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7리,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영암군(靈巖郡) 경계까지 50리,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무안현(務安縣)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함평현(咸平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 통의(通義)라고도 한다. 이며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 금성(錦城)이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었다. 얼마 안 되어 군인(郡人)이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에게 붙자, 궁예는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고,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가서 쳐 빼앗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을 피해 남방으로 파천하여 이곳에 와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환도했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둘이고 영암(靈巖)ㆍ영광(靈光). 현이 여덟이다. 함평ㆍ고창(高敞)ㆍ광산ㆍ장성(長城)ㆍ진원(珍原)ㆍ무장(茂長)ㆍ남평ㆍ무안. 『신증』 광산을 주(州)로 올렸다. 『신증』 주가 하나이다. 광주(光州).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발라(發羅)ㆍ통의(通義)ㆍ금산(錦山)ㆍ금성(錦城)ㆍ진해군(鎭海軍).
【성씨】 본주 김(金)ㆍ나(羅)ㆍ오(吳)ㆍ정(鄭)ㆍ진(陳)ㆍ손(孫)ㆍ남(南)ㆍ박(朴)ㆍ유(柳). 종의(從義) 박(朴)ㆍ홍(洪). 영산(榮山) 윤(尹)ㆍ황(黃). 회진(會津) 양(梁)ㆍ임(林)ㆍ신(申)ㆍ조(曹)ㆍ서(徐). 안로(安老) 김(金)ㆍ서(徐)ㆍ차(車)ㆍ전(全). 반남(潘南) 홍(洪)ㆍ조(曹)ㆍ박(朴)ㆍ채(蔡)ㆍ송(宋)ㆍ주(朱). 복룡(伏龍) 조(曹)ㆍ박(朴)ㆍ구(仇)ㆍ유(庾)ㆍ화(化), 범(汎) 내성(來姓)이다. 장산(長山) 남(南)ㆍ김(金)ㆍ채(蔡)ㆍ임(任)ㆍ장(張). 여황(艅艎) 조(趙)ㆍ조(曹)ㆍ화(化)ㆍ주(朱), 김(金) 전(全)이라 한 데도 있다. 압해(押海) 박(朴), 주(朱) 주(周)라 한 데도 있다. 정(丁)ㆍ강(江)ㆍ남(南)ㆍ고(固). 군산(群山) 유(兪)ㆍ윤(尹). 임성(任城) 박(朴)ㆍ유(兪). 극포(極浦) 윤(尹). 거평(居平) 사마(司馬)ㆍ유(柳)ㆍ임(林). 금마(金磨) 하(河). 손리(孫利) 오(吳). 수다(水多) 방(邦)ㆍ유(兪)ㆍ이.
【풍속】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정도전의 기(記)에 있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가게를 벌여 물건을 팔고 산다. 민속이 순박하다. 이예(李芮)의 시에 있다.
【형승】 모든 산이 북으로 향하였다 허백(許伯)의 시에 있다.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다.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있다.
【산천】 금성산(錦城山)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 정도전(鄭道傳)의 〈소재동기(消災洞記)〉에,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여 동북에 웅거하였으니 나주의 진산이다.” 했다. ○ 김극기(金克己)의 사(詞) 〈강남락(江南樂)〉에, “신령스러운 멧부리 매우 높다. 깊숙한 골짜기에 호랑이가 일찍이 돌을 차고[跔] 갔고, 옛 못에는 용이 또한 구슬을 안고 조는데, 달밤에는 뭇 신선이 내려온다. 매우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일악(一握)이다. 솔숲절[松寺] 저녁 종소리 깊은 골짜기에 전해지고, 버드나무 마을 쓸쓸한 방앗소리 외로운 연기 너머에서 들리는데, 조도(鳥道)가 위로 꾸불꾸불 이어졌네.” 하였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금성산은 바다 남쪽에 있으니, 태사(太姒)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 한 척의 배로 견왕(甄王)이 귀순한 길이요, 일만 깃발 현묘(顯廟 현종(顯宗))가 출사(出師)했던 곳이라네. 흥룡사(興龍寺) 밖에는 서기(瑞氣)가 떠 있고, 개계원(開界院) 앞에는 흰 연기가 일어나네. 성조(聖祖 태조(太祖))의 누선(樓船)을 여기에서 맞았으니, 동정(東征)하는 오늘날 생각 그지 없어라.” 하였다. 덕룡산(德龍山)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재신산(宰臣山) 주의 남쪽 9리에 있다. 시랑산(侍郞山) 주의 남쪽 8리에 있다. 주 사람들이 재신산(宰臣山)을 목사(牧使)의 비보(裨補)라 하고, 시랑산을 판관(判官)의 비보라 한다. 쌍계산(雙溪山)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용진산(湧珍山) 주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월정봉(月井峯) 주성(州城)의 서쪽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주성의 서북쪽에 있다. 두 봉우리가 모두 금성산의 서쪽 갈래로서 주성을 돌아 안고 있다. 앙암(仰巖) 금강(錦江) 남안에 있다. 혹 노자암(鸕鶿巖)이라고도 한다. 그 밑에는 물이 깊어 헤아릴 수 없는데 속설에 용이 있다고 한다. 바위 밑에 구멍이 있는데 조수가 밀려 갔을 때는 보인다. 전설에 명(明) 나라 황엄(黃儼)이 제주(濟州)로 갈 때 압승(壓勝)한 곳이라 한다. 복암(伏巖) 광탄(廣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주 사람들이 놀이하는 곳이다. 바다 주의 서남쪽 70여 리에 있다. 금강진(錦江津) 일명(一名) 금천(錦川), 목포(木浦)이며, 혹은 남포(南浦)라고도 한다. 곧 광탄의 하류인데 주의 남쪽 11리에 있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석양에 봉우리 그림자 물가에 떨어지는데, 부서진 갓 등(藤) 지팡이로 나루 가에 서 있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산은 아득하니, 가을 빛이 사람의 시름을 견디지 못하게 하도다.” 하였다. 광탄(廣灘) 그 근원이 여덟이다. 하나는 창평현 무등산(無等山)의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담양부(潭陽府)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장성현 백암산(白巖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蘆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산(光山) 무등산(無等山)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능성현(綾城縣) 여점(呂岾)의 북쪽에서 나온다. 이것들이 모두 주의 북쪽에 이르러 작천(鵲川)ㆍ장성천(長成川)과 합류하여 주의 동쪽 5리에 와서 광탄이 된다. 정자천(亭子川)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금성산의 서남쪽에서 나와 남포(南浦)로 흘러 들어간다. 송지천(松只川)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쌍계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남포로 들어간다. 장성천(長成川)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 광탄으로 들어간다. 학교천(鶴橋川) 금성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성안으로 들어 왔다가, 동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작천(鵲川)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주의 용진산(湧珍山) 및 영광군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광탄으로 들어간다. 고막포(古幕浦)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팔니도(八尒島) 주위가 28리이다. 안창도(安昌島) 주위가 20리이다. 하의도(河衣島) 주위가 30리이다. 태니도(笞尒島) 주위가 30리이다. 도초도(都草島) 주위가 35리이다. 자을도(者乙島) 주위가 31리이다. 지좌도(只佐島) 주위가 45리이다. 수치도(愁致島) 주위가 23리이다. 사치도(沙致島) 주위가 12리이다. 