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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성균관 향교 스크랩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이 있는 성균관(成均館) 에서
이장희 추천 0 조회 153 15.10.13 2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이 있는 성균관(成均館) 에서

(2011/09/19 현재)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이었으며,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가 있고,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이 있는
성균관(成均館) 전경 입니다. 〈주례 周禮〉에는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 하였는데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성균관 [成均館]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주례 周禮〉에는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했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후 성종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대와 그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성균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으나,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200명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四學) 생도나 문음자제(門蔭子第)들이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고 승보시 출신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구별했다. 그러나 이들 하재생도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에 달하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과과정은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의 제술로 이루어졌으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1466년(세조 12)에는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으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 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발된 이들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균관의 이러한 성격은 조선 후기에 유교 학풍이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 심성 수양과 의리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서원을 통해 그러한 학풍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성균관 교육의 부진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이 여전히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했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


조선시대는 성리학적 도학정신이 정신적인 지표와 교육이념의 중추를 이루었다. 유교적 교육내용이 채택되어 사용되었지만 신라와 고려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형성해 온 것은 불교였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가 쇠퇴해짐에 따라 그 정신적 지도력이 혼미해지자, 조선 사회는 건국과 더불어 사회를 바로잡고 질서를 세우기 위한 강력한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충효를 근본으로 하여 삼강오륜을 내세우고 상하의 계급과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택되어 크게 장려되었다.

 

이에 기초한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을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한 것으로 등장하였으며, 그 주된 대상은 사대부층인 양반계급으로서, 관직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또한 교육내용에 있어서는 경전중심의 인문 교육을 숭상하고 실업 교육을 천시하여, 교육의 대상과 내용에 있어 배타성을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규범화되어 전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으며, 유학자들의 깊이있는 학문체계는 우리 나라 교육사상 및 정신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실학사상이 대두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의한 새로운 학풍이 등장하였다. 이는 시대적 요청에 의한 자연스런 현상으로도 볼 수 있으나, 전통적 유교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당시로서는 새롭고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에 의한 교육의 방향제시가 구체화, 토착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실학사상의 본질적인 정신은 단절되지 않고 개화기의 사상적 토양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근거로 한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고려의 교육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성균관(成均館)이 있어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교육 수준으로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서원(書院)과 초등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교육기관은 오늘날처럼 계통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독립된 교육기관이었다.

 

이에 대한 교육행정은 중앙의 육조 중 예조가 주관하였으며, 문관의 임명·고신(告身)·녹패(祿牌)·훈봉(勳封) 등 중요한 행정권한은 이조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학령’과 ≪경국대전≫을 비롯한 각종 교육법규를 제정하였다. 국가적으로 교육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국왕이 양사비(養士費)라는 명목으로 전토(田土)·미포(米布)·어포(魚脯)·시장(柴場)·금전(金錢) 및 서적 등을 내렸으며, 사학기관인 서원에 대해서도 전호의 면세와 같은 특전을 주었다.

 

조선시대의 국립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 때의 국자감 혹은 성균관 등으로 부르던 것을 계승하여, 1398년에 건물을 준공하여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걸쳐 통용된 이름이었으며, 그 밖에도 국학·태학·국자감·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밖에 지금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존경각(尊經閣), 공자·맹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 등의 아버지를 제사하는 계성사(啓聖祠)와, 그 외에 비천당(丕闡堂)·일량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육일각(六一閣)·정록청(正錄廳)·서리청(書吏廳)·경관청(京官廳)·향청(香廳)·전사청(典祀廳)·낙생청(樂生廳)·수복청(守僕廳)·제기고(祭器庫)·차장고(遮帳庫)·직방(直房)·포주(包廚)·식당·서벽고(西壁庫)·문고(文庫)·동서월랑(東西月廊) 등의 부속 건물로 되어 있다.

 

성균관을 유지, 경영하는 비용은 나라에서 하사하는 학전(學田)과 어장(漁場) 등으로 충당하였다.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였는데, 동지사(同知事) 이상은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고, 장격(長格)인 지사(知事, 정2품) 1인, 동지사(종2품) 2인, 대사성(大司成, 정3품) 1인, 사성(司成, 종3품) 2인, 사예(司藝, 정4품) 3인, 직강(直講, 정5품) 4인, 전적(典籍, 정6품) 13인, 박사(정7품) 3인, 학정(學正, 정8품) 3인, 학록(學錄, 정9품) 3인, 학유(學諭, 종9품) 3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직제는 고종 때까지 거의 변동없이 계속되었다.

