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노희경 - 시놉시스
미니시리즈
그들이 사는 세상 (가제)
제 작 : YEG프로덕션
감 독 : 표민수
작 가 : 노희경
1. 제 목 : 그들이 사는 세상 (가제)
2. 형 식 : 미니시리즈 70분물 * 16부작
3. 주 제 :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아닌 동지다.
4. 기획의도 :
1) 각박한 사회, 경쟁만이 난무한 이 사회에 따뜻한 경종을 울리는 드라마를 만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방송사, 그것도 드라마제작국은 물질과 욕망의 핵처럼 불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젊은이들은) 방송사를 선망하면서도 그곳을 비윤리적이며 속물적인 사고가 보편화 되어있다고, 서슴치 않고 단죄한다. 그러나 정작 그 곳에서 일하는 개인은 너무도 평범하게 현대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랑과 이해, 인정과 관심>이 필요할 뿐이다. 때론, 순간적인 욕망에, 속물적 근성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누구인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편견 속에 가려진 드라마 국의 일원들의 사랑과 삶을 따뜻하게 조명하여, 그들 사이에 여전히 흐르는 휴머니티를 말함으로써, 방송사와 일반인들 사이의 따뜻한 이해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의 이해를 끌어내려 한다.
2) 새로운 관계, 동료애를 추구하는 드라마를 만든다 -
우리나라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으로 가족과 연인사이의 갈등만을 강조한다. 그 러나 현대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곳은 다름 아닌 일하는 현장이다. 그 현장 속에서 관계가 단절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절반은 실패한 것 아닌가. 이 드라마는 연인과 부부, 가족과 동료, 친구 등 모든 관계의 소통을 추구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 몸을 부대끼고 사는 동료들과의 우정에 중점을 둔 드라마이다. 각박한 사회, 동료애라는 새로운 시선을 강조하여 주변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따뜻하기에 살 맛 나는 세상을 그리는 드라마를 만들려 한다.
3) 새로운 형식을 시도, 독특한 드라마를 만들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미국드라마나 일본드라마에선 낯설지 않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여전히 낯선 전문직 현장드라마라는 장르를 <제대로> 개척하려 한다. 드라마 만드는 전 과정(지금까지 한국드라마에 있었던 방송사이야기는, 배우와 매니저, 배우와 작가, 감독들만이 나오는 표피적인 방식에 멜로를 섞어놓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드라마의 제작과정 전반의 볼거릴 제공함은 물론 모든 스탭들의 노고를 생생하게 스케치하고, 이를 우리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문제로 까지 이어가려한다) 보여줌으로써 풍성하고도 색다른 볼거릴 제공하고, 사전제작으로 완성도를 높이고, 매회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나레이션, 미니성의 강한 스토리에 테마가 있는 시추에이션 형식(1화 - 적, 2화 - 설레임, 3화 - 아무도 모른다, 4화 - 중독 등으로 구성) 을 사용,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드라마의 새로운 형식미를 추구하려 한다.
5. 작가의도 :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각박해서 못살겠다, 인정미가 없 다, 사랑의 부재다, 가족애조차 함몰이다 하면서 저마다 우려의 목소 리를 높인다. 그러나 정작 그 대안은 아무도 제시하지 못한다. 작가는 그 대안으로 먼저 주변의 사람들과 대화하라 권하고 싶다. 그 주변 사람들 최전방에 함께 꿈과 생계를 일궈가는 동료가 있다. 늘상 실적 을 쪼는 상사가 인간미 없다 욕하기 전에 그의 어깨에 짊어진 그의 어린 딸과 아들, 중년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생각한다면 그의 말 이 마냥 고깝게 들리진 않을 것이고, 나와 경쟁을 벌이는 동료가 꼭 나만큼만 성공에 집착하고, 도태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음을 안다면 그 역시 마냥 밉진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너무도 약해 남이 인정해줘야 신이 나는 인간의 허약한 속성 때문에, 때론 단순한 이기 심 때문에 실수를 하고 매몰차도 지지만 집으로 가는 길,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반추는 인지상정이다. 진정한 용서란 한번 봐준다는 생색이 아닌 ‘아, 그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타인(동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가족과 연인간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살맛 역시 날 것이다. 모두가 소통을 원하면서 정작 모두 다 소통하길 꺼려하는 우리의 마음속엔, ‘상대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란 안쓰런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 때론 그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하고, 외면도 하지만, 결국엔 그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를 내는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있다. 작가는 그들의 작은 용기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도 생동감 넘치게 하는지 얘기하고 싶다.
6. 등장인물 :
1) 주준영(여, 20대 후반) - 감독.
혹독한 조연출을 10개월 전에 청산하고, 최근 찍은 단막극 두 개가 자타가 공인하는 작품성과 시청률을 거머쥐고, 해외 드라마 페스티벌에 나가 상까지 받게 되면서, 일약 방송가에 주목받는 새내기 감독이 되었다. 말은 직설적이고, 일은 열정적이고, 동료와는 유쾌하게, 사랑에는 걸림 없는, 당차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다. 그런 그녀도 때론 소심하고, 상처받고, 아파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없다. 동료들은 그녀가 남성천국인 드라마국에서 여린 여자의 몸으로 물불 안 가리고 천지사방을 헤집고 다니며 좌충우돌하며 제 세계를 일궈 가는 게 안쓰럽고, 대단하다 말하지만, 그녀는 그럴 때마다 대놓고 웃기지마라 한다. 그들의 말투에 ‘여자주제에’라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선심을 느끼는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당당한 동료, 무서운 경쟁자로 인식되고 싶을 뿐, 더 이상의 평가는 모두 오바라 생각한다.