대야도(大也島) 주위가 23리이다. 소지도(小智島) 주위가 25리이다. 반월도(半月島) 주위가 12리이다. 박지도(朴只島) 주위가 8리이다. 고하도(高下島) 주위가 12리이다. 다리도(多里島) 주위가 15리이다. 사읍도(沙邑島) 주위가 45리이다. 압해도(壓海島) 주위가 60리이다. 옛날 현(縣)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송도(松島) 주위가 10리이다. 구슬도(仇瑟島) 주위가 10리이다. 우막도(牛幕島) 주위가 7리익다. 소문도(蘇文島) 주위가 7리이다. 우개도(牛開島) 주위가 30리이다. 가난도(加難島) 주위가 20리이다. 비니도(飛尒島) 주위가 30리이다. 지도(智島) 주위가 60리이다. 장산도(長山島) 주위가 35리이다. 옛날 현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자은도(慈恩島) 주위가 45리이다. 암타도(巖墮島) 속칭 암태(巖泰)라 하며 주위가 45리이다. 신소도(新蔬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 여러 섬들은 모두 주의 서쪽 5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물길로 모두 1백 리가 넘고 또 사람들이 거주한다. 흑산도(黑山島) 물길로 9백 리인데 주위가 35리이다. 옛날에는 흑산현(黑山縣)이라 불렀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있다. ○ 송사(宋史)에,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으로부터 순풍을 만나면 3일만에 대양(大洋)에 들어가고, 또 5일만에 흑산(黑山)에 이르러 그 나라 경내에 들어간다.” 한 것이 바로 이 섬이다. 우십교지(牛十橋池)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숭교지(崇敎池)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판제지(板梯池)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가요산(謌謠山)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홍의도(紅衣島)ㆍ가가도(可佳島) 모두 주의 서쪽에 있다. 물길로 1천 3백여 리이다.
【토산】 전복[鰒]ㆍ숭어[秀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鳥賊魚]ㆍ낙지[絡締]ㆍ굴[石花]ㆍ김[海衣]ㆍ황각(黃角)ㆍ비자(榧子)ㆍ표고[香蕈], 죽전(竹箭) 삼향리(三鄕里)에서 난다. 감태(甘苔)ㆍ감초ㆍ미역ㆍ숫돌[礪石] 주의 남쪽 비음리(非音里)에서 난다. 차[茶]ㆍ석류ㆍ사기그릇[磁器]ㆍ대[竹]ㆍ매산(苺山). 『신증』 웅어[葦魚].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주위가 3천 1백 2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이 20개, 샘이 12개, 작은 시내가 하나 있다.
【봉수】 군산 봉수(群山烽燧) 주의 서쪽 1백 5리에 있다. 남쪽으로 무안현(務安縣) 유달산(鍮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현의 고림산(高林山)에 응한다.
【궁실】 벽오헌(碧梧軒)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을 말한다. 동쪽에 벽오동 나무가 있는데, 다른 군에서는 없는 것이므로 이행(李行)이 이렇게 이름짓고 시를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라 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니, 이에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며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든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월성(月城) 김후(金侯)가 선발되어 목사로 왔는데 또 현명한 통판(通判) 오후(吳侯)를 만나, 뜻이 같고 의기가 통하여 정사가 닦이고 폐단이 제거되었다. 개연(慨然)히 관사를 중수할 뜻이 있어 곧 자기의 봉급을 덜고, 공금을 보태어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모아 먼저 이 동헌(東軒)부터 수리했다. 다만 이 동헌의 옛 구조가 넓고 좁은 것이 적당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다시 설계하여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했다. 마루와 방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서늘하고 따뜻한 것이 알맞게 되니 모두 몇 칸이다. 이렇게 공사를 시작한 것이 경자년 8월인데, 수개월이 걸려 완공했으니, 크고 트이고 시원함이 옛 건물에 비하여 배나 된다.
자제를 나에게 보내어 내 글을 구하여 영구히 전하기를 도모하는 이가 있었다. 내 생각건대, 관사란 것은 관청을 존엄하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요, 그것의 흥폐(興廢)는 수령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금 수령을 보건대, 나약하여 무능하고 우활한 자는 공문서를 처리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니, 그 밖의 일에 겨를이 있겠는가. 간혹 현명하고 유능하다 하는 이는 핑계하기를, ‘나는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함을 두려워한다. 백성의 비방이 일어날 것을 어찌하랴.’ 하며, 비록 바람에 꺾이고 비에 벗겨져도 일찍이 나무하나 세우고 돌 하나 옮겨서 틈이 생겨 새는 것을 수리하지 않고, 여관에 든 나그네마냥 무관심하게 앉아 허물어지기만 기다리다가, 다 허물어진 뒤에야 고치니, 백성을 괴롭게 함을 이루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제 두 후(侯)는 백성을 도리로써 부리어 백성의 재물을 손상하지 않고 농사짓는 때를 어기게 하지 않고 일을 과히 떠벌리지 않았으니, 이미 백성에게 덕되었거니 어찌 법에 방해되었으랴. 아, 물(物)의 흥폐(興廢)는 물의 운수이다. 이 고을에 관사 있은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며, 전후로 수령이 된 자 그 얼마리오마는, 그 중수하기를 옛날에는 하지 못했다가 이제 와서 하게 되니, 어찌 때를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내 들으니 옛 사람의 말에, ‘대체로 궁실이나 누각을 만듦에 있어서, 이미 그런 것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처음으로 만들고, 반드시 그것을 아낄 줄 아는 자가 있어 뒤에 중수하는 것이니, 만약 퇴폐해도 수리하지 않아서 처음만 있고 뒤가 없으면, 이는 물리(物理)의 순환(循環)하는 도(道)가 아니다’ 했으니, 그 말이 참이로다. 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이 두 후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두 후의 정사를 정사로 하여, 관청을 자기 집같이 여긴다면 거의 두 후가 오늘 중수한 갸륵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리라. 김후의 휘(諱)는 춘경(春卿)이고, 오후의 휘는 한(漢)이니, 모두 현명하고 유능하기로 한 때에 이름이 있는 이들이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벽오헌(碧梧軒)에서 벽오동을 보니, 헌(軒)에 가득 푸른 그림자 영롱히 깔렸구나. 그 가운데 앉으니 나의 모든 근심 사라지는데, 더구나 맑은 바람 불어 얼굴에 스치네. 한가롭고 편안함이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 이상이니, 눈 앞의 흥미가 아침마다 새롭구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호)의 시가 맑디 맑으니, 속됨과 누추함 씻어 진(眞)으로 돌아가누나. 길이길이 유전(流傳)하여 이 명소(名所) 빛내리니, 어찌 매몰하여 없어지리오. 글의 높고 뜻이 예스러워 세상에 없는 바라, 구슬이 반짝반짝 헌(軒) 귀퉁이 환하도다. 내 와서 봉황의 가지를 휘여잡으니, 완연히 옥산(玉山)같은 풍채 보는 듯하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반일(半日)토록 애써 읊조리며 앞뜰에 섰네. 높은 데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며 구상(構想)하노라니, 동강(東江)의 물 빛이 맑게 일렁거리누나.” 하였다. 『신증』 금성관(錦城館) 은행정(銀杏亭) 남쪽에 있다.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지었다.
