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 땅의 이름
횡성의 지명유래에서 우항리(牛項里)는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쇠목, 우항(牛項)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재울, 물언지, 모란, 새발을 병합하여 무네미 위쪽이 되므로 ‘상수남리(上水南里)’라하다가 1940년에 현재의 우항리로 고쳤다.(횡성의 지명유래)
역사에 빛나는 횡성의 인물에서는 우항리(牛項里)를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했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우항리는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 부르는데 우항 시장(市場) 앞에 있는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상인데 그 중 소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쇠목 즉, 우항이라 한다.
본래는 상수남리(上水南里)였으며 우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수재울, 물언치, 모란, 새말 등을 합하여 상수남리라 하였다가 그 후 우항으로 고쳤다.(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우항1리]
가마봉 [산]
양적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산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우항리 남쪽에 있다.(횡성의 지명유래) 우항리 마을 뒤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듯한 산이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가마봉은 “우항리 남쪽에 있는 산. 가마처럼 생겼음. ‘가마’는 ‘솥[鼎], 가마[釜]’의 뜻과 ‘곰[熊]’의 고대어 ‘고마’와 연관된 두 예가 있다. ‘곰’은 원시사상과 연관되어 ‘신성스러운 곳이나 사물’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때 ‘고마[곰]’는 신(神)을 뜻하는 우리의 고유어이기도 하다. 우천면민이 매년 해맞이 행사를 여기서 하는 사연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옛날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든가 산신제를 지냈을 수도 있고, 마을사람들이 신이 기거하는 산이란 뜻에서 가마봉이라 불렀을 수도 이다. 해발 280.8m이다. 산 뒤에는 우천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 위에서보면 우항리와 대미원천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현재 이곳에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를 하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우천면민이 모두 참여하는 해맞이 축제이다.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제단 앞에는 “우천면민의 和合․繁榮”이라 음각해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모서리에는 “건립 2013.11.25. 우천면장 번영회장”이라 하여 건립주체와 연도를 새겨 놓았다. 제단 앞뒤로 향로를 올려놓는 향단(香壇)이 있다.
공동산[공동묘지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어서 공동산이라 했다. 2농공단지 넘어가는 길이 있는 고개 밑이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며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이곳에 곳집이 있었다.
구룡천(九龍川)[개울]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천명(川名)이라 했다.
당숲[성황숲]
성황숲, 전통마을 숲. 쇠목의 성황당이 있는 숲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소나무가 꽤 많이 있어 울창한 숲을 이뤘다. 지금도 성황당 주변과 정자 옆으로 소나무가 있다. 이 숲은 마을에서 복원을 하였는데, 우항리 전통마을 숲이라 하여 “이 마을 숲은 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계승 및 발전시켜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며, 토속문화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복원한 숲입니다.”라고 안내판에 써 놨다. 그러면서 서낭당과 솟대와 홍살문을 그려 놓았다.
당숲에는 말처럼 생긴 나무가 있어서 아이들이 그 나무를 말이라면서 올라가서 타고 놀았다.
당숲은 우항리 마을 가마봉과 연결된 산자락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쇠목의 목 부분을 뚫어 길을 내고, 가마봉 아래서 길까지의 부분은 밭으로 개간했다. 산자락이 이어졌을 때는 당숲까지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한다.
문화마을 [마을]
정부시책에 의해 현대식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다. 1994년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매입하여 분할 측량하여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여 현대식으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때 주택은 55동으로 각 88평이었다. 상가는 8동을 만들었다.
방이평(芳伊坪)[평야]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평야라 했다.
4H표석
당숲 앞 솟대 옆에 있는 시멘트로 찍어 만든 4H표석이다. 녹색 토끼풀(네 잎 클로버) 그림에 지덕노체라고 쓴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아랫부분에 희미하게 우항리 무슨 회라고 녹색과 검은색으로 쓴 글씨가 있는데 잘 읽을 수가 없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설립된 청소년 단체인데 우리나라에는 1954년 11월에 처음 설립되었다. 네 개의 H(머리(Head), 마음(Heart), 건강(Health), 손(Hands))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표상한다.
상수남주막(上水南酒幕)[주막]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는 ‘돌ᄯᅥ거리쥬막’이라 하였다.
성황당[당집]
쇠목성황당. 쇠목서낭당. 당숲 끝 소세바위 옆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원래 이곳은 산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산을 깎아 길을 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 목줄을 끊었다고 이야기 했다. 가마봉의 산이 당숲의 성황당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호랑이가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황당의 신은 덕고산성황신이다. 성황당 안 위패에 그렇게 써 놓았다. 예전에는 유사가 날을 받아서 성황당고사를 지냈다. 날이 나오면 술을 해서 성황당 옆에 묻어두었다가 고사를 지낼 때 꺼내서 신께 올리고, 마을사람들이 음복을 했다. 그때 제당이 볏짚으로 만들어졌었다. 그걸 김영철 씨와 고종태 씨가 지금과 같이 당집을 새로 지었다. 지금은 음력 1월 3일에 성황제를 올린다. 유사도 따로 정하지 않고 당연직으로 이장이 한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아서 올렸으나 지금은 돼지머리를 사서 제물로 쓴다. 떡시루 메 등을 진설한다.
