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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카이 삼대 레이조(空海三大霊場) 중 하나라는 젠츠지
안타까워 하다가 잠이 들었는가.
여러 편안한 침실들을 두고 거실 바닥에서 자고 있었으니.
거실 탁자에 놓여있는 코보대사에 관련된 책자들과 젠츠지 안내 책자들을 뒤적이며 공실
상태인 방들에 아쉬움을 곱씹다가 그대로 잠든 것이리라.
귀국일(10월21일) 10일 전인 10월 11(토)일 밤의 일이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실은, 남은 헨로미치가 한 주간 거리도 되지 않으므로 일찍 마치고 조기 귀국하고 싶으나
저가항공의 애로(탑승일변경불가) 때문에 앞당길 수 없다.
당초의 계획은 시코쿠헨로를 마친 후 귀국일에 맞춰 오사카 한하고 걷다가 귀국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으나 도로 사정 때문에 그것도 포기했고.
까미노에서는 분발하여 소요일을 단축함으로서 축적된 1주일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2.5개월의 날이 빠듯하여 계획에서 밀려났던 루트를 걸었으니까.
황금 루트 아라곤길 걷기를 보너스로 받은 행운이었는데 시코쿠헨로에서는 대안이 없다.
보속(步速)을 낮추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고작이라 할까.
느지막이 일어나 젠츠지의 슈쿠보 사무소(寺務所)에 키를 반납한 후 경내를 다시 살폈다.
쿄토(京都)의 토지(東寺), 와카야마 켄(和歌山県伊都郡/近畿地方) 코야산(高野山)의 콩고
부지(金剛峰寺)와 더불어 쿠카이 삼대 레이조(空海三大霊場) 중 하나라는 젠츠지.
인왕문을 기준으로 동원(東院/東側)과 서원(西院/西側)으로 구분되는 사찰이다.
동원은 가람(伽藍)으로 불리며 금당(金堂/本堂), 오층탑(五重塔/五輪塔), 석가당(釋迦堂)
등이 있는, 창건 이래의 사역(寺域)이란다.
서원은 대사가 태어난 사에키가(佐伯家)의 저택자리에 세웠으며 배전(拜殿), 중전(中殿),
공양전, 오전(奧殿) 등을 아우르는 어영당(御影堂/大師堂)과 보물관 등이 있다.
어제 얼핏 스쳐간 버마전(戰) 전몰자 공양탑(pagoda)에 들렀다.
1941년, 내가 병원에서 개복수술 후 생사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태평양전쟁(2차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버마(현 미얀마)를 비롯해 동남아 전역을 점령했다.
래대오 프로그램은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 일색이고 식민지(朝鮮)의 소학교 학생들
에게는 조그맣고 하얀 고무공이 배급되었다.
천황폐하의 전승기념 선물이라는 이 공을 나는 병원에서 받았다.
고무가 없는 일본이 고무의 산지들을 점령했으므로 고무가 풍부하게 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알량한 과시를 위해 18만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바쳤다니.
그 18만명 중에는 우리의 부형들도 부지기수였으니 저주받을 야욕이어...
그랬으면서도 사죄는 커녕 시치미를 떼고 되레 견강부회하고 있는 저들의 양심(兩心).
태평양전쟁의 주범도 미국이라는 억지 선동을 아직도 하고 있는 자들이다.
까미노처럼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갈망하는 시코쿠헨로에서도 그 짓을
하고 있는 자들.
까미노듸 뻬레그리노스와 오헨로의 첸로상
젠츠지에서 도보3.8km 북쪽, 76번 콘조지(金倉寺/金藏寺町)를 향해 젠츠지의 동쪽 끝 남
대문(南大門/1박한 젠콘야도에서는 슈쿠보와 等距離위치)을 떠난 시각은 아침8시 32분.
주차장으로 쓰이는 4각광장 변의 너른 인도(人道) 공간이 바삐 돌아가고 있는 아침.
가을축제의 달(月)인 10월의 제2 주말을 맞아 어제 석양부터 준비하고 연습에 열중했던
멤버들(?)이 출정을 앞두고 거리마다 골목마마 삼삼오오 신명이 나는 듯이 보였다.
헨로미치에 들기 위해 정북의 아카몬(赤門) 앞으로 가서 직진하는 24번현도(本鄕通り)를
잠시 걷다가 젠츠지시 관광교류센터에 들렀다.
특이하게도 파고다(pagoda)지붕이 설치되어 있는 첫 블록 사거리의 우측길 중간에 비켜
있기 때문에 의도해야 되는 사무소다.
헨로상 신분으로 방문해야 할 까닭은 없으나 안내 간판과 카가와 현의 '세토나이카이(瀨
戶內海) 국립공원80주년'기념 홍보에 말려들었다 할까.
