 신도들이 자신의 종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지 않나하는 질문을 그대의 양심과 한번쯤 대화해 보시길 권유한다.





(4) 예수의 히스테리와 기독인의 폭력


마태문서 21장을 보면 예수가 얼마나 폭력적이며 히스테릭한 성정의 소유자인지 잘 묘사되어 있다. 우선 그 장면을 함께 감상하기로 하자.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거기에서 팔고 사고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마태 21:12)


사실 구청 직원들이 노점상 단속을 할 때도 이렇게 험악하게는 하지 않을 듯한데. 예수가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필자는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예수의 광기어린 이 작태에 대해 그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 보기로 하자.


1)누구의 책임인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준조세격인 신전세에 대해서는 예수도 마태서 17장에서 이미 인정한 바 있으므로 신전세 자체 문제를 제기한 바는 분명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상기 21장에서 예수가 언급한 데로 신전에서의 상행위에 대해 예수가 분노했다는 이유 정도가  그 변명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이유가 합당하다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서 예수는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참고로 당시 신전세는 반세겔 즉 2 데나리온 정도이니 요즘 화폐로 치면 약 10만 원 정도가 되겠는데(근로자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세겔화로 환전할 시 그 환차손을 제사상 계급과 환전상들이 결탁하여 치부를 하였다 한다. 사실 신전에서의 상행위 보다는 이 문제가 더욱 심한 부패의 고리였지만,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도 하지 않았다.


신전 뜰에서의 상행위는  제사장의 허락이 없었으면 분명히 불가능했을 게다. 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인 제사장을 만나 충고를 하던 이의를 제기하던 했어야지, 왜 무턱대고 폭력부터 행사를 했어야만 했을까? 그러하다. 예수는 대화 혹은 토론을 모른다. 입술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 내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모범을 보여 주지 못한 위선자 예수의 또 하나의 모습이  상기 문장에 표현되었을 따름이 아닌가 한다.


2)자격문제..어이없는 질문과 대답

예수의 광기어린 행동 뒤 제사장들이 항의하는 장면을 보기로 하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이며 성전 뜰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치밀어서 예수께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립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 21:15,16)


정말 어이없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예수의 폭력 행위 그리고 무자격 의료 시술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도 항의도 하지 아니 하고,느닷없이 길거리 아이들의 동요에 대해 질문을 했을까? 만약 그대가 그 당시 현장에 있었다면, 과연 이런 무뇌아 같은 질문을 했을까? 예수의 대답을 마저 보기로 하겠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들린다. '주께서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리라' 고 하신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1:16)


뭔가 잘못 짜여진 각본을 보는 것 같지 아니한가? 당연히 폭력 행위에 대한 추궁과 그 자격에 대해 문의해야 될 것을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예수가 주 즉 메시아라는 예표 사건으로 돌려 버리는 작가의 비겁한 의도가 그대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 한가?


그러하다. 상기 대화는 그저 예수의 폭력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억지로 구성된 소묘일 따름으로 보여 진다. 마태서의 치졸한 구성에 비해 요한서는 그나마 조금은 더 용의주도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같은 주제로 구성된 요한서로 들어가기로 하겠다.


3)자기 몸이 신전인가?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2)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요한 2:13~17)


상기 문장을 보면 신전의 존엄성과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중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장면이 뒤이어 나온다. 예수의 히스테릭한 행동은 좀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다음 장면은 도무지 이해 못할 예수의 변명이 첨가 되어 있는 바, 그 장면은 아래와 같다.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8~22)


마태문서에 비해서는 질문 자체가 그리 하자가 없다. 그러나 예수의 히스테릭한 그리고 주제넘은 폭력 행위에 대해 그 당위성을 묻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예수는 동문서답으로 일관한다. 생각 해 보시라. 자격 문제를 거론 하는데 왜? 갑자기 신전의 파괴와 건립 문제가 대두되어야만 했을까? 예수의 어이없는 대답과 그것에 대해 항의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이 한편의 코미디 같지 아니 한가?


좋다. 어이없는 그 상황을 모두 인정하기로 하고 얘기를 진행하자. 예수는 이 장면과 그 후 자신의 죽음 시 성전 휘장이 찢기는 사건(마태 27,51) 등을 통해 건물로서의 성전의 의미를 제거하고 자신이 성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주장인즉슨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는 의미를 선포하였다고 보여 진다.