하대리에는 당을 없애고 나자 갑자기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 자살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목맨 사람이 대여섯 명 된다고 했다.
우항리에서는 성황제를 지내면서 마을사람들이 술을 안 먹는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도 노인들도 술을 잘 안 먹는다고 한다. 음주가 없어졌다면서 “그거 한 가지는 좋아.”라고 했다.
소세바우 [바위]
쇠바위. 서낭당 밑에 있는 바위이다. 소의 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원 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매일 찾아드는 손님에 귀찮음을 느낀 부인이, 때마침 탁발하러 온 한 노승에게 하소연 하자,
“저 바위를 깨트려 버리면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하므로 그의 말대로 바위를 깨트리니, 그 날부터 손님이 끊어지는 동시에 가세가 기울어져 결국 망해 버리고 말았다 하는데, 그 바위를 깨트릴 때 그 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소세바우는 숲안에 있는 바위로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부자가 매일 같이 찾아드는 손님이 귀찮아 그 바위를 깨뜨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솟대
마을 당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둔 솟대이다. 따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송정보(松亭洑)[보]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 솔졍지보라 하고 상수남리에 있는 보(洑)라 했다.
쇠목 [마을]
마을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 우항리를 일컫던 원래 지명이다.
쇠목강[강]
쇠목 앞으로 흐르는 강을 일컫는 지명이다. 원래는 하대로 쪽으로 강이 흘렀는데 이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쇠목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어서 쇠목강이라 했다.
쇠목소[웅덩이]
쇠목강이 흐르면서 만들었던 소(沼)이다. 소세바위 바로 옆이었다. 물웅덩이가 커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뛰어내리면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소가 물을 먹어야 하니 생긴 웅덩이라 했다. 지금은 없다.
숲안[마을]
쇠목 동쪽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시낭골[골]
공동산, 곧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이다. 시낭골은 공동묘지가 있어서 이 동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 무덤을 썼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면서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에 곳집[화채간]이 있어서 상여를 보관했는데, 너무 멀다고 해서 버덩으로 옮겼었다. 버덩에서는 돌을 주워 쌓아서 곳집을 만들고 행상을 보관했었다. 그러다가 지금 정화조 있는 곳으로 곳집을 옮겨 짓고 행상을 보관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가고 병원에서 죽으면 영안실로 가서 장례를 치르기에 곳집의 기능이 없어져서 약 20년 전 불을 해서 태웠다.
연못
소세바위 바로 앞으로 있던 연못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했는데, 꽤 큰 연못이 있어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소세바위 아래는 꽤 깊어서 아이들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더위를 식혔다. 연못에 대한 이름은 있었으나 현재 아는 사람이 없다. 소가 먹는 물처럼 인식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벼락이 쳐서 바위를 깨뜨릴 때 소머리 바위의 일부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우시장터
성황당 앞 농토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이 몇 번 열렸다.
장터
우항 장(場)이 서던 곳이다.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횡성과 가까워져 우항엔 장이 서지 않는다. 우항마을 길가 가운데로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가 있다.
진고개 [고개]
우항1리와 양적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예전에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또 예전에 고개가 높고 땅이 질었다.
총독골[골]
청독골. 쇠목에 있는 골짜기이다. 쇠목마을 뒤에 있는 가마봉의 골짜기이다. 빙둘러 가마봉의 산언저리가 감싸고 있다. 골짜기 안에는 밭이 있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홍살문
성황당 앞에 세워 놓은 홍살문이다. 성황당으로 부정한 귀것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세웠다. 마을전통숲을 새로 정비하면서 함께 만들었다. 마을제사를 지낼 때 금줄을 치기도 한다.
황소상[조형물]
우항리에 문화마을을 만들고 기념으로 세운 조형물이다. 황소상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이곳 우천문화마을은 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쾌적한 전원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추진된 사업이다. 이제는 애향심과 단결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드높은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더욱 더 큰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그 의지의 다짐으로 주민의 뜻을 모아 이 지역의 표상인 화소상을 세운다. 1994.6.30.”
[우항2리]
거북바위[바위]
우항리 수재울 냇가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는 거북의 머리 방향에 따라 그 지역의 부귀공명이 죄우된다는 전설이 있다. 주민들은 서로 자기네 마을이 잘 되기만을 바란 탓에 수시로 거북바위의 머리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러자 이 마을에 살던 임수학이라는 사람이 몰래 이 바위를 땅에 파묻었다. 그 후부터 거북바위는 자취를 감추었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구융골 [골]
백달리 역골 전에 있는 골짜기다. 골 형태가 소 구유처럼 생겼다. 작은구융골과 큰구융골이 있다.
네덜란드기념비[비]
우천면 새말 인터체인지 부근에 있으며, 5.25한국전쟁 때 참전해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한 네덜란드 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5년 국방부가 세운 것으로,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 모양의 기념비와 오우덴 중령의 뜻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있다. 기념비 주변은 잔디밭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사방 전망이 좋아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횡성군지<증보판>)
한국동란 참전국가에 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방부에서 건립한 ‘네덜란드 참전기념비’는 우천면 우항리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에 소재한 횡성군의 전적지 명소 중의 하니이다.
