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인도하심 따라 철없이 따라온 뜻길
김종영 • 권영혜 가정
1. 아저씨는 누구세요? 2. 통일교회 입교 3. 휘몰아치는 영계역사 4.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구레네를 닮아라 5. 개척교회 6. 군대 생활 7. 기독교 신학교 입학 8. 원리강사로 공직생활 출발 8. 주한 미7공군(오산) 군무원 9. 이천가정교회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종영, 참아버님을 아저씨로 부른 고3 신앙 초보자, 열심히 공부하여 목회를 잘 하라고 격려해 주신 참부모님, 기독교 신앙, 원리강론 내용에 심취, 영계의 안내로 21일 원리수련회 참석, 순회전도단 활동, 목회자가 되라는 계시, 교회개척, 여의도 구국세계대회 참석, 군대 생활 중에 원리 성구 암송, 일화 근무 및 기독교신학 공부,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 및 사직, 목회 및 동유럽 선교사, 미래계획
1. 아저씨는 누구세요?
1972년 10월 초순 경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전국 고3 총회가 있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나는 전북 이리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총회에 갈만한 학생이 없어 나 혼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집회 장소인 구리 중앙수련소를 가르쳐 주지 않고 청파동 구본부교회(청파동 1가 71-3)를 가르쳐 주었다. 원리도 잘 몰랐고, 통일교회 역사에도 아주 무지한 초보 신앙자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이 집회에 꼭 참석하라고 해서 내가 가게되었다.
나는 서울이 초행길이라 많이 낯설었다. 서울역에 내려서 물어물어 청파동 구본부교회를 찾아갔다. 그때가 저녁 8시 30분 정도 되었다.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무척 난감했다. 그때 집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희미한 전등불 아래 터벅터벅 걸어 나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물으셨다. “학생 어디서 왔나?” “전북 이리에서 고3 학생총회라고 해서 왔는데 아무도 없네요.” 나는 대답하며 난감해 하였다. “그래, 교역장은 누구지?” “김한수씨(72가정)라고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나왔는데 아주 똑똑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그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는 “내가 지금 총회에 가니까 나랑 같이 가자. 내 차를 타라.”고 하셨다. 나는 잘못 찾아와 난감해 하던 차에 아저씨가 차를 타라고 하시니까 너무 기뻤다. 그래서 아저씨가 타시는 차를 탔다. 운전기사가 있고, 그 옆에 내가 타고, 내 뒤에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 타시고, 기사 뒤에 아저씨가 타셨다. 차는 정말 좋은 차였다. 처음으로 그렇게 멋진 차를 처음 타보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차는 미국제 링컨이라는 고급 승용차였다.
아저씨와 나는 청파동 구본부교회에서부터 중앙수련소까지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물으셨다. “지금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저는 교회에서 전도부장을 하고 있습니다. 120명 전도를 목표로 매진하고 있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통일교회 목회자가 되려고 합니다.”하고 힘주어서 말했다. 아저씨는 “그래, 꼭 그렇게 하도록 해라.”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 기억하지 못한다. 망우리 고개를 넘을 때쯤 문득 “이분이 도대체 누구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범한 아저씨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분이 바로 문선명선생님이시구나. 아차, 큰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을 직접 뵙지 못했고, 흑백 사진으로만 몇 번 보면서 “문선명선생님은 통일교회 창시자로서 왕관을 쓰시고 도포를 입고 모든 통일교인들이 우러러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양복을 입으시고 “학생, 어디서 왔나?”라고 물으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망우리 고개를 넘고서는 별로 말없이 차를 타고 갔다. “혹시 실수를 했으면 어떡하나? 어떻게 만회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내 가슴은 쿵쿵거렸다. 통일산업 정문까지 가보니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서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며 영접하는 것이었다.