이와 같은 논지라면 건물로서의 성전이란 이미 그 존재가치 자체가 사라져야할 시점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예수는 그렇게 히스테리를 부려야만 했을까? 별 의미 없는 그리고 당연히 없어져야할 건물로서의 성전에 대해 예수는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보여야만 했을까?


그러면 이쯤에서 정리를 해 보기로 하자.

첫째: 예수는 폭력 행위를 하기 전에 문제의 근원에 대해서 고찰을 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 하여야만 했다.

둘째: 제사상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좀 더 확실한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상인들에게도 충분히 설명을 해야만 했다.

셋째: 신전에서의 상행위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환차손을 착취하던 제사장 계급외 기득권층의 횡포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경고했어야만 했다.

넷째: 건물로서의 신전의 기능 상실에 대해 요한서 기자의 설명이 맞다면, 예수의 행동 자체는 너무나 비합리적이 아닌가 한다. 즉 상행위를 하던가말던가....아예 무시를 했어야만 했다.

마지막: 신전을 신성시한 예수의 이 행동 하나가 먼 후일 기독인들이 교회의 대형화를 시도하는 그 단초가 되었음을 그 당시 예수는 상상이나 하였을까?


기독인들은 예수 흉내 내기를 즐겨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의 히스테릭한 폭력 행위를 교회 안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 바깥에 까지 끌고 나가는 더욱 심각한 증세를 보이고 있는 바, 단군상 목따기, 불상 훼손 등이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겠다. 물론 마녀 사냥이니 인디오 학살이니...등등 모든 종교 폭력의 뿌리도 그 근원은 예수의 폭력성과 그 궤를 함께 한다고 보면 틀림없겠고....


최일도 목사처럼 예수 이름 팔아 보험 장사까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신도 끌어 들이기 영업을  방해하는 타 교단 문제에 대해서는 용감하게도  폭력 행위를 하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그 원죄는 대화와 토론을 모르는 예수에게 그 죄 값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5) 간디의 엄청난 오해 그리고 실수


세계 4대 성인이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인지 소크라테스가 포함되고 공자 혹은 마호메트가 삭제되는 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상기 인물들을 성인으로 추앙한다, 반면 그 성인들의 흠집 잡는 것 또한 즐겨한다.


석가는 부귀를 단념했지만 자신의 처와 자식을 포기했다더라....즉 사회생활 도피자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공자의 마누라는 악처로 유명했다더라....공자와 그 자식은 둘 다 본처를 버렸다더라....마호메트는 돈 많은 과부의 도움을 받아 출세했다더라....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를 경멸했으며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더라....


그러하다. 아무리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하더라도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철학, 인생관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뿐이며 그러한 행위야말로 우리가 이성과 오성을 가진 존재임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예수는 어떠한가? 이상하게도 예수에 대한 험담은 별로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기독인들의 처절한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예수가 완벽한 삶의 본보기를 실제로 보여 주었는지....사람들은 사실 유무의 진실 여부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한데, 진실한 예수의 삶에 대해 오해를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공로자는 간디가 저질렀다고 판단된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그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가?"


과연 그러한가? 혹시 진실은 따로 있는 것은 아니한가? 결론부터 내리자면 간디는 오해를 하였고 그는 바이블을 한 번도 제대로 읽었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가 되겠다. 예수는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기독인 즉 영국인들의 잔인함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간디의 말은  간디 자신이 예수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간디의 간단한 이 잠언이 인구에 회자되어 예수의 성인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 셈이 되어 버렸는데 오늘 현재도 목사들은...기독인들은....나를 모욕해도 예수를 욕보이는 짓은 하지 말라고 절규하고 있으며 보편적 일반인들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음이 현실이 되겠다.

자 그러면 간디를 감동시켰다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1)예수는 원수를 사랑했는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마태 5:40)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그 유명한 산상설교 중의 한 구절이 되겠다. 자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절규 이전에 원수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내려야 하겠다. 불행하게도 바이블에는 원수에 대한 한계 혹은 그 정확한 뜻을 설명한 바 없다. 할 수 없이 일반적 견해 즉 사전의 도움을 받기로 하자.