히토토시젠, 츠무기아룬다80年(人と自然, 紡ぎ步んだ80年/사람과자연 엮이어걷기 80년)
아침 9시(개시) 이전이라 헛걸음을 각오했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좋은 기분이었다.
60대로 보이는 남(男)이 맞으며 세토나이카이국립공원지정80주년(1934년~2014년) 기념
엠블럼(emblem) 대소(大小) 한쌍을 내게 선물한 그.
코보대사의 산지 답게 관광교류센터의 역할(role)은 헨로상과 관광객을 동근이명(同根異
名)일 뿐, 동일시 또는 동일화 하는데에 있는가.
헨로상과 관광객의 구분을 지워버리는, 단색으로 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듯.
젠츠지시에 오신 관광객과 헨로상의 접대소로, 또한 지역민들에게도 기꺼운 교류시설로
개설되었다니까.
까미노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까미노에서는, 시각이 많이 완화되었다 해도, 여전히 뻬레그리노(peregrinos)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차량 이용자들인데 반하여 차량이 대형일 수록 더 환대, 우대받는 헨로다.
까미노는 그 길이 가시밭이건 카핏(carpet) 위건 영성훈련의 과정인데 반해 헨로에서는
오로지 봉납하기 위해 후다쇼에 있는 자만이 헨로상이다.
그래서 개인보다 단체가, 소형차량보다 대형일수록 웰컴이 진하다.
봉납행위도 신앙고백의 한 표현이므로 다다익선이라면 할 말이 없다.
교류센터를 나와 헨로미치인 홍고도리(本鄕通り/24번현도)로 복귀하여 잠시 나아가다가
눈에 특별하게 띈 것은 '燒肉ソウル'(불고기서울)
평양냉면 서울, 냉면 한국불고기(韓國燒肉) 등 한국음식점이다.
왜 어제 석양에 지나칠 때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아침시간(9시36분)에 나타나는가.
시코쿠헨로에서 처음 보는 한국음식점이며 어제 봤더라면 제백사하고 뭐든 먹었을 텐데.
「赤門筋」ネオンのゲートを潜って交差点を直進して. . . .
'아카몽킨'(赤門筋) 네온 게이트(neon gate) 사거리를 직진, 반듯한 직선로인 홍고도리를
따라 한참 가면 '콘조지2.7km' 석주가 도로 왼쪽(大西寢具店옆)에 초라하게 서있다.
홍고도리를 떠나 좌측 골목길로 진로를 바꾸라는 안내 표지다.
놓치고 그냥 가도 JR도산선(土讚線) 철로 위를 넘어서 만나게 되지만.
도시로 간 사람들의 빈 자리를 메꾸는데 허수아비 외에는 없는가
젠츠지초에서 카미요시다초(上吉田町)로 바뀐 지역의 이면로를 따르기 5분여에 공터에서
소란스런 현상이 전개되는 중이었다.
임시로 조립한 가건물 안팎에 사람들과 그들이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차량들로.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이벤트(event)성 행사의 일종?
'セルフの店 さぬきうどん はすい亭'(셀프 가게 사누키 우동 하스이亭)
셀프 서비스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나 본데 전에 탈진상태의 공복에 먹은 적이 있는(16회
글참조) 사누키 우동집과 유사한 집으로 내 취향은 아니라 아직 공복상태인데도 지나쳤다.
그나저나, 애매한 시간대(10시전후)에 몰려온 사람들이 먹는 우동은 아침인가 점심인가.
오전 새참?
지금은 카가와켄(香川県)인데도 옛 사누키쿠니(讚岐國)에 대한 향수때문인지 음식이름을
비롯해 많은 간판들이 '사누키'를 달고 있다.
24번현도(홍고도리)는 고가로 철로(土讚線)를 건넌 후 홍고도리교차로에서 좌회전, 25번
현도(伊予街道)와 1블록을 함께 하고 카미요시다초(上吉田町)교차로에서 우회전한다.
홍고도리(24번현도)를 떠난 헨로미치는 '사누키우동 하스이정'을 지나 지상터널로 철길을
건넌 후 샛길로 25번과 24번현도를 거푸 건넌다.
북쪽 마을길을 따라 콘조지(金倉寺) 타운인 콘조지초(金藏寺町)에 들어섰다.
우측 지호지간에 자리한 젠츠지 시민풀(Swimming Pool)의 현란하고(?) 별난 인력(引力)
에 끌려 잠시 외도(헨로를 벗어나)했다.
무라카미지(村上池) 남단에 젠츠지 시민체육관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단지.
내가 사는 강북구와 비교하면 인구가 인수동과 비슷한데(젠츠지시32.453 :인수동32.903.
밀도평방km당 813명:11.230명) 인수동은 물론 강북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시설이다.