나는 차에서 급히 내려서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아버지, 죄송합니다. 정말 몰라 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그랬더니 “일어나라,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라.”고 하시며 “이쪽 길로 쭉 내려가면 집회하는 데가 있다.” 하시며 길을 안내해 주셨다. 정말 그 아저씨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있으시고 정이 깊으시며 이해력이 많으셨다. 참부모님을 통일가의 모든 식구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에 내가 최초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참부모님은 내가 거침없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다 들어주시고 친절하시고 사랑이 넘치게 응답해 주셨다. 나는 일어나서 말씀하시는 길을 따라 중앙수련소에 갔다.
이것이 내가 참부모님을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교회 사정을 잘 모른 초보자로서, 감히 신인일체, 하늘부모님의 실체, 천지인참부모님을 만났고, 차를 탔고 대화를 나누며 일생을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얼마나 영광인가? 다만 내가 너무 철이 없었고,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송구스럽고 창피스럽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내 인생에서 참부모님의 차를 탔고 직접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2. 통일교회 입교
다음 날 200~300여명이 모인 총회에서 참부모님께서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다. 말씀 도중에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너 어제 내가 차를 태워준 학생이지?”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니 “교회 들어온 지 일 년도 안 된 학생을 태워 주었구만. 학생으로서는 네가 처음으로 그 차를 처음 탄 거야.”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물으셨다. “너, 우리 원리 따라 올 수 있어?” “예.” “정말이야?” “예.” “쇠꼬챙이를 목에 끼워서 벽에 달아매어도 따라올 수 있어?”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응. 됐어, 그럼 됐구만.” 하셨다. 나는 왜 나에게만 그런 말씀을 하시나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뜻길을 따라 오면서 참부모님께서 누구를 세워 원리의 길을 갈 수 있느냐고 약속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용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성화학생총회를 마쳤다. 총회가 끝나고 교회에 돌아온 나는 통일교회 입회원서를 썼다. 그때까지 입회원서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교회에 나간 때가 여름방학이 되기 전인 7월 12일 정도 되었기에 입교날짜를 7월 12일로 적었다. 그리고 나의 생일도 음력으로 7월 12일이므로 그 날짜로 기록한 것이다.
입교 전에 나는 기독교를 다니고 있었다.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으나 종종 나갔고, 기독학생회 모임에도 나갔다. 그때 같은 반 친구가 “이상한 교회가 있다. 한번 가보자.”고 하며 나를 인도하기에 따라서 간 곳이 통일교회였다. 그 친구도 통일교회에 나보다 며칠 전에 입교하였다.
원리 말씀이 너무 조직적이고 신기해서 매일 수업이 끝나면 교회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들을 때 혼자 가지 않고 학교 친구들을 3~4명씩 데리고 갔다. 60~70명은 원리를 듣도록 내가 인도하였다. 특별히 학교 학생회장부터 대다수의 학교 리더들을 인도하여서 원리말씀을 듣게 하였다. 그랬기에 교역장께서는 입회원서도 쓰지 않은 나를 전도부장에 세우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고향에 갔다. 나의 고향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시골 마을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서천에서 전북 이리로 유학을 갔다. 놀랍게도 이리공고는 통일교회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박규남(72가정) 천마축구단 단장부터 수없이 많은 공직자를 배출하였다. 한 때는 고등학교 동문 10여 명이 공직에 있던 때도 있었다.
고향에 온 나는 군대에 갈 때까지 고향을 위하여 일하고자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시기였기에 고향을 위하여 마을 가꾸기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3. 휘몰아치는 영계역사
우리 마을은 100여 호가 살아가고 있는 큰 마을에 속하였다. 나는 마을에 있는 18~25살까지 25명 정도 청년들을 묶어 청년회를 조직하고 4H를 체계화시켰다. 활동자금도 제법 많이 조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마을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이웃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녔다. 동네 청년들을 몰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까 목사님은 나를 교회 청년회장으로 세워 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웃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를 다녔다.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기에 교회에서 주는 학용품으로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사서 쓰지 않을 정도로 혜택을 받았다.
사실 나는 통일교회 원리를 잘 몰랐다. 한 번도 수련을 받은 적이 없고, 체계적으로 원리를 공부한 적도 없었다. 이리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친구들을 데리고 통일교회에 갔을 때 반복되는 토막 강의만 들었던 것이 원리 실력의 전부였다.
