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정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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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Artificial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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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국의 근작, 인공정원
마리오네트로 대리된 삶의 풍경
1. 이성국은 자신의 근작들에 대해 인공정원이라 부른다. 이는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인 셈이다. 인공정원이란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을 말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정원 자체가 이미 그 말속에 인공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원이란 저절로 주어진 자연을 의미하는 소산적 자연과는 비교되는 인공적으로 획득된 자연을 의미하는 능산적 자연인 것이다. 인간가는 무관하게 펼쳐져 있는 객관적 지평으로서의 자연과는 비교되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으로 연속된 자연,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유정한 자연,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자연의 산물이다. 그 이면에는 자연을 자기의 안쪽으로 끌어들여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구체적인 형식화를 얻어 나타난 것이 낙원사상이다. 자연의 비의를 벗겨내고 자연을 앎의 대상으로 전유하려는 그 불가능한 욕망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결핍돼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니까 정원은 인간이 소유할 수도 인식으로 거머쥘 수도 없는 자연과 낙원 그리고 유토피아(이상화된 사회를 위한 밑그림)를 해바라기 하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증명해 준다. 결핍에 그 맥이 닿아있는 현실과 이에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가 투사된 이상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과 차이를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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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인공정원이란 주제 속에는 이처럼 인공이 이중으로 덧칠돼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공정원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 인공정원이란 주제를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고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자연 자체가 일차적 자연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해석으로 가공된 이차적 자연이 정원이다. 그리고 인공정우언은 사람들의 관념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의 이미지 즉 이미지로서의 자연이다. 말하자면 내셔널지오그래피와 같은 대중잡지, 연서와 사진 같은 인쇄매체, TV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삶의 풍경 속에 깊숙이 침윤돼 있는 자연에 대한 이미지다.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화의 과정은 사이버매체를 매개로 한 가상현실 속에서 더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작가의 인공정원이란 주제 속에는 자연으로부터 유사자연으로 그리고 재차 가상자연으로 연이어진 이렇나 자연의 이미지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내재돼 있다. 인공정원이란 주제는 이처럼 현대인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는 자연(엄밀하게는 자연의 이미지)을 암시한다. 그 자연은 실제의 자연으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동떨어져 있으며, 현대인은 이렇게 한낱 이미지로만 남은 자연에다가 향수와 휴식과 같은 일탈에 대한 욕망을 투사한다. 그리고 이때 욕망은 실제를 능가한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말에서 그림이 자연의 풍경을 재는 기준이 되고 있듯이 현대인의 관념은 실제보다는 이미지를 더 친숙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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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인공정원이란 주제를 통해 일상 속에 유포된 자연의 이미지에 천착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연의 실제 보다는 자연의 이미지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일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때 자연은 자연의 감각적 질을 모방하기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 곧 삶의 질을 모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 속에서의 자연 혹은 정원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일종의 삶의 풍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인공정원은 곧 실제로부터 동떨어진 고3도로 문명화(인공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풍경이고 삶의 정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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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형극과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을 마리오네트라고 한다. 이성국의 근작에서 인공정원 곧 삶의 정원은 이러한 미리오네트로 현상한다. 나무로 만든 목각 인형들이 등장하고, 이 인형들이 인간의 삶의 풍경을 대리하는 일종의 인형극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작가는 나무의 분진과 스테인(나무를 염색하는 반투명 안료) 냄새로 가득한 공장(작업실)에 칩거하면서 최근 수년동안 이 인형들을 생산해 왔다. 공장 한쪽에는 나무를 가공하는데 필요한 공구들이 놓여 있고, 그 공구들을 이용하여 작가가 생산해 낸 똑 같은 크기와 형태의 머리들, 팔뚝들, 다리들, 어깨들이 공장의 또 다른 한쪽에 정돈돼 있다. 작가는 그 신체의 부분들을 조립하여 인형을 만든다. 