 

입학 자격은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추도록 했는데 생원·진사를 원칙으로 하며, 생원·진사가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학생으로서 ≪소학≫과 사서와 1경에 통한 자, 일찍이 문과나 생진과의 향시나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한 자, 나라에 공로가 있는 집 적자손(嫡子孫)으로 ≪소학≫에 통한 자, 현재 관리로 있는 자로서 취학을 희망하는 자 등으로 충원할 수 있었다. 학생정원은 조선 초에는 1백인이었다가 그 뒤 150인에서 200인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농사의 흉풍에 따라 감원과 충원이 좌우되었다.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경술(經術)과 문예를 주로 하여 강독·제술·서법으로 나눈다.

① 강독은 사서인 ≪논어≫·≪맹자≫·≪중용≫·≪대학≫과 오경인 ≪시전≫·≪서전≫·≪주역≫·≪예기≫·≪춘추≫를 9재(九齋)로 편성하고, ≪대학≫에서부터 ≪주역≫까지를 순차적으로 학습하게 하였다.

② 제술은 의(疑)·논(論)·부(賦)·표(表)·송(頌)·잠(箴)·기(記)를 일정한 기간 동안 힘쓰게 하여 지식의 응용과 표현을 연습시켰다.

③ 서법은 해서·행서·초서를 단계적으로 반복, 연습하되 해서를 장려하였다. 성균관의 면학은 매일 강(講)을 받았으며 고시(考試)가 다양하고 철저하여, 일고(日考)·순고(旬考)·월고(月考)·연고(年考)가 있었다. 연고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실시하여 시험관은 성균관 당상급(堂上級) 예조당상(禮曹堂上) 2인, 예문당상(藝文堂上) 1인, 대간(臺諫) 1인이 모여서 고강(考講)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으로는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등의 대표를 선출하여 조직적인 학생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공관(空館)·권당(捲堂)·공재(空齋)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들 거재유생(居齋儒生)들은 국가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明倫)·풍교(風敎)에 어떤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인정될 때는 이를 상소하여 탄핵하였다. 이것을 유소(儒疏)라고 하는데, 이때는 관생들이 명륜당에 모여 사무를 분장하고 상소두(上疏頭)·소색(疏色)·제소사소반(製疏寫疏反)·별색장(別色掌) 등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소두는 관생들을 이끌고 관에 나아가 부복하여 상소하게 되는데, 이때 상소의 윤허를 받지 못하거나 소두를 벌 주어 정거(停擧:일정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함)를 받게 되든지 귀양을 보내게 되면, 학생들은 권당·공재·공관 등을 취하였다.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단식동맹을 뜻하며, 공재는 기숙사에서 나가는 것이고, 공관은 학생 전부가 대성전 신문(神門) 밖에 이르러 사배하고 퇴거하는 것이니 지금의 동맹휴학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면 왕은 근신을 보내어 교유(敎諭)를 내리는 등 무마에 힘쓰게 되어 마치 민주국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학자를 우대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던 당시의 풍토를 알 수 있다.

 

사학(四學)은 고려의 동서학당 혹은 오부학당을 이어받아, 1411년(태종 11)에 국도(國都) 북부에 중학(中學)을 세우고 동·남·서부에 각각 동학·남학·서학을 세웠다. 사학은 성균관에 예속한 교육기관으로 학제나 교육방침에 있어서 성균관과 유사하였다. 교과는 역시 경술과 문예를 주로 하고 학관은 대개 성균관 교수가 겸직하였고 때로는 서반직(西班職)에서 이를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학의 교육성적이 다소 부진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77년(성종 8)에는 사학 교직에 구임법(久任法)을 판정하여 30개월 근속법을 세운 일이 있었고, 효종 때는 송준길(宋浚吉)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제시한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받아들여 제도를 정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년 6월에는 사학에서 우수한 유생들을 각각 20인씩 뽑아 남학에 모이게 한 뒤, 3품 이하 문신 3인을 보내어 강론과 제술로써 시험하여 우등생 약간인을 뽑아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는데, 이를 승보(陞補)라 하였다. 학생정원은 각 1백인씩이고 그 경영은 나라에서 지급하는 전답과 어장의 수입으로 이를 충당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실 교육을 담당하는 왕족 학교로서 종학(宗學)이 있었다. ≪국조보감 國朝寶鑑≫에 의하면, 1429년(세종 11)에 처음으로 종학을 세우고 문행(文行)·학덕을 겸비한 자를 박사로 삼아 종친들을 가르치게 하니 이로써 예법과 질서가 바로잡혔다고 하였다. 종학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설치되었으며, 그 뒤 문교행정의 쇠퇴로 사라지게 되었다.