【누정】 무이루(撫夷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비 개인 뒤 산빛 고운 것이 상심(傷心)되고, 취한 후 봄빛은 얼굴에 가득 뜨누나. 풍경이 아름다우나 내 고장 아니니, 이제부터 고원(故園)에 돌아가 쉴까보다.” 하였다. 동루(東樓) 곧 성의 동문루(東門樓)이다.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읍 성을 증축할 때 중수(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 안에 있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도전(道傳)이 회진(會津)으로부터 귀양와서 나주를 지나칠 때 동루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ㆍ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때의 도움과 수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순수할 제, 이 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등하게 했다.
아, 도전이 남쪽으로 떨어져 와서 서울과 멀어졌으나 조종의 공덕의 갸륵함을 듣고 이 누에 올라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아 당시의 천승만기(千乘萬騎)가 이 안에 주둔했던 것이 상상된다. 또 혜종의 사당이 찬란하게 있는 것을 보니, 외로운 신하의 간절한 회포를 위로해 준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이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다. 은행정(銀杏亭) 무이루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주의 남쪽 2리쯤에 있다. 망화루(望華樓) 객관 남쪽에 있으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연꽃 마루[芝栱]와 비늘같은 기와지붕이 자색 노을을 스치는데, 사군(使君)은 날마다 서울을 바라보네. 벽오동 천 열매는 봉이 깃들기에 알맞고, 화각(畫角) 세 소리에 날은 저물어 까마귀 날아드네. 생선 파는 바다 저자[海市] 시끄럽고, 우차(牛車)는 디굴디굴 마을로 돌아가누나. 한 지방의 도회(都會)에 누대(樓臺)도 좋으니, 금장(金章 고관의 복색)으로 해변에 머무름을 한하지 말라.” 하였다. 『신증』 빙허정(憑虛亭) 무이루 동남쪽 성 위에 있다. ○ 남곤(南袞)의 시에, “풍진(風塵) 밖에 높이 솟았고, 성벽(城壁) 사이에 우뚝하네. 나무는 평야에 의지하여 짧고, 하늘은 해문(海門)을 향하여 넓도다. 형승(形勝)은 사람 때문에 있으니, 빈붕(賓朋)이 마음껏 즐기도다. 저녁 때 그림으로나 그릴 만한 이곳은 낙조(落照)가 구름낀 산마루에 비치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주성의 서쪽에 있다.
【역원】 청엄역(靑嚴驛)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찰방(察訪)을 두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은 11이니, 단엄(丹嚴)ㆍ영신(永申)ㆍ선엄(仙嚴)ㆍ신안(新安)ㆍ녹사(綠沙)ㆍ가리(加里)ㆍ영보(永保)ㆍ경신(景新)ㆍ광화(光和)ㆍ오림(烏林)ㆍ청송(靑松)이다. ○ 찰방 1명이다. 신안역(新安驛) 주의 남쪽 33리에 있다. 자화원(慈化院) 주의 동문 밖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주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강원(錦江院) 금강의 언덕에 있는데 누각(樓閣)이 있다. 연화원(蓮花院) 주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다. 홍해원(洪海院) 주의 남쪽 13리에 있다. 신안원(新安院)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개계원(開界院)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창걸원(昌乞院)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영원(嶺院)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창고】 영산창(榮山倉) 금강진(錦江津) 언덕에 있으니 곧 영산현(榮山縣)이다. 나주 및 순천(順天)ㆍ강진(康津)ㆍ광산(光山)ㆍ진도(珍島)ㆍ낙안(樂安)ㆍ광양(光陽)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동복(同福)ㆍ흥양(興陽)ㆍ무안(務安)ㆍ능성(綾城)ㆍ영암(靈巖)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해남(海南) 등지의 전세(田稅)를 여기에 거두어 들였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한다. 『신증』 금상(今上) 7년에 이 창고에 거두어 들이던 것을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으므로 폐지되었다.
【교량】 학교(鶴橋) 성 안에 있다. 영산교(榮山橋) 금강진에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수리한다. 고막교(古幕橋) 고막포(古幕浦)에 있다.
【불우】 흥룡사(興龍寺) 금강진 북쪽에 있다. 고려 태조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조부는 부돈(富伅)이요,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인데, 대대로 주의 목포(木浦)에 살고 있었다. 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를 아내로 맞아 장화왕후를 낳았다. 장화왕후가 일찍이 꿈을 꾸는데, 바다의 용이 품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깨어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 진수(鎭守)할 때, 목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어서 태조가 그리로 가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는데 미천한 신분이라고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정액(精液)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가 곧 빨아 먹었다.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혜종(惠宗)이다. 얼굴에 자리 무늬가 있으므로 세상에서는 접주(襵主 주름살 임금)라 한다. 그 자리에 큰 절을 세워 흥룡사라 하고, 앞에 있는 샘을 완사천(浣絲泉)이라 하니, 속설에 오씨가 빨래하던 샘이라 한다. ○ 무명씨(無名氏)의 시에, “앙암(仰巖) 동쪽 용이 날던 땅, 바로 거기가 어진 왕비의 옛 집터로다. 구세(九世)의 장군이 묵던 곳이요, 삼한(三韓)의 태자가 환생한 집이라네.” 하였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성은 퇴락하여 초목이 깊은데, 당년엔 왕의 행차가 강가에 머물렀도다. 북쪽 산의 단풍든 나무는 화개(華蓋 별 이름)에 기울고, 남쪽 언덕의 연기 낀 대밭은 우림(羽林 별 이름)에 솟았도다. 연(輦)타고 다니던 길에 반딧불이 나는데 이끼에 달무리[蘇暈]가 엉겼고, 붉게 칠한 대문에는 새가 지저귀니 소나무 그늘에 잠겼구나. 가을 바람 부는 퇴락한 절에 매미 소리 저물녘에 들리는데, 홀로 난간에 의지하여 고금(古今)을 느끼누나.” 하였다. 법륜사(法輪寺) 주의 서쪽 1리에 있다. ○ 고려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금수(錦水)가 동으로 흘러 금성(錦城)을 둘렀으니, 매양 중추(中秋)를 만나면 배가 더 맑구나. 세사(世事)를 따라 시대마다 변함이 없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철철 흐르는 한결같은 소리로다.” 하였다. ○ 고려 이영간(李靈幹)의 시에, “가을 서늘함과 저문 경치가 가장 서로 좋은데, 하루 저녁 절간에서 한 번 눈썹을 펴누나. 별들은 밤이 깊은데 빛이 찬란하고, 누대(樓臺)에 달이 가득하니 그림자가 높고 낮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우레에 놀라고 돌 때리는 시냇물 소리 급한데, 어지러이 솟은 죽순[筍]같이 하늘 찌르는 돌의 형세도 기이하도다. 청정(淸淨)한 경지를 누가 길이 관장하는고. 속세 밖의 백운사(白雲寺)뿐이로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금성산(錦城山)에 있다. 〈사기(寺記)〉에, “신라 선덕왕 때 중 안신(安信)이 금성산 유마굴(維摩窟)에 살면서 22년간 도를 닦다가 몸을 천길이나 되는 갑(岬) 밑에 던지니, 갑자기 오색 구름이 와서 둘러싸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하였다.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이곳은 참으로 선경(仙境)이니, 누가 이 절을 창립했는고. 문을 두드리니 속세와 단절되고, 방으로 들어가니 도심(道心)이 통하누나. 새벽 이슬에 산은 푸름을 머금었고, 비에 가을 꽃은 붉은 빛이 바랬구나. 천고의 일을 생각하니, 나는 새가 공중을 지난 것 같구나.” 하였다. 금륜사(金輪寺) 주의 남쪽 평지에 있다. 신왕사(神王寺) 금성산에 있다. 도홍사(道弘寺) 금성산 월정봉(月井峯)에 있다. ○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쓸쓸한 절 찾아 일찍이 최상방(最上房)을 지나니, 대와 오동나무에 싸인 전각(殿閣)이 처량하구나. 구름이 파묻고 물이 막아 사람 없는 곳에, 오직 그윽한 꽃이 물 건너 향기를 보내네.” 하였다. 쌍계사(雙溪寺) 쌍계산에 있다. 신륵사(新勒寺) 금성산 장원봉(壯元峯)에 있는데, 일명(一名) 울아사(鬱牙寺)라고도 한다. 용진사(湧珍寺) 용진산에 있다. 