1남 2녀의 막내(오빠는 결혼해 외국에서 생활, 언니는 현재 독립해서 혼자 살면서 이혼남과 열애중이고, 본인은 혼자 여의도 아파트에 기거 중)로, 교수에 시인인 아버지와 갑부 집안의 막내딸인 엄마사이에서 겉으론 누가 봐도 유복하게 자랐다. 친구도 애인도 동료도 그녀의 배경만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막내딸 소릴 할 때면 ‘부럽지?’ 하고 웃으며 받아치지만, 내심 쓸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 법이니까. 평생을 아무도 모르게 자식들마저 속여 가며 (코흘리개 일곱 살 처음으로, 그녀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와 외도하는 엄마를 목격을 했다, 그리고 이후 사춘기에 다시. 상처받은 그녀가 지방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거기서, 아버지의 외도로 또 한 번 상처받는다. 이게 무언가, 그녀는 그 혼란을 차마 무서워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따져보지도 못하고, 지금껏 이다. 본인은 스스로 이것을 이해라하지만, 지오 눈에 그것은 분명 외면이다) 한 평생을 배신과 무관심과 증오를 내뿜으며 살아가는 부모를 보며 그녀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가 얼마나 얄팍하고 허무한지를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첫사랑 지오도 나름 쿨하게 보냈고, 두 번째 사랑 준기도 간다고 하니, 쿨하게 보낼 참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시간남아 봐 온 게 허황된 사랑에 애끓는 드라마와 영화뿐이라 그런가, 아니면 어리석어 그런가(이 나이에 순수는 그녀는 어리석음이라 치부한다), 그녀는 이미 끝난 게 너무도 확연한 지오와의 관계를 놓지도 잡지도 못하고 가슴이 아린다.
1) 정지오 (남, 30대 초반) - 감독.
단막은 물론 3년 동안 만든 미니시리즈 두 개가, 시청률도 나쁘지 않고, 작품성면에선 탁월했다. 현재 작품으로나 시청률로나 손색없는 미니시리즈를 촬영 중이다. 예리하고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고 따뜻하고 열정적이다. 후배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집안의 1남 2녀 중 막내이자, 장남이다. 가난이 싫어, 죽자 사자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해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영화가 좋아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매달 나오는 월급이 필요해 방송국을 지원했다. 반벙어리에 다혈질 아버지와 나이 오십에 소박맞은 큰 누나, 포장마차를 하며 또순이처럼 살고 있는 작은 누나는 그에게 짐이기도 하고, 위안이기도하다. 높은 연봉의 외부 연출로 나가고도 싶지만, 인간을 표현하는 드라마를 단순한 생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사춘기시절 삶의 막막함과 인간존재의 호기심을 그는 영화에서 배웠다.) 나가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냉정한 세상이 무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끝난 것 같지만,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에 있는 준영은, 그에게 아킬레스건만 같은 존재다. 왜 준영을 사랑한다 말 못하는가, 왜 그녀를 동료로 밖에 두지 않나, 때로는 그녀도 나도 서로를 간절히 원하지 않는가, 한번쯤 기쁘게 사랑할 수는 없는가, 스스로에게 물을 때 마다 올라오는 가난에 대한 자격지심과 현실의 무게는 그를 숨 조르게 한다. 감당할 수 없다면, 외면하자. 그렇게 준영을 그는 밖으로만 몰아낸다. 그런데도 얘는(준영) 왜 이리도 안고 싶게 만드는가. 엎친 데 덮친다고 그는 눈에 이상마저 느끼게 된다.
1) 손규호 (남, 30대 초반) - 감독.
명품 좋아하고, 출세 좋아하고, 이기적이며, 시청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뇌물도 문제시 되지 않는 수준에서 적당히 받아먹고, 남의 캐스팅도 가로채길 마다 않는, 누가 봐도 속물중의 속물이다. 현재 방송 3사중 시청률로 가장 잘나간다. 도도하고, 냉정하고, 바람기 많아 동료들로부터 왕따 수준이다. 이해심 많은 지오조차도 그에게 냉담하다. 지오와는 드라마가치관에 있어 극단적 대립관계에 놓여있고, 몇 번 지오의 캐스팅에 손을 댄 적이 있다. 동료들은 마치 지오를 선, 그를 악으로 규정짓고 있는 듯하다.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지향하는 걸 지향할 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 모든 걸 인정할 만큼 솔직하지 않은가. 국회의원을 지내고, 현재 대선을 바라볼 만큼 힘 있는 정치인인 아버지와 다소곳하고 따뜻한 어머니 사이에 2남중 장남으로, 남 부러울 것 없는데, 문제는 동생 규민이다. 어려선 제 말이라면 무조건이던 놈이 중학교 때부터 주먹질로 말썽을 피우더니, 이즘은 더욱 강도 높게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아버지의 출세에 영향을 주면 어떻게 하려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의 곁에 해진이 나타난다. 이제 갓 스무살이 넘은 기집애가 저를 사랑한단다. 캐스팅을 해달란 뜻인가 본데 어림없다. 근데 이 어림없고 어이없는 사랑에 왜 자꾸 설레이는 거지. 연애라면 지겹다던 그가, 스스로가 닳고 닳았다던 그가, 꼬맹이의 전화한통에 하루가 즐겁다. 지오에게 수술을 결심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2) 윤 영 (여, 40대 초반) - 배우.
감독과 스탭, 후배 배우들 사이에서 마귀할멈이라고 불린다. 젊어선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우주연을 몽땅 휩쓸어 독식했다. 그리고 한창 전성기인 20대 후반 돌연 맞선 두 번 본 게 전부인 대기업총수 아들한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이내, 이혼하고, 다시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와 재혼, 딸을 낳았다. (현재 딸은 미국 유학중이다.) 그리고 다시 이혼을 하고 10년 전부터 혼자 살면서 다시 배우로 활동해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에, 권모술수에 능하다. 대다수의 젊은 감독들은 그녀 (사장, 본부장들과 친분이 있고, 거대 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로 캐스팅에 막강한 영향을 주는)를 무서워는 하지만, 사랑하진 않는다. 그래도 재수 없게 연기는 잘 해, 그게 감독들의 평가다. 그녀는 사람들이 저를 싫어라 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있다. 그러라지 뭐, 나도 지들 별론데 지들이라고 날 좋아할 필욘 없지, 쿨하다. 그녀는 생부도 모르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참으로 천박하고 천박한 비어홀마담이었던, 어머니를 그녀는 참으로 미워라 했다, 그러나 늘 희망 같은 게 있었다. 언젠간 드라마틱하게 어머니와 제가 화해할 수도 있으리라는. 그러나 어머니의 치매 판정으로 그 희망은 물 건너갔다. <남자가 좋아>,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났었구나, 제 인생을 통해 그렇게 이제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는데, 그녀는 사는 게 좀 아프다. 준영은 물론 모든 방송가사람들이 싫어하는 그녀, 이제 늙어가는 그녀가 배우로서 이 세계에 살아남는 방법은 무 얼까?