이 비는 전국에 산재한 참전 16개국의 기념비 중 하나로 1975년 3월 25일에서 9월 27일까지 국방부가 건립 제막하여 1975년 10월 29일 횡성군에 이관 군이 관리하고 있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거대한 풍차모양을 하고 있는 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네덜란드군이 횡성을 중심으로 가장 격렬하게 활약하였고 또한 횡성전투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룬 바 있어서 그 의미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며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관광객이 참배하고 네덜란드 관광객이 필히 참배하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충성과 용기를 신조로 삼는 ‘오랜지공’의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 피를 흘린 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
참전약사는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군은 1950년 십자군으로 파견되어 용전분투하다가 육군은 1954년 10월 18일, 해군은 1955년 1월 24일 각각 본국으로 개성한 군대이다.
여기 여러 유엔 회원국 국민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의 이름을 새긴다.”(횡성군지<증보판>)
노적봉 [산]
구융골 옆에 있는 산이다. 봉우리가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대미원천 [하천]
마을을 가로 지르는 하천이다. 현재의 상대리와 하대리를 예전엔 상대미원리, 하대미원리라 불렀다.
돌턱거리 [터]
주막거리. 돌터거리. 모란가기 전에 있는 터이다. 예전엔 이곳으로 물이 흐르고 반석이 있어서 놀기도 좋았으며 서낭당도 있었다. 돌이 많았다. 주막이 있던 곳이라 주막거리라고도 한다.
면화버덩 [들]
우항1리 위에 위치한 들이다. 예전에 목화를 많이 심었다.
모내 [마을] → 모란
모란 [마을]
모내. 우내. 우항2리 6반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둔내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별신을 치렀는데 이때 씨름, 화투 등도 했다고 한다. 마을에 못이 있어서 물안이라고 했는데 변해서 모란이라고 한다. 또 모롱이 진 곳에 마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내(隅內)’라고도 한다.
못골 [골]
물언지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물언지 [마을]
물언지(勿言之). 경로당이 있는 마을로 우항2리 3, 4반에 해당된다. 쇠목 동쪽에 있다. 물이 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매화산 호랑이가 이곳에서 사람을 물어서 쇠호랭이에서 먹었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는 물언지(勿言之)를 한자로 쓰고, 쇠목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고, 매화산(梅花山) 호랑이가 와서 인명(人命) 및 가축(家畜)을 물어갔다 했다.
살구촌 [마을]
물언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살구나무가 많았다.
삼마곡 [골] → 삼밭골
삼밭골 [골]
삼마곡. 수재울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삼을 많이 했다. ‘삼마곡’이라고도 한다.
상수남리 [마을]
우항1,2리를 가리키는 옛 마을명이다.
새말 [마을]
신촌(新村). 오원1리 밑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나중에 새로 생겼다. 또는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서 ‘새말땀’ 또는 ‘신촌’이라고도 한다. 우항2리 6반에 해당된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가 있다.
새말땀 [마을] → 새말
수재곡 [마을] → 수재울
수재울 [마을]
수재골, 수재곡(守財谷). 우항2리 1,2반에 속하는 마을이다. 새말 휴게소 주위 마을과 앞의 마을이 이에 속한다. 6.25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두루미가 많이 서식했는데, 이 두루미들이 길조(吉鳥)여서 마을의 재물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시랑골[골]
수재울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촌 [마을] → 새말
역골[골]
역곡(驛谷). 수재울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우내(隅內) [마을] → 모란
율목정 [터]
경로당 부근이다. 밤나무가 많았다.
자월 [골]
수재울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위에 있는 골은 웃자월 아래에 있는 골은 아랫자월이라 한다.
횡성의 지명유래에서 우항리(牛項里)는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쇠목, 우항(牛項)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재울, 물언지, 모란, 새발을 병합하여 무네미 위쪽이 되므로 ‘상수남리(上水南里)’라하다가 1940년에 현재의 우항리로 고쳤다.(횡성의 지명유래)
역사에 빛나는 횡성의 인물에서는 우항리(牛項里)를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했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우항리는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 부르는데 우항 시장(市場) 앞에 있는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상인데 그 중 소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쇠목 즉, 우항이라 한다.
본래는 상수남리(上水南里)였으며 우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수재울, 물언치, 모란, 새말 등을 합하여 상수남리라 하였다가 그 후 우항으로 고쳤다.(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우항1리]
가마봉 [산]
양적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산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우항리 남쪽에 있다.(횡성의 지명유래) 우항리 마을 뒤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듯한 산이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가마봉은 “우항리 남쪽에 있는 산. 가마처럼 생겼음. ‘가마’는 ‘솥[鼎], 가마[釜]’의 뜻과 ‘곰[熊]’의 고대어 ‘고마’와 연관된 두 예가 있다. ‘곰’은 원시사상과 연관되어 ‘신성스러운 곳이나 사물’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때 ‘고마[곰]’는 신(神)을 뜻하는 우리의 고유어이기도 하다. 우천면민이 매년 해맞이 행사를 여기서 하는 사연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옛날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든가 산신제를 지냈을 수도 있고, 마을사람들이 신이 기거하는 산이란 뜻에서 가마봉이라 불렀을 수도 이다. 해발 280.8m이다. 산 뒤에는 우천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 위에서보면 우항리와 대미원천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현재 이곳에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를 하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우천면민이 모두 참여하는 해맞이 축제이다.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제단 앞에는 “우천면민의 和合․繁榮”이라 음각해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모서리에는 “건립 2013.11.25. 우천면장 번영회장”이라 하여 건립주체와 연도를 새겨 놓았다. 제단 앞뒤로 향로를 올려놓는 향단(香壇)이 있다.