절에 극복루(克復樓)가 있는데, 무설산인(無說山人)의 〈기문(記文)〉이 있다. ○ 정도전이 기문 뒤에 쓰기를, “여황(艅艎)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 극복루는 용진사에 있는데, 대체로 사람이 누각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마음을 즐기고 눈을 달리어 산천 풍월을 실컷 보아 유람의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니, 학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이 누각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영릉(零陵)의 산은 남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이나 쫓겨난 신하는 감옥 같은 산이라 하였고,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장관(壯觀)인데 귀양간 사람은 서글퍼했으니, 사람이 진실로 그 본심을 잃는다면 어디를 가나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누각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심(私心)을 이겨 천리(天理)를 회복하면, 마음이 넓어져 천지와 더불어 크기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로움을 같이하여 호호탕탕(浩浩蕩蕩) 만나는 곳마다 모두 즐겁다. 그러므로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혜종사(惠宗祠) 흥룡사 안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철원(鐵原)이 성(聖)을 열어주었고, 금리(錦里)에서 잉태했도다.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날 먼저 백제성에 오르도다. 산하가 왕기(王氣)를 돕고 사당(祠堂)에서 민정(民情)을 보겠도다. 원하건대, 동정(東征)하는 군사를 돌보아 거듭 만대에 태평을 열어 주소서.” 하였다. 남해신사(南海神祠)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기록되었으며,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금성산사(錦城山祠)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다. 사당이 다섯개 있으니 상실사(上室祠)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中室祠)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下室祠)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國祭祠)는 하실사(下室祠)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禰祖堂)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 ○ 고려 충렬왕 4년에 이 사당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에 나의 공이 있었는데, 장병들은 모두 상을 타고 나만 빠졌으니 어째서인가.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여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흥(鄭興)이 왕에게 귀띔을 하여 작위(爵位)를 주게 하고, 또 그 고을의 녹미(祿米)를 모두 받지 않고 해마다 5석을 이 사당에 바쳐 춘추로 향과 축문과 폐백(幣帛)을 내려 제사지냈다. 본조(本朝)에 와서도 향과 축문을 내린다. 속설에, “사당의 신은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므로, 매년 춘추에 이 고을 사람뿐 아니라 온 전라도 사람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연락부절하였다. 남녀가 혼잡하게 온 산에 가득하여 노천에서 자므로 남녀가 서로 간통하여 부녀를 잃는 자가 많았다.” 한다. 매일밤 기생 4명이 사당 안에 윤번으로 숙직했는데, 성종 10년에 예조에 명해서 금하게 했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옛 사당이 빈 산 속에 있는데, 봄바람에 초목 향기 아름답도다. 안개 구름은 웅장한 기운을 보태고, 우레와 비는 위엄을 돕는다. 장구와 북은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고, 돼지 다리는 지은 농사 풍년들기를 비는도다. 늙은이들은 취해서 부축임을 받아 돌아가는데, 막걸리는 제상에 흥건하도다.” 하였다. 용진단(龍津壇) 금강 북안에 있다. 앙암(仰巖)과 마주보고 있는데, 본 고을에서 제사지낸다. 여단(厲壇)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영산폐현(榮山廢縣)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흑산도(黑山島)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우거하였으므로 영산현이라 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에 군으로 승격했다가 후에 주에 예속되었다. 압해폐현(壓海廢縣)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압(壓) 자는 압(押)으로 쓰기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인데, 백제 때는 아차산군(阿次山郡)이 되었다가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군을 삼았다. 고려초에 나주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영광군에 예속되고 후에 다시 나주에 예속되었다. 후에 왜적에게 땅을 잃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였으므로 압해현이 되었다. 여황폐현(艅艎廢縣)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수천현(水川縣)인데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회진폐현(會津廢縣)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肹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고려와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안로폐현(安老廢縣)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인데,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쳐 반남군(潘南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 김대경(金臺卿)의 시에, “백년의 세월에 오십이 넘었으니, 반생(半生) 동안 이미 시서(詩書) 때문에 그릇되었네. 어찌 세상에 병란(兵亂)이 있을 줄 알았으랴. 마침내 한 섬의 양식도 저장한 것 없구나. 어찌 맨손으로 범 잡고 배 없이 하수(河水) 건너는 것을 부러워하랴. 오히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 잡는 것이 서글프네. 고을 이름은 내 늙음을 편안히 하기에 정히 합당하니, 한 굽이 맑은 시내가 집을 둘렀네.” 하였다. 복룡폐현(伏龍廢縣)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복룡현이며, 일명(一名)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다가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때 옛 이름으로 복구하여 나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남여(籃輿)가 삐걱거리며 비 개인 내를 건너가는데, 멀리 전구(前驅)가 언덕밭을 지나는 것이 보이네. 읍내의 개는 사람보고 짖는데 울타리에 구멍이 있고, 촌 무당은 귀신을 맞이하느라 종이로 돈을 만들었구나. 끊어진 구름 찬 해는 교묘히 삼켰다 뱉었다 하고, 작은 봉우리와 질펀한 언덕은 멀리 서로 접했구나. 남으로 금성(錦城)까지 30리라니, 남여 멘 하인들의 어깨가 붉어질 것이 걱정이네.” 하였다. 반남폐현(潘南廢縣)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장산폐현(長山廢縣) 주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일명 안릉(安陵)이라고도 한다.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백제 때는 거지산현(居知山縣)이 되고, 거(居) 자를 굴(屈)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 안파(安波)로 개칭하여 압해군(壓海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나주에 예속시켰다. 후에 왜적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이곳에 와서 우거하여 장산현이 되었다. 금성산고성(錦城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9백 46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삼면이 험하게 막혔다. 옛날에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퇴락하였다. 동정자(東亭子) 임유정(林惟正)의 집구시(集句詩)에 “들에서 마음 내키는대로 걸으니, 푸른 이끼에 지팡이 짚기가 알맞구나. 초(楚) 나라 땅은 천리나 먼데, 두견새는 한스럽게 운다. 숲이 이지러진 곳에 호수의 빛이 새어나오고, 모래가 편평하니 풀빛이 가지런하구나. 해가 사양(斜陽)이 되니 물고기가 먹이를 찾고, 숲이 어두워지자 새들이 깃드는구나. 고목은 하늘에 닿아 어둡고, 새 대는 물을 덮어 나직하구나. 배 젓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해는 그림 다리[畫鄕] 서쪽에 떨어지누나.” 하였다. 종남향(從南鄕) 옛날에는 종의향(從義鄕)이라 불렀다.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손리향(孫利鄕)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소산리(所山里)라 했는데, 지금은 도림리(道林里)라 한다. 평구부곡(平丘部曲) 주의 북쪽 16리에 있다. 금마부곡(金磨部曲) 안로현(安老縣)에 있는데, 주에서 40리이다. 거평부곡(居平部曲) 회진현(會津縣)에 있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30리이다. 군산부곡(群山部曲)ㆍ극포부곡(極浦部曲)ㆍ임성부곡(任城部曲) 이상 세 부곡은 지금은 합하여 삼향리(三鄕里)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수다소(水多所) 옛날에는 수타(水墮)라 했는데, 일명 횡산(橫山)이라고도 하며,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인덕지(仁德池) 성 안 동작리(東作里)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석장(石檣) 동문 밖에 있다. 전설에, “이 주를 처음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이것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한다. 문 안에도 목장(木檣 나무 돛대)이 있다.