그랬기에 시골길 40리 정도 되는 서천 읍내에 있는 통일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통일교회 목회자가 되기로 참부모님과 약속했는데 이를 어쩌지?”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계에서 “고향을 떠나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영적인 역사를 처음 접해보는 나는 그 말에 순종할 리가 없었다. 순종하지 않는 나에게 영계에서는 잠도 재우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어느 때는 꿈속에서 두들겨 패기도 하였다. 꿈을 깨고 나면 실제로 아픔을 느꼈다.
이렇게 20여 일이 지속되니 견딜 수 없고 살 수도 없었다. 나는 꿈속에서 영계의 사람들과 타협을 하였다. “당신들은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겠습니까? 나는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자식도 낳아 길러야 되는데, 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겠습니까?” 그러니 영계에서는 “모든 것을 책임져 주고 언제든지 너와 함께해 줄 테니까 믿고 고향을 떠나라.”고 응답을 하였다.
나는 영계와 굳게 약속을 하고 고향을 떠났다. 마치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던 고향집을 떠나서 알 수 없는 미지의 땅,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처럼(창세기12:4), 나도 오직 믿음 하나로 집을 떠났다. 고향을 떠날 때 간단한 옷가지를 조그마한 가방에 챙기고 차비로 3,000원(당시 쌀 1가마니가 10,000원 정도)을 들고 옛날 다녔던 전북 이리교회를 무작정 찾아갔다. 나는 교회에 가서 원리공부를 하고, 허드렛일 하는 봉사도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고 간 것이다. 그날이 1973년 12월 19일이었다.
교회를 가니 교역장께서 “여기를 어찌 왔는가?”라고 물으셨다. “영계에서 무작정 집을 떠나라고 다그치고 명령해서 왔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단하다. 사실 내일부터 구리 중앙수련소에서 제4차 순회전도단(기동대) 출발을 위하여 21일 수련이 시작되는데, 거기로 가서 수련을 받고 6개월 동안 전도단 활동을 하고, 공적인 활동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통일신학교가 체계화되지 않았기에 순회전도단 6개월을 수료하고 임지발령을 받아 교회장으로 나가는 것이 목회자 양성 코스였다. 나는 곧바로 서천군 비인에 사는 시집간 누나 집으로 갔다. 구리까지 가기 위한 차비도 있어야 하겠고, 교육받고 생활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을 사기 위해서였다.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쌀 1가마니 값을 받고 상경하여 구리 중앙수련소에 갔다. 그날이 12월 20일이었다.
수련소에 가니 저녁때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왔다. 나도 접수를 하려고 하니 “교구장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구장이 무엇인데요?”라고 질문하였다. 내 말을 듣고 접수자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행히 돌려보내지 않고 교육을 받게 수락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21일 수련 기간 동안에 전편과 후편 원리 전체를 두 번에 걸쳐 들었다.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원리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때였다.
4.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구레네를 닮아라
21일간 교육을 수료하고 1974년 1월부터 전남 순회전도단에 배치되었다. 그때 순회단원들은 나를 비롯하여 30여명 정도 되었다. 순회전도단 단장은 엄일섭(120가정)교구장이셨고, 강사는 김경옥(430가정)교역장이었다. 보통 한 교회에서 8~10여 일을 머무는데, 오전은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전도활동을 하였고, 저녁에는 활동한 분들을 교회로 모셔 와서 원리부흥회를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전용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가 부족하여 먹는 밥은 성미(誠米) 사업을 해서 충당을 하였다. 나는 성미 사업을 제일 잘하였다. 무슨 일이든 집념이 강해서 악착같이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1월 말 경에 전남 함평에서 활동을 할 때에 여자들은 사택에서 잠을 자고, 남자들은 성전에서 잠을 잤다. A타입 교회를 짓기 전이라서 성전 바닥이 시멘트 바닥이었고, 아주 춥고 냉기가 많이 올라왔다. 옆에서 자는 동료가 잠을 자는데 추워서 몸을 새우같이 구부리고 뒤척이며 힘들어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덮고 있던 모포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떨면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참부모님께서 나에게 성경 마태복음 27장 32절을 주시며 “너는 평생 이 성경구절을 기억하며 살라.”고 하셨다. 꿈에서 깨어 성경을 펴보니 “로마 군인이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하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엄일섭 교구장께 꿈 얘기를 말씀을 드렸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불변의 심정으로 참부모님을 모시며 공직자의 길을 가라.”고 격려해 주셨다.