공동산[공동묘지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어서 공동산이라 했다. 2농공단지 넘어가는 길이 있는 고개 밑이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며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이곳에 곳집이 있었다.
구룡천(九龍川)[개울]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천명(川名)이라 했다.
당숲[성황숲]
성황숲, 전통마을 숲. 쇠목의 성황당이 있는 숲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소나무가 꽤 많이 있어 울창한 숲을 이뤘다. 지금도 성황당 주변과 정자 옆으로 소나무가 있다. 이 숲은 마을에서 복원을 하였는데, 우항리 전통마을 숲이라 하여 “이 마을 숲은 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계승 및 발전시켜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며, 토속문화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복원한 숲입니다.”라고 안내판에 써 놨다. 그러면서 서낭당과 솟대와 홍살문을 그려 놓았다.
당숲에는 말처럼 생긴 나무가 있어서 아이들이 그 나무를 말이라면서 올라가서 타고 놀았다.
당숲은 우항리 마을 가마봉과 연결된 산자락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쇠목의 목 부분을 뚫어 길을 내고, 가마봉 아래서 길까지의 부분은 밭으로 개간했다. 산자락이 이어졌을 때는 당숲까지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한다.
문화마을 [마을]
정부시책에 의해 현대식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다. 1994년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매입하여 분할 측량하여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여 현대식으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때 주택은 55동으로 각 88평이었다. 상가는 8동을 만들었다.
방이평(芳伊坪)[평야]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평야라 했다.
4H표석
당숲 앞 솟대 옆에 있는 시멘트로 찍어 만든 4H표석이다. 녹색 토끼풀(네 잎 클로버) 그림에 지덕노체라고 쓴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아랫부분에 희미하게 우항리 무슨 회라고 녹색과 검은색으로 쓴 글씨가 있는데 잘 읽을 수가 없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설립된 청소년 단체인데 우리나라에는 1954년 11월에 처음 설립되었다. 네 개의 H(머리(Head), 마음(Heart), 건강(Health), 손(Hands))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표상한다.
상수남주막(上水南酒幕)[주막]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는 ‘돌ᄯᅥ거리쥬막’이라 하였다.
성황당[당집]
쇠목성황당. 쇠목서낭당. 당숲 끝 소세바위 옆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원래 이곳은 산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산을 깎아 길을 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 목줄을 끊었다고 이야기 했다. 가마봉의 산이 당숲의 성황당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호랑이가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황당의 신은 덕고산성황신이다. 성황당 안 위패에 그렇게 써 놓았다. 예전에는 유사가 날을 받아서 성황당고사를 지냈다. 날이 나오면 술을 해서 성황당 옆에 묻어두었다가 고사를 지낼 때 꺼내서 신께 올리고, 마을사람들이 음복을 했다. 그때 제당이 볏짚으로 만들어졌었다. 그걸 김영철 씨와 고종태 씨가 지금과 같이 당집을 새로 지었다. 지금은 음력 1월 3일에 성황제를 올린다. 유사도 따로 정하지 않고 당연직으로 이장이 한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아서 올렸으나 지금은 돼지머리를 사서 제물로 쓴다. 떡시루 메 등을 진설한다.
하대리에는 당을 없애고 나자 갑자기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 자살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목맨 사람이 대여섯 명 된다고 했다.
우항리에서는 성황제를 지내면서 마을사람들이 술을 안 먹는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도 노인들도 술을 잘 안 먹는다고 한다. 음주가 없어졌다면서 “그거 한 가지는 좋아.”라고 했다.
소세바우 [바위]
쇠바위. 서낭당 밑에 있는 바위이다. 소의 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원 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매일 찾아드는 손님에 귀찮음을 느낀 부인이, 때마침 탁발하러 온 한 노승에게 하소연 하자,
“저 바위를 깨트려 버리면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하므로 그의 말대로 바위를 깨트리니, 그 날부터 손님이 끊어지는 동시에 가세가 기울어져 결국 망해 버리고 말았다 하는데, 그 바위를 깨트릴 때 그 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소세바우는 숲안에 있는 바위로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부자가 매일 같이 찾아드는 손님이 귀찮아 그 바위를 깨뜨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솟대
마을 당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둔 솟대이다. 따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송정보(松亭洑)[보]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 솔졍지보라 하고 상수남리에 있는 보(洑)라 했다.
쇠목 [마을]
마을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 우항리를 일컫던 원래 지명이다.
쇠목강[강]
쇠목 앞으로 흐르는 강을 일컫는 지명이다. 원래는 하대로 쪽으로 강이 흘렀는데 이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쇠목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어서 쇠목강이라 했다.
쇠목소[웅덩이]
쇠목강이 흐르면서 만들었던 소(沼)이다. 소세바위 바로 옆이었다. 물웅덩이가 커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뛰어내리면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소가 물을 먹어야 하니 생긴 웅덩이라 했다. 지금은 없다.