똑 같은 머리와 표정 없는 얼굴의 이 인형들에게서, 마치 아이들을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소시지로 재가공해 내는 핑크프로이드의 '벽'에 등장하는 학교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한낱 나무인형에다가 생명과 호흡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욕망에서는 상실한 유년에 바탕을 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를 복원하려는 의지가 읽혀지고(마치 피노키오와도 같은), 인형으로 대리되는 유사인격체를 창조하려는 작가의 행위에서는 비의적인 관념에 바탕을 둔 연금술적 세계관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인형들은 유아적이고 동화적인 비전과 함께, 생경함과 낯설음이 중첩된 이중적인 모습으로서 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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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이 직접 나무를 가공하고, 자르고, 조각하고, 조립해 만든 이 인형들은 신체의 주요 부위마다 관절이 있어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설 수도 앉을 수도 있다. 팔이나 다리를 굽히거나 펼 수도 있고, 허리를 구부릴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처럼 비록 그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턱을 움직일 수조차 있다. 그러나 그 인형들은 어떠한 센서나 동력장치도 내장하지 않은 탓에 저 혼자서는 앉거나 걸을 수도 없으며 턱을 움직여 말을 할 수도 없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숨은 손처럼 숨은 심(작가)의 손길을 매개로 해서만이 그 인형들은 살아서 움직일 수 있다. 모든 필요한 관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마치 정지화면을 보는 듯 붙박이로 서서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부동의 인형들을 움직이게 하는 작가의 숨은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집단을 이루고 있는(거의 100여개가 넘은) 이 인형들은 일종의 군중심리와 집단무의식을 상기시키며, 그리고 작가의 숨은 손은 이 인형들을 길들이고 훈육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주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형들의 지워진 눈은 자기 반성적인 능력을 상실한(혹은 박탈당한) 맹목을 암시한다.
이처럼 인형들은 개체성을 상실한 집단적 주체로서 나타나고, 그 각각은 사회와 제도 그리고 관습과 교육이 개인에게 요구해온 여러 형태의 억압의 계기들을 내재화한 현대인의 초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집단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동질적이고 익명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비록 모봇처럼 차갑지는 않지만(마치 온기가 전달될 것만 같은 이 나무인형들에서는 오히려 일말의 연민마저 느껴진다), 무표정한 얼굴의 나무인형들이 보이지 않는 주체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제도로 구조화된 시스템에 길들여진 개체들(현대인들)이 문명화된 사회, 인공정원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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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성국의 작업에서 인공정원은 일종의 조형형식을 매개로 해서 세계를 재편하려는 질서의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련의 마리오네트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 인공정원의 개념이 삶의 풍경을 암시하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이 작업에서는 상대적으로 조형논리에 기울어진 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그 굵기와 크기가 일정하거나 일정치 않은 나무토막(각목)들을 일일이 세워서 심는(병렬하는) 방식으로 패널을 만든다.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재구성해낸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한 패널의 표면에다가 부분적으로 조각하기도 하고, 토치가 내뿜는 불로 태우기도 한다. 그리고 스테인으로 착색을 하거나 사포로 연마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형상은 대개는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그리고 장식적인 화면으로 나타나고, 더러는 원형과 같은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일부 작업에서는 마치 항공지도와도 같은 일종의 재현적인 요소가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부분들을 조합해 내는 방식이 일종의 모자이크화를 그리고 퍼즐 맞추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며, 또한 이는 그대로 세계를 재편하고, 재구성하고, 재구조화하는 질서의식에 그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각각의 나무토막으로 나타난 세계의 질료에다가 조형화의 과정을 개입시킴으로써 일종의 인공적인 틀을, 구조를, 질서를 부여하고 있으며, 그 일련의 과정을 인공정원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고도로 문명화된(인공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내재화한 자연을 실제의 자연 대신에 삶의 풍경 속에서 찾는가 하면, 그 삶의 풍경을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곧 인공정원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인공정원은 개성을 상실한 익명적이고 집단적인 주체들이 살아내야 할 제도화된 현실과 함께, 세계를 재편하려는 질서의식의 이중적인 형태로 현상한다. 이로써 이성국의 인공정원 연작은 인공적인 환경과 더불어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의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 자연은 아마도 나무인형들의 감은 눈 속에서나, 나무토막들의 불에 그을린 상처 속에서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충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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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한 작품입니다요..~ 나무로 어떤장치두 하지 안쿠..움직이궁..직접..제작한다는 것이.두번 놀라움을..나무라..더..관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