열심히 5개월 10일 동안의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수료를 하였다. 원리교육 21일을 합하여 6개월 코스를 통과하였다.
5. 개척교회
순회전도단 수료 이후에 내가 배치된 곳은 전남 장성교회였다. 당시 장성교회 교역장은 김경옥(430가정, 성화하심)이었다. 이분은 기동대 수료를 두 달 정도 남겨놓고 전남 장성으로 인사 이동되었다. 뒤를 이어 신호철(1,800가정, 성화하심)께서 오셔서 4차 전남기동대 강사로 있었다. 당시 장성교역장 사모는 동원전도를 나가셔서 부재중이었다. 사모께서 동원기간을 수료하실 때까지 내가 교역에서 학생부장, 총무, 식사 준비 등 교회에 관한 모든 일을 하였다.
김경옥 교역장께서는 기동대 강사로 있었기에 30여명의 전남기동대원들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 특별히 나를 선택하여 장성으로 부르신 것이다. 훗날 교역장께 물었다. “왜 저를 부르셨나요?” 하니, “원리강의나 말씀에 대한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하늘이 늘 함께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이곳으로 부른 거야.”라고 답하셨다.
나는 성화학생도 교육하고, 교회 일도 보며, 광주에서 희망의 날 대향연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가 사모께서 임지를 수료하고 교회에 오셔서 나는 장성군 신흥면 개척교회장으로 나갔다. 전임여자교회장이 축복문제로 임지를 철수하였고, 그 자리에 내가 갔다.
그곳은 시골 방 한 칸과 부엌이 있는 월세 집이었다. 식구는 기성가정 2가정과 청년식구들이 있었다. 그곳을 가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몸이 튼튼하여 일 잘하게 생겼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개척교회의 상황은 다 그랬다.
그곳에 있다가 1975년 6월 7일, 여의도에서 있는 구국세계대회 21일을 남겨 놓고 인원동원 때문에 서울로 왔다. 영등포구 문래동교회에 6~7명이 배치되어서 인원동원 활동을 하였다. 주로 국제기동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외국 사람들과 두 명이 조를 짜서 영등포 전체를 누비고 다녔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전단지를 주며 대회 개최를 알렸다.
구국세계대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록에 의하면 120만 명이 구국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당일 주위를 지나는 모든 버스노선이 행사장을 경유해서 갔다. 물밀 듯이 몰려오는 인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한국 역사 이래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더욱이 내가 하루 종일 활동하여 성공을 거두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하니까 보람이 컸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참부모님 생애노정을 강의할 때에는 자주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 하곤 한다. 여의도 구국세계대회를 승리로 마치고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교역과 교회를 번갈아 다니며 생활하다가 9월 12일 군 입대 영장이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6. 군대 생활
군대에 입대할 때 《원리강론》을 가지고 입대하였다. 원리공부를 철저히 하여 원리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논산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보병 8사단 산정호수 입구에 있는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원리강론》에 있는 원리성구를 노트에 써서 암송을 하였다. 당시에는 판서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원리성구를 모르면 강의를 할 수가 없었다. 전편에 나오는 성구는 200개 정도이다. 이것이 반복되어 나온다. 후편은 성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이해만 하면 된다.
