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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다송은 한국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차의 전문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스님의 친필본 동다송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굴 소개된 동다송은 모두 4종류로써, 신헌구가 필사한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이 필사한 석오본(石梧本)과 대흥사의 법진(法眞)스님이 필사한 법진본(法眞本)과, 송광사의 금명(錦溟)스님이 필사한 금명본(錦溟本)이 있다.
이듬해 53살(1838년) 되던 해 봄에 일지암을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갔다. 처음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두루 둘러본 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다시 한양(서울)에 들러서 해거도인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해거도인은 순조의 부마로서 시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존경받아오던 분인데, 사문(沙門)의 몸으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었음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더욱이 동다송 역시 해거도인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는 점에서 스님과 해거도인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조선조 사회에서 천대 받던 승려의 신분으로 유가의 빼어난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나눈 것은 오직 스님의 깊은 학문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하게 한 것이다.
스님이 55세(1840년) 때에는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팔고(湖南八高) 중에서 한 분으로 그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小痴)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는데 그 지행(持行)이 어떠한가?' 하였다. 소치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스님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스님의 학덕과 지행이 널리 모든 선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사호를 받은 사람은 스님 외에는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1841년) 두륜산 마하연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새로 짓고, 보련각에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 종사(十二代 宗師)스님과 12대 강사(十二代 講師)스님, 역대조사(歷代祖師) 고승대덕(高僧大德)스님 등 172분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 가서 있었는데, 소치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서 보내왔다. 이 현판은 지금도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도 써서 보내왔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걸작의 경문(經文)도 써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추사 당대의 최고의 절필로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다.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하나도 없이 수집가들의 손에 흘러들어가 버렸다.
58세(1834년)에는 스님께서 고향에 찾아간 감회를 시로 옲었다.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 (遠別鄕關四十秋)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歸來不覺雪盈頭)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 (新基草沒家安在)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古墓笞荒履跡愁)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心死恨從何處起)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血乾淚亦不能流)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孤공更欲髓雲去)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已矣人生傀首邱)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고향.
늙은 몸으로 백발을 이고 찾은 고향, 어린 동몽의 기억으로 옛 집을 그리워하다 찾아간 고향이 이미 거덜난 쑥대밭이란다.
누가 슬프지 않으랴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에는 이끼만 가득 끼었고, 소식조차 물을 사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마음은 죽고 상했는데 한은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먹장삼만 적신다.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수구한다는 말 하지 말라 부끄럽구나.
62세(1847년)에는 진묵조사유적고(震묵祖師遺蹟攷)를 찬술(撰述)했다. 예전에 전주에 갔을 때 진묵조사에 대한 실기를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 선생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는데, 전주 봉서사(鳳棲寺)의 스님이 찾아와 진묵조사의 기문(記文)을 청했다. 이에 스님께서 전에들은 바를 기록하여 상하 두권으로 묶어 진묵조사유적고를 저술 하기에 이른 것이다.
66세(1851)에는 석오 윤치영(尹致英)과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초의스님 시집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에 발문(跋文)을 썼다. 이때 석오 윤치영은 일지암을 방문하고 스님이 새로 창건한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를 짓기도 했으며, 또 동다송 석오본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 동다송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다.
71세(1856년)에는 금란교계(金蘭交契)를 사십이년간이나 깊게 나누던 추사 김정희가 서울 관악산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대정(大靜)까지 찾아가 반년 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용호(蓉湖:서울)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던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처럼 지내다가 홀연히 추사가 먼저 떠나니 스님은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一枝庵)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그토록 좋아아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산문 밖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생각 밖에서만 이루어 놓았고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으나 곧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主禪)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住錫)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侍者)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그때 세수(世壽)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高宗) 3년 8월 2일이었다. 스님이 입적하신 지 오래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茶毘)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善機) 범인(梵寅)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辛未年) 4월로 입적하신 지 5년째 되던해 봄이다. 이때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다. 그후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義禁府事) 신헌(申櫶)에게서 비명(碑銘)을 얻어 그 옆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헌이 추금(秋琴) 강위(姜瑋)에게 부탁해서 대신 지은 것이다. 이 비를 세우기는 스님이 입적하신 뒤 75년만인 1941년 4월에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泳)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스님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艸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진묵조사유적고(震묵祖師遺蹟攷),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등이 있다.
18~19세기의 어지러웠던 조선시대 말을 살다간 초의선사의 이름은 장의순이며 법호는 초의(艸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이었다.
초의선사는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이야기한 '동다송'과 '다신전'을 지어 우리나라 다도사상을 처음으로 정립시킨 사람으로 후에 한국의 다성으로 불리어 진다.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통해 이어온 차 문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원을 중심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게 되었다. 초의선사는 차의 이론적인 부분과 실생활의 활용면을 체계화시켜 한국의 다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초의선사의 다도사상은 선(禪)사상과 차와 선은 하나의 맛이라는 것을 뜻하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으로 함축해 말할 수 있다. 곧 부처님의 진리와 차는 하나의 맛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차는 단순하게 물을 끓이고, 우리고 ,마시는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를 다스리고 수양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과 선만을 강조한 그런 스님이 아니었다. 시와 그림, 글씨, 차와 선을 겸비해 당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등과의 교류를 통해 실학정신을 계승하고 서민불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후에 대흥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스스로 차를 덖으며 다도의 맛과 멋을 전하던 초의 선사는 1866년 80세의 나이로 대흥사에서 입적하는 그날까지 선(禪)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의선사 의순(草衣禪師 意恂) (1786∼1866)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다도(茶道)의 정립자. 성은 장씨이다.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草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무안출신.
1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탁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에 있던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6세 때 남평 운흥 (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고, 대흥사(大興寺)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대오(大悟)하여 유일(有一)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다. 불교학 이외에도 유학·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속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이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구비한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 <동다송(東茶頌)>을 제작하여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와 원예 및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그의 사상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집약된다. 선사상은 저서인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 잘 나타나 있다. <선문사변만어>는 당대의 유명한 대선사 백파(白坡)가 <선문수경(禪門手鏡)>이라는 저술을 바표하자 의순이 선배 백파의 잘못을 하나하나 변등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백파는 선을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의 3종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나, 의순은 선을 3종으로 판별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보고,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辨)을 중심으로 백파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의순이 전선(專禪)으로 기울지 않고 지관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데에서 그의 선사상의 큰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다선일미사상은 차와 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시작된다. 의순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잔의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차의 성품이 사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a는 "차의 진예없는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塵穢除盡精氣入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의순의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은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하였다. 그에게는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국집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이상적 불교인으로 존경한 인물은 진묵(震默)이었다. 그는 또한 대흥사 13대종사 중 13번째 대종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둔사지(大芚寺誌)>는 의순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대둔사지>의 편자가 의순이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마지막으로 그를 쳐서 13대종사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이다.
저서로는 <선문사변만어>1권, <이선래의(二禪來儀)>1권, <초의시고(草衣詩藁)>2권,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1권, <동다송>1권, <다신전(茶神傳)>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불교인물사상사> (불교신문사편. 1990), <동사열전> (광제원. 1994).
차와 시·그림 나누며 42년간 芝蘭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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