이 곳도 인구 이탈(감소)을 막으려고 이렇듯 안간힘을 써도 1985년을 정점으로 하여 감소
일로에 있단다.
이같은 시설로 대응하지 않았으면 감소폭이 더 격심했을까.
문득, 허수아비마을이 떠올랐다.(5번글 참조)
카미야마초 아가와(德島県 神山町阿川)마을 도처에 허수아비 인형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로 달아났기 때문에 부족한 수를 허수아비 인형으로라도 채우고 싶은가"
푸념하며 걸었는데 어느날 TV에서 그 허수아비들을 만든 사람을 만났다.
젊은 시절 한 때 근무한 직장이 있던 마을.
이 아가와 마을을 20여년 후에 방문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정감 넘치던 옛 마을이 아니고
서글프도록 황량해진 마을이었단다.
그래서, 고향 마을이 아니지만 직장생활 중에 흠뻑 들었던 옛 정감을 되찾기 위해서 돌아
오지 않을 사람들을 허수아비로 채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허수아비의 내부를 채우려면 많은 종이가 필요한데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폐 신문들을
모으고 일손이 되어 줌으로서 예상치 못한 협동심이 불어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미구에 '허수아비마을'로 회자되고, 허수아비는 마을의 랜드마크가 되어 관광지 리스트에
들게 됨으로서 옛 정감의 회복은 물론 활기 있는 마을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 일을 일으킨 주인공의 말이다.
사찰M&A의 귀재도 인척관계는 넘지 못할 산?
외도에서 돌아와 농로와 마을길을 바꿔가며 북쪽으로 이어가는 헨로미치에 들어섰다.
아루키헨로미치인 농로와 마을길이 차도를 횡단한 후 다른 차도를 따라서 북상하는데 이
지역의 붉은 화살표와 헨로석주 등 헨로 표지들은 신뢰할만 하므로 따르면 된다.
홍고도리를 따르던 차량헨로미치는 25번현도로 바꿔타고 북상하다가 이나기초(稻木町)
신호등교차로(패밀리마트 앞)에서 우회전하는데 아루키헨로미치가 횡단하는 도로다.
도보와 차량,둘이 하나로 뭉쳐서 북상하는 헨로미치는 고가 타카마츠(高松)자동차도로를
지상터널로 거듭 횡단하고 18번현도도 횡단한 후 좁아진 길을 따라 직진하고 북상한다.
76번레이조 콘조지에 당도한 시각은 10시 48분.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개조 지쇼대사(智証大師/円珍)가 태어났다는 곳.
코보대사가 태어난 해인 호키(宝亀) 5년(774)에 지쇼의 조부 와케도젱(和氣道善)이 창건
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지쇼는 코보대사의 생질(혹은 질녀의 아들?)이며 도젱은 12대천황 케이코(景行/71~130)
의 후손이라니 사누키의 호족 여인이 황족에 출가했는가.
창건당시의 사명(寺名/道善寺)이 거듭 바뀌어 '金倉寺'(콘조지)가 된 내력이 있다.
858년(天安2),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한 지쇼대사가 이듬해(貞觀元年)에 '金藏寺'(콘조지)
로 개명앴는데 928년(延長6년)에 다이고천황(醍醐)의 칙령으로 다시 바뀌었다는 것.
당시의 지명(金倉郷)을 따서 콘조지(金倉寺)로.
기이한 것은 천태종이 76번레이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88레이조 중에서 진언종이 아닌 10%, 8개 사찰중 절반(4개소)이 천태종이며 이미 거쳐온
43번레이조(明石寺)도 천태종이지만.
코보대사의 출생지인 젠츠지에서는 그의 권위가 높은 하늘과 넓은 대지에 견줄 만큼인데
반해 10리길도 못되는 이곳 콘조지에서는 지쇼대사와 같은 반열의 대사 대접이 고작이다.
88레이조를 좌지우지하며 사찰M&A의 귀재인 코보에게도 인척관계는 넘지 못할 산?
그래서 위계관계가 1대(代) 아래인 지쇼에게 속수무책이었던가.
레이조도 진언종 아닌 천태종에 양보(?)하고?
그들의 세계에서도 어른 노릇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일임을 의미하는가?
정답: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과부의 엽전과 빈자 일등과 늙은이의 오셋타이
3.9km 도류지(道隆寺)를 향해 콘조지를 떠난 시각은 11시 25분.
도류지 헨로미치는 도쿠젠지(德善寺)와 콘조지(金藏寺) 우편국이 좌우에 있는 길을 따라
33번현도에 올라선 후 서쪽(좌측) 100m쯤에서 북상하는 농로를 따른다.
육조지장당(六條地藏堂)을 좌측에 둔 마을길을 따라서 북상하면 고가 11번국도(丸龜바이
패스도로)의 지상터널을 통과한다.