 

향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지방재정에 의하여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부터 크게 장려되었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태조 원년에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패로써 수령들의 치적을 고거(考據)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후부터 계속적인 장려로 부·목·군·현에 각각 향교를 하나씩 설립하게 되었으며,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교수 혹은 훈도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 뒤 1읍 1교로 설치하여 큰 읍에는 70∼90인을 정원으로 하고, 중읍은 50인, 소읍은 30인으로 하였으며, 유지비는 역시 급제전(給祭田)과 학전 등으로 경영하였다.

 

학전 급수는 상세하지 않으나 영조 때 편찬한 ≪속대전 續大典≫에 보면, 성균관은 400결, 사학은 각 10결, 주부향교(州府鄕校)는 7결, 군현향교(郡縣鄕校)는 5결, 사액서원(賜額書院)은 3결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어 대성전과 동서 양무, 명륜당과 동서 양재의 구조를 갖추었으며, 특히 조선 말기의 향교는 교육보다 제례적 기능이 강화되어 향교 교육에 다소 소홀한 점이 있었다.

 

향교의 기능은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예양존중(禮讓尊重)의 풍교(風敎)를 고취시키고자 향교에서 양로연(養老宴)·향음주례(鄕飮酒禮)·향사례(鄕射禮) 등을 행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연은 매년 8월에 지방의 덕망 있는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여 공궤(供饋)하는 것을 말하며, 향음주례는 매년 10월에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고령 노인을 모시고 주연을 베풀어 서로 권면하여 장유유서의 예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향사례는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을 택하여 그 지방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이름나고 예의바른 자를 초대한 뒤 읍양(揖讓)과 주배(酒盃), 궁사(弓射)와 음악 등으로 주연을 즐기고 예의를 중히 알게 하는 것이다.

 

서당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로서, 고구려의 경당이나 고려의 서재(書齋)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져서,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동몽들의 유학도장으로 중요시되었다. 서당이 비록 사설이라고 하나 지방민의 교화와 유학의 학풍 및 도덕적 향풍(鄕風) 진작 등 국가문화에 끼치는 영향을 인정하여 나라에서 감독·장려·개선을 꾀한 일도 있었으니, 효종 때 송준길의 학규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서당의 교과목은 ≪천자문≫·≪동몽선습≫·≪통감≫·≪소학≫·≪시경≫·≪서경≫·≪역경≫·≪사기≫·≪당송문≫·≪당률≫ 등을 과하였는데, 이는 사학이나 향교의 예비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명유인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설립하여 봄·가을로 향례를 지내는 동시에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를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1550년(명종 5)에는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백운동서원의 교화사업을 왕에게 계문(啓聞)하는 동시에 보호를 청하여, 왕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내리고 전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게 되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서원의 설립 목적은 명유·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함으로써 명륜(明倫)·양도(揚道)를 더욱 밝히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강학연찬(講學硏鑽)함으로써 교화에 공헌하는 것으로,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게 되어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향교가 국립 교육기관으로 문묘배향을 하는 곳이라면, 서원은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한 사람 이상의 명유·공신을 제사하는 곳이었다. 또한 주로 산수 좋고 조용한 곳에 위치하여 수양 및 자유로운 학문탐구가 가능하였으며, 지방의 청년·자제들이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도장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차차 서원이 남설(濫設:마구 설립함)되어 유생의 학문태도가 나태해지고 향교의 학생이 서원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군역을 도피하기 위한 청년들이 서원의 원복(院僕)으로 되는 등 폐단이 잇따랐고, 그 후기에는 서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당파를 형성하여 질서를 어지럽히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745년(영조 21)에는 300개의 서원과 사우를 철폐하였으나 정조 때에 조사된 전국의 원우(院宇)는 65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