【명환】 고려 주열(朱悅) 고종 때 목판(牧判)이 되어 청령함으로 이름이 있었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가 되었다. 그때 율원(栗原) 도적 괴수 이연년(李延年)이 해양(海陽) 등의 주현(州縣)을 노략질했는데, 경손이 나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다. 경손이 별초군(別抄軍) 30여 명을 모집하여 나아가 싸워서, 이연년을 베고 승세를 타서 추격하니, 적당들이 크게 무너져서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에 내직(內職)으로 들어가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최린(崔璘) 고종 때 부사(副使)가 되었다. 그때 율원 사람 이연년이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 자칭하고 주군(州郡)을 노략질하니, 최린은 지휘사 김경손과 함께 쳐부수었다. 그 공으로 특진하여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김응덕(金應德) 원종(元宗) 11년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때 삼별초(三別抄)가 진도(珍島)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형세가 매우 치열하여 모든 고을이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적장(賊將)이 나주 경계에 이르자, 응덕과 부사(副使) 박부(朴琈) 등이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상호장(上戶長) 정지려(鄭之呂)가 분연히 말하기를,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산골짜기로 도망을 갈지언정, 고을의 수리(首吏 상호장)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도적을 따르리요.” 하였다. 응덕은 그 말을 듣자 곧 성을 지키기로 뜻을 결정하고, 나주 및 여러 영현(領縣)에 통청하여 들어와 금성산을 확보하여, 가시나무를 세워 책(柵)을 만들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도적이 이르자 군사들이 모두 상처를 싸매고 죽음으로써 지키니, 적이 7일간 주야로 공격했으나 마침내 함락하지 못했다. 민종유(閔宗儒) 충렬왕 때 목사(牧使)가 되었다. 장항(張沆) 충숙왕 때 목사가 되었다. 민적(閔頔) 목사가 되었다. 윤택(尹澤) 충목왕 때 목사가 되었다. 정치는 관대함을 숭상하여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붙들어 주었다. 전보인(全輔仁) 성종 때 주의 경학박사(經學博士)가 되었다. 임금이 교서를 내려 격려했는데 그 교서에, “순순(諄諄)히 지도하는 것은 선보(宣父 공자)가 문으로 넓게 해 주는[博文] 뜻에 합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과인의 권학(勸學)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다. 마땅히 발탁하는 은혜를 더하여 특별한 은총을 보이겠다.” 하였다. 본조 함우치(咸禹治) 목사가 되었다. 김계희(金係熙) 세조 때 목사가 되었다.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했으므로, 백성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한 것 같았고, 보(寶)를 세워 매년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명륜당(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최선복(崔善復) 목사가 되었다. 강노(姜老)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영견(李永肩) 목사가 되었다. 『신증』 이유인(李有仁)ㆍ민이(閔頤)ㆍ김세영(金世英)ㆍ신영홍(申永洪)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정가신(鄭可臣) 처음 이름은 흥(興)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세자를 따라 원(元) 나라로 갔다. 거기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중히 여기게 되어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고 단엄(端嚴)하며 전고(典故)에 익숙하여, 한때의 사명(辭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옛 집이 주의 북쪽 금안동(金安洞)에 있다. 일찍이 원 나라에 있을 때의 시에, “해동(海東)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산 아래 우리 집은 초가 수간(數間)이라네.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내가 심은 것인데, 봄 바람에 주인 오기를 응당 고대할 것이로다.” 하였다. 나유(羅裕) 사람됨이 용감하고 출중하여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데 밝았다. 난을 당하여 두려워하지 않아 자주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진자화(陳子和) 키가 크고 날래며 용맹스러웠다. 원종 때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를 공격할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는데, 바로 적중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베어 가지고 나오니, 군사들이 기뻐 날뛰었다. 조금 뒤에 적에게 해를 당했다. 나익희(羅益禧) 나유(羅裕)의 아들이다. 벼슬은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이르렀다. 성품이 곧고 절의(節義)를 사모하여 사람과 다투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분배하면서 특별히 종을 더 주니, 그는 사양하면서, “한 아들로서 다섯 자매의 사이에 있으니, 어찌 차마 구차스레 재물을 차지하여, 시구(鳲鳩)의 인(仁)을 손상하게 하겠습니까.”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의롭게 여겨 그대로 좇았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박상충(朴尙衷) 반남(潘南) 사람인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어, 고례(古禮)를 잘 고증하고 차례 있게 정리하여 《사전(祀典)》을 만들었다. 우왕(禑王) 때 이인임(李仁任)이 원 나라를 섬기자고 하자, 다시 상소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글을 잘 지었다. 조용히 거처할 때는 책만 보며 말이 생업에 미치지 않았고, 가정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근신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부귀를 보면 경멸하였다. 정지(鄭地) 모습[形貌]이 괴걸(魁傑)하고 성품이 관후하며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다. 독서를 즐겨 대의(大義)에 통하고 출입할 때에는 항상 책을 지니고 다녔다. 공민왕 때 속고적(速古赤)이 되어 왜구를 막을 계책을 올리니, 공민왕은 보고 매우 기뻐하여 전라도 안무사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 왜구가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도를 침범하여 고을마다 도륙하고 불을 지르니, 그를 삼도도지휘사(三道都指揮使)로 삼았는데, 왜구를 쳐서 크게 부수었다. 사람들은 지휘사가 아니었다면 3도의 백성이 거의 다 없어질뻔했다고 하였다. 본조 정종(定宗) 3년에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공을 기록하여 철권(鐵券)을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광주(光州)에서 살다가 죽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정침(鄭沈) 나주의 아전으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홍무(洪武) 4년 봄에 전라도 안렴사의 명으로 제주도 산천에 제사지낼 축문과 폐백을 받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왜적을 만났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그만 홀로 안된다고 하며 싸울 것을 결심하고 활로 적을 쏘니, 쏘는 족족 맞아 죽어 적이 감히 덤비지 못했다. 