행정구역은 곧 젠츠지시콘조지초에서 나카타도군타도츠초(仲多度郡多度津町)로 바뀐다.
25번현도를 이용하는 차량헨로상들이 현도를 떠나서 도보헨로상들과 함께 한 길을 이용,
도류지까지 북상하는 길이 시작된다.(願掛け地蔵尊이 자리한 지점)
농로와 촌로 구분이 없는 긴 직선로가 지루하다 싶을 때 "人の子もわが子と同じ愛の手て.
(히토노 코모 와가 코토 오나지아이노 테데/남의 자식도 내 자식과 같은 사랑의 손으로)
길가에 서서 나그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상쾌한 바람으로 다가온, 고마운 손글씨판.
타도츠초소년육성센터, 청소년건전육성토요하라(豊原)지구정민회의(町民會議)의 모토가
이와 같은 마을이라는 뜻 아닌가.
남의 자식을 내 자식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면 윤리니 도덕이니, 옛것이니
새 것이니 따질 것 없다.
일체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으며 그 곳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 선의 마을이니까.
시코쿠헨로에서 이와 유사한 글판의 마을들을 지날 때마다 내 뇌리에 진하게 칠해 있는
반 일본 정서의 색이 조금씩이나마 연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설영, 단지 마을의 이미지 메이킹용이라 해도.
일본의 대한(對韓) 야욕과 그 실체를 식민 압제시대에 구체적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205번현도사거리를 건너면 왼쪽에 타도츠토요하라우편국이다.
토요하라소학교(多度津町立)를 지나는 4거리도 한 줄은 205번현도다.
500m 안팎의 간격을 두고 평행하는 2개의 도로가 동일 번호를 달고 있다.
일본도로의 번호체계를 모르면서 무슨 왈가왈부를 하겠는가마는 혼란스럽고 불만스러운
것만은 사실이기에 시큰둥하게 건너가는데 우측 저쪽의 한 글판에 이끌렸다.
노변의 지장당벽에 붙어있는 "貧者の一灯というは我 が身を照らす光なり"(힌자노 잇토
토 이유와 와가 미오 테라스 히카리나리)라는 글귀다.
"빈자의 일등이라는 것은 자신을 비추어 밝히는 빛이다"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엽전 두 닢"으로 묘사된 "빈자의 한 등".
"가난한 자의 정성어린 등 하나가 부자의 허영에 찬 수많은 등(百萬長者의 一萬灯) 보다
낫다"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다.
등 하나의 초라한 빛이 수많은 등이 한꺼번에 밝히는 밝은 빛에 감히 비교될 수 없다.
그럼에도 봉헌은 양(量)보다 질(質)을 중시하며 진심과 성의를 요구하는 종교의 신앙행위
임을 강조하는 비유일 뿐 종교라 해도 현실적으로는 다다익선이다.
한데, 그 행위(貧者의 一灯) 또는 비유에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가.
봉헌자 자신을 조명하는 빛이란다.
허위와 진실, 가식과 성심 등을 낱낱이 담아두는 CCTV카메라 또는 블랙박스(black box)
라도 장착되어 있단 말인가.
진지한 신앙에는 이같은 기능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난해한 뜻이기 때문인지, 명쾌한 기분에 도달하지 못해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으로 타도츠
(CAR SCHOOL TADOTSU/자동차운전학원)를 왼쪽에 끼고 직진을 계속했다.
운전학원의 종점 쯤에서 77번레이조 도류지 방향표지가 있으며 헨로미치인 우측(동쪽)의
농로 겸 마을길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뒤로 쳐지는 노변의 2층집 창문을 통해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헨로상 데스카, 아나타"(ヘンロ樣ですか, あなた)
모습을 드러내며 계속 소리치는 고령의 남자.
"좃토 맛테 쿠다사이"(ちょっと待ってください/잠깐만요)
쏜살 같이 달려나온 영감은 뭔가 들고 온 것을 내 손에 쥐어주며
"ヘンロ樣に 差し上げる わたしの お接待.(헨로사마니 사시아게루 와타시노 오셋타이/
헨로상에게 드리는 내 오셋타이)란다.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는 극소 미니어처 팬더(miniature panda).
이미 언급했지만 헨로미치에는 동전1닢(100y) 또는 자기손으로 정성스레 만든 물건 등을
주는 오셋타이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1.000y 지폐를 봉투에 넣어 정성스레 준 여인도 있는데,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동행한다는 징표로 주는 것이란다.
70세 전(68?)인데도 히자(膝/關節?)가 좋지 않아서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영감의 소원을
들어 얼마 되지 않은 남은 거리를 그와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목 관계인 두 나라 영감이지만 오셋타이를 한 것처럼 헨로상의 약속이므로 꼭 지키리라.
