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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입력 2011.09.28 12:40
호수 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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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이혜숙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는 조선일보 논설주간, 조선중앙일보 주필, 서울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경향신문 주필에 초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소문난 항일운동 집안 출신이어서 일제하 신간회 활동을 계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할 때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의 조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국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다.
“일본인들은 건청궁 내전에서 고종과 왕세자인 이척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전으로 여러 명의 일본인이 뛰어들어와 고종의 어깨를 칼로 찌르고 비틀거리는 국왕을 밀치면서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일본인들의 앞에 나타난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건물 문 앞에서 팔을 크게 벌리고 왕비의 어전인 곤령각으로 달려가는 일본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그를 권총으로 쏘아 버렸다. 허리에 총탄을 맞고도 비틀거리면서 복도로 나가는 이경직에게 낭인 히라야마 이와히코가 대각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경직은 땅바닥에 대구루루 굴러떨어져 절명했다.”(‘조선왕조 멸망기’ 가다노 쓰기오)
나라에서 장충단(지금의 장충단공원)을 짓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훈련대 대대장 홍계훈에 제사지내고, 그 앞에 충정공의 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경직의 아들 우규(禹珪)는 순천부사와 비서원 승지를 지낸 후, 일제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교육만이 극일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기호흥학원(중앙고교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우규는 김규근(金珪根)과 결혼하여 4형제를 두었다. 장남 겸구(謙求)는 경성의전을 졸업한 의사로 윤유선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두었다. 겸구의 아들 원복(85·서울대 항공학과 졸업)씨는 대한항공 전무를 지냈으며, 건국대 겸임교수인 최영희(76·한신대 대학원 졸업)씨와 결혼했다. 겸구의 장녀 경숙(작고·경기여고 졸업)씨는 관재청(管財廳) 차장을 지낸 장창진(작고·규슈제대 법과 졸업)씨와 결혼했고, 차녀 재숙(91·경기여고 졸업)씨는 상주지검장을 지낸 이원항(작고·경성법전 졸업)씨와 결혼했으며, 3녀 인숙(작고·배화여고 졸업)씨는 국회의원·주프랑스 대사를 지낸 민병기(작고·시카고대 정치학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이우규의 3남 민구(敏求)는 도쿄제대 경제학부 출신으로 한전 감사, ㈜한국무진회장을 지냈으며, 한효희(작고·경기여고 졸업)씨와 결혼하여 3남4녀를 두었다. 민구의 장남 승복(70·고려대 경제학과 졸업)씨는 한전 처장을 지냈으며, 임향숙(64·경희대 기악과 졸업)씨와 결혼했고, 차남 정복(69·연세대 의대 졸업)씨는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와 대한피부과학회장을 지냈으며 김화식(65·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씨와 결혼했고, 3남 준복(66·서울대 공대 금속학과 졸업, 오하이오대 금속학 박사, 재미)씨는 박성희(60·서울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민구의 장녀 희숙(80·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씨는 미국 사비스 크리스천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서울대 공대와 미국 텍사스대 교수를 지낸 민광식(84·서울대 물리학과, 미네소타대 물리학 박사)씨와 결혼했다. 민구의 차녀 창숙(작고)씨는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고, 3녀 명숙(75·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미국 러시의대 방사선과 교수로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이재남(78·브라운대 영문학과 졸업, 뉴멕시코대 영문학 박사)씨와 결혼했으며, 4녀 정숙(73·이화여대 생물학과 졸업)씨는 이봉기(76·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이우규의 4남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는 한국 전통국악을 현대적 학문방법으로 체계화한 현대국악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서울대에 국악과를 설립하고 국악교육을 스스로 담당하여 우수한 국악 인재들을 배출했다. 만당은 1909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나 14세부터 바이올린을 익혔고,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경성제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취직하여서는 국악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데 공헌했다. 광복 후 중앙방송국 국장대리와 공보부 방송국장을 거쳐, 1970년에는 서울대 음대 학장에 취임하여 1974년 정년 때까지 재임했다. 만당은 송귀남(작고·숙명여고 졸업), 정기영(재취·85·이화여대 가정과 졸업, 행당중 교장 역임)과 결혼하여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창복(77·연세대 의대 졸업)씨는 미국 일리노이대 안과 임상교수를 지냈으며 이은희(75·숙명여대 국문학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만당의 차남 영복(74·연세대 상경대 졸업)씨는 김경옥(70)씨와 결혼했으며, 3남 대복(68·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졸업)씨는 창문여고 교장으로 조유자(67·서울대 음대 성악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만당의 장녀 영숙(79·서울대 약대 졸업)씨는 쌍용양회 중앙연구소장을 지낸 홍성준(84·서울대 화공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였고, 차녀 화숙(71·서울대 약대 졸업)씨는 정태형(75·서울대 상대, 덴버대 경제학 석사)씨와 결혼하였으며, 3녀 영혜(43·이화여대 졸업)씨는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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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규의 차남인 성재 이관구는 1898년 11월 26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20번지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일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4년에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26년에 동 대학원을 수료한다.
