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법계전승(法界傳承)의 전통이 강한 종파이다. 그러므로 전통수호운동이 강력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움직임도 또한 비교적 강하고 민족사회의 전통을 특징적으로 잘 보존시키려는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 그 긍정적인 평가이다. 신라시대의 선은 산문선(山門禪)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의 전통을 수용했으며, 조선시대의 선은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을 지니면서 한국적이고 독자적인 선풍을 전승하였다. 물론 선의 흐름은 정치적인 시대성에 사로잡힌 유약한 사상은 아니었지만, 선의 이념이 시대와 함께 능동적으로 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신라시대(新羅時代) 신라시대의 선을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 초기의 선과는 달리 한국 초기의 선은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신라시대의 초기선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지만, 구산선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선문도 있고 고려시대에 개산되었던 선문(禪門)도 있으므로, 구산선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에 살아남은 산문선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선문은 구산(九山) 이상의 산문이 있었으나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문선의 성격은 신라 선가(禪家)들의 비문을 보면 다양한 선가들이 상호 접촉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에 의하면 '북산의 남악척(北山義 南岳陟)'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북산이란 설악산을 의미하며, 도의(道義)가 가지산에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간 일을 가리킨다. 또한 남악이란 지리산을 가리키며 홍척(洪陟)이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개산하였던 사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도의와 홍척은 함께 신라선의 선각자로서 마조(馬祖)의 제자 서당(西堂)에게 법을 이은 선사였으나 신라선에 미친 영향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신라인은 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경교(經敎)중심주의이며 또한 선을 수행해도 습선(習禪, 觀)에 지나지 않는 맹목적 불교수행이며 미신적 불교신앙이었다. 이러한 종래의 불교에 대한 도의의 비판적 태도는 달마대사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하였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도의도 진전사에서 15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홍척에게는 흥덕왕과 선강(宣康)태자가 파격적으로 제자가 되어 당시 선으로 신라사회에서의 지배적 권위를 가져온 국사(國師)의 호까지 새롭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골품제도가 폐지되고 지방호족제도로 바뀌는 역사적 상황이 홍적을 중심으로 하는 선가의 배경에 맞았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북산의 남악척'의 상이한 방향성은 당시 모든 산문에 영향을 미쳐 두 개의 그룹처럼 되었다. 북산계에서는 사굴산의 범일(梵日)이 '석존의 스승은 진귀조사(眞歸祖師)이다'라고 하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전설을 가지고 선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성주산의 무염(無染)은 교학(敎學)의 '유설토(有舌土)'에 대해서, 선학(禪學)의 '무설토(無舌土)'가 근본적이며 우위의 세계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선 우위사상은 세속을 초탈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선사상은 조선시대의 조사선풍(祖師禪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에 비해 남악계는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시키는 것에 부심하였다. 희양산의 지선은 의양산에 선궁(禪宮)을 구축하는 일을 하고, 또한 동리산의 도선(道詵)은 도참(圖讖)과 위서(緯書)를 가지고 사회에 출현하였다. 또 쌍계산의 혜소는 범패를 실연하는 불교의 대중화를 목표로 한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선과 정치, 선과 사회풍속, 선과 교학을 융화하고 싶다는 융선(融禪)의 움직임은 당시 호족들의 배경이 되고부터 호족의 한 사람이었던 왕건이 성공하고 그 결과 융선사상(融禪思想)이 고려사회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가 되자 송나라의 화엄, 천태의 발달과 함께 선과 교가 상호 대칭관계를 가지고 불교가 전개되었다. 교가 선과 함께 화회(和會)하는 이념은 후삼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선과 교가 회통하는 움직임은 이념통일에 부심했던 의천(義天)이 송나라로부터 천태종을 가지고 고려에 유포하여 송도(松都)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산문선의 승려, 특히 융선계의 선승들을 구했던 때부터이다. 이 움직임은 당시 선승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선계에서도 선의 입장에서 선교화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의 방법에 의한 수행으로 출발하여 다양한 교학을 통해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는 즉 시작과 종착은 선에 의한 방법을 가지고 선교화회의 방도를 구했다. 이상의 선교화회는 각각의 교, 또는 선의 입장에서 선교화회하는 것으로서 자파중심의 화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지눌(知訥)은 각기 입장을 넘어서 진정한 불자의 화회는 자기의 '진심(眞心)'으로 돌아가지 아노으면 안된다는 것을 불자의 첫번째 요건으로 삼았다. 진심으로 돌아가는 제일도(第一道)는 해오(解悟)이며, 그 해오는 혜능(慧能)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사상이었다. 지물은 창평의 청원사(淸原寺)에서 혜능의 <단경>을 보고 크게 깨쳐 어떠한 곳에든 부처님의 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지눌은 대장경 속에서도 성불하는 도를 발견하고 또한 선에 있어서도 대반야(大般若)가 살아 숨쉬는 도를 증득했다. 불법의 생활화라고 하는 도를 경험했던 지눌은 출가 대중이 많은 송광사에 돌아가서 진심의 도를 가르치는 책인 <수심결(修心訣)>을 저작하고 '정혜쌍수'에 의해서 진심을 계발하고 '돈오점수'에 의해서 진심을 함양하는 도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화회의 사상 내용이다. 그런데 이는 일반 대중의 도이었지만 중생의 근기는 다양한데 비해 정혜쌍수하는 도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므로 그 지표를 확실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눌의 전통은 지눌에서부터 16대까지 전해졌지만 그 선교화회하는 사상적 전통은 너무나도 변하기 쉬웠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지눌의 선이 그 제자 혜심에게 전해지자마자 그 내용은 변화하게 되었다. 지눌의 기본사상이었던 화회(和會)사상보다도 지눌사상의 일부분이었던 경절사상(徑截思想)을 궁극적 진리라고 말하면서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해버렸다. 특히 선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고려 말기의 시대사적 사상 조류였다. 이 때문에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이 유행하였다. 조사선의 이론을 전개하는 결정적인 전적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이다. <선문보장록>은 신라의 산문선 중 순선계(純禪系)의 움직임을 제시하면서 선의 우위성을 설명하였다. 특히 사굴산의 범일이 진성왕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설화, 즉 석가의 스승이었던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澈底)시켰다고 하는 전설을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조사성을 강조하는 이론의 암시였다. 여래(如來)의 설은 방편교학(方便敎學)이며 팔만대장경을 전개하였지만 조사의 그것은 설명이 없이 바로 들게 하는 격외선(格外禪)이며 스스로의 깨침만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조사의 밀밀상전(密密相傳)하는 소식(消息)에 의해서 완성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사상은 조선시대의 정수(頂首)였던 서산휴정(西山休靜)의 선교석(禪敎釋)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특히 휴정은 여래의 깨침 이상으로 조사의 밀전(密傳)을 직로(直路)함이 중요하다고 보면서, 경전은 입문하여 선행(禪行)은 구극이라고 하는 의미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도를 설명하였다. 어느날 금강대로 행주(行珠), 유정(惟政), 보정(寶晶)의 3대 제자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가지고 와서 '금강경을 선종의 종지로 삼아야 좋을 지 어떨지'에 대해 물았을 때 휴정은 '석가가 정법안장을 가섭(迦葉)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금강경을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직 못들었다.'고 말하며 반대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또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석가의 교설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휴정은 '팔만대장경을 석가의 교설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으로 변해갔다. 물론 조선시대에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사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사선풍이 강했던 것은 확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