이 때(2014년 10월 11일 12시29분) 이후로는 그와 함께 걷는, 동행이인(同行二人)의 마음
가짐으로 걷겠다는 것.
그의 오셋타이 팬더가 나외 함께 걷는 내 헨로는 그와 동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니까.
77번 도류지와 78번 고쇼지(鄕照寺)
이름도 모르는 그와 동행하여 도류지에 당도한 시각은 12시 33분.
와도(和銅) 5년(712), 광대한 뽕나무밭(桑園)이었던 이곳에 이 지방영주 와케미치타카(和
気道隆)가 큰 뽕나무를 잘라 조각한 작은 약사여래상을 모실 초당을 건립했다.
이 초당이 이 사찰의 효시란다.
다이도(大同)2년(807)에는 당에서 귀국한 코보대사가 초유(朝祐/道隆의아들)의 간청으로
약사여래상을 조각했다.
초유는 그(藥師如來像) 배안(胎內)에 자기 부친(道隆)의 상(像)을 넣어 본존으로 모셨으며
코보대사로부터 수계(授戒)한 후 2세 주지가 되었다.
그(朝祐)는 선조 전래의 재산으로 칠당가람을 짓고 사명을 도류지(道隆寺)라 했다.
창건한 부친의 이름을 딴 것이다.
시속 3km 정도의 걸음으로 3분 40초에 불과한 지근 거리에 거주하는 그 영감이 무척 걷고
싶겠다고 헤아리며 들어선 인왕문 안의 경내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곧 알게 된 것은 매년 가을 어느날(?)에 있는 연중 행사로 사이토오고마쿠'(柴燈大護摩供)
라는 밀교(眞言宗)의 비법이 바야흐로 시작될 것이라는 것.
행사장에는 다수의 의자(좌석)와 행사에 쓰일(?) 시설과 물품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고
임시로 마련된 야외 봉납접수부가 바삐 돌아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인왕문을 들어서고 있는 주인공들.
갖가지 민속의상(?)으로 치장하고 민속악기들을 불며, 참배객들의 주시와 환영을 받으며
보무당당하면서도 엄숙하게 입장함으로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코보대사가 들여온 밀교비법의 하나인 '고마'(護摩)는 불꽃과 함께 번뇌를 태워버리고 신
불(神仏)에게 자신의 소원을 알리는 의식이란다.
수도자 모습의 승려들이 북소리와 함께 독경하는 가운데 노송잎으로 덮혀있는 고마단에
불이 붙여지면 순식간에 결계(結界/밀교에서, 魔軍의 장난을 없애기 위해 印明法에 따라
제정한 도량의 구역) 안이 하얀 연기로 가득해진다.
흰 연기가 불꽃을 대체하면 승려들에 이어서 참배객들도 소원을 쓴 고마나무를 고마단에
던짐으로서 불길과 연기에 실어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의식은 승려가 맨발로 불길 위를 통과하는 것으로 계속되고.....
끝까지 지켜볼 수 없는 나그네인 것이 유감이었다.
전례 없이 1시간 이상을 바쳤지만 끝날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데다 13시반이 넘었으니.
78번레이조가 7km 남짓 전방에 있으므로 아직 여유롭기는 하나 고마의식에 인력(引力)을
느끼지 못한 것이 현장을 떠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78번고쇼지(鄕照寺)는 도류지의 동북향 7.2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도류지 진입은 남문(仁王門)으로 하지만 이어지는 헨로미치는 고쇼지 한하고
북문 앞 차로와 함께 간다.
20리도 못되는 길이라 해도 마루가메시(丸亀市)에 들어서 3번에 걸쳐 잠시의 이면도로를
택할 뿐 샛길, 곁길, 자투리 길 등 복수가 없는 길이다.
아마도, 1.200km헨로에서 유일한 구간일 것이다.
33번현도를 개설할 때 헨로미치를 100% 수용한 결과라 할까.
오직, 33번현도만 고수하면 되므로 마루가메시 도심을 지나고 아야우타군 우타즈초(綾歌
郡宇多津町)까지 시가지로 이어지지만 택일의 고민이 없는 천하태평의 길이다.(지도에는
그러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78번후다쇼 고쇼지(七十八番札所鄕照寺)7km' 이정표는 차량과 도보자 모두에게 모처럼
일치하는 안내를 하고 있다.
신호등사거리를 지나면 타도츠초(多度郡多度津町北鴨)에서 마루가메시 나카츠초(丸亀市
中津町)에 진입하고 작은 지장당 앞에서 우측 이면도로를 잠시 따른다.
도로로 돌아와 나카츠교(中津橋/金倉川)를 건넌 후 다시 이면도를 따라 21번현도를 횡단,
잠시 후 도로에 복귀한다.