사전에는 ‘자기 또는 자기 집이나 나라에 해를 끼쳐 원한이 맺힌 사’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데 그러면 그 당시 예수의 원수는 누구였을까? 예수의 가족에 대해 누군가가 해를 끼쳤다는 내용은 바이블에 전혀 기록이 없으므로 일단 제외하자. 예수의 히브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유대를 통치했던 로마는 그의 원수 목록에 들 수 있겠다. 그 다음은 예수 자신에 해를 끼친 사람을 정리하는 순서가 되겠는 데 이 경우....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리스트에 등재되겠다.


우선 예수를 배반한 유다 그 다음엔 예수의 포교를 방해하고 대적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유대교 율법학자와 제사장들....그 외 헤롯 왕가의 사람들....등등....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사탄 ,마귀, 귀신 등도 예수의 원수임에 틀림없을 터이고...


이제 예수의 원수라고 진단내릴 수 있는 그 대상은 대개 정리를 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그 원수들을 사랑했을까? 불행하게도 필자는 예수가 그 원수들을 사랑했다는 흔적들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원수들에게 악담을 퍼 부었으며 증오만 겨냥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자 한다. 바이블에 묘사된 예수의 육성을 인용하겠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 26:25)


예수는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에게 충고 한 마디하지 않았으며 자살로 이어지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그저 방관하였을 따름이다. 예수는 유다를 사랑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 되겠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 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한 18:22,23)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설교한 예수,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쳐하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고 항의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 주고 만다.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 6:24)

왜 예수는 부유한 사람들에 이렇게 증오를 퍼부어야만 했을까?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누가 11:42)

바리새인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 붇는 내용은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는 예수의 일상사였다.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누가 11:51,52)

율법사도 마찬가지....이제는 그 당시 시대 사람에게 조상의 책임까지 전가하고자 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누가 13,31,32)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하는 예수의 천박한 표현도 확인하자....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태 8:32)

예수에게 동물 사랑을 기대함은 난센스가 되겠다.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될 것을 예수는 왜? 애꿎은 돼지들을 몰살시켜야만 했을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마태 23:33)

소위 성인의 입에서 독사의 새끼라는 험악한 욕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 물론 지옥에 떨어져라 고하는 말은 양념이 되겠고....


그러하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받는 방법은 그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야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누가 예수를 사랑의 화신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묘하게도 예수에게 정작 해를 끼친 민족의 원수...로마에겐 너무나 관대한 예수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마가 12:17)


비록 자신과 신앙관이 틀렸다고 해도 같은 민족이었던 바리새인 등에게 그렇게 악담을 퍼붓던 예수가  실질적인 민족의 원수인 로마에겐 왜? 그렇게 관대했을까?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그 격언의 유일한 실천 사항은 로마에 대한 것뿐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그렇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오지 로마에 한정되었을 따름이었다. 군중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예수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는데 그 뜻이 이해되시는가?


2)그러면 이웃은 사랑했을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태 19:19)


우리는 예수가 원수들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면 그의 가족사랑, 이웃 사랑은 어떠했을까? 예수는 말로는 정말 근사한 격언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흔하게 뱉어낸다. 우선 예수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행한 모습을 묘사한 바이블의 내용을 확인해 보자.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태 12:48)

최소한 8명 식구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대하는 그 냉정한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 하시니라] (마태 13:57,58)

예수의 가장 가까운 이웃 사람들은 역시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진정 이웃 사랑 실천의 모범을 보여 줄 의향이 있었다면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던 그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자 그 반응은 역시 냉랭하였다. 그는 고향 이웃 사람들에게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았음이 너무나 확연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러하다. 예수는 가족들을 외면했으며 고향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애정도 표명하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기술인가"에서 사랑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a. 형제애 b. 모성애 c. 성애 d. 자기애 e. 신에 대한 사랑


예수는 형제애도...성애도....자신에 대한 사랑도 몰랐으며 더욱이 실천에 대해서는 흉내도 내지 못하였다. 그저 신에 대한 사랑만을 자신 나름대로 실천하였을 뿐이었다. 그러하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지도 안했으며 원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에게만 온정을 베풀고 능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간디는 예수에 대해 너무나 엄청난 오해를 했음에 틀림없다.