2) 양수경 (남, 20대 후반) - 조감독.
별명 미친 미스양 (재밌는 성격과 여성스런 이름 땜에 붙여진 별명이지만, 그는 죽어라 사양(?)한다) 준영과는 동갑이지만, 재수를 하고, 의가사 제대 (군대서 축구를 하다 다릴 다쳤는데, 다행히 일상에는 지상이 없다, 남들은 행운이라 하는데, 자신은 불명예스럽다)를 하고, 방송고시(?)를 두 번 낙방했다 붙어서 이제 조연출 2년 차다 (방송 사고를 내 지방근무를 하다, 드라마국에 재입성한다). 택시 운전하는 아버지와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건강하게 자랐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지만, 대부분은 방송국에서 지낸다. 성격이 급하고, 단순하고, 앞뒤 안 가리는 다혈질에 좌충우돌 사고뭉치다. 자신은 자신이 지오 선배처럼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남 보기엔 무지기 잘난 척하는 젖비린내 나는 어린놈일 뿐이다. 그런데 너무나 모든 게 명백하고 심플하던 그의 삶에 준영이 나타면서 혼란이 시작된다. 전엔 마냥 재수 없던 기집애가 2년 만에 만나 같은 팀이 되어 일하고 나서부터 자꾸 꿈자리까지 찾아와 그를 설레게 하고, 애타게 한다. ‘지가 잘나봤자, 여자지’ 그는 저돌적으로 대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여자 꿈쩍을 안한다. 술김에 입을 맞추면, 지가 더 달려들어 설렘을 무색하게 만들고, 폼을 잡으려하면 일이나 잘하시지 퉁박주기 일쑤다. 그래도 천번 만번 대시하리라 했는데, 자신이 존경하고 제 인생의 모델인 하늘같은 지오가 준영을 사랑하는 걸 알게 되면서, 누가 뭐래도 잘나가던 인생에 심각한 태클이 걸리는 순간이다. 그는 그렇게 혼란을 겪으며 남자로 감독으로 성장해 가는데,
2) 장해진 (여, 20살) - 신인배우.
이제 막 데뷔를 앞두고 있다. 학창시절 단순히 좋아하던 연예인의 팬클럽 회장을 하다가, 매니저에 눈에 띄어 배우가 됐다. 순수하고 맑고 밝다. 무능력하지만 긍정적인 경찰 아버지와 작은 동네 수퍼를 하는 생활력 강한 엄마 밑에서 외동으로 자랐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 없고, 놀기 좋아하는 그녀에게 배우란 직업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매니저가 달려들 때도 나같은 게 뭘 하며 기대감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규호를 만났다. 시니컬하고, 재수 없이 말하는 이 남자가 재밌다. 대체 무슨 뒤틀린 맘인지, 규호가 싫다 그러면 그럴수록 규호가 좋다. 주변 동료들이 매니저가 다른 놈은 몰라도 규호만은 안된다는 데도 그녀는 아랑곳이 없다. 그녀는 현재 그녀 자신이 얼마나 야망이 큰 줄 아직은 모르지만, 규호를 만나면서, 그 야망 때문에 숱하게 그를 배신하게 된다. 사랑과 야망 그사이에서, 뭐가 옳은지 오래도록 그녀는 알지 못하는데..
2) 김민철 (남, 40대 중반) - 드라마국 국장.
젊은 나이에 승승가도를 달려 국장에 이르렀다. 젊어선 작품성 있는 작품도 만들고, 시청률도 낼 만큼 냈다. 현장에서 떠나 데스크에 있으면서도, 작품성과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현재 역대 최고의 국장으로 불린다. 그러나 굳이 작품성을 내세우기보단 시청률이 우선이라 강조한다. 별명이 독사로 불릴 만큼, 심하게 독선적이고 다혈질적이다.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조차 그에게 감히 말도 못 붙일 지경이다. 그런 그에게 지오는, 그가 같이 술을 먹는 유일한 동료다. 남들은 그가 인정사정없고 일 중독자에 방송국 이미지(결국엔 자기의 출세)만 생각한다지만, 지오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이 다 좋을 수는 없는 법, 그가 뒷거래하지 않는 정직함을 알고, 후배를 편성에서 자르고 맘이 아파, 여의도 바닥을 헤매고 다니고, 너무도 드라마를 사랑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유혹이 온다. 감독으로서 싹수가 보이는 준영(민철과는 적대적인)의 드라마에 지난 사랑이었던 윤영이 자길 캐스팅해 달라 부탁을 해온 것이다. 헌신짝처럼 자길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웃기는 여자다. 그런데 그 웃기는, 말도 안 되는 여자가 그는 아직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3) 박현섭 (남, 40대 중반) - 드라마국.
드라마 감독으로서나 CP로서나 회사에 그닥 도움이 안 된다. 능력 없다. 그러나, 인정미 넘치고, 이해심 많고, 농담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은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탓에 적이 없고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다. 김민철 국장과는 입사동기로 늘, 그에게 작품성도 시청률도, 승진도 뒤지며 산다. 샘은 나도 김민철의 리더십을 존경해마지 않고, 자신에겐 없는 그의 드라마에 대한 치열함도 감독시절 그의 작품도 좋아한다. 다만 성질은 좀 고쳐야 하지 않나, 잘난 척은 좀 줄여야 하지 않나 싶다. 맏형 같은 자상함과, 엄마 같은 살가움이 있다. 아내를 세상에서 젤 사랑하고, 딸내미 하나있는 걸 금지옥엽처럼 여긴다. 민철과 윤영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한때 그도 윤영을 사랑했었다. 농담처럼 그녀와 키스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 말한다. 진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3) 이준기 (남, 30대 초반) - 대학 병원 외과의사.