이관구는 1914년에 이덕용(李德鎔)과 결혼하여 4남2녀를 두었다. 장남 순복(작고·서울대 사학과 졸업)씨는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으며, 차남 인복(83·미국 루이빌대 건축학과 졸업)씨는 미국에서 건축설계사로 일하며 송정희(79)씨와 결혼했다. 3남 신복(81·일본대 예술학부 졸업, 경희대 정치학 석사)씨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홍성돈(70)씨와 결혼했고, 4남 완복(작고·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씨는 연합통신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관구의 장녀 은숙(작고·서울여의대 졸업, 연세대 의학박사)씨는 연세대 산부인과 교수로, 연세대 병리학 교수를 지낸 이응렬(작고·세브란스의전 졸업, 경도제대 의학박사)씨와 결혼했으며, 차녀 혜숙(76·고려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학박사)씨는 국립의료원 안과의사로 안성도(79·서울고 졸업, 자영업)씨와 결혼했다.
이관구와 수주(樹州) 변영로는 막역한 술친구다. 변영로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관구 부인의 아명을 알아가지고는 이관구 집에 와서 다짜고짜 내실로 통하는 중문에 서서 “야, 시애비 왔으니 술상을 보아 내보내라”고 외친다. 응답이 있을 리 없다. 며칠 뒤 변영로가 다시 이관구의 집을 찾았다.
“사랑에 성재가 있는 기척이 났다. 나는 이에 용기를 얻어 불쑥 들어서니 성재가 나오며 맞이를 하는데 그 표정은 참으로 망연하였다. 나의 내의(來意)를 짐작한 군은 설왕설래에 앞서 나의 입을 막으며, ‘쉬 쉬, 자네가 온 줄 알면 나올 술도 절대로 나올 리 없으니 오늘만은 꿀꺽 소리도 말고 조용히 먹고 가게… ’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재는 안으로 들어가서 딴 손님이 왔다는 군색스럽기 짝이 없는 핑계로 술 한 상이 나왔던 것이다.”(‘명정 40년’ 변영로)
이관구는 1926년 교토제대 경제학부 대학원을 수료한 후 귀국하여 경성제대에서 연구생활을 계속하려 하나, 경성제대는 지도교수 추천장까지 들고간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의 지도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것도 문제가 됐지만, 그가 소문난 항일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관구는 신간회 활동을 계기로 이듬해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보성전문과 이화여전에서 경제사를 강의하던 그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위원 겸 정치부 간사로 임명된다. 신간회 회장직을 맡았던 당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촉망받는 이 젊은이를 눈여겨보다 두 달 후 특채한다. 이관구는 정치부장으로 일하면서 민세 안재홍 등과 함께 사설과 시평을 쓴다. 이즈음 이관구의 회고를 옮긴다.