숲안[마을]
쇠목 동쪽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시낭골[골]
공동산, 곧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이다. 시낭골은 공동묘지가 있어서 이 동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 무덤을 썼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면서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에 곳집[화채간]이 있어서 상여를 보관했는데, 너무 멀다고 해서 버덩으로 옮겼었다. 버덩에서는 돌을 주워 쌓아서 곳집을 만들고 행상을 보관했었다. 그러다가 지금 정화조 있는 곳으로 곳집을 옮겨 짓고 행상을 보관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가고 병원에서 죽으면 영안실로 가서 장례를 치르기에 곳집의 기능이 없어져서 약 20년 전 불을 해서 태웠다.
연못
소세바위 바로 앞으로 있던 연못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했는데, 꽤 큰 연못이 있어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소세바위 아래는 꽤 깊어서 아이들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더위를 식혔다. 연못에 대한 이름은 있었으나 현재 아는 사람이 없다. 소가 먹는 물처럼 인식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벼락이 쳐서 바위를 깨뜨릴 때 소머리 바위의 일부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우시장터
성황당 앞 농토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이 몇 번 열렸다.
장터
우항 장(場)이 서던 곳이다.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횡성과 가까워져 우항엔 장이 서지 않는다. 우항마을 길가 가운데로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가 있다.
진고개 [고개]
우항1리와 양적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예전에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또 예전에 고개가 높고 땅이 질었다.
총독골[골]
청독골. 쇠목에 있는 골짜기이다. 쇠목마을 뒤에 있는 가마봉의 골짜기이다. 빙둘러 가마봉의 산언저리가 감싸고 있다. 골짜기 안에는 밭이 있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홍살문
성황당 앞에 세워 놓은 홍살문이다. 성황당으로 부정한 귀것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세웠다. 마을전통숲을 새로 정비하면서 함께 만들었다. 마을제사를 지낼 때 금줄을 치기도 한다.
황소상[조형물]
우항리에 문화마을을 만들고 기념으로 세운 조형물이다. 황소상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이곳 우천문화마을은 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쾌적한 전원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추진된 사업이다. 이제는 애향심과 단결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드높은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더욱 더 큰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그 의지의 다짐으로 주민의 뜻을 모아 이 지역의 표상인 화소상을 세운다. 1994.6.30.”
[우항2리]
거북바위[바위]
우항리 수재울 냇가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는 거북의 머리 방향에 따라 그 지역의 부귀공명이 죄우된다는 전설이 있다. 주민들은 서로 자기네 마을이 잘 되기만을 바란 탓에 수시로 거북바위의 머리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러자 이 마을에 살던 임수학이라는 사람이 몰래 이 바위를 땅에 파묻었다. 그 후부터 거북바위는 자취를 감추었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구융골 [골]
백달리 역골 전에 있는 골짜기다. 골 형태가 소 구유처럼 생겼다. 작은구융골과 큰구융골이 있다.
네덜란드기념비[비]
우천면 새말 인터체인지 부근에 있으며, 5.25한국전쟁 때 참전해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한 네덜란드 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5년 국방부가 세운 것으로,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 모양의 기념비와 오우덴 중령의 뜻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있다. 기념비 주변은 잔디밭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사방 전망이 좋아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횡성군지<증보판>)
한국동란 참전국가에 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방부에서 건립한 ‘네덜란드 참전기념비’는 우천면 우항리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에 소재한 횡성군의 전적지 명소 중의 하니이다.
이 비는 전국에 산재한 참전 16개국의 기념비 중 하나로 1975년 3월 25일에서 9월 27일까지 국방부가 건립 제막하여 1975년 10월 29일 횡성군에 이관 군이 관리하고 있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거대한 풍차모양을 하고 있는 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네덜란드군이 횡성을 중심으로 가장 격렬하게 활약하였고 또한 횡성전투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룬 바 있어서 그 의미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며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관광객이 참배하고 네덜란드 관광객이 필히 참배하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충성과 용기를 신조로 삼는 ‘오랜지공’의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 피를 흘린 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
참전약사는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군은 1950년 십자군으로 파견되어 용전분투하다가 육군은 1954년 10월 18일, 해군은 1955년 1월 24일 각각 본국으로 개성한 군대이다.
여기 여러 유엔 회원국 국민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의 이름을 새긴다.”(횡성군지<증보판>)
노적봉 [산]
구융골 옆에 있는 산이다. 봉우리가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대미원천 [하천]
마을을 가로 지르는 하천이다. 현재의 상대리와 하대리를 예전엔 상대미원리, 하대미원리라 불렀다.
돌턱거리 [터]
주막거리. 돌터거리. 모란가기 전에 있는 터이다. 예전엔 이곳으로 물이 흐르고 반석이 있어서 놀기도 좋았으며 서낭당도 있었다. 돌이 많았다. 주막이 있던 곳이라 주막거리라고도 한다.
면화버덩 [들]
우항1리 위에 위치한 들이다. 예전에 목화를 많이 심었다.
모내 [마을] → 모란
모란 [마을]
모내. 우내. 우항2리 6반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둔내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별신을 치렀는데 이때 씨름, 화투 등도 했다고 한다. 마을에 못이 있어서 물안이라고 했는데 변해서 모란이라고 한다. 또 모롱이 진 곳에 마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내(隅內)’라고도 한다.