현재 준영의 애인. 준영과 친구의 소개팅으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완벽하고, 직선적이고, 냉정하다. 그런 그가 자유분방하고 지 멋대로인 준영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는 나름대로 참 힘들었다. 그만큼 준영은 그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즘 그는 준영과의 관계를 더 지속시키시란 무리다 싶다. 외과의사로서 아내의 내조는 필수적인데, 준영에게 내조를 바라기란 무리였다. 그녀는 일반직장이 아닌 전문직이었고, 게다가 그 일을 너무도 사랑했고, 외동아들인 제 처지는 아랑곳 않고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 결혼도 별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헤어지자 맘먹고 얘기하면, 그러자 하며 냉하게 돌아선 준영이 다시 문자로 보고 싶단 말만 해도, 맘을 다잡지 못하고, 그는 다시 준영을 만났다. 그렇게 헤어지고 만나길 벌써 1년 새 서너 번이었다. 최근에도 그들은 한 달간의 이별을 접고, 다시 만났다. 훗날, 지오의 수술을 맡게 되면서 준영과 다시 만나게 된다.
4) 오민숙 (여, 50대 후반) - 배우.
어려서 배우생활로 접어들어 이날 이때껏 조연만 했다.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상대배역의 연기를 잘 받쳐 줄 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모던한 연기에 대해선 누구나가 경배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성격이 뾰족하고 누구나를 씹어대는 성격에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경우 바른 지오조차 그녀와 대판 붙어버릴 만큼. 그러나 지오와는 그 일로 친한 친구사이가 된다. 일곱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집안 식구들 수발드느라 결혼을 못한 노처녀다. 윤영과는 친하지만, 그녀의 권모술수에 대해서는 대놓고 ‘그렇게 살지 마, 이년아’ 할 만큼 바른 소릴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입에 칼 물고, 손엔 갈고리 차고, 걸리면 딴지걸지만, 그것만이 그녀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아는 사람은 윤영뿐이다. 배우 수진을 사랑하는 정일우(배우)를 아무도 모르게 혼자 평생 짝사랑하고 있다.
4) 김수진 (여, 50대 초반) - 배우.
민숙은 그녀를 애증의 관계로 보지만, 그녀는 민숙이 재밌는 친구다. 민숙과는 달리 젊어서는 이쁜 얼굴로 주연을 도맡아 했고, 나이들어선 성격 좋은 엄마 역할로, 코믹한 이미지로 배우로서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게다가 입담 좋고, 성격 좋아 감독과 스탭들에게 ‘엄마, 누나’로 불리며 인기 만점이다. 결혼해 살다가,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한지 십년 째다. 자식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잘나가고 있다.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그녀를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는 정일우에게는 왠지 친구이상의 감정이 가지 않아, 맘을 내주지 못한다. 사실 그간 연애를 통 안했던 것도 아닌데, 살림을 차리지 않은 건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는 때문이다. 정일우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게 편하고, 일우를 향한 민숙의 마음을 조금은 아는지라 편 치가 않다.그런데 어느 날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찾아온다. 아내와 이혼을 하려한다는 것이다. 이게 왠 떡인가 싶다. 그런데, 그게 사기(그는 이미 재혼한 여자와는 헤어지고, 사업에 실패한 낙오자이다)라니, 그러나 그녀가 이를 알았을 땐 이미 집에 차압이 늘어온 이후였다. 하늘이 노랗기만 하다.
4) 성소유 (남, 20대 후반) - 스타배우
광고 패션 모델계에서는 이미 내노라하는 스타. 최근 개봉한 영화에서 주조연급으로 배우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다정하고, 농담도 잘하고, 열정적이다. 특히나, 스텝들에게 친절하고, 매너 좋기로 유명하다. 작은 프로덕션에서 있다가, 최근 영화를 (단역으로 출연한) 본 윤영에 의해, 윤영이 대주주로 있는 프로덕션에 거대한 몸값을 받고 스카웃 되어왔다. 남들은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윤영의 종마 정도로 보지만, 그는 진심으로 윤영을 사랑한다. 그러나, 윤영조차 젊어서 한때 지나가는 당연한 과정으로 보는 게 속상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윤영이 예상한대로 그녀를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데.. 윤영의 말대로, 인생엔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게 합리화인가?
4) 이연희 (여, 30대 초반) - 현재 지오의 애인.
대학시절 준영이 지오를 만나기 이전부터 연인관계였다. 그리고 지오가 준영과 헤어지자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사업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그리고 남자와 별거(현재 미국에서 사업 중)하고 다시 1년 전 우연히 지오를 만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솔직하고, 모든 것에 자유롭다. 누가 봐도 혼자 살아야 할 사람이다. 사람들은 지오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말하지만, 그녀만은 지오가 얼마나 뒤틀리고 보수적이고 비극적인 줄을 안다. 그리고 준영을 끔직이 사랑하는 것도. 남편과 이혼할 맘도 없다. 그도 사랑하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오도 좋다. 이 이기심을 어떻게 해야 할까?
4) 이서우 (여, 30대 후반) - 드라마 작가.
거침없는 말투, 일상이나 대본이나 독특한 대사법(?)을 가졌다. 꼼꼼하고, 정확한 대본제출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잘난척한단 말도 곧잘 듣는다. 연애도 않고, 거의 일중독에 빠져 산다. 드라마 작가세계에서 손에 꼽는 위치에 있다. 감독을 두 번 정도 갈아치운 적이 있어서, 방송국내 감독들에겐 그닥 평판이 좋지 않지만, 그와 일을 해본 지오는 그녀에게 절대적인 신임이 있다(지오와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다 믿는 때문이다. 지오의 집안사정, 준영에 대한 감정들을 상세히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녀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단 걸 지오도 모를 만큼 입이 무겁다.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공장생활, 포장마차, 갖은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홉 식구의 가장이다. 작가에게 이야기를 맡기지 않고, 마치 자기가 작가인양 이야기를 꾸려오는 준영이 감독으로서 그닥 탐탁치가 않다. 그런데, 그녀와 한 팀이 됐다. 좋다, 어차피 프론데 하면 하는 거지, 맘을 냈는데, 준영이가 그녀를 싫단다. 어쭈 이것 봐라, 그녀는 준영과 띠걱거리기도 하지만, 깊은 우정을 쌓아가는데, 지오를 아무도 모르게 짝사랑한다. 사는 것도 고단한데 짝사랑이라니, 젠장할 팔자다 싶다.
5) 김민희 (여, 20대 초반) - 여자조감독. 일명 김군.