“나는 1926년 9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간회의 발기와 그 경성지회의 정치부 간사란 책임 지위에 있으면서 조선일보에 들어가 논설반 주간으로서 주필 민세를 도와 날마다 사설·시평·논평을 번갈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의 신문인 생활의 시작이었다.”(월간조선 1985년 4월호 ‘특집 민족지의 거봉들’)
이관구는 입사하자 논설기자로 활기있게 필봉을 휘두른다. 1927년 7월 전북 태인의 동진수리조합 공사장에서 한 일본인 업자가 조선인 인부들의 임금 1만6000여원을 횡령한 사건을 주목한다. 수천 명의 조선인 인부들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농성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충돌했다. 조선인 인부 수십 명을 체포하고 총칼로 위협했다.
이관구는 7월 21일자 ‘동진의 괴사건’이란 시평에서 경찰의 태도를 강력히 비판한다. 그는 “폭양 아래 모진 목숨을 위하여 모은 돈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보니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을 일이랴”면서 “사회의 공안을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책임이 있는 경관이 인부들의 피나는 요구를 채워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인민을 상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수십 명의 검속자를 내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긍치 못할 일”이라고 썼다. 이 시평은 곧바로 압수됐다.(‘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1928년 1월에는 이관구가 집필한 ‘보석 지연의 희생’이라는 사설이 문제가 되어 발행인 겸 주필 안재홍과 편집인 백관수가 수감된다. 이관구는 이 글에서 “그 신문(訊問)·고형(拷刑)·고문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며 또 한편으로 이병(罹病·병에 걸림)한 피고에 대하여 너무나 비인간 대우를 하였음을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생명이 경각에 달린 피고에게 보석의 청원이 누누(屢屢)함에도 불구하고 옥사(獄死)를 볼 때까지 보석을 지연하며 비록 보석이 된다고 하여도 사망, 불구의 결과를 보게 할 심사가 어디 있을까”라고 질타한다. 이 역시 압수됐다. 안재홍과 백관수는 책임을 지고 수감됐지만 이관구는 기소중지 처분을 받아 구속을 면한다. 1928년 5월에는 민세가 쓴 사설 ‘제남사변의 벽상관’ 때문에 안재홍과 함께 구속됐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사설은 압수되고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일제가 이관구를 구속한 것은 그가 정치부장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동안에 쌓인 ‘괘씸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세가 잦은 감옥살이로 자리를 비웠을 때 호암 문일평 동지와 논평을 분담한 일도 있었다. 두 분 동지의 필자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민세는 단숨의 필력으로 사설 한 편을 웅경 대담하게 반 시간 안팎으로 갈겨써 놓는 데 비해 호암은 원고의 일자일언과 문장의 맥락을 다듬고 또 다듬느라고 늘 마감시간에 못 대는 정문파(精文派)였다. 내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민세와 더불어 첫 번째로 중점을 두고 벌인 논평활동은 언론탄압 및 집회금지에 관한 악법의 철폐와 경찰정치의 탄핵이었다.”(‘지조와 관용의 선각자 안재홍’ 이관구 월간조선 1985년 4월호)
이관구는 훗날 “걸핏하면 폭행을 당하고 테러를 당하는 살얼음판에서 민족주의 이론을 굳세게 펴나간 것은 사명감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며 “당시 기자들은 지사적인 데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관구의 쿄토제대 경제학부 시절 지도교수였던 가와카미(河上)는 이름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이관구의 3남 이신복 전 성균관대 교수는 “쿄토제대 경제학부는 사회주의자들의 산실”이라며 “선친께서 일제강점기 때 쓴 논설은 사회주의 성향을 띤 것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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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조카 정복씨, 조카 승복씨, 막내딸 혜숙씨, 조카 대복씨(왼쪽부터).
