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23일, 일본 오사카돔에서 벌어진 한 대결에 한국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바로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과 ‘야수’ 밥 샙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최홍만의 승리. 한국 씨름과 미식축구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링에서 맞붙는다는 의외성에 더 관심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종격투기가 성행하는 요즘, 고유영역을 넘어선 이색적인 대결이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니다. 사브와 폭스바겐의 경쟁 역시 얼마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9-3과 파사트의 대결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시장 환경과 모델의 성격이 변했다. 스칸디나비아 태생으로 매니아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아 온 9-3(옛 900)과 폭스바겐 기함이면서 패밀리 세단이었던 파사트가 최신 디젤 엔진으로 무장하고 한국땅에서 맞붙었다.
9-3 TiD 스칸디나비아 감성의 독특한 디자인과 강력한 터보 엔진으로 상징되던 사브 900은 매니아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온 프리미엄 콤팩트 세단이다. 이런 900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90년 GM이 사브를 인수하면서다. GM은 플랫폼을 오펠 벡트라와 통합하는 한편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99년 마이너 체인지하면서 9-3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3년 벡트라용 입실론 플랫폼을 사용한 2세대를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메이커에 팔린 사브와 볼보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기존 이미지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점은 같았으나 볼보는 스포티한 이미지로의 변신에 성공한데 반해 사브는 GM스러워졌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볼보의 P2X 플랫폼은 우수한 성능으로 포드 차기모델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GM은 다른 브랜드 차에 사브 이름을 붙여 팔기에 바쁜 모습이다. 스바루 임프레자와 시보레 트레일블레이저를 손봐 9-2X, 9-7X 배지를 붙인 것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스바루 지분 매각으로 차기 9-2X 계획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만큼 9-3은 더더욱 사브의 자존심을 지켜 나가야 하지만 이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최근 GM은 오펠 아스트라 세단형을 새턴의 차기모델로 결정했다. 이는 GM의 저가 브랜드 새턴과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 사브가 같은 플랫폼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멋진 스타일과 강력한 초반 가속 배경이 어찌되었든 9-3의 디자인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독일차 느낌이 강하지만 헤드램프와 그릴에는 900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루프라인에서 C필러로 넘어가는 매끄러운 곡면은 세단이면서도 쿠페의 날렵함을 제공한다. 검은색을 많이 사용한 인테리어는 몸을 감싸는 타이트함이 특징. 벡트라 플랫폼이어서 실내 공간이 파사트에 뒤지고, 세부적인 마감 역시 깔끔하지 못하다. 사브 특유의 에어벤트와 독특한 컵홀더 디자인, 키박스 위치는 옛 모습을 따르고 있다. 소파 감각의 시트는 편안하지만 코너링 때 운전자를 제대로 잡아 주지 못한다. TiD 엔진은 오펠의 1.9 CTDi다. 피아트와 공동개발한 120마력, 150마력 두 가지. 국내에 수입되는 모델은 4밸브 방식의 150마력형으로 터보 엔진의 강력한 가속력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9-3의 성격에 잘 어울린다. 최대토크는 32.7kg·m. 자동 6단 변속기와 조합된 1.9TiD 엔진은 반응성이 매우 뛰어나다. 강력한 초반 토크 덕분에 정지상태에서의 휠스핀도 다반사. 토크밴드가 좁아도 6단 자동 변속기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9-3의 트랜스미션은 매끄러운 작동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아이신제. 스티어링 스포크에 달린 변속 스위치는 쓰기 편하고, 조작하기 전에는 변속되지 않는 방식이라 운전자의 뜻대로 제어할 수 있다. 엔진 소음과 승차감에서는 성적표가 그리 좋지 않다. 방음처리가 잘 안되어 있는지 아이들링부터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실내로 유입되고 서스펜션은 터보 휘발유 버전에 비해 안정감이 떨어진다. 특히 강하게 횡가속이 걸리는 상황에서는 롤링이 생각보다 크고, 그렇다고 승차감 중시의 부드러운 세팅도 아니다. 9-3의 리어 서스펜션에는 ReAxs라 불리는 패시브 리어 스티어링 시스템이 달렸다. 코너 바깥쪽 바퀴에 힘이 걸리면 자연스럽게 토 아웃되도록 설계해 언더스티어를 줄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실제 주행에서는 특히 오르막에서 앞바퀴가 빠르게 비명을 지르며 쉽게 언더스티어를 일으킨다. 스포츠 세단이라고 부르기에 아쉬움이 큰 달리기였다.