주로 보초를 서면서 노트에 쓴 전편 성구를 암송하였다. 6개월 정도 외우니까 다 외울 수가 있었다. 이 때 외운 성구가 제대 후에 목회를 할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군 복무 중에는 통일교회를 가고 싶어도 휴가 때가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군대생활 10여 개월 정도를 하고서 일등병 때에 저녁 9시 정도 되어서 부대원들과 함께 야간 행군을 하였다. 행군을 하다가 포천군 일동면 길가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일동교회’라는 긴 간판이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대열에서 이탈하여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1800가정 축복을 받은 젊은 교회장께서 갓난아기를 기르며 목회를 하고 있었다. 총을 든 군인이 밤중에 뛰어 들어오니 깜짝 놀라셨다. “놀라지 마세요. 통일교회 간판이 있어서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왔습니다.” 인사를 하며 잠깐 나를 소개하였다. 그 교회장이 지금 충의애관 관장으로 계시는 이종선관장이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뛰어서 대열에 복귀하였다. 부대 행렬에서 뒤쳐지면 안 되기에 1km 이상을 뛰어갔다. 지금도 가끔 공식 집회 때에 이관장을 만날 때는 그때 일을 얘기하며 미소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군대생활 하면서 중대군종(中隊軍宗)을 하였다. 군종의 역할은 중대 내에서 1명을 뽑아서 교회 다니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부대 밖 교회로 안내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차를 끓여 초소를 순회하기도 하고, 토요일에는 면회객을 위한 봉사도 하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커서 유격장 조교로 14개월간 파견 복무도 하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이 군대생활 3년을 잘 마치고 1978년 7월 말에 전역을 하였다.
7. 기독교 신학교 입학
1978년 가을에 수택리에 있는 일화제약에 입사를 하였다.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서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해인 1979년도에 기독교 신학교 야간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참아버님 앞에서 약속한 평생목회를 실천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기독교 신학공부를 먼저 하고 나서 통일신학을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회사에서 배려를 해 주어서 조금 일찍 퇴근하여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4학년 때인 1982년도에 축복을 받고 회사를 퇴직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대한신학교 신학대학원(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협회에 공직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에 퇴계원교회(현 남양주 교회)에 다니면서 부교회장처럼 교회에서 성화학생들을 돌보고 저녁 예배도 인도하면서 교회에서 학비를 보조받았다.
8. 원리강사로 공직생활 출발
협회에서 서울 강남교구(당시에는 서울이 강북교구, 강남교구로 나뉘어져 있었음) 수련소 원리강사로 발령을 내었다. 당시에는 교구 주관으로 일주일 수련이 왕성하던 때라서 권혁서 교구장께서 나를 원리 강사로 기르시려고 선택하셨다. 판서 강의를 하던 때라 원리를 통째로 외우지 않으면 강의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많이 부족하고 교구장을 잘 알지 못하였는데, 교구장께서는 나를 원리강사로 선택해서 발령을 내주시고 원리강사가 될 수 있도록 강사교육을 해주신 것이다. 지금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직 수련 강의를 할 만큼 실력이 되지 않았기에 교구와 교회 행정을 겸하면서 수련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여 많은 강사들로부터 철저하게 원리공부와 강의비법을 배웠다. 당시에 조만웅 목사(현 원로회 회장)께서 강의를 많이 하셨다. 군대에서 외웠던 원리 성구와 수십 번 읽었던 《원리강론》이 원리강사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때 배우고 훈련했던 원리강의가 이후의 목회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고, 교구원리수련 및 중앙수련소에서 협회원리수련을 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14개월 후에 경기도 송탄교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축복을 받은 후라서 아내와 함께 임지로 나갔다. 그때 많은 6천가정 형제들이 전국 교회로 3년 임지동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송탄교회는 대지가 110여평 정도 되었고, 옛날 가옥 2채가 있었다. 하나는 사택으로, 다른 하나는 성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최고로 열악한 교회환경이었다. 그러나 송탄에서 열심히 정성을 들이며 전도를 하여 경기도에서 교회성장 1등으로 평가를 받아서 이재석 협회장으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그런 중에 미국 메를린랜더 대학을 나온 성품이 좋고 능력 있는 장교 출신을 전도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몇 살 적었고, 오산 공군부대에 다니고 있었으며 직책이 상당히 높았다. 나는 그에게 2~3년간 미군부대 도서관 같은데 들어가서 근무하면서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능하다고 하였다. 나는 미래에 국제적인 차원에서 리더로서 일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려는 욕구를 가졌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이유로써 목회를 잠시 접고 영어공부에 전념하기로 마음 먹었다.