이관구는 1929년 10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잠시 언론계를 떠난다. 그는 조선일보에 재직한 동안 300여편의 논설과 시평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때 기사는 대부분 무기명이지만 그가 쓴 글은 부인이 스크랩해 보관한 덕분에 온전히 가려낼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은 6·25전쟁 때 피란살이를 하면서도 사설 묶음만은 반드시 지니고 다녔다. 그의 자손들은 이를 기초로 하여 1986년 ‘성재 이관구 논설선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는 1956년 경향신문 사설을 제외한 광복 후의 사설은 누락되어 있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조맹기, 일조각)
이관구는 ‘주선(酒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술을 즐겨 술에 관한 일화도 많다. 변영로는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에 이관구, 염상섭, 오상순과 술에 취해 대낮에 서울 성북동에서 발가벗고 소를 타고 산을 내려온 이야기를 실었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 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똥물(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겼던)을 건너고 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관구는 1932년 10월 조선중앙일보 주필이 돼 1936년 이 신문이 ‘손기정 일장기 사건’으로 폐간될 때까지 근무한다. 그는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백두산 탐험비행기’를 16회 연재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딱딱한 논설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쓴 일반적 탐험기여서 더욱 값진 글로 평가받고 있다.
“여름 한철이면 천자만홍의 고움을 자랑하고, 8800척의 거인의 이마를 현란하게 꾸며 놓은 유명한 꽃밭이 바로 여기련만 이제는 백설이 이를 덮어 눈부시게 아침 햇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덧 우리는 망망하게 넓고 넓은 수해(樹海) 위로 나왔는데 저쪽 맞은편에 불쑥 솟은 허연 그림자가 저 유명한 백두산이 아닌가?”
광복 후 그는 서울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합동통신 부사장 겸 고문을 맡아 해방공간의 언론을 주도한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은 일제 관영지였던 매일신문을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코리아타임스를 창간한 경험이 있는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하경덕에게 신문 창간 작업을 맡기며, 하경덕은 이관구를 끌어들여 인선작업을 한다. ‘서울신문 100년사’는 이관구에게 인선작업을 맡긴 이유로 “성재가 과거 신간회에도 참여함으로써 좌우 양쪽에서 무난히 수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관구는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하고 또 적확한 보도’를 강조한다. 그는 사설을 통해 이 신문은 당파들의 대변지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민족총력의 집결통일과 독립완성’을 위한 ‘민주주의적 결사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관구가 해방정국기에 기여한 것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1946년 3월 20일까지 가장 큰 신문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한 것이다. 그 당시 한반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항은 신탁통치 찬반논쟁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은 한반도 분단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때 이관구는 신문 논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이관구는 1946년 5월 미군정청이 김규식·여운형 등 온건한 좌우 양 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만든 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선임된다. 그 후 성균관대학 경제학 교수를 지내다가 1952년부터 경향신문 주필을 맡으며, 초대 한국신문인협회 회장에 선임돼 반독재언론투쟁에 앞장선다. 경향신문 주필 시절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을 많이 써서 ‘솜으로 싼 바늘’이란 평을 들었다. 급기야는 주요한이 집필한 칼럼 ‘여적(餘滴)’사건으로 1959년에 폐간된 경향신문은 4·19혁명 이후에야 복간된다.
4·19혁명 후 이관구는 서울일일신문 사장을 맡았고,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재건국민운동본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5월 19일 서울 도봉구 수유3동 134의 43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천안시 목천면 도장리 선영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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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성재 이관구 조맹기 서강대 언론대학원 교수 성재 이관구는 일제 때 신간회 창립에 참여한 풍토적 국사 언론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진보적 글을 쓰고 광복 이후에는 우파로 활동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서울신문 재직 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던 여운형을 서울신문에 자주 등장시켰다. 그러나 그와 깊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해방정국이 끝나자 서울신문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로 그 영향력이 이전되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해방정국의 격동기에 좌우를 수용하려고 노력한 유일한 신문이었다. 당시 서울신문은 좌 또는 우의 정론지만이 득세하는 좌우격돌 시대에 불편부당의 중립을 유지하려 한 권위지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풍토적 국사 언론인으로서 좌우를 조화롭게 아우르는 성재 이관구의 노력이 있었다. 성재는 입법의원으로서도 이러한 임무를 더욱 충실히 이행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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