한데, 이 2번의 이면도로는 헨로미치 표지는 있으나 헨로지도가 왜 외면하고 있을까.
마을이 나카츠초에서 텐마초(天滿町) ~ 마에지오야초(前塩屋町)로 이어지는 길인데 걸을
까 말까는 자의에 맡긴다는 뜻?
텐마초의 무라카와상회(村川商會/竹材, 袖垣,造園 資財) 앞에서 합류한 헨로미치는 마에
지오야초(前塩屋町) 지역에 들어선다.
우편국(丸亀塩屋)을 지나고 시오야다리(塩屋橋/西汐入川)를 건너면 사이와이초(幸町)다.
다리 건너 'V'자 길에서 우측을 택해 'T'자 길까지 직진하여 우회전한다.
첫 건물인 무라카미가쿠엔(村上學園)고교 앞, 사이와이초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현도21
번을 따라 난조마치(南條町)를 지난다.
고쇼지4km 이정표 지점의 좌측 노변에 헨로코야가 있다.
'마루가메조켄(丸亀城乾) 제18호'
"이 코야(小屋)는 지역의 여기저기, 보행인들의 사랑을 받기 바라며 무상의 협동작업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소중히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지은지 8년(平成18년)이 지났는데도 깨끗이 보존되고 있는 것은 소중하게 이용한 결과?
1블록이 지난 대형4거리에서 21번현도는 방향을 우측으로 90도 틀고, 고쇼지 헨로미치는
33번현도가 되어 직진하는 메인 스트리트를 따른다.
오테초(大手町)와 시와쿠마치(塩飽町)-토미야마치(富屋町)-도리초(通町)-후루타이마치
(風袋町) 사이를 지나는 쿄고쿠대로(京極通り)다.
카가와은행(香川)마루가메지점 앞 정면으로 난 대로 끝의 마루가메성(城)이 막힘이 없다.
시청을 비롯해 마루가메시의 핵지대인 것 같다.
고쇼지 3km지점, 고가인도교를 지나 도이초(土居町)의 도키강(土器川) 쌍다리, 호라이교
(蓬萊橋)를 건너는데 우측의 강 따라가서 한눈에 잡힌 미려한 산이 있다.
이 산(飯野山?)을 어느 아루키헨로상은 마루가메의 후지산이라 할 만큼 아름답다고 했다.
다리를 건너면 또 하나의 'V'자길 앞이다.
33번현도와 길지 않은 이면도로로 되어 있는데 헨로지도는 이 길에서도 침묵한다.
이 길에 들어설 때(도류지에서 나와서) 내가 한 찬사와 달리 자투리길이 곳곳에 있는데도
일체의 자투리길을 헨로미치로 인정하지 않는 헨로지도가 괴이쩍다.
'V'자의 우측 이면도로(좌측은33번현도)를 따라서 동북진, 신호등4거리 도로를 횡단했다.
이어서 양도(兩道/현도와이면도) 사이를 몽땅 점유하고 있는 맨션(勞住協第26빌蓬萊ニュ
マンション)을 지나 현도(33번)에 합류했다.
동진을 계속하는 중에 왼쪽으로 우타즈역(宇多津驛)을 가리키는 안내판.
이어서 출현한 우타즈타운(宇多津町) 간판은 고쇼지 지역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마루가메시를 떠나 아야우타군(綾歌郡) 땅에 있음을.
우측 노변의 지장장(岸落地藏院)을 지나 곧 '78번후다쇼 고쇼지 1km' 지점을 통과했다.
가로놓인 현도194번 고가(高架)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 고가 앞 우측에 있다고 '아루키헨로 야숙일람'이 소개한 지장당(地藏堂)을 찾아갔다.
이 밤의 숙소를 정해야 할 시. 지점에 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후 3시는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지장당 안에 갇혀 있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더구나, 웬만한 대안이 있으면 바꾸고 싶을 정도로 심란한 것이 천 인상인 실내다.
어쨌거나 78번레이조 고쇼지 방문이 우선이므로 당장에는 이 곳을 떠나야 했다.
다시 오게 될지 모를 지장당을.
194번현도와의 교차로 사거리에서 얼마 되지 않은 지점에 있는(왼쪽) 미야와키서점(宮脇.
이 지역 高松市를 本據로 한 점포수에서 일본최대의서점체인)을 지나 우측 우부시나진자
(宇夫階神社)길 또는 조금 더 진행해 '鄕照寺500m우측' 안내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선다.
안내표지 찾는데 실패하지 않고 찾은 표지를 놓치지 않으면 지장 없는 골목길에서 완만
하게 오른 위치에 자리한 고쇼지.
당도한 시각은 15시 50분쯤이었다.