못골 [골]
물언지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물언지 [마을]
물언지(勿言之). 경로당이 있는 마을로 우항2리 3, 4반에 해당된다. 쇠목 동쪽에 있다. 물이 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매화산 호랑이가 이곳에서 사람을 물어서 쇠호랭이에서 먹었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는 물언지(勿言之)를 한자로 쓰고, 쇠목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고, 매화산(梅花山) 호랑이가 와서 인명(人命) 및 가축(家畜)을 물어갔다 했다.
살구촌 [마을]
물언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살구나무가 많았다.
삼마곡 [골] → 삼밭골
삼밭골 [골]
삼마곡. 수재울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삼을 많이 했다. ‘삼마곡’이라고도 한다.
상수남리 [마을]
우항1,2리를 가리키는 옛 마을명이다.
새말 [마을]
신촌(新村). 오원1리 밑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나중에 새로 생겼다. 또는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서 ‘새말땀’ 또는 ‘신촌’이라고도 한다. 우항2리 6반에 해당된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가 있다.
새말땀 [마을] → 새말
수재곡 [마을] → 수재울
수재울 [마을]
수재골, 수재곡(守財谷). 우항2리 1,2반에 속하는 마을이다. 새말 휴게소 주위 마을과 앞의 마을이 이에 속한다. 6.25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두루미가 많이 서식했는데, 이 두루미들이 길조(吉鳥)여서 마을의 재물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시랑골[골]
수재울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촌 [마을] → 새말
역골[골]
역곡(驛谷). 수재울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우내(隅內) [마을] → 모란
율목정 [터]
경로당 부근이다. 밤나무가 많았다.
자월 [골]
수재울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위에 있는 골은 웃자월 아래에 있는 골은 아랫자월이라 한다.
횡성의 지명유래에서 우항리(牛項里)는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쇠목, 우항(牛項)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재울, 물언지, 모란, 새발을 병합하여 무네미 위쪽이 되므로 ‘상수남리(上水南里)’라하다가 1940년에 현재의 우항리로 고쳤다.(횡성의 지명유래)
역사에 빛나는 횡성의 인물에서는 우항리(牛項里)를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했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우항리는 쇠목 또는 ‘소목’이라고 부르는데 우항 시장(市場) 앞에 있는 산의 모양이 소가 드러누운 형상인데 그 중 소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쇠목 즉, 우항이라 한다.
본래는 상수남리(上水南里)였으며 우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수재울, 물언치, 모란, 새말 등을 합하여 상수남리라 하였다가 그 후 우항으로 고쳤다.(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우항1리]
가마봉 [산]
양적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산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우항리 남쪽에 있다.(횡성의 지명유래) 우항리 마을 뒤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듯한 산이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가마봉은 “우항리 남쪽에 있는 산. 가마처럼 생겼음. ‘가마’는 ‘솥[鼎], 가마[釜]’의 뜻과 ‘곰[熊]’의 고대어 ‘고마’와 연관된 두 예가 있다. ‘곰’은 원시사상과 연관되어 ‘신성스러운 곳이나 사물’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때 ‘고마[곰]’는 신(神)을 뜻하는 우리의 고유어이기도 하다. 우천면민이 매년 해맞이 행사를 여기서 하는 사연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옛날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든가 산신제를 지냈을 수도 있고, 마을사람들이 신이 기거하는 산이란 뜻에서 가마봉이라 불렀을 수도 이다. 해발 280.8m이다. 산 뒤에는 우천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 위에서보면 우항리와 대미원천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현재 이곳에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를 하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우천면민이 모두 참여하는 해맞이 축제이다.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제단 앞에는 “우천면민의 和合․繁榮”이라 음각해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모서리에는 “건립 2013.11.25. 우천면장 번영회장”이라 하여 건립주체와 연도를 새겨 놓았다. 제단 앞뒤로 향로를 올려놓는 향단(香壇)이 있다.
공동산[공동묘지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어서 공동산이라 했다. 2농공단지 넘어가는 길이 있는 고개 밑이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며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이곳에 곳집이 있었다.
구룡천(九龍川)[개울]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천명(川名)이라 했다.
당숲[성황숲]
성황숲, 전통마을 숲. 쇠목의 성황당이 있는 숲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소나무가 꽤 많이 있어 울창한 숲을 이뤘다. 지금도 성황당 주변과 정자 옆으로 소나무가 있다. 이 숲은 마을에서 복원을 하였는데, 우항리 전통마을 숲이라 하여 “이 마을 숲은 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계승 및 발전시켜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며, 토속문화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복원한 숲입니다.”라고 안내판에 써 놨다. 그러면서 서낭당과 솟대와 홍살문을 그려 놓았다.
당숲에는 말처럼 생긴 나무가 있어서 아이들이 그 나무를 말이라면서 올라가서 타고 놀았다.
당숲은 우항리 마을 가마봉과 연결된 산자락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쇠목의 목 부분을 뚫어 길을 내고, 가마봉 아래서 길까지의 부분은 밭으로 개간했다. 산자락이 이어졌을 때는 당숲까지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한다.
문화마을 [마을]
정부시책에 의해 현대식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다. 1994년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매입하여 분할 측량하여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여 현대식으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때 주택은 55동으로 각 88평이었다. 상가는 8동을 만들었다.
방이평(芳伊坪)[평야]
조선지지자료에 상수남리에 있는 평야라 했다.