간디는 다음과 같이 그의 말을 수정했어야한다. 크리스천도 싫지만 예수는 더 더욱 싫다. 예수는 말로만 원수사랑 이웃 사랑을 외쳤고 크리스천은 예수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했었다....라고.....


사족: 예수의 사랑 이야기는 표절이었음도 확인하자. 혹은 너무나 흔한 경구였음도 확인하자. 산상설교가 유대인의 또 다른 경전 "12족장의 경서" 그리고 샴마이와 함께 바리새파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힐렐"의 가르침에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던가....혹은 불경 『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으며 『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등에서 빛과 소금에 대한 경구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사족하나 더: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는 게 말만의 약속이 아니던가?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만 한다....知信行이라는 경구를.....





(6) 너무나 쉬운 문제, 뻔한 해답


마태복음4장에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 이때 까지만 해도 예수는 아직 신으로서 자격이 갖춰지지 않았나 보다. 소위 신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바이블을 보면 이때쯤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고 그 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야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구나. 아직은 신의 아들 정도의 자격 밖에 인정받지 못 했나 보다. 아무튼 예수는 시험을 받았다한다...자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그 당시 예수의 상태를 보면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단식할 때의 모습이 서술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좀 있지만 상상에 맞기고 질문을 해 보자.


그대가 40일 동안 단식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 단식이 끝나고 난 뒤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 아마 물과 소금은 충분히 섭취했을 터이고 수면도 어느 정도는 취했다고 가정하면..

그렇다. 배고픔이겠다. 빵과 우유가 그 어떤 욕망 보다 우선 이었을 게다. 그런데 마귀의 첫 번 시험을 보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이해가 되는가? 배가 고파 탈진한 사람에게 나타나 갑자기 돌을 빵으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라는 게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이라... 옛날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 하던 사단의 총명함은 어디로 갔을까? 그때의 사단이라면 어떻게 유혹했을까? 아마 이 정도가 아니겠는가....


자 여기 사과(빵이라고 해도 문제는 없다)가 있다. 이 사과를 먹으면 영원히 배고픔이란 고통에서 해방될게다...운운.. 이정도의 상황설정은 되어야 유혹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장면은 마귀의 유혹이 아니라 마귀가 배고픈 예수를 약 올리는 장면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여 진다. 식욕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비유 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묘사가 이 장면이 아닌가 한다. 예수의 반응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 다음 장면을 보기로 하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즉 명예욕을 자극하는 시험이 되겠는데... 이때 예수의 반응이 재미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마귀가 바이블을 인용하니 예수도 바이블의 내용으로 대응한다? 그렇다. 예수는 알고 있었구나... 바이블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거리란 것을... 마지막 시험문제는 어떠한가?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우상숭배는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그들 민족의 딜레마인가 보다. 이 문제는 너무 쉬웠는지...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두 번째 문제와 마찬가지로 바이블을 인용해 가볍게 통과한다. 대개 이정도가 예수가 시험을 통과한다는 내용이겠고 그 다음엔 야훼의 아들임을 인정받고 아니 확신하고... 갈리리로 전도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가 예수의 시험내용이라 한다.


자 정리를 해보자. 1)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기적요구 2)성전에서 뛰어 내려 사람들에게 야훼의 아들 됨을 증거 하라는 요구 3)마귀에게 경배하라는 배교의 시험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시험문제 치곤 너무 유치하고 정답이 뻔하지 않은가? 인간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 되는 과정으로서 너무나 허접하지 않은가? 인간에겐 기본적인 욕망이 몇 개 있다. 식욕,수면욕,물욕,명예욕,권력욕,성욕...등


그리고 콤플렉스도 당연히 있겠고...외모, 재능, 부모 및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 필자가 성서 기자라면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교묘히 조합하여 예수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시험문제를 출제했을 터인데... 너무나 쉬운 문제를 낸 마귀의 정체가 궁금하다. 아니 성서기자의 상상력 빈곤에 동정이 간다. 이러한 내용에 혹하는 우리 이웃의 맹신 광신에는

차라리 분노를 느낀다...