Passat 2.0 TDI 페이톤이 등장하기 전까지 파사트는 폭스바겐의 기함이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 회장이 집권하면서 원대한 이미지 변신 작업에 착수, 지금은 페이톤과 투아렉으로 고급차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높여 가고 있다. ‘국민의 차’를 뜻하는 폭스바겐이 변화를 모색한 것은 벤츠, BMW가 소형차 시장을 파고드는데 따른 맞불작전이었다. 당시 피에히 회장은 폭스바겐을 벤츠와 경쟁할 수 있는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때 가장 많은 변화를 요구받은 모델이 파사트였다. 당시 벤츠 S클래스와 경쟁하는 페이톤과 골프 사이에는 너무나 큰 공백이 있었다. 아우디 A4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5세대 파사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2000년 대폭적인 마이너 체인지를 거쳐 실내를 고급스럽게 다듬고 W8 4.0ℓ 엔진과 콰트로 시스템을 조합하기도 했다. 1973년 데뷔해 올 해로 33주년이 되는 파사트는 1964년 아우디 인수 후 그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한 폭스바겐의 첫 앞바퀴굴림 모델. 아우디 80과 같은 플랫폼을 사용한 초대 파사트는 쥬지아로가 디자인을 담당했고 앞선 FF기술과 수랭식 엔진 조합으로 유럽 중형 패밀리카 시장에 안착했다. 82년 등장한 2세대는 중국에서 산타나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 팔리고 있다. 골프 플랫폼을 사용한 6세대는 여러 모로 5세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5세대는 작은 차체에 어퍼미들 세단의 풍격과 고성능까지 담으려고 애썼지만 6세대는 안락한 실내, 높은 실용성과 가격대비 성능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높아진 완성도와 달리기 지금까지 파사트의 스타일링은 지나치게 밋밋했으나 6세대는 매력이 넘친다. 직선과 원을 조합한 헤드램프는 이오스를 닮았고 리어 콤비네이션 램프는 페이톤의 멋스러움을 이어받았다. 골프 플랫폼을 늘인 새 중형 플랫폼(PQ46)을 쓴 덕분에 차체 크기나 실내 공간은 상당히 여유가 있다. 패밀리 세단으로 더 없이 좋은 사이즈에 안락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우드그레인과 크롬 장식의 조화가 페이톤의 화려한 인테리어를 떠올려 주고, 시트 안락성 역시 흠잡을 데 없다. 높은 감성품질과 넓은 수납공간은 소형차의 명수 폭스바겐다운 모습. 세로배치 엔진의 5세대와 달리 가로배치식 신형 파사트는 8기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폭스바겐 특유의 알뜰한 유닛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1.6ℓ 102마력을 시작으로 1.6 FSI와 2.0FSI, 2.0 FSi 터보, V6 3.2 FSI 등 다양한 휘발유 엔진과 함께 1.9 TDI, 2.0 TDI(140/170마력) 등 세 가지 직분사 디젤 터보를 고를 수 있다. 이번에 국내 시장에 소개된 2.0 TDI 140마력형은 피에조 인젝터를 쓴 최신의 직분사 유닛. 피에조란 압력을 가하면 전기를 만들어 내는 압전 소자를 뜻한다. 반대로 전기를 주면 움직임이나 압력을 만들 수 있다는 원리를 살려 인젝터를 만들었다. 기계식에 비해 부품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뿐 아니라 반응성이 좋아 차세대 직분사 디젤용 분사장치로 주목받고 있다. 섬세한 분사제어 덕분에 140마력의 최고출력과 32.6kg·m의 최대토크를 내는 파사트 TDI는 6단 반자동 변속기 DSG와 조합해 0→시속 100km 가속 9.8초, 최고시속 209km의 좋은 성적표를 내놓고 있다. 액셀 초기 반응이나 초반 가속은 9-3에 비해 더디지만 구동계 정숙성이나 조종성이 한 수 위다. 시속 100km 부근에서의 추월가속성능은 달리는 재미까지 더해 준다. 트윈 클러치로 동력의 끊어짐이 없고 반응이 빠른 DSG를 채용해 강력하지만 활용 회전수 대역이 좁은 최대토크를 적절하게 살려낸다. 성능이 뛰어나고 디젤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조용한 회전은 승용 디젤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고압 직분사 방식이어서 엔진 자체의 소음과 진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방음대책이 철저해 실내로 거의 유입되지 않는다. 9-3과 비교했을 때 소음이나 주행감각 모두 휘발유 엔진에 가깝다. 서스펜션은 부드러운 편. 안락함을 중시한 세팅이어서 과격한 코너링은 무리지만 그렇다고 쉽게 안정감을 잃지 않는다. 파워풀한 엔진은 고속에서의 추월가속이 쉽고 정속주행 때 고요해 장거리 운전에도 적합하다. 그야말로 패밀리 세단으로 최적화된 모습. 한때 방황했던 파사트가 이제서야 제 모습을 찾은 듯하다.
가격, 성능에서 폭스바겐의 판정승 두 모델은 직렬 4기통 직분사 디젤 터보 엔진을 가로로 얹고 비슷한 동력성능을 지녔다. 휘발유 엔진이 대적할 수 없는 뛰어난 연비에 청소가 필요 없는 분진필터로 배기가스 문제도 해결했다. 이렇듯 공통점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 몰아 본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이는 GM과 폭스바겐/아우디가 걷고 있는 요즘의 행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상당히 흥미롭다. 브랜드 이미지나 모델 라인업으로 보아 9-3과 파사트는 경쟁상대가 아니다. 요즘 프리미엄 콤팩트 시장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는 9-3은 디젤 엔진으로나마 숨통을 틔어야 하는 상황. 휘발유와 같은 4천595만 원의 가격표가 달려 있지만 여전히 파사트(컴포트 4천40만 원/프리미엄 4천250만 원)보다 비싸다. 반면 끊임없는 고급화와 신기술 투입 등 공을 많이 들인 파사트는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국내 시장에서도 폭스바겐의 위상을 높여 주고 있다. 이종격투기의 링에서는 씨름이나 유도, 레슬링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다. 더욱 강력한 전투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대결은 파사트의 판정승. GM의 불안정으로 사브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폭스바겐의 날카로운 펀치가 승패를 갈랐다. 글 ·이수진, 사진·이명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