4H표석
당숲 앞 솟대 옆에 있는 시멘트로 찍어 만든 4H표석이다. 녹색 토끼풀(네 잎 클로버) 그림에 지덕노체라고 쓴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아랫부분에 희미하게 우항리 무슨 회라고 녹색과 검은색으로 쓴 글씨가 있는데 잘 읽을 수가 없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설립된 청소년 단체인데 우리나라에는 1954년 11월에 처음 설립되었다. 네 개의 H(머리(Head), 마음(Heart), 건강(Health), 손(Hands))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표상한다.
상수남주막(上水南酒幕)[주막]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는 ‘돌ᄯᅥ거리쥬막’이라 하였다.
성황당[당집]
쇠목성황당. 쇠목서낭당. 당숲 끝 소세바위 옆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원래 이곳은 산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산을 깎아 길을 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 목줄을 끊었다고 이야기 했다. 가마봉의 산이 당숲의 성황당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호랑이가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황당의 신은 덕고산성황신이다. 성황당 안 위패에 그렇게 써 놓았다. 예전에는 유사가 날을 받아서 성황당고사를 지냈다. 날이 나오면 술을 해서 성황당 옆에 묻어두었다가 고사를 지낼 때 꺼내서 신께 올리고, 마을사람들이 음복을 했다. 그때 제당이 볏짚으로 만들어졌었다. 그걸 김영철 씨와 고종태 씨가 지금과 같이 당집을 새로 지었다. 지금은 음력 1월 3일에 성황제를 올린다. 유사도 따로 정하지 않고 당연직으로 이장이 한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아서 올렸으나 지금은 돼지머리를 사서 제물로 쓴다. 떡시루 메 등을 진설한다.
하대리에는 당을 없애고 나자 갑자기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 자살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목맨 사람이 대여섯 명 된다고 했다.
우항리에서는 성황제를 지내면서 마을사람들이 술을 안 먹는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도 노인들도 술을 잘 안 먹는다고 한다. 음주가 없어졌다면서 “그거 한 가지는 좋아.”라고 했다.
소세바우 [바위]
쇠바위. 서낭당 밑에 있는 바위이다. 소의 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원 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매일 찾아드는 손님에 귀찮음을 느낀 부인이, 때마침 탁발하러 온 한 노승에게 하소연 하자,
“저 바위를 깨트려 버리면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하므로 그의 말대로 바위를 깨트리니, 그 날부터 손님이 끊어지는 동시에 가세가 기울어져 결국 망해 버리고 말았다 하는데, 그 바위를 깨트릴 때 그 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소세바우는 숲안에 있는 바위로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부자가 매일 같이 찾아드는 손님이 귀찮아 그 바위를 깨뜨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솟대
마을 당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둔 솟대이다. 따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송정보(松亭洑)[보]
조선지지자료에 한글로 솔졍지보라 하고 상수남리에 있는 보(洑)라 했다.
쇠목 [마을]
마을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다. 우항리를 일컫던 원래 지명이다.
쇠목강[강]
쇠목 앞으로 흐르는 강을 일컫는 지명이다. 원래는 하대로 쪽으로 강이 흘렀는데 이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쇠목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어서 쇠목강이라 했다.
쇠목소[웅덩이]
쇠목강이 흐르면서 만들었던 소(沼)이다. 소세바위 바로 옆이었다. 물웅덩이가 커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뛰어내리면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소가 물을 먹어야 하니 생긴 웅덩이라 했다. 지금은 없다.
숲안[마을]
쇠목 동쪽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시낭골[골]
공동산, 곧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이다. 시낭골은 공동묘지가 있어서 이 동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 무덤을 썼다. 2농공단지로 가는 길을 내면서 공동묘지가 많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에 곳집[화채간]이 있어서 상여를 보관했는데, 너무 멀다고 해서 버덩으로 옮겼었다. 버덩에서는 돌을 주워 쌓아서 곳집을 만들고 행상을 보관했었다. 그러다가 지금 정화조 있는 곳으로 곳집을 옮겨 짓고 행상을 보관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가고 병원에서 죽으면 영안실로 가서 장례를 치르기에 곳집의 기능이 없어져서 약 20년 전 불을 해서 태웠다.
연못
소세바위 바로 앞으로 있던 연못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했는데, 꽤 큰 연못이 있어서 아이들이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소세바위 아래는 꽤 깊어서 아이들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더위를 식혔다. 연못에 대한 이름은 있었으나 현재 아는 사람이 없다. 소가 먹는 물처럼 인식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벼락이 쳐서 바위를 깨뜨릴 때 소머리 바위의 일부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우시장터
성황당 앞 농토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이 몇 번 열렸다.
장터
우항 장(場)이 서던 곳이다.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횡성과 가까워져 우항엔 장이 서지 않는다. 우항마을 길가 가운데로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가 있다.
진고개 [고개]
우항1리와 양적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예전에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또 예전에 고개가 높고 땅이 질었다.
총독골[골]
청독골. 쇠목에 있는 골짜기이다. 쇠목마을 뒤에 있는 가마봉의 골짜기이다. 빙둘러 가마봉의 산언저리가 감싸고 있다. 골짜기 안에는 밭이 있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홍살문
성황당 앞에 세워 놓은 홍살문이다. 성황당으로 부정한 귀것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세웠다. 마을전통숲을 새로 정비하면서 함께 만들었다. 마을제사를 지낼 때 금줄을 치기도 한다.