얼굴은 이쁘장한데, 옷차림도 말투도 성격도 사내같다. 수경을 좋아하고, 준영과 지오를 존경한다. 앞뒤 안 가리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해, 주위사람들로 부터 핵폭탄소릴 듣지만, 정작 본인은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 그 외 - 촬영, 조명, 동시녹음, 스크립터, 소품, 섭외, FD, 다수의 주조연배우등 전 스탭으로 분한 많은 사람들
7. 줄거리 :
1) 준영, 지오, 수경을 중심으로
대학을 입학해 영화동아리에서 만난 예비역 지오는 준영에게 첨부터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연희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설레는 맘을 접고 1년이 갔는데, 그가 연희와 헤어지게 되고 혼자 여행을 떠나고, 준영은 촬영을 위해 여행 을 떠나서, 정말 거짓말처럼 작은 소도시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렇게 합류한 여행에서, 준영은 아직 이별의 아픔도 씻겨내지 못한 그에게 프로포즐 했었다. ‘좋아한다고 알고나 있으라고’ 우동집에서 밑져야 본전이다 싶게 어설프게 웃으며 데면데면 건넨 말이, 나중에 지오는 과장되지 않아, 참 많이 미더웠다고 했다. 둘은 그렇게 시작했다. 같이 영화를 찍고, 공부를 하고, 첫키스도(재미없이 버스 안에서 준영이 먼저 어설프게 시도했었다. 그러나 준영은 나중에도 그만한 키스는 생애 다시 없으라 생각한다) 했다. 결혼은 몰라도 준영은 지오와의 사랑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했든가. 준영과 지오는 1년을 가지 못했다. 영화도 찍을 겸, 농활도 할 겸 장소를 물색하다 정해진 장소가 지오의 본가였다. 준영은 그 계획이 너무도 설렜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집에, 그의 부모가 있는 집에, 일을 핑계 삼아 슬쩍 가볼 수 있다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그 셀렘은 박살이 나고 만다. 가방 짐을 풀기도 전에 본가 근처에 산다는 늙은 지오의 누나(사람이 너무 좋아, 차라리 모자른 듯 보이는)가, 동네 여자에게 제 남편에게 꼬리친 년이라 하며 머리채가 잡히는 꼴을 본 것이다. 게다가 지오의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화를 내며 두 여자를 빗자루로 때리고, 사위가 와서 말리자 그와 또 쌈이 붙고, 그걸 지오와 동아리친구들이 말리고, 난장도 그런 난장이 없었다. 첫날밤을 그렇게 보냈는데, 담날 새벽 지오부는 그녀에게 밥도 제대로 못한다고 악을 쓰고, 준영은 서운해도 시골노인네들은 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오가 먼저 올라가라 한다. 화장실도 재래식이고, 여러모로 그녀가 불편할거라나. ‘아니다 같이 있겠다’ 했는데, 덜컥 뭘 잘못 먹었는지 장염이 걸리고, 준영은 결국 그곳에서 이틀을 앓으며 버티다 먼저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이후 서울에서 다시 만난 지오는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전화도 해보고 찾아도 갔지만, 지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 좋다, 나도 구질스럽게 남자한테 목매기는 싫다’그렇게 말하고 돌아설 땐 냉정한 마음도 일고 눈물도 안 났는데, 이후, 지오와 연희가 다시 만나는 것을 알았을 때 준영은 제 방안에서 소주 두 병을 까고, 이유도 모른 채 목을 놓아 울었었다. 그리고 지오가 졸업을 하고, 방송국 드라마국에서 2년 반 만에 다시 만나, 동료로 선후배로 6년을 지내면서 오늘까지다.
‘M사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 회사야?’, 준영이 첫 입사를 했을 때 지오 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지도 않고 건넨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지오를 제법 잊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넘 서운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이 지오와의 관계를 조금은(연희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걸 알고 난 후였다) 기대했음을.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지오는 이미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었고, 일이 넘 바빴고, 곁을 내주지 않았다. 니가 날 외면하면 나도 기꺼이 외면해주지, 준영은 어느 한 날 오래된 미련을 칼로 무 베듯 자르고, 준기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지오가 연희를 만나게 되면서, 그들 관계는 정말 동료가 된듯했다. 그리고 한 회사에 있어도 각자의 일로 그닥 부딪힐 일 없이 살아왔는데, 지오의 작품이 방영되던 시점에 그만 그 주 촬영 테잎이 손상되는 일이 벌어지고, 준영은 회사의 지시로 서브감독으로 현장에 나가게 된다. 그런데, 촬영 현장에서 무리한 연출로 스턴트맨 사고가 나면서, 그 일로 지오는 방송 불발 직전에 놓이고, 하필 그날은 준기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준영이 촬영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준기는 이별을 선언했다. 제 일만 우선시하는 준영의 이기심에 지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간 지오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방송을 내보내고, 성난 송출부 부장(방송 불발사고를 직전에 막은)에게 뺨을 맞고 만다.
‘내가 적당히 하랬지? 그렇게 니가 잘났냐? 거기서 왜 곡예를 해, 자식아!, 니 그림만 잘나 보이면 사람이 다치든 방송이 나가든 말든 너는 상관이 없어? 그래?!’ 그 일로 지오는 악을 써가며 준영을 남들처럼 몰아 세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 그럼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한때 ..사랑한다고 했던 사인데, 날 이 정도로 밖에 안보는 건 너무 하지 않니?’ 남들이 듣든 말든 준영도 악을 쓰며 할 말을 다했다. 그리고 그 밤 마지막 경고 라며 ‘일이냐, 나냐’ 를 선택하라고 한 준기에게 준영은 ‘일’ 이라고 말했다. 끝은 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걸까, 이내 지오가 연희와 헤어졌다.