화살이 다 되자, 그는 일이 틀린 줄 알고 도포를 갖추어 입고 단정히 앉았다. 적이 이를 보고 놀라, “이는 관원”이라 하고 경계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자, 그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항복했다. 본조 박은(朴訔)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인데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본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아들 규(葵)는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고, 강(薑)은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어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정식(鄭軾) 가신(可臣)의 6세손이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과 지방에서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신증』 최보(崔溥) 과거에 두 번이나 우등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이학(理學)에 더욱 정통했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제주에 사신으로 가다가 표류되어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렀는데, 〈표해기(漂海記)〉가 세상에 전한다.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만나 멀리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금상(今上 중종) 초년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숭질(朴崇質)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경(恭頃)이다. 정수곤(丁壽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교리가 되었다. 총명하고 기억을 잘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더니, 일찍 죽었다. 정수강(丁壽崗) 정수곤의 아우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유우】 고려 정도전(鄭道傳) 신우(辛禑) 초에 도전으로 하여금 북원(北元)의 사신을 영접하라고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내 마땅이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올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를 결박하여 명 나라로 보내겠소.” 했다가 드디어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리어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갔다. 〈소재동기(消災洞記)〉를 지었는데, “도전이 소재동 황연(黃延)의 집에 세들어 있었다. 그 동리는 곧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居平)의 땅인데, 소재(消災)라는 절이 있어 동리 이름도 소재동이라 한다. 동리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인데, 동북쪽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와 고개가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수가 있다. 그 남쪽에는 들판이 펀펀한데 숲 속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 초가집 10여 호가 있으니, 바로 회진현이다. 유명한 산수(山水)로는, 금성산(錦城山)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나주의 진산(鎭山)이다. 또 월출산(月出山)은 맑고 빼어나며 우뚝하여 동남쪽을 막아 섰는데, 영암군(靈巖郡)과의 경계이다. 금강(錦江)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소재동은 바다까지 수십 리나 된다. 산의 남기(嵐氣)와 바다의 장기(瘴氣)는 사람의 살에 닿으면 언제나 병이 나게 한다. 아침저녁 어둠과 밝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는 것 또한 구경할 만하다. 동(洞) 안에는 다른 초목은 없고 오직 누런 띠풀과 긴 대나무가 소나무나 녹나무[枏]에 섞여 있다. 민가에서 문과 울타리는 가끔 대나무로 나무를 대용하니, 그 소쇄(蕭洒)하고 청한(淸寒)한 것은 멀리 온 사람도 또한 즐겨 안거(安居)할 만하다.
주민들은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고, 힘써 농사 짓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황연(黃延)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집에서 술을 잘 빚고 또 자신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술이 익을 때마다 반드시 나에게 대접했다. 손님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金成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법 글자를 알았고, 그의 아우 김천(金天)은 이야기하고 웃기를 잘하며 술도 잘하는데, 형제가 한 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徐安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늙어서 중이 되어 안심(安心)이라 불리었다. 코가 크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거동이 괴상하고, 사투리와 속담과 시골 여염집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또 김천부(金千富)라는 이와 조송(曹松)이라는 이도 있었는데, 술을 잘 마시는 것이 김성길(金成吉)이나 황연(黃延)의 동류(同類)였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따라 놀며, 철에 나오는 토산물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마음껏 놀다 가곤 했다. 나는 추울 때는 갖옷 한 벌, 더울 때는 베옷 한 벌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거처하는데 아무 구속이 없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두세 학자와 함께 강론한 뒤에 시내를 따라 바위와 골짜기를 오르내리다가 싫으면 쉬고 흥이 나면 걸었으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배회하고 구경하며 휘파람도 불고 시도 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혹 농부나 촌로를 만나면, 싸리 포기를 깔고 앉아 서로 위로하며 묻기를 전에 알던 사람처럼 하였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서쪽에 좀 편편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래로 넓은 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을 사랑하여, 종을 시켜 묵은 풀숲을 베어내고 집 두 칸을 짓게 했다. 띠도 자르지 않고 나무도 깎지 않았으며, 흙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싸리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단하고 힘이 적게 들었다. 그것도 동리 사람들이 모두 와서 도우니, 며칠 안 가서 다 되었다. 현판을 ‘초사(草舍)’라 달고 거처했다. 아, 두자미(杜子美)가 성도(成都)에서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겨우 한 해를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초당 이름은 천년이나 전해 온다. 나는 이 초사에 얼마나 살까. 내가 떠나간 후 이 초사는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말 것인가. 들불[野火]에 타 없어지거나 썩어 흙이 돼 버릴 것인가. 혹시라도 후에까지 남을 것인가, 아닌가. 모두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미치광이 같고 엉성하고 어리석고 고지식하므로, 이 시대에 버림을 받아 먼 지방으로 귀양왔는데,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와 같이 후대해 주니, 혹시 나의 곤궁한 처지를 애처로이 여겨 거두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시대의 여론을 듣지 못하여 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요컨대, 모두 매우 후대하는 것이니, 나는 부끄럽고 감격해서 시말(始末)을 적어 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였다. 본조 조주(趙注) 세종 때 장원하여 청렴하고 근면하게 벼슬을 지냈으므로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만년에 검호 조참판(檢戶曹參判)으로 물러나와 나주의 세화리(細花里)에 살았다. 그때 나이 80여 세로 매년 동짓날과 정월 원단(元旦)의 성절(聖節)이 되면 반드시 망궐례(望闕禮)에 참석하였는데, 나주 성문을 들어오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공청(公廳)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수령은 임금의 근심을 나눈 직책을 수행하고 성안은 수령이 있는 곳이므로 그렇게 한다.” 했다.