(7) 예수의 동문서답


예수는 3년이란 그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기적을 보여 줬으며 또한 무수한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죽음 직전 까지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이 정말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점을 해소하지 못 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와 신도들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한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고 바이블은 증거하고 있다. 만약 로마가 그들의 정권 안보 차원에서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이 말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의 도그마를 정립 혹은 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하는 말과 뜻이 같다고 보면 되겠다.


바이블 자체가 그만큼 허점과 오류가 많다는 뜻이다. 예수는  기적이 절실히 요구되는 장소에서 그의 능력을 보여 주지 않았고 확실한 표현이 필요한 대화에서는 비유로 말하거나 아예 동문서답을 해 버렸다. 예수의 동문서답을 몇 가지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사탄과의 대화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 4:3)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4:4)


신으로서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예수는 너무나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예수의 대답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사단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기만 하다. 예수는 신명기 8장에 나온 말을 인용하였지만 그 인용 예 역시 너무나 억지스럽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신 8:3)


신명기의 내용은 광야 40년 고생의 이유를 설명하고자하는 야훼의 말이다. 왜 이스라엘 선조들 고생담의 이유가 사탄의 요구에 대한 답이 되어야했을까? 차라리 그 돌을 만나쯤으로 변신시키고 난 뒤....빵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하고 훈계했어야 좀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글에서는 야훼의 말씀과 빵이 살아가는 데 다 필요하다는 뜻이지만....예수의 말은 오직 야훼의 말씀만 가지고 살라 라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가한다....그대는 빵 없이 살 수 있는가?


2)빌립과의 대화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요한 14: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요한 14:9,10)


빌립의 현실적 의문에 대한 예수의 현학적 대답이다. 사실 야훼가 하늘나라에 있느냐 혹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느냐하는 것은 심각한 신학상의 주제라고 볼 수 있는 데....무식한 빌립이 과연 예수의 이 말을 이해는 했을까? 빌립에게 질타하기 전에 좀 더 쉽게 설명을 할 수는 없었을까? 참, 그대는 야훼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대의 마음 안에 임재 한다고 생각하는가?


3)니고데모와의 대화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요한 3;2)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3:3)


예수의 신성을 즉 메시아 됨을 인정하고자하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는 엉뚱하게도 중생에 대해 설교를 한다. 이러한 동문서답에도 불구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 가는 니고데모가 유대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니...너무나 의심스럽지 않은가?


4)두 죄수와의 대화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 ...] (누가 23:37)

한 죄수의 이러한 현실적인 요구에 예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누가 23:42)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누가 23:43)


다른 한 죄수의 간청은 두 가지 관념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한다. 즉 윤회설을 믿는 자일 경우 그리고 예수의 재림을 믿는 경우...그러나 예수는 그 죄수의 관념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설명도 하지 않고....뜬금없이 오늘 나하고 낙원에 함께 가는 은총을 베풀겠다고 한다.

그러한 예수의 반응에 그 죄수는 속으로 웃었을까? 아니면 기독인들의 기대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 축복을 기대했을까? 더욱이 이 대답은 마태복음에서 예언한 예수의 사후관하고도  상충된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마태 12:40)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죽은 다음 게헨나에서 삼일 보내고 난 뒤 부활해야만할 터인데....

이 장면에선 낙원에 갔다가 부활할 거라고 한다....만약 낙원이 땅 속에 있다고 하면 세째 하늘에 있는 낙원에 갔다고 주장했던 바울과 주장이 또 상치되겠고....[고후12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가나안 여인과의 대화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 (마태 15: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마태 15:23)


딸의 치유를 바라는 여인의 애처로운 간구에 예수와 그 일행들의 반응이 너무나 잔인하다.

예수는 아예 무시하고자 하고...제자들은 귀찮으니 쫓아내버리고자 한다. 그 다음 예수의 대답을 보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15:24)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마태 15:26)

여인의 그 애달픈 간청에 그대는 [개]같은 이방인이라고 오히려 저주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욕에도 여인은 처참할 정도로 애원한다...그리고 자존심마저 포기한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태 15:27)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 15:28)


동문서답하고는 좀 다르지만.....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관념을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대화가 되겠다. 그놈의 구원이 무엇인지(병 치료를 구원으로 해석하자) 이렇게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해 가면서도 그 열매를 찾고자해야만 할까?