지오에게 연희는 첨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관계에서 사랑을 한다고 할 때, 노력한다는 말이나 참는다고 하는 말들은 이별을 준비하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오는 연희를 떠올리면 늘 그런 단어가 생각났다. 사랑이 쉬운 사람, 못돼서가 아니라, 헤퍼서가 아니라, 연희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연희와 헤어지던 날 그는 슬프지 않았다. ‘아, 제발 이젠 끝이 나거라’ 간절한 바람과 동시에 준영이 그리웠다. 그 밤 그는 화해(방송일로 불거진)를 빌미로 준영을 찾아갔다. ‘술만 사오면 다야?’ 준영은 여느 때처럼 별일 없단 듯 지오를 받아들이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6년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 ‘내가 선배 만날 때 뭘 잘못했어? 몰라서 묻는 거야.’ 지오는 그 밤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음 덮어지는 게 아니라 그립게 싸인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그는, 이제 말해버려서 자유롭고 싶었다. ‘가난한 우리 집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널 보면서, 정이 뚝 떨어졌어’ 그 말에 그건 아니라고 우길 줄 알았는데, 준영은 가볍게 ‘스물 한 살 기집애가, 한 번도 고생이라고는 안 해본 기집애가, 좀 놀랠 수 있지 않나? 참 이해심 없다’ 한다. ‘넌 왜 그렇게 뻔뻔스럽냐?’, 지오는 그 말을 하며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준영을 못 잊는다 싶었다. 준영은 모든 게 참 담백한, 그래서 늘 그녀 맘속엔 대체 뭐가 있나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밤 자신을 마중하는 준영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참지 못하고 기습 키스를 하고 돌아서버렸다. 담날 회사에 출근한 지오의 책상 앞엔 준영의 메모가 놓여져 있었다.
<어젯밤 키스가 무슨 의미냐고 주준영이 정지오에게 물음>, 지오는 답장했다 <남잔 술 먹으면 가끔 그런 짓을 함, 별일 아님>, 이내 준영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만나자>, 지오는 <싫다>고 했다. 고생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준영에게, 사는 게 축제라고 생각하는 준영에게 그의 삶은 분명 족쇄가 될게 뻔했다. 준영이 ‘밥을 못 먹고사는 절대 가난도 아닌데, 그건 구닥다리 콤플렉스’ 라고 말을 해도, 그는 ‘나는 구닥다리야’ 하며 말문을 막았다. 그런데, 친동생같은 수경이 ‘형, 난 미치겠다, 준영이 땜에, 그 재수 없는 게 넘 좋아진다’ 며 술에 취해 고백을 해오던 날 그는 정말 가슴이 덜컥했다. 준영과 때론 편집실에서 회사에서 밤을 새우며 캐스팅문제에 대해, 드라마에 대해, 목청을 높이며 서로의 의견을 펼 때, 그는 정말 그녀와 그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했는데, 수경과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는 그녈 볼 때마다, 질투가 나고, 화가 나고, 외로웠다.
수경은 준영이 지금당장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게 여자에 대한 그의 지론이다. 그는 준영이 싫대도 준영 옆에 있고, 준영이 화를 내고, 구박을 해도, 늘 곁에 있고 싶었다. 친군데 어때하며 볼에 입을 맞추고, 어깨에 손을 두르고, 그 때문에 준영에게 발길로 채여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지오가 그녈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끔은 준영이 그를 이용해 지오의 질투심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았을때, 너무도 낙관적인 그도 울고 싶었다. 그는 그날 팀 회식 때, 죽자 사자 술을 먹고 여의도 대로에서 지오의 멱살을 잡고, 준영의 멱살을 잡고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적으로, 이럴 순 없다고, 내가 호구로 보이냐고, 둘 다 지랄을 한다’ 고 악을 쓰며 성토하고 ‘이제부터 내인생엔 드라마만 있다, 니들은 잊겠다’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자꾸 가슴이 아파졌다. 그리고, 그즘 지오의 눈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그는 그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다. 그는 지오를 미워할 수도 없게 된 게 더욱 울화가 치민다.
지오는 첨엔 눈의 이상이, 피곤에서 오는 줄 알았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피곤이 가중되면 가끔 사물이 흐리거나 이중으로 보이거나 색감을 잃거나하는 증상이 있었다고 했다. ‘그지, 그렇지, 별일 아니겠지?’ 그는 안심했다. 아니, 안심하는 척했다. 절대로 별일이면 안되니까.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준영이, 수경이 자신이 촬영해온 그림의 색감이 안 좋다고, 할 때도 그는 재촬영하면 되지, 별일 아니라고 우겼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원근감을 잃어버린 그가, 촬영감독에게 카메라를 달려오는 전철에 깊이 갔다대라 요구하고, 그바람에 큰 사고가 날 뻔한 일이 생기고, 눈이 정말 심각한가 위급한 마음에 휘청이던 지오가 계단에 구른 것이다. 그즘 엄마같은 큰누나는, 대장암 수술을 받고, 똥기저귀를 차서 아버지 애를 태우는데, 그가 다친 것이다. 다행이 사고는 크지 않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시신경쪽의 문제로 실명우려가 된다, 수술을 받으라는 권고를 받는다. 수술을 권유하는 의사는 완쾌를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감독에게, 가난한 자에게 실명은 사형선고였다. 그 밤 그의 사고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준영에게 그는 아무 일 없다고 호들갑떨며 뭐하러왔냐고 하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밤, 준영과 바다로 갔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지오는 자기와 의미같은 거 안 따지고, 책임져라마라 징징대지 않고 쿨하게 잘 수 있냐고 물었다. 준영은 자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오는 그런 사람이다. 완벽한 출구도 아니면서 늘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놓는, 조금은 비겁한. 그래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러마했다. 지오는, 수경에 대한 죄책감, 준영의 앞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 장차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한 공포를 그 밤 까맣게 잊고 싶었다. 그 밤 둘은 오래 사랑했다. 준영은 이 남자라면, 이렇게 불안정하게 사랑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왜냐고 물음 대답할 순 없지만. 그게 그가 원하는 거라면 해줄 수 있었다. 가끔 남자들이란 한없이 괜한 콤플렉스에 짓눌려 살길 좋아하니까. 그런데, 새벽녘 그가 떠났다. 슈퍼를 갔나, 산책을 갔나, 그러다 전활 했는데, 서울 가는 국도를 달리고 있단다. 그러며 하는 말이, ‘그만 만나자, 그만 이 길고도 어이없는 관계를 끝내자, 뭐냐, 이게’하며 괜한 악을 쓴다. 준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왜 지난날까지 일을 들춰 화를 내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쾅하는 소리가 난다. 지오의 차가 가드레일을 박은 것이다.