【열녀】 본조 나씨(羅氏) 형제 호장(戶長) 나종(羅宗)의 딸들이다. 언니는 한림(翰林) 조탁(趙琢)의 아내요, 동생은 견룡(牽龍) 임윤덕(林允德)의 아내이다. 형제가 모두 일찍 과부가 되어 남편의 묘소에서 3년간 묘막(墓幕) 생활을 했다. 집이 가난했지만 제사는 오직 삼가하여 지냈다. 영락(永樂) 중에 목사 권천(權踐)이 조정에 보고하여 북장리(北藏里)에 한 쌍의 비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동리를 절부리(節婦里)라 하고, 그 자손들을 복호(復戶)시켰다. 『신증』 능금(能今) 정병(正兵) 최치강(崔致江)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애통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복을 벗은 지 19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영비생장구가향(靈妃生長舊家鄕)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성조(聖祖 고려 태조)께서 지금의 고을을 개척하오니, 영비(靈妃)가 생장한 옛 고을이다.” 하였다. 금성춘색조(錦城春色早) 이색(李穡)의 시에, “금성에 춘색이 일러서, 강 언덕에 매화가 지려는도다.” 하였다. 유시가객통오월(有時賈客通吳越) 윤진(尹珍)의 시에, “바다에 가깝고 산으로 둘러 싸인 옛 금주(錦州), 앞 마을 곳곳에 고기잡는 배를 매놓았구나. 한때는 장사꾼이 오월(吳越 중국) 지방과 통했었거니, 사람들은 물고기와 새우를 얻어 주루(酒樓)로 들어가도다.” 하였다. 반야백사유월색(半夜白沙留月色) 고려 채보문(蔡寶文)의 시에, “이 땅에 왔던 것이 10여 년, 금년 가을에 또 기러기처럼 남쪽으로 왔구나. 발을 저녁 때 걷으니 강산은 좋고, 거울을 아침에 대하니 귀밑머리가 틀렸구나. 한밤 백사장에 달빛이 비치는데, 해 묵은 푸른 대가 봄빛을 빛내는구나. 부귀영화 새로운 영광이 중하니, 오고 가는데 누가 나더러 옛날의 포의(布衣)라고 할소냐.” 하였다. 강회지축부(江回地軸浮) 장윤화(張允和)의 시에, “나무가 늙으니 산의 모습이 씩씩하고, 강이 돌아 흐르니 지축(地軸)이 뜬 것 같다.” 하였다. 『신증』 관로소매경우탁(官路小梅經雨拆)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금성(錦城)의 꽃 속에 와서 봄놀이를 하니, 꽃 아래 생황(笙篁)의 노래 나그네 수심을 방랑케 하는구나. 관청 큰 길의 작은 매확는 비를 맞아 벌어지고, 역정(驛亭)의 실버들은 바람에 불려 부끄러워하는 듯. 한 떼의 구름이 바다를 덮었는데 때때로 나팔 소리 들리고, 옥 같은 달은 창을 비취는데 홀로 누각에 의지하도다. 해거름의 호남(湖南)은 배나 쓸쓸하다. 오운(五雲)이 깃들인 서북쪽은 신주(神州 임금이 있는 곳)로다.” 하였다. 십이영(十二詠)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염백(鹽白)의 누선(樓船)이 변한(卞韓)을 지나가니, 환호성이 이미 금성산(錦城山)에 진동하더라. 흥폐(興廢)를 알아 먼저 귀순하니, 예로부터 주민(州民)의 인상이 좋기도 하올씨고.” 하였다. ○ “교활한 오랑캐의 깃발이 덕진(德津)을 가리니, 어찌 남포(南浦)에 천인(天人)이 주둔했을 줄 알았으랴. 가련하다. 맹덕(孟德 조조(曹操))의 천 척 군졸이, 마침내 주랑(周郞 주유(周瑜))의 한 횃불에 재가 되었어라.” ○ “용손(龍孫 고려 태조를 말함)이 당일에 군함을 대고서, 갑자기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는 선녀를 만났도다. 천년의 박씨(薄氏) 계집이 진실로 좋은 짝을 만나니, 지나는 사람도 그곳을 완사천(浣紗泉)이라 하는구나.” ○ “비단 빨던 강가가 고려 태조 처가의 고향이요, 흥룡사(興龍寺) 안에는 그 서광이 어리었도다. 지금도 부로(父老)들은 남긴 덕을 그리워하여, 피리 불고 북 치면서 추대왕(鄒大王 혜종(惠宗))을 즐겁게 하도다.” ○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푸른 나무가 창으로 하여 문드러졌는데, 현묘(顯廟)가 비단 빨던 강물로 항해해 왔도다. 무엇이 명황(明皇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西蜀)으로 도망간 것과 다르랴. 무이루(撫夷樓)가 산화루(散花樓) 되었도다.” ○ “누가 종지(宗之)를 기(蘷)ㆍ설(偰)의 무리라 하였던가. 험한 땅과 평지가 마침내 몸을 위태롭게 하였구나. 부질없이 부로들을 동문(東門)에서 타일러 괴롭히는 것이, 어찌 세 번 꿰매고[三緘] 회진(會津)에 숨은 것만 하랴.” ○ “산과 바다는 아름다워 빼어난 기운이 새롭고, 옛부터 다만 명신(名臣)을 낸 것 뿐 아니다. 삼향(三鄕)의 죽전(竹箭)이 천하에 소문나니, 주석돌[錫]과 단은(丹銀)이 어찌 보배라 할 것인가.” ○ “붉은 뱃전[舷] 검은 돛대가 파도에 가득하고, 짤달막한 집 마을마다 노적가리가 높구나. 백만 섬 영산(榮山) 창고의 안에 있으니, 금년에는 백성의 고혈(膏血)을 빤다고 말하지 마소.” ○ “우러르고 엎드린 두 바위 기이하고도 훌륭하니, 노니는 나그네는 동쪽 서쪽 배가는 대로 놔둔다. 빙설(氷雪) 같은 금강(錦江)에 섭섭한 생각나서, 말타는 것을 뿌리치고 걸어서 수홍교(垂虹橋)를 건너는구나.” ○ “월정봉(月井峯) 서쪽 시내에는 모래가 달음질치고, 성안엔 악한 흐름[流惡]이 몇 집이나 되는가. 학교(鶴橋)에 신발 끄는 소리 얼마인 줄 알리. 아름다운 이름 마땅히 추천하여 완화(浣花)와 짝지을 것이라.” ○ “남녀의 비단옷 푸른 봉우리를 쌌고, 사바(娑婆)의 노래와 춤 신간(神姦)을 즐겁게 하도다. 사군(使君)은 바로 서문표(西門豹)이니, 이 경내에 늙은 홀아비 없게 만들리라.” ○ “광탄(廣灘)은 지척 사이라 성지(城池)에 붙었는데, 긴 모래사장에서 추는 졸렬한 춤은 옛부터 있었던 것이로다. 금일에 개척한 삼십 리엔 흰 느릅나무가 응당 생사당(生祠堂)을 정결하게 하였으리.”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 때에 금성 현감(錦城縣監)으로 내렸다가 후에 다시 승격시켰고, 영조 4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방면】 동부(東部)ㆍ서부(西部) 모두 읍내(邑內)이다. 복암(伏巖)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삼가(三加)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상곡(上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신촌(新村)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지량(知良)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전왕(田旺)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지죽(枝竹)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비음(非音)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산(馬山) 남쪽으로 위와 같다. 세화(細花)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반남(潘南) 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금마(金麽) 본래는 금마부곡(金麽部曲)이다. 안로(安老) 고현(古縣)에 있다. 종남(終南) 본래는 종남향(從南鄕)이며, 전에는 종의남(從義南)이라 하였다.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원정(元亭)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시랑(侍郞)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모계(茅界)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수다(水多) 본래는 수다소(水多所)이며,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용문(用文)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우곡(紆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오산(吾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공수(空樹)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두동(豆洞)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55리이다. 