     (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ㆍ西?ㆍ三門ㆍ明倫堂>)


-종    목 보물 제14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명륜동3가 53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제2대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다. 제3대 태종(太宗)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로 또 타버렸다. 그러나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선조(宣祖) 34∼35년(1601∼1602)에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36∼37년(1603∼1604)에 동무(東무)·서무(西무)·신문(神門)·중문(中門)을, 39년(1606)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 확충하였다. 인조(仁祖) 4년(1626)에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敬閣), 양현고(養賢庫) 등을 재건하였으며, 고종(高宗) 6년(1869)에 보수하였다. 문묘(文廟)의 동·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문묘는 공자(孔子) 즉 문선왕(文宣王)의 묘당(廟堂)으로서,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 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동서 양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文廟와 成均館)

 

-종 목  사적  제143호 
-지정(등록)일 1964.11.1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명륜3가 53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존경각과 향관청, 비천당, 계성사가 있으며, 남쪽 좌우에 유생들이 살면서 글을 읽던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 있다. 동재 동편에는 식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창고, 육일각, 잡사가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교의 중심지로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서울문묘일원(보물 및 현대건축물을 제외한 지상시설물 포함) → 서울 문묘와 성균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서울 문묘는 태조가 한양에 천도하여 경복궁을 비롯하여 종묘와 사직단의 영조 사업이 끝난 직후인 그의 4년(1395)에 문묘의 조영을 명하여 태조(太祖) 6년에 착공 7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때에 만들어진 문묘는 공자를 봉사(奉祀)한 묘우(廟宇)를 높은 자리에 잡게 하고 종사(從祀)는 옆에 배치하고 학당(學堂)인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실(夾室)을 만들고 그밖의 청랑(廳廊)을 만들었는데 대소건물이 모두 96칸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 있는 문묘의 구성이 태조 창건의 그것과 같은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창건의 문묘는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은 정종(定宗)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太宗) 7년(1407)에 중건되었다. 그 후 성종 21년(1490)까지 진사식당, 전사청, 존경각 및 향관청의 건물과 비, 비각 등을 세우는 등의 정비작업이 계속되었으나 연산군대에 그의 횡포한 처사로 문묘는 그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유생들은 몸을 피하는 등 암흑시대를 맞게되어 짐승을 기르는 장소로 또는 놀이터로 변(變)했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문묘에는 많은 건물이나 시설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중종 원년(1506)에 보수하고 그의 6년까지에 모두 정비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선조 34년(1601)부터 39년 사이에 거의 원 모습으로 중건되고 영조대까지에 모든 시설이 거의 완비되었으며 고종 6년(1869) 대수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문묘에는 주건물인 대성전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4성(聖) 10철(哲)과 송조(宋朝)의 6현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동, 서 양무에는 공자의 70제자와 한국과 중국의 대유(大儒) 111위의 위패를 모셨고 전국 각처에 있는 문묘의 중심이며 최대규모의 것이었다. 이렇듯 문묘는 한양 천도 직후 궁궐과 종묘 사직단 다음으로 건립되고 연산군대를 제외한 모든 왕조에서 이를 중요시한 것은 조선왕조의 정교(政敎)의 근본을 유교에 두었기 때문이다. 문묘는 원래 남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중문과 동·서무 그리고 중심부 뒷쪽에 본전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뒤에는 다시 동·서 양재가 있고 그 뒤 중앙에 명륜당이 있으며 그 동쪽 뒤에 존경각이 있다. 대성전은 내외 2출목의 간결한 다포집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앞에 한 칸의 퇴를 달아 개방하였다. 명륜당은 본당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2익공이며 좌우 익사는 초익공이다. 모든 건물이 매우 간결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거의 단청되지 않은 건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간결한 양식과 장식으로 된것도 있고 유교정신에 입각한 조형인 듯하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 (서울 文廟 은행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제59호 
-지 정 일 1962.12.03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53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4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26m, 가슴높이의 둘레가 12.09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26.8m, 남북으로 27.2m이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점에 이르는데 그 중 이 문묘의 은행나무는 유주(乳柱)를 잘 발달시키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유주는 일종의 기근(氣根)이라고 믿어지는데 일본에서는 더 흔하고 그 발달도 현저하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학교에 가까운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자라고 있다. 몸집이 웅장하고 가지의 발달이 왕성해서 넓은 수관폭을 가지고 있다. 명륜당은 선조(宣祖) 39년(1606년)에 세워졌고 그 앞에 서 있는 대성전(大成殿)은 이보다 4년 앞서 세워졌다. 그리고 문묘 자체는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까지 기록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화재를 입은 흔적이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 윤탁이 심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문묘가 창건된 뒤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약 60년전의 기록에 의하면 경학원(經學院) 경내에 4그루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석전대제 (釋奠大祭) -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가리키며, 예법과 음악이 존중되는 국가의 의례이다. 일명 문묘대제, 석전제(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유교 교육을 위한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고대 중국의 제사관례에 따라 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전대제는 매월 2월과 8월의 정해 놓은 날에 공자를 비롯하여 옛 성인들의 학덕을 추모하며 행해진다. 절차를 보면 영신례, 전폐례, 초헌례, 공악,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례, 망료의 순서로 진행된다. 연주되는 음악은 문묘제례악이라 하는데, 기악과 성악, 춤을 총칭하는 대성아악으로, 여덟 개의 아악기만 사용하고, 등가와 헌가 두 개의 악단이 절차에 따라 번갈아 연주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현재는 조선 전기 세종(재위 1418∼1450) 때 영신곡, 황종궁 이하 12곡과 송신악 중에서 송신협종궁, 송신임종궁 등 15궁을 채택하여 전승하고 있다. 석전대제는 국가적인 행사로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음악이 연주되고 춤이 곁들여지는 종합예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의식을 통해 조상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길렀으며,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게 되어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석전대제(釋奠大祭)란 공자를 모신 사당(祠堂)인 문묘(文廟)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석전이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奠)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원래는 산천, 묘사(廟祀), 선성(先聖: 공자. 739년에 문선왕으로 추존됨) 등 여러 제향에서 이 석전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나 다른 제사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문묘의 석전만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문묘제향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현재 석전대제는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공자의 제자들과 우리나라의 유학자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 명현 16위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 가을 매년 두 차례 즉,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 첫째 丁日)에 거행하고 있으며, 지방에서는 향교(鄕校)에서 주관한다. 이 제향의 절차는 영신례(迎神禮),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공악(空樂),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徹변豆), 송신례(送神禮), 망료(望僚)의 순서로 진행된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문묘제례악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박연(朴堧)이 원나라의 『대성악보 大成樂譜 』에 의거하여 만든 것인데 십이율(十二律)을 각기 궁(宮)으로 한 12곡과 송신황종궁, 송신협종궁, 송신임종궁을 합하여 모두 15곡이다. 박연이 만든 이 음악의 악보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며, 지금도 『악학궤범』에 있는 그대로 연주한다.