준영은 수경에게서 지오의 비극적 상황을 들으며, 사랑이 소용없는, 지오만의 절대 고독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손 놓고 있을 순 없는일 이었다. 이후, 수술을 거부하는 지오에게 준영은 애원하지 않고, 달래지 않고, 윤영(그즘 준영은 그녀와 묘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과 상의해 모질게 접근한다. 규호를 끌어들여 지오가 차기작에 이미 캐스팅한 배우 전부를 가로채라 하고, 핵심축인 작가마저 따로 만나, 일에서 손을 떼게 한다. 일이 삶의 전부인 지오에게 그 일은분명 치명적이고, 다시 준영과의 관계회복을 막는 악수일 것이다. 그래도 준영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우린 끝난 사이 아니야, 분명히 말하지만, 복수야, 이건’ 그녀는 독해졌다. 지오는 죽음으로 몰아넣어야만 다시 살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임으로 주저하지 않았다. 지오가 ‘가만 두지 않겠다’ 하고 수술실을 들어가던 날, 준영은 이제 정말 그와의 사랑이 끝나겠구나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준영의 눈에 그날은 해가 밝았다.
2) 손규호와 장해진을 중심으로 -
작품 때 마다 전형적이다, 상투적이다, 자기복제다, 온갖 악평이 쏟아져도, 그는 단연 이 시대 최고의 시청률 제조기다. 때문에, 아랑곳이 없다. 시청자가 많이 본다는 것은 시청자에게 자신의 얘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면 됐다 싶다. 준영이 몇 편의 드라마로 깝죽대도, 그는 준영정도는 라이벌로 생각도 않는다. 지오라면 몰라도. 어쨌든, 그가 해진을 만난 건 천지연 수목드라마의 오디션에서였다. 해진은 대본은 그만그만 읽어 제끼는 거 같은데, 그만그만할 뿐, 매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화장실에 가자, 요 기집애 볼일 보는데 까지 따라와 눈을 똑바로 뜨고, 당돌하게 하는 말이, 한번 믿어주심 잘할 건데, 저가 무명이라도 무시함 후회할 거란다. 어이가 없었다. ‘너같은 애 숱해 무시하며 살았어도 단 한 번 후회한 적 없거든’ 그는 아랑곳없이 마저 볼일을 다보고, 자릴 뜨고, 해진의 점수표에 크게 X표시를 했다. 근데, 이게 스토커도 아니고, 집 앞에도 오고, 주차장에도 오고, 화를 돋구었다. 그는 매니저에게 전화해, ‘배우관리 제대로 해라, 한번만 더 그 기집애가 내 문앞에 나타남, 니네 회사 배우 전부를 이번 드라마는 물론 담번에 하는 드라마에서까지 보이콧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CF에 단발로 나온, 해진을 보게 된다. 카메라발도 잘 받고, 연기가 제법이다 싶다. 그는 차기 준영의 작품에 이미 그녀가 꽤 큰 역할로 캐스팅 거론이 되고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 이런 욕심이 나네,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해진을 캐스팅해버린다. ‘장해진 매니저와 내가 만나고 있는 거 알았지? 근데, 어떻게 선배가 되서, 후배 배우를 가로채? 인생 정말 그렇게 살래?’ 준영은 그 일로 화가 나,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 냉정한 바닥에 선후배라니, 얘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싶었다. 그는 어이없이 웃으며 ‘미안하다’ 말했다. ‘인간 참 저질이다, 걔 가져’ 준영이 쨉을 날려 왔다. 연애가 안 되면 친구로라도 삼고 싶은, 기집애다 싶다.
규호는 해진과 작업하며, 예상외로 놈이 귀엽단 생각이 든다. 감정이 안 붙는다 화를 내면, ‘지금하고 있잖아요, 쫌만 기다려요’ 하며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며 기가 죽는 법이 없고, 기어이 씬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하는 말이 ‘좋아해요’ 란다. ‘니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하고? 너 어디서 그런 말 마라, 딴 놈 같음 너 엎어뜨려, 자식아’ 했다. 규호가 해진을 마다한 게 도덕성이 많아선 아니었다, 그는 제법 배우들과 연분설이 났고, 그 연분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제 갓 스무살인 애는,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얘가 입이 가벼운지 어쩐지도 모르겠고.
그 일 후에도 해진은 여전히 그를 좋다고 했다, 그 말은 솜털처럼 가벼워서 늘 웃음이 났지만, 놈이 집 앞에서 ‘얼굴만 보고 갈라고 했어요, 봤으 니 갈게요’ 하며 돌아설 때나, ‘아버지가 높은 사람이라며요? 아, 그럼 못 나가는 집안의 나랑 결혼하기 힘들겠다, 난 연애만은 싫고 결혼이 좋은데’ 하며 술 먹고 눈물을 글썽일 때면 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놈을 안고 싶어졌다. 그리고 비오는 어느 날, 좋은 비디오가 있다며 연기공부 좀 해달라고 해진이 규호를 찾아왔을 때, 규호는 해진에게 입맞춤을 당하고 만다. ‘너 미쳤냐고?’ 소릴치고 내쫓아버렸지만, 좋았다.
그렇게 규호가 해진에게 맘을 줬는데, 해진이 그의 뒷통수를 친다. 다시 준영의 작품에 가겠다는 것이다. 비중이 작다고. 그 말은 해진의 입 을 통해서 아닌 매니저의 입을 통해서였다. 설마, 요녀석이 나를 후릴까 싶어, 해진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도 않는다. 맘이 슬픔으로 싸했지만 그는 이내 웃긴 경험했네 하며 훌훌 털었다. 어린애한테 놀아난 자신이 웃기도 했다. 그리고, 해진은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야, 정말 웃기는 세상이다 싶었다. 그리고 그때 동생이 조직폭력배와 연루해(이미 몇 번의 사건으로 동생 규민은 매스컴을 타고, 그때마다 부친은 동생을 위해 온갖 백을 다 써 빼줬었다) 큰 일을 치르고 결국엔 현상수배로 쫓기는 신세까지 되면서, 그 일로 존경하는 부친이 정치일선에서 떠나는 일이 생기고, 그는 난생처음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데, 그 밤 해진이 찾아와, ‘캐스팅에 욕심이 났어요, 내가 정말 연기 잘하는데 안 믿어주고, 좋아한다는데도 아니라 그러구, 위로해줄라고 왔는데, 변명만 한다. 나 싫다면 갈게요’ 한다. 그는 그 밤 해진과 깊게 사랑했다. 그리고 그 고민을 준영에게 말했다. ‘해진이 걔를 사랑하는데, 걔가 나를 사랑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넌 여자니까, 여자를 알 거 같아서 묻는 건데, 걔가 나를...’ 욕먹을 작심하고 물었는데, 준영이 차분히 받아준다. ‘해진이 믿을 애가 못돼, 야망이 넘 커. 똑똑한 척 혼자 다하고, 바보같이..알잖아, 나한테 안 물어도’, ‘알지, 나도. 근데 뭐 걔랑 살라 그러는 건 아니고, 배신당할 준비하고 있음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짐짓 별 일 아닌 듯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리고 해진과 달콤한 몇 개월이 지났는데, 어느 날 그는 신문기사에 해진이 재벌 2세와 결혼을 한다는 기사를 읽고 만다. 그날 그는 술을 빌미삼아, 첨으로 남 앞에서 ‘아, 염병 내가, 내가 싫다, 등치 큰 사내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놈이, 쪼그만 기집애 하나 땜에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하며 목을 놓아 울었다. 그것도 정말 지기 싫은 지오앞에서. 그래도, 그 애가 다시 온다면, 그는 받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애가 다시 왔다. 또 상처를 주려나보다.