첫째, 고3 총회에서 참부모님 앞에 평생 목회를 약속한 후, 나의 운명은 ‘선교를 나가서 순교자와 같은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인생과 신앙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우선 영어를 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둘째, 당시에 아내가 목회 사모로서 합당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목회를 일단 중단하였다. 아내는 몸이 약해 자연유산을 4번이나 하였다. 아내는 기독교 신앙의 7대를 이어온 정성파 집안의 후손으로 집안 모두가 목사나 장로 권사들이다. 아내는 계시를 받고서 통일교회에 입교하였고, 7일 금식을 24번이나 하였으며, 축복받기 4년 전에 이미 나를 일편단심의 성품을 지닌 남편이 될 사람으로 계시를 받고, 정성을 드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힘들게 치료하였다. 그런데 축복받기 2~3년 전에 또다시 전신마비가 되어 축복받을 즈음에는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약혼식장에서 장애자로 분류되어 빨강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아내의 건강 상태가 목회사모로서 충분한 조건을 완비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여서 나와 아내는 일단 목회를 정리하기로 합의하였다.
8. 주한 미7공군(오산) 군무원
아내는 구리 성화유치원 인가를 받아서 운영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퇴계원에서 개인유치원(예림유치원)을 운영하였다. 그럼으로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2~3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이 크게 번지고 말았다. 미군부대에 들어가기 위하여 섭외하던 중에 미국 장성출신 지도자들과 아시아 태평양 최고의 미국 군대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꿈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대 장성과 높은 직업군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서 같이 이루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에게 “모든 종교를 총괄하는 종교 파트를 새로 만들 것이니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을 한국 상황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면, 정부 내각에 종교부서를 별도로 두는 것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일에 최고의 직책을 가진 분들이 다 연관되었다.
나는 미래에 참부모님께서 강조하시고 바라시는 통일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교파적인 활동을 정부와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열심히 근무하고 영어공부를 하였다. 2년 정도 미군부대에 다니며 일을 진행하였다. 직장으로 생각하면 최고의 직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월급이 많다 보니 퇴직금을 매해 정산하는데 이것저것 합치면 보너스가 600%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일이 의도대로 잘 되지 않고 지연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수익을 받는 일자리에 안주하면 안 되고 참부모님께 약속한 <일생 목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소명감이 다시 불타올랐다. 나는 미군부대를 사직했다. 나를 도와주려던 미군들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하면서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남들은 그런 자리를 못 받아서 안달인데, 나는 그런 자리를 주겠다고 해도 마다하니까 그들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나는 교문교회로 발령을 받았고, 이어서 미금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 참부모님께서 목회자 총회에서 40명을 선정하여 세계순회사로 보내셨다. 나는 참부모님께 뽑혀 동유럽 순회사로 파송되었다. 유럽에서 활동을 하던 중에 축구를 하다가 무릎을 다쳐 수술을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귀국하였다. 한양대학교 구리병원에서 2번을 더 수술을 하였다. 순회사 나갈 때에 미금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다시 미금교회에 발령을 받고 근무하였다. 그런데 미군부대에서 내가 귀국한 것을 알고서 “꼭 당신이 복직하여서 일을 해야 한다.”고 다시 불렀다. 나는 다시 목회를 중단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2년간 미군부대에 복직하여 근무하였다.