황소상[조형물]
우항리에 문화마을을 만들고 기념으로 세운 조형물이다. 황소상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이곳 우천문화마을은 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쾌적한 전원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추진된 사업이다. 이제는 애향심과 단결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드높은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더욱 더 큰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그 의지의 다짐으로 주민의 뜻을 모아 이 지역의 표상인 화소상을 세운다. 1994.6.30.”
[우항2리]
거북바위[바위]
우항리 수재울 냇가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는 거북의 머리 방향에 따라 그 지역의 부귀공명이 죄우된다는 전설이 있다. 주민들은 서로 자기네 마을이 잘 되기만을 바란 탓에 수시로 거북바위의 머리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러자 이 마을에 살던 임수학이라는 사람이 몰래 이 바위를 땅에 파묻었다. 그 후부터 거북바위는 자취를 감추었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구융골 [골]
백달리 역골 전에 있는 골짜기다. 골 형태가 소 구유처럼 생겼다. 작은구융골과 큰구융골이 있다.
네덜란드기념비[비]
우천면 새말 인터체인지 부근에 있으며, 5.25한국전쟁 때 참전해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한 네덜란드 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5년 국방부가 세운 것으로,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 모양의 기념비와 오우덴 중령의 뜻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있다. 기념비 주변은 잔디밭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사방 전망이 좋아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횡성군지<증보판>)
한국동란 참전국가에 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방부에서 건립한 ‘네덜란드 참전기념비’는 우천면 우항리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에 소재한 횡성군의 전적지 명소 중의 하니이다.
이 비는 전국에 산재한 참전 16개국의 기념비 중 하나로 1975년 3월 25일에서 9월 27일까지 국방부가 건립 제막하여 1975년 10월 29일 횡성군에 이관 군이 관리하고 있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거대한 풍차모양을 하고 있는 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네덜란드군이 횡성을 중심으로 가장 격렬하게 활약하였고 또한 횡성전투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룬 바 있어서 그 의미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며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관광객이 참배하고 네덜란드 관광객이 필히 참배하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충성과 용기를 신조로 삼는 ‘오랜지공’의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 피를 흘린 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
참전약사는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군은 1950년 십자군으로 파견되어 용전분투하다가 육군은 1954년 10월 18일, 해군은 1955년 1월 24일 각각 본국으로 개성한 군대이다.
여기 여러 유엔 회원국 국민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의 이름을 새긴다.”(횡성군지<증보판>)
노적봉 [산]
구융골 옆에 있는 산이다. 봉우리가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대미원천 [하천]
마을을 가로 지르는 하천이다. 현재의 상대리와 하대리를 예전엔 상대미원리, 하대미원리라 불렀다.
돌턱거리 [터]
주막거리. 돌터거리. 모란가기 전에 있는 터이다. 예전엔 이곳으로 물이 흐르고 반석이 있어서 놀기도 좋았으며 서낭당도 있었다. 돌이 많았다. 주막이 있던 곳이라 주막거리라고도 한다.
면화버덩 [들]
우항1리 위에 위치한 들이다. 예전에 목화를 많이 심었다.
모내 [마을] → 모란
모란 [마을]
모내. 우내. 우항2리 6반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예전에 둔내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별신을 치렀는데 이때 씨름, 화투 등도 했다고 한다. 마을에 못이 있어서 물안이라고 했는데 변해서 모란이라고 한다. 또 모롱이 진 곳에 마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내(隅內)’라고도 한다.
못골 [골]
물언지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물언지 [마을]
물언지(勿言之). 경로당이 있는 마을로 우항2리 3, 4반에 해당된다. 쇠목 동쪽에 있다. 물이 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매화산 호랑이가 이곳에서 사람을 물어서 쇠호랭이에서 먹었다고 한다. 횡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는 물언지(勿言之)를 한자로 쓰고, 쇠목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고, 매화산(梅花山) 호랑이가 와서 인명(人命) 및 가축(家畜)을 물어갔다 했다.
살구촌 [마을]
물언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살구나무가 많았다.
삼마곡 [골] → 삼밭골
삼밭골 [골]
삼마곡. 수재울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삼을 많이 했다. ‘삼마곡’이라고도 한다.
상수남리 [마을]
우항1,2리를 가리키는 옛 마을명이다.
새말 [마을]
신촌(新村). 오원1리 밑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나중에 새로 생겼다. 또는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서 ‘새말땀’ 또는 ‘신촌’이라고도 한다. 우항2리 6반에 해당된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가 있다.
새말땀 [마을] → 새말
수재곡 [마을] → 수재울
수재울 [마을]
수재골, 수재곡(守財谷). 우항2리 1,2반에 속하는 마을이다. 새말 휴게소 주위 마을과 앞의 마을이 이에 속한다. 6.25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두루미가 많이 서식했는데, 이 두루미들이 길조(吉鳥)여서 마을의 재물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시랑골[골]
수재울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촌 [마을] → 새말
역골[골]
역곡(驛谷). 수재울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우내(隅內) [마을] → 모란
율목정 [터]
경로당 부근이다. 밤나무가 많았다.
자월 [골]
수재울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위에 있는 골은 웃자월 아래에 있는 골은 아랫자월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