거평(居平) 본래는 거평 부곡이며, 회진(會津)의 옛 현에 있다.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곡강(曲江)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60리이다. 대화(大化)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도림(道林) 본래는 손이향(孫利鄕)이며, 옛날에는 소산리(所山里)라 불렀다.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여황(艅艎)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장본(獐本)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적량(赤良) 북쪽으로 위와 같다. 이로(伊老)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죽포(竹浦)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삼향(三鄕) 본래 군산(群山)ㆍ두포(杜浦)ㆍ임성(任城)의 세 부곡(部曲)이다. 무안현(務安縣) 남쪽 경계 너머에 있다.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50리이다.
【영아】 우영(右營) 인조 때에 두었다. ○ 우영장 겸 토포사(右營將兼討捕使) 1명이다. 인조 19년에는 능주 목사(陵州牧使)가 토포사를 겸하였는데, 현종 15년에는 우영장이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나주ㆍ광주(光州)ㆍ능주(陵州)ㆍ영암(靈巖)ㆍ영광(靈光)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무안(務安)ㆍ함평(咸平)ㆍ무장(茂長)이고, 토포(討捕)의 속읍은 장성(長城)ㆍ고창(高敞)ㆍ흥덕(興德)이다.
【진보】 지도진(智島鎭) 함평 임치도(臨淄島) 서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숙종 8년에 진을 두었다. ○ 수군만호 겸 사복별장(水軍萬戶兼司僕別將) 1명이다. 흑산도진(黑山島鎭) 우이도(牛耳島) 안에 있는데, 처음에는 별장(別將)을 두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다섯 읍내(邑內)에 있다. 제민창(濟民倉) 서쪽으로 40리이다. 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이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30리이다. 남창(南倉) 남쪽으로 40리이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40리이다. 삼향창(三鄕倉) 삼향면에 있다. 고월창(孤月倉) 남쪽으로 30리이다. 마산면(馬山面)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장성(長城)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있다. 영산창(榮山倉) 금강진(錦江津) 가에 있는데 채산현(菜山縣)의 옛 터이다. 국초(國初)에 조창(漕倉)을 두고 창성(倉城)을 쌓아, 나주ㆍ광주ㆍ순천ㆍ강진ㆍ진도ㆍ낙안(樂安)ㆍ광양ㆍ화순ㆍ남평ㆍ동복ㆍ흥양(興陽)ㆍ무안ㆍ능주ㆍ영암ㆍ보성ㆍ장흥ㆍ해남 등의 전세(田稅)를 이곳에서 서울로 운송하였다. 중종 7년에 조창을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로 옮겼는데, 지금은 강창(江倉) 뿐이다. 나리포창(羅里浦倉) 제주(濟州)와 접하여서 설치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공주(公州)에 설치하였는데, 경종(景宗) 때에 임피(臨陂)로 옮겼으며, 영종(英宗) 때에는 군산(群山)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시 임피로 환원했으며 정종(正宗) 때에 이곳 제민창(濟民倉)으로 옮겼다.
【목장】 망운장(望雲場) 영광 망운면 경계에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이다. 속장(屬場) 압해도장(押海島場)ㆍ장산도장(長山島場)ㆍ자은도장(慈恩島場) 이상은 망운에 속한다. 지도장(智島場)은 지도(智島)에 속한다.
【진도】 영강진(榮江津) 고려 때에는 남포창(南浦倉)이라 불렀다. 제창진(濟倉津)ㆍ금강진(錦江津) 모두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수다진(水多津)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회진강진(會津江津) 서남쪽으로 15리이다. 죽포진(竹浦津) 서쪽으로 30리이다. 오산진(吾山津)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몽탄진(夢灘津) 서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종남진(終南津)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옻[漆]ㆍ모시[苧]ㆍ감ㆍ생강ㆍ우모(牛毛)ㆍ해삼.
【누정】 장춘정(藏春亭) 죽포(竹浦) 서쪽에 있다.
【궁묘】 남해신단(南海神壇) 남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중사(中祀)를 모셨다. 금성산단(錦城山壇) 고려 충렬왕 3년에 본읍에 영을 내리어 금성산을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본조에서도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를 모셨다. 용진단(龍津壇) 금강(錦江) 북쪽에 있는데, 우뚝 선 바위가 즐비하다. 본읍에서 제사지낸다.
【사원】 경현서원(景賢書院) 선조(宣祖) 계미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김성일(金誠一) 안동(安東) 편을 보라. 기대승(奇大升) 광주(光州) 편을 보라. ○ 월정서원(月井書院) 현종(顯宗) 갑진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박순(朴淳) 개성(開城) 편을 보라. 김계휘(金繼輝) 호는 황강(黃岡)이며, 본관은 광주이고, 벼슬은 대사헌이었다. 심의겸(沈義謙) 호는 일재(逸齋)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청양군(靑陽君)이다. 정철(鄭澈) 호는 송강(松江)이고,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반계서원(潘溪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우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박상충(朴尙衷) 개성 편을 보라. 박소(朴紹) 합천(陜川) 편을 보라. 박세채(朴世采) 문묘 편을 보라. 박필주(朴弼周) 호는 여호(黎湖)이고, 박소의 후손이며, 벼슬은 찬성이고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정렬사(旌烈祠) 선조 병오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도(梁山濤) 모두 진주(晉州) 편을 보라. 임회(林檜) 자는 공직(公直)이고, 호는 관해(觀海)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인조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 광주(廣州) 목사였는데 피살되었다. 좌승지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