미군 부대 안에서 영어시험을 보는데 영문학과 나온 사람만큼 높은 점수를 받기도 하였다. 직장생활로써는 최고로 좋은 환경이었다. 좋은 직장에서 미래의 전망도 핑크빛처럼 보장이 될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뭔가 텅 빈 구덩이가 생겨서 허전하였고, 안정이 되지 않았다. 대체로 좋은 직장에서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끼게 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하고 불안하였다. “왜 이렇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3때 수택리에서 있었던 참부모님과의 만남과 <평생 목회>약속이 다시 떠올랐다. 원인 분석이 되었다. 나는 육신의 평안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참부모님과의 약속이 더 컸고, 나를 잡아끌었기에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류 직장인 미군 부대를 그만두었다. 두 번에 걸쳐 미군 부대를 다닐 기간에는 협회 지침으로 두 차례에 걸쳐 환고향하는 시기였다. “하늘이 나를 불러내시어 그 기간에 영어와 국제적인 감각을 키우도록 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렇지만 나를 믿고서 나를 찾아주었고 새 일을 맡겨 주며 같이 일을 만들어왔던 미군 부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미안하기도 하였다.
9. 이천가정교회
2023년 12월이 되면 나는 목회 정년을 맞는다. 그 동안 목회했던 곳을 생각해 보면 제4차 순회전도단, 장성신흥, 제2교구 원리강사, 송탄, 교문, 미금, 동유럽순회사, 미금, 하남, 일신, 광명, 안산, 경기서부교구장을 거쳤다. 지금은 이천교구장을 하고 있다.
지난날을 돌이켜 바라보면 나는 참부모님과 영계와 약속한 모든 것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늘도 모든 약속을 지켰다. 하늘이 영계를 동원하여 나를 고향에서 불러내어 4차순회전도단 활동을 시켰고, 공직생활 33년이 가까워지도록 목회자의 길을 가게 하였다.
하늘은 좋은 아내를 짝 지워 주셨고, 자식도 잘 성장시켜주셨다. 두 아들 다 축복을 받았다. 큰 아들은 연세대 대학원을 나왔고 며느리는 숙대 대학원을 나와서 둘 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선문대총학생회장을 지냈고 졸업 후에는 3년 학사장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작은 며느리는 일본 2세로 고려대 대학원을 나와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자녀들이 착해서 아버지 어머니 노후는 자기들이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듣기만 해도 든든하다.
고3 성화총회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청파동에서 참부모님을 “아저씨”로 불렀고 차 안에서 참부모님과 “평생목회”하기로 약속하였으며, 전체 학생들 앞에서 “목에 쇠꼬챙이를 뀌어 달아매어도 원리의 길을 가겠다고.”고 참부모님께 약속했던 인연이 있었기에 하늘은 철저하게 나의 삶과 신앙 길을 인도해 주셨다.
그리고 “할 일이 많으니 공부를 많이 하라.”고 하신 말씀도 기독교 신학 6년, 사회복지학 6년, 선문대학교에서 석사, 박사 4년을 공부하면서 거의 다 지킨 것 같다.
참부모님을 만나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하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일생을 살아왔다. 모든 것이 무한히 감사할 뿐이다. 참아버님으로부터 받았던 큰 사랑과 은혜를 독생녀 실체성령 참어머님께 보답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퇴직을 하고도 우리 부부는 어떤 형태로든 뜻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범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희곡선이 있는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기에 하늘 앞에 영원히 떳떳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부모님, 참부모님, 조상들의 은덕이다. 감사할 뿐이다. 목회하는 동안 겪었던 많은 사연들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넘긴다.
첫댓글 손기문님 댓글
김종영 목사님의 어릴적 참아버님과의 순수한 귀한 인연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참아버님과 그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미7군 군무원의 좋은직장을 가감히 박차고 어렵고 힘든 목회의 길을 걸어오신 김종영 목사님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자서전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승하시고 온가족 행복하십시요.^^
정혁순님 댓글
김종영 수석님의 자서전 감동입니다. 하늘이 특별히 사랑하실 듯...
윤연숙님 댓글
김종영목사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한번 참아버님과 약속한 신념을 지키시려고 평생 고생길을 선택하신 감동의 자서전 참 좋았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