6)빌라도와의 대화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요한 18:35)


예수의 행적에 대해 설명해 보아라는 빌라도의 질문이다. 즉 네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황당한 유언비어를 유포했느냐 그리고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대의 동족들인 대사제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느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요한 18:36)

간단하게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적이 없다....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을 예수는 왜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기만 했을까? 그리고 예수는 부하(종)가 있다고 전제를 하고 대답을 했는 데....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와 신도들을 부하라고 생각했음을 은연 중 보여 주고 있다.(현실의 목사와 교주들이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예수가 대표적으로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요한 18:37,38)


빌라도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게다가 빌라도는 예수가 왕이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왕이냐고 질문만 했을 뿐이지...그러나....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라는  예수의 이러한 황당한 답변에도 빌라도는 그저 참고만 있다.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는 왜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4:16) ...이 말을 왜 하지 않았을까?


어떠한가? 그대가 만약 예수의 대화 상대라면 ...하고 생각해보시라....사실 기독인들과 대화할 시 상기와 같은 사례가 너무나 동일하게 재현된다. 대답이 궁하면 ....오직 믿음으로 하는 것은 예수의 동문서답에 추가된 또 하나의 처참한 변명이 되겠다.





(8)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엇갈린 태도


바이블은 한 가지 명제에 대해 서로 다른 표현 내지 주장이 너무나 많이 기록되어 있다. 소위 성령의 감화로 기록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이블이 왜 이렇게 서로 엇갈리기만 할까? 예수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사고관을 엿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태 10:5)


분명 마태에서의 예수는 철저한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어느 정도 유대인과 피가 섞인 민족이 아니던가...그러나 예수는 유대 순혈 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아쉽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면 누가복음에서의 예수의 입장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누가 17:16)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누가 10:33)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누가 9:52) 


상종도 말라던 사마리아인을 적극적으로 만나기도 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다음, 요한문서의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한 4:10) >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한 4:39)


요한문서에서는 아예 사마리아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아이러니를 그대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렇다. 바이블은 기록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다. 그리고 작성 시기도 편차가 많다. 저자가 다르고 그 작성시대도 다르니 당연히 그 사고관도 민족관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성령이 바이블을 기록했다는 그 오해를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바이블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겠는가?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는 다른 인물이다....? 그렇게 주장하면 필자 역시 동의해 줄 의향이 있음을 밝혀 둔다.





(9) 예수의 눈물과 악어의 눈물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는 슬픔을 알 때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아픔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린다.

*분했을 때도 서러워도 눈물을 흘린다.

*너무 추워도 눈물을 흘린다.

*너무 웃어도 눈물이 나온다.

*하품을 할 때도 눈물을 흘리겠고

*기쁨을 만났을 때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기아에 허덕일 때도 당연히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눈물과 웃음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한다. 바이블엔 이상하게도 이러한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인 눈물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구약의 주인공들인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등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인간들로 묘사되어 있는 데 그러면 소위 사랑의 표상으로 선전되고 있는, 신약의 주인공인 예수는 어떠할까? 예수의 일생을 기록했다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우선 요한복음에 묘사된 장면을 같이 감상하기로 하자.


1)예수와 나사로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 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 11:35)


예수는 일생을 통하여 그의 가족들...의붓 애비 요셉, 모친 마리아 그 외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소위 12사도로 불리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린 바 없다. 물론 그를 따르던 여인들을 위해서도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었다. 이렇게 눈물에 인색했던 예수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나사로가 상기에 서술된 뭍사람들 보다 좀 더 다른 의미의 인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었을까? 해답은 우선 그대의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자. 필자의 감상이 궁금하다고?


나사로를 위해 흘린 예수의 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을까..하는 게 필자의 솔직한 느낌임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러면 예수가 눈물을 흘리기 전의 장면, 소위 나자로의 부활로 회자되고 있는 그 장면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오빠인 라자로를 평소에 사랑했다 한다.(11:5)

*마리아 자매가 라자로의 발병을 예수에게 고한다.(11:3)

*예수는 그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고 안심을 시킨다.(11:4)

*3절에서 나사로는 죽을병이 아니라고 해놓곤 갑자기 나사로는 죽었다고 말을 바꾼다.(11:11.14)

*나자로를 부활시키겠다고 제자들에게 말한다.(11:11)

*나자로는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 한다.(11:17)

*마르타는 오빠를 구해주지 않았다고 원망의 말을 한다.(11:21)

*예수는 나자로가 곧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11:23)

*마르타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으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신앙 고백 한다.(11:24~27)

*마리아는 예수가 있었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과 안타까움을 표한다.(11:32)

*예수는 마리아와 이웃 유대인이 눈물을 흘리자 같이 운다.(11:35)


자 여기 까지다. 왜 예수가 눈물을 흘렸을까?


