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에스파냐입니다.
('스페인'은 영어명인 것을 깜빡;;; 정식명칭으로 수정하였습니다...^^)
146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1516): 아라곤 왕으로서는 페르난도 5세(재위 1479∼1516). 아라곤의 왕자였다가 카스티야의 왕녀인 이사벨과 결혼한 후 아내의 즉위와 동시에 공동통치자가 되어 스페인 절대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가톨릭 왕’ 으로 불린 이들의 결혼을 계기로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가톨릭 왕국이 종교적으로 강력히 통합 되었다.
가톨릭 왕들은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그라나다의 이슬람교도들을 축출하고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가톨릭 왕들의 종교 통일은 종교 개혁이 유럽 전반의 가톨릭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던 상황 속에서 더욱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얻었고,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페르난도 2세를 ‘예루살렘의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특히 이사벨 여왕은 엄격한 종교 재판소를 통해 유대교, 이슬람교와 같은 이교도들을 엄격히 통재했고 중앙 집권화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1. 종교재판 -이교도 처단
8세기 동안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왕들의 집권 이후 스페인인들의 외면적 종교 생활은 가톨릭 교리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매우 은밀히 그들 나름의 전통적 종교의식을 고수했다.
가톨릭 왕들은 눈가림 식의 가톨릭化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페인 사람들의 완벽한 통합을 위해 ‘피의 순수성’ 및 ‘신앙의 순수성’ 을 목표로 했다. 이교도들에게 고문과 개종의 협박을 가하면서 인종의 순수성 확보를 통해 종교 통합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여 이교도(특히 유대교와 이슬람)들이 끝내 개정을 거부할 경우 스페인에서 축출했다.
스페인은 1478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의 허가 하에 국왕의 칙령으로 종교 재판소가 세워졌다. 종교 재판소는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들에 의해 주관되며 이단자, 개종자들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각국의 종교 재판소도 이교도 색출에 여념이 없었지만 특히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는 그 절차가 길고 복잡했으며 고문이 매우 잔인했다. [재판에 회부되는 자가 워낙 많았고, 재판 까지는 투옥기를 가져야 했는데 심한 경우 수사 레이스데 레온의 경우, 5년간 감옥에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또한 개종한 자들로 하여금 이교도 색출 작업에 적극 가담하도록 하여 분열책을 쓰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에르난도 델 풀가르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만 2천여명의 이교도들이 화형당했다.]
스페인 전역에는 2만 명 정도의 이단 심문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담당 지역을 돌며 이교 행위를 적발하고, 청중 앞에서 이교도들을 비난하길 종용했다. 따라서 이교도들과 사람들 사이에는 높은 벽이 쳐졌고 이교도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했다.
또한 종교 재판을 받을 경우, 유죄 판결자는 재산을 모두 종교 재판소가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통 가벼운 혐의자들이 다수인 이교도들은 화형을 면하는 대신 벌금, 구금, 공직 박탈로 처리되면서 재산 박탈을 겸해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2. 왕실의 교회 권력 장악
당시 스페인 교회는 막대한 부와 특권으로 유지되었는데, 성직자들은 세금이 면제되었고 대영지를 소유하며 영지 내의 사법권과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톨릭 왕들은 귀족들을 장악했지만 스페인 교회를 뛰어넘지 않으면 왕권을 강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차 교회의 권력을 잠식해갔다. 1475년 사라고사 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를 이용해 이사벨 왕은 당시 항상 왕과 교황 사이의 분쟁거리가 되었던 성직 임명에 개입했다.
더 나아가 가톨릭 왕들은 그라나다 왕국의 모든 교회에 성직 임명권을 행사하고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도움을 받았다. 1486년 교황 칙서를 통해 스페인 국왕의 성직 임명권이 전면 보장되었다. 아메리카 발견 후 왕실은 식민지역의 지배권을 전면 확보했다.
스페인 교회 역시 유럽의 보편적 폐단이었던 성직 겸임, 부재 성직자, 부패한 성직 매매, 성직자의 비도덕성이 문제시 되었다. 몇몇 교회 및 수도회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사벨 여왕의 고해 사제였던 헤로니무스 수도회의 에르난도 데 탈라베라는 교회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이사벨 여왕은 주교직의 임명권을 잡았고, 수도원 개혁 운동이 동반되면서 성직자들의 도덕적 책임감이 향상되었다.
3. 불완전한 통합
비록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가 통합되었지만 이것은 종교적 영역에 국한되었고 정치적인 중앙 집권화는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가지고 있는 물적 토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사벨 왕의 카스티야는 지역의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토착 귀족들의 정치적 권리획득의 정도는 비교적 미진한 편이었다. 면세권을 가진 귀족층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과 분리되어 있는 신분회의 코르데스에 다소 둔감했으며 끊임없는 재정복에 의한 왕조의 불안정은 코르데스를 정기적으로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카스티야는 양모, 무역 경제의 발전과 느슨한 정치 상태라는 유리한 조건에 의해 왕조에 의한 단호한 중앙 집권화 과정을 밟게 되었다. 반면 아라곤 왕국은 여전히 봉건제적 색채가 짙은 아라곤과, 경기 침체 및 흑사병, 쁘띠 부르주아들의 계급투쟁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카탈로니아로 인해 자본주의적 성장이 매우 둔했으며, 귀족, 성직자, 기사 등의 중세적 세력들이 코르데스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국은 중앙 파견관리를 통해 카스티야를 관리했던 것과는 달리, 아라곤에게는 느슨한 정치적 자립권을 보장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영토적이며 종교적인 통합 후, 즉 스페인 특유의 종교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하나의 관료제를 도입한 후 절대주의의 국가로서의 초석을 다져갔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불안했으며 통합 운영 자체도 원활하지 못했다. 훗날 스페인은 제국의 경제적 토대로서 교역 중심의 중상주의를 채택하고 중앙 집권화를 위한 행정적 시도를 단행하며, 식민지의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상비군을 형성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단행하며 절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 언급한 내재적 불안요소에 있었다.
로마의 바람
Caesarian^^
첫댓글 요새들어 공부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데, 머리가 따라주질 않아요. 몸은 펄펄한데 자꾸만 멍.. 한게. 우습지만 요즘은 대학생이 되어 제가 공부하고 싶은 것만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는 심오하고도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