세토나이카이에 걸려있는 세토대교의 조망이 훌륭하다는 위치.
옛날부터 항구마을로 번영, '시코쿠의 정면현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 고승, 명승들과
인연이 깊은 레이조란다.
또한, 특이한 것은 시코쿠 88레이조 중에서 유일하게 '시종(時宗/鎌倉시대 말기 일본불교
의 하나)이라는 것.
나라시대, 진키(神龜) 2년(725)에 교키보살이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55cm정도의 아미타여래상을 조각, 본존으로 안치하고 사명을 붓코잔 도죠지(佛光山道場
寺)라 했는데 고쇼지로 바뀐 것은 1664년(寬文4년)의 일이란다.
코보대사가 이곳을 방문하기는 807년(大同2년).
지금도 널리 신앙되고 있는 '액막이우타즈대사'(厄除宇多津大師)라는 목조 대사상은 이때
대사가 자신의 상을 조각하여 액막이서원(誓願)을 함으로서 비롯되었단다.
그랬음에도 이 사찰은 코보대사의 진언종이 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다.
정토종(淨土宗)의 한 파인 '시종' 의 개조, 잇펜쇼닌(一遍上人/1239~1289)이 쇼오(正応)
원년에 3개월쯤 체류하며 오도리넴부츠(踊り念仏/춤추며 염불)의 도량(道場)을 열었다.
그래서 진언.염불 2교의 법문(法門)이 전해지게 되었고 88개소중 특이하고 유일한 레이조
시종(時宗)으로 남게 되었고 훗날 사명도 바뀌게 되었다는 것.
까미노의 몰리나세까와 우교조약을 맺은 시코쿠헨로의 우탕그라
76번에 이어 78번에서도 코보대사의 주특기가 무기력했으며 82번과 87번에서도 그러한
것이 우연일까 고향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선지자 원칙(?)에 해당할까.
경내의 안내판(略緣起)은 액막이우타즈대사'(厄除宇多津大師)신앙에 따라 밀교의 번영을
누리다가 "시코쿠후다쇼 중 유일하게 양종(兩宗/진언종,시종)의 레이조"가 되었다 하지만.
액제대사당 앞에 판을 벌여놓은 노사츠(納札) 취급녀에게 지장당 외의 야숙소를 물었다.
그 여인이 극찬하며 알려준 젠콘야도는 78번후다쇼(鄕照寺)의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아루키헨로 야숙일람에 등재되어 있는 젠콘야도 우탕그라(うたんぐら)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조식과 오니기리(おにぎり/점심용주먹밥)포함 1.000y의 숙박료에
감사의 팁 1.000y을 더 받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을 정도의 집이다.
나의 헨로는 후다쇼의 여인이 추천한 집이라 해서 무작정 찾아갈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걷는 길도 그렇거니와 먹거리와 잠자리, 이에 반드시 부수되는 대인 관계 등 일체가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전혀 무탈한 까미노와 극과 극의 관계다.
일일히 생각하고 다스리기를 거듭한 끝에 실행하는 내가 별다른 생각없이 그 집을 찾아간
것이야 말로 시코쿠헨로에서 내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집(善根宿)의 거실에 있는 까미노 꼰차(concha/가리비).
그리고, 내가 까미노의 5개루트 2.100km(3개 主線과 2개 支線)를 걸은 80세(2014년당시)
영감이라고 자진해서 자기 소개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 바로 이 콘차다.
이번에는 주인이 놀랐으며 이로써 이야기판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3년전의 일인데 내년에도 봄부터 6개월에 걸쳐 4.000km를 더 걸을 것이라는 말에 충격과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한 주인.
그는 즉시 나를 벽에 액자들이 걸려있는 별도의 집(사무실?)으로 안내했다.
한데, 이 방(우탕그라) 벽에 걸려있는 액자들은 까미노 프랑세스의 마을인 몰리나세까와
우교관계를 맺은 두 마을 간의 문서들이다.
몰리나세까(Molinaseca)의 카운터파트(counterart)가 바로 이 마을 우타즈초(宇多津町.
우탕그라)라니 이럴 수가.
이번에는 내 놀라움이 충격적이었는데 내 핸드폰에서 이 방에 걸려있는 사진들과 동일한
'우교비' 사진들을 살편본(까미노이야기 21회) 그가 나보다 더 감개무량한 듯이 보였다.
"일본의 어느 마을이겠거니" 생각했을 뿐 내가 그 마을에 가게 될 것을 상상이나 했던가.
더구나 그 카운터파트의 집에서 1박하며 그 주인공과 그 때 일을 감회 깊게 반추중이라니.