첫 번째 추측: 만약 나자로의 죽음이 애통해 울었다면 얼마 전 그의 부활을 공언했으며 조금 있다가 실제로 나자로를 살려내는 기적과 배치된다. 즉 예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

두 번째 추측: 마리아 자매와 유대인의 믿음 부족이 안타까워서? 그러나 이것도 말이 안된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에게 왜 이적을 행하나?

세 번째 추측: 마리아가 울고 이웃들이 우니 덩달아서 운다? 역시 말도 안 된다. 예수 입장으로서 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울고 있는 군중들을 비웃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역시 악어의 눈물 밖에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악어는 먹이를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입안에 수분을 보충, 먹이를 삼키기 좋게 해주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여「악어의 눈물이「거짓 눈물」을 의미하게 됐다고 한다.]


예수가 나자로의 병을 즉시 고쳐 주지 않고 죽고 난 뒤 살린 것은 그의 목적 즉 자신의 능력을 좀 더 극대화시키고 신도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하자는 의도가 아니었던가한다. 예수의 의도에 잘 따라 주는 주위 모든 조연들의 역할을 보니 얼마나 흐뭇했겠는가? 그렇다. 예수는 악어의 눈물을 흘렸던 게다. 다른 장면으로 넘어 가기로 하겠다.


2)예수와 예루살렘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누가 19:41)


복음서에 특히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는 神과 人間의 경계를 넘나드는 반신반인적 존재로 묘사됨과 동시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철저한 유대인으로 그려져 있다. 상기 장면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와 그 종말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유대인으로서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장면 역시 우리는 냉철하게 분석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예수가 눈물을 흘린 이유를 누가편집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는 데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 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19:42~4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 첫 번째로: 누가복음 편집자의 작위성에 대해, 주지하는바 상기 내용은 제1,2차 유대 전쟁을 예언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제1차 전쟁이 C.E. 66-70 그리고 제2차 유대전쟁이 C.E.131-134 동안에 발발했으므로 누가복음은 적어도 예수의 사후 30여년 후에 편집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역사 비평을 인정한다면 예수를 예언자로 묘사한 누가편집자는 철저한 위선자 내지 음모자로 밖에 평가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두 번째 견해로 정말 예수가 예언자였다고 인정해 줄 경우를 가정해 보기로 하자. 30년 혹은 100년 후에 발생할 역사적 사실을 예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참이라면 예수는 정말 神 혹은 神的인 존재라고 평가해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평화의 길을 몰랐으며 야훼가 구원하러 올 때를 몰랐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예루살렘을 멸망했어야할까? 그리고 그 멸망을 왜? 이교도인 로마의 힘을 빌려야했을까? 게다가 유대 전쟁 당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 역시 왜? 죽어야만 했을까? 예수가 진실로 인류를 사랑하는 神이었다면 미래의 참상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전에 그러한 참상이 발생하기 전에 신적인 권능을 발휘해서라도 미연에 그 전쟁을 방비했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는 신적인 존재가 결코 될 수 없으며 그 외 미래를 예언할 수 있었다는 상기 내용은 당연히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의 구속사적인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한다면 예수가 이때 흘린 눈물 역시 "악어의 눈물"로 치부될 수밖에 없겠다.


그러하다. 예수는 가족과 지인을 위해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인류를 위해 진실 된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조국 이스라엘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도 그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 했다. 그러나 기독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한다. 눈물을 모르는 자에게 눈물을 바치는 그대여 그대의 눈물은 오해이며 예수 그리고 목사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임을 하루라도 빨리 알게 되길 바라노라.


첨언: 사실 바이블은 상상력이 부족했던 그리고 치밀하게 글을 쓰는 구성력이 모자란 고대인의 신앙 고백록 정도로 인정해 버리면 모든 의문은 당연히 풀리는 바,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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