3) 윤영과 민철, 민숙과 수진를 중심으로 -
데뷔 초 감독과 배우로 만난 윤영과 민철은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을 했다. 열정이 독한 만큼 식는 속도도 빨랐다. 20대 중반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목매는 그가 싫어졌다. 야망도 챙겨야 했고. 어느 한 날 자신의 변심을 알지 못하는 민철에게 윤영은 빅카드를 제시한다. 결혼을 청산하고 홍콩으로 잠적하자 한 것이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설마 이혼을 할까? 그즘 재벌 2세의 청혼을 받아두고 골머릴 앓던 그녀가 나름 계산을 하고 제시한 빅카드였다. 분명 이혼은 안 할 것이다, 그럼 그를 용서 못하는 척하고 일을 좀 더 하다가, 재벌 2세를 좀 만나보고 아님 말고, 좀 괜찮음 계속 민철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앞날을 가늠해 보자. 그런데, 덜컥 민철이 이혼을 하고 만 것이다. 젠장. 윤영은 그가 자길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중요치 않았다. 제 살길이 더 급했다. 그가 이혼했으니, 몇월 몇시 공항에서 보자 했다.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연락을 두절하고, 한 달도 채 못돼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재벌과 결혼을 했다. 연예생활도 승승장구, 더 이상 민철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와 이혼을 하고 다시 의사와 재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나름 철이 들어갔다. 죄받나, 민철에게 모질게 한 그 죄. 남편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1, 2년 밖에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젊은 애들과 바람을 피우고. 그리고 떠날 때는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말을 했다. ‘너는 멀리서 보면 괜찮아도, 가까이 있으면 구린 냄새가 나는 여자다’. 아프진 않았지만, 씁쓸했다. 그 말은 엄마를 떠나던 남자들이 엄마에게 한말이었다. 이즘 그녀는 자주 민철이 생각났다. 그는 정말 그녀에게 신사였다. 당시엔 늘 따뜻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를 질리게 했지만, 나이가 드니 그게 정말 사랑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어느 한 날 민철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준영의 작품에 캐스팅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즘 사업적으로는 몰라도, 배우로서 그녀는 묘하게 밀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릴 듣는 순간 그녀는 설랬다. 만나자는 제의에 민철은 담박에 ‘왜, 또 이용하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미 그는 전에 알던 신사가 아니었다. 후배들의 별명처럼 독사처럼 독하게 변해있었다. 매력이 있어졌네, 윤영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민철은 윤영의 제의가 어이없었다. 니가 감히 날 다시 이용하려고. 그는 이를 앙다물고, 다신 당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그날 밤 윤영의 전화를 기다리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윤영이 우연을 가장 해 그는 다시 윤영과 재회했다(아내와는 윤영의 일로 이혼해 살다가, 최근 다시 재결합을 준비 중이다). 민철은 그녀에게 온갖 독한 말을 해댔다. ‘머리가 비어서 모르냐, 요즘이 어떤 시댄데, 캐스팅 청탁이냐? 넌 내가 만만하냐? 젊어서처럼 니가 이쁜 것 같으냐?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걸 아느냐? 니가 지금은 그래도 힘이 있지만, 너도 늙는다, 어느 날 니가 힘없는 날 피눈물을 흘리게 해 주겠다’, 그는 독사답게 그녀 를 공격했다. 거칠지 않고, 치명적으로. 그러나, ‘많이 변했네, 흥분한 거 같으니까 담번에 말하자, 당신은 어떤지 모르지만 가끔 난 보고 싶드라’ 라고 말하며 명함을 주고 일어서는 윤영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에게 무너져 내릴 자신을 예감했다.
성소유가 그녀의 예상대로 그녀 곁을 떠나고, 엄마마저 화해없이 세상을 떠나버리던 날도 그녀는 촬영을 했고, 그닥 울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와 가끔 와인도 마셔주고 수다도 떨어주던 수진이 촬영장에서 소변을 봐버리고, 그를 처리하기 위해, 민숙과 수진을 끌고, 화장실에서 수진을 씻기던 날 그녀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배우의 삶이란 건가? 나도 이 선배처럼 결국엔 이렇게 초라하게 제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되고 마는 건가? 그녀는 모든 게 제 일만 같아져 막막했다. 그녀는 수진의 재활에 목숨을 건다. 그런데, 그즘 민숙의 자살소동이 일어난다. 브라운관 앞에서 그래도 한때, 모든 이를 설레게 했던 우리들인데, 이렇게 참담한 말로를 맞는가? 그녀는 맘이 아픈데, 그즘 민철이 적극적으로 그녈 배신하기에 이른다. 몇 번의 힘없는 거부를 하다 더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윤영과 잠자릴 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캐스팅을 조정(?)해주던 날, 그는 그녀가 이곳에 남아있는 한, 자신이 그녀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민철은 그게 복수가 아닌, 제 살 궁리였다고 나중에 지오에게 말했다. 민철의 비리폭로로 윤영은 기소를 당하는데, 검찰로 향하던 날, 윤영이 민철에게 전화를 해온다. ‘한동안 정말 살맛 안 났는데, 제대로 뒷통수 한 번 맞으니 살고 싶어지네, 근데 내가 정말 이대로 끝날까? 잘살아’. 담날 윤영은 당당히 검찰로 향한다. 준영의 눈에 그날 윤영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첫댓글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