 

문묘제례악에는 아악기만 사용하여 팔음(八音: 악기를 제작하는 여덟 가지 재료)을 갖추어야 하고, 등가(登架)와 헌가(軒架) 두 개의 악단이 절차에 따라 번갈아 연주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댓돌 위[堂上]에 배열되는 등가에는 편종, 편경, 특종, 특경, 절고, 소, 훈, 지, 약, 적, 금, 슬, 박, 축, 어, 노래 등이, 그리고 댓돌 아래[堂下]에 위치하는 헌가에는 편종, 편경, 노고, 노도, 진고, 부, 훈, 지, 약, 적 박, 축, 어, 노래 등이 편성되는데 등가에서는 음려(陰呂)를 쓰고 헌가에서는 양율(陽律)을 쓴다. 문묘제례악은 그 음넓이가 십이율(十二律) 4청성(淸聲)에 불과하며, 7음음계로 이루어져 있고 주음(主音)으로 시작하여 주음으로 끝난다. 선율은 장식음이 없고 각 음의길이가 일정하여 화평정대(和平正大)한 맛을 자아낸다. 제례악에는 악기연주(樂), 노래(歌), 춤(舞)이 포함되는데 노래는 악장(樂章)이라 하고 춤은 일무(佾舞)라 한다. 문묘제례에서는 모두 8구 32자의 한문가사로 된 악장을 부르며 팔일무(八佾舞)라 하여 8열 8행 64명이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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