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잡았던 삼사순례 예정이
더 좋은 날~~ 좋은 도반들과의 함께 할
가을 순례를 기다려봅니다.
삼사순례 예정지였던 논산.....
제가 다녀온 것 간단하게 소개해드립니다.
논산에 사는 사람들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렇게 물어본다고 한다.
‘네가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
논산에서는 이 세 곳은 반드시 구경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도 이번 답사는 논산으로 왔기에 이 세 곳과 더불어 쌍계사와 개태사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강경 미내다리
논산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무대가 있는 육군훈련소이다.
훈련소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중간거점의 지리적 여건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이번 답사를 마치고 나니 후삼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치열한 접전지였던 황산벌의 의미가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두 기의 묘가 있는데 하나는 백제와 신라의 싸움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계백장군의 묘이고,
또 하나는 다시 후백제를 세웠으나 고려에 투신하고 마는 견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을 뺏기 위한 이유는 넓은 들의 풍부한 식량과 물자수송의 중심이었던
강경포구의 편리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경의 번성을 말해주는 징표로 남은 것이 바로 미내다리였는데,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에 놓여있었다.
강경천의 둑길을 따라 가다보면 홍예교인 미내다리가 보인다.
이런 홍예양식의 다리는 보통 궁궐이나 절 입구에서 볼 수 있고,
민간에서는 보기 드문 다리이기에 의미가 더 큰 것이다.
돌을 깎아서 홍예(무지개모양)로 만드는 것은 많은 비용과 기술이 필요한 것인데,
그 만큼 강경장이 번성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민간의 재력이 있었던 것이다.
강경의 미내다리
강경천
홍예다리 밑 부분에 있는 이무기 형상은 다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홍예의 중심부분에 있는 이맛돌에는 소박한 호랑이 머리를 새겨놓았다.
지금 다리는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땅 위에 남아 있어서 다리가 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강둑에는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었고 강물은 하늘을 가득품고 유유히 흘렀다.
홍예의 머릿돌 강경천 너머 보이는 마을
논산IC 인근에 쌍계사가 있었다. 하동의 쌍계사는 초입의 긴 벚꽃행렬 때문에 전국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논산의 쌍계사는 초입은 조촐하지만 법당문이 연꽃, 모란, 국화꽃으로 조각된 꽃창살이 있어 아름다운 절이었다.
법당기둥은 큰 둥치의 나무를 껍질만 정리하고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구불거리며 자라고 있을 것만 같았다.
쌍계사 입구의 누각
논산 쌍계사 대웅전
대웅전 옆모습
이 중에 한 기둥은 칡덩굴이라고 하는데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한다고 한다.
그래서 법당의 기둥들은 키높이 만큼은 다 반질거렸다. 법당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는데
닷집이 각각 독립적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칡덩굴로 만든 법당 기둥 /아픈 사람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고통이 멸한다고함.~~
닷집 앞의 천장에는 하얀 새 세 마리가 나는 듯이 달려 있어서 극락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았다.
쌍계사는 고려에 창건된 절이지만 당시의 건물은 불타고 현재 대웅전은 조선 영조 때 중수한 것으로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극락의 새로 꾸며진 대웅전 닷집 앞 천장의 아름다움
꽃창살이 비치는 모습 법당 출입문
대웅전은 아름다운 꽃살문으로 장식/연꽃, 국화, 모란
점심은 강경장을 구경하고 먹기로 하였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젓갈집 뿐이었으며 그 다양한 종류가 놀라웠다.
시장 끝 한 곳에서 이 고장의 별미인 황복국과 우어무침을 먹었다.
감칠맛 나는 신선한 맛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맛집으로 등재되었다.
개태사가 자리 잡은 천호산은 낮은 산등성이가 물결이 일 듯 구불구불 길게 드리워 있었다.
개태사의 창건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신검을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지은 절이었다. 그래서 창건연대가 후삼국 통일을 이룬 936년이었으며,
절 뒤의 산은 원래 황산이었는데 하늘이 도와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여 천호산(天護山)이라고 고치고
절 이름도 개태사(開泰寺)라고 하였다.
개태사 입구 길
개태사 입구
이렇게 화려한 배경에 창건된 절이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며 폐사가 되었다.
법당에 모신 삼존불입상은 도랑에 넘어져 허리가 부러지고 목이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세 분의 불상은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투박한 얼굴에 손과 발이 매우 컸으며 건장한 모습이었다.
부처님의 수인은 시무외인(두려움을 없애주는 수인)과 여원인(소원을 들어주는 수인)의 모습이지만
자비로운 모습을 찾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이런 모습은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의 사람들의 모습이 반영된 것 같았다.
그러나 옷자락과 영락 등의 표현은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개태사 삼존석불중 오른쪽 부처님
마당 한 곳에는 창건 당시 스님 500분이 머물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큰 밥솥인 철확이 있었다.
이 밥솥은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인들이 가져가려고 시도하였으나 두 번이나 기이한 일이 생기자
다행히 이렇게 절에 남게 되었다.
철확/500명의 밥을 하던 솥
개태사 3층 석탑
관촉사에는 흔히 은진미륵으로 알고 있는 큰 불상이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보관에 화불을 모셨던 흔적이 남아 있는 관세음보살님 이라고 한다.
조성 당시에는 화불의 불빛이 송나라까지 뻗쳐서 한 스님이 빛을 따라 찾아와서
이 불상에 예배하고 절 이름을 관촉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머리와 몸과 허리아래 부분을 각각 한 돌을 사용하여 세 부분을 붙여서 조성하였다.
사각의 커다란 체구에 몸의 비례에 맞지 않게 길고 큰 얼굴에 길게 그려진 눈은 위엄이 서려있었다.
관촉사 관세음보살입상
삼성각에서 본 모습
이 불상은 고려 광종19년(968)에 왕의 명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후백제의 유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고려왕권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산신각이 있는 높은 계단을 올라보면 관세음보살 입상을 넘어 펼쳐진 넓은 황산벌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삼성각 윤장대
관촉사 삼성각에서 본 정경
불상 앞에는 거대한 석등하나가 있었다.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과 실상사 석등과 더불어 매우 큰 석등이었다.
고려시대의 석등특징인 고복형의 간주석에 사각형의 화사석이 2단으로 올려져있었으며,
지붕돌의 끝은 힘차게 번쩍 들어 올려져있어서 역시 고려초기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였다.
관촉사 석등
관촉사 3층 석탑
3층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의 아름다운 문양
하루 종일 우리는 애마를 타고 논산 들녘을 달렸다.
옛날 말발굽 아래 뺏고 뺏겼던 전투의 현장은 그 아픔의 깊이만큼 치유가 되었나 보다.
지금은 풍요롭고 한가한 농촌 풍경이 우리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
첫댓글 ^^ 대승사에서 윤5월에 성지순례 코스로 잡았던 곳인데 고맙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오고 날이 무더워서 취소했었는데 이렇게 인터넷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올가을에는 꼭 가야 할텐데....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햇살님 하시는 모든일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_()()()_
예정했던 날 진짜 비 많이 왔어요...취소 잘 하셨습니다~가을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