그(주인) 또한, 일본인도 무관심한 현장을 놓치지 않은 한국 노인(すご----い)이 자기네
게스트(guest)로 오리라고, 그래서 마주하고 있게 되리라고 꿈엔들, 상상인들 했겠는가.
2011년 4월 24일 오전에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의 몰리나세까(Molinaseca/Leon
州 地自體Bierzo의 마을)에서 나는 일본인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愛媛県 愛南町와 함께)
2009년 6월 4일자 'JAPAN - SPAIN CAMINO 友交記念碑'(우교기념비/메뉴'까미노이야기'
41번글 참조)가 샘났기 때문이었다.
까미노의 연간 뻬레그리노스(Peregrinos/순례자) 통계를 보면 우교관계를 맺은 해(2009
년)의 한국과 일본의 순례자는 1079명 대 526명으로 일본은 한국의 반도 되지 않았다.
실은, 2006년의 84명(한국) : 282명(일본)을 끝으로 2007년에 449명 : 327명으로 역전이
된 이후 2008년에는 915명 : 412명으로 한국은 일본의 배가 넘는 수가 까미노에 갔다.
그랬음에도 일본은 우교관계를 수립했고 대학인순례자협회에도 소위 학위증이라는 순례
증서에 매달리는 우리와 달리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일본이다.
아시아대륙에서 최대의 인원이 가서 최고의 수입원이 되고 있는데도 대학인순례자협회의
순례자여권에 우리글(한글)은 단1글자도 없다.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뽀르뚜갈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으며 대학
관계자들용으로 발급하는 순례자여권이다.
7개 언어중 일본어 외에는 모두 순례자수 최상위국들의 언어다.
한국인 뻬레그리노스는 일본인의 배가 넘으며 아시아대륙 전체의 뻬레그리노스 중 한국
외의 국가 총수보다 더 많은 수가 가서 가장 많은 매상을 올려주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을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위상(位相)의 문제다.
나는 걷는 도중에 관계당국 최고위자에게 글을 보냈다.
한국의 위상과 한국인 뻬레그리노스가 받아야 할 응분의 인격적 예우에 대해서.
7개언어에 한국어가 추가되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그의 답장이 왔다.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국어 번역본을 보내주면 다음 발행본 부터 반영하겠다고.
그는 내게 최상의 경의를 표하며 내 닉네임 'SANTIAGO'(산띠아고)를 선물한 사람이므로
식언이 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天助自助者)"
이 격언을 전제로 하여 나는 까미노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일본인에게는 전 세계인이 집결하는 까미노가 자기네의 절호의 홍보무대다.
지금 내가 1.200km 시고구 헨로를 걷고 있는 것도 사아군의 알베르게 벽에 붙은 그들의
홍보 포스터 효과 아닌가.
몰리나세까의 새 주택가에 일본이 개발한 가라오게(空オケ)간판이 나붙어 있다.
이것도 우교관계의 효과일 것이다.
까미노에서 일본이 이처럼 실리적인데 동일한 무대에서 한국은 어떠한가
돈 많은 한국, 돈 잘 쓰는 한국인이라는 불쾌한 이미지가 날로 퍼져가는데도 자성은 커녕
허장성세만 날로 더해가는 한국인에게 순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국과 일본의 전체 인구 대비 기독교인 비율이 신구교를 통털어 1%도 되지 않는 일본에
비해 27%(가톨릭8, 개신교19)를 자랑하는 한국의 현실은?
고백컨대 참담한 심정이다.
젠콘야도로 제2인생의 문을 연 이리에무네노리(入江宗德)와 노리코(德子) 부부
낮에 이정표의 '우타즈초'가 처음 대하는데도 왠지 생소한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을 기이히
생각하며 걸었는데 부러워했던 마을 이름이기 때문이었던가 보다.
비를 피할 수 있으면 호.불호가 전혀 개의되지 않았던 잠자리에 까탈을(?) 부렸고 후다쇼
여인의 추천에 주저 없이 따르는 등, 이름도 괴상한 우탕그라로 몰기 위한 전희였던가.
이 민가(民家)가 '우탕그라'라는 괴이쩍은 이름의 젠콘야도로 환생하고 두 마을(宇多津町
과 Molinaseca)과 우교관계를 맺기까지의 사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타카마츠(高松)에 거주하며 프리(freelancer) 아나운서로 할동중인 나카이쿄코(中井今日
子)는 친정 부모가 살다가 공가가 된 집(宇多津町2201)의 활용 문제로 고민했다.
부모가 함께 양로원으로 갔기 때문인데 보람있게 쓰이기 위해 고심하며 많은 자문과 의논
끝에 시코쿠헨로의 길목에 위치한 점을 고려해 헨로상들의 젠콘야도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에 더하여, '지역 노령자 목욕탕'과 '지역 주민의 교류살롱'등 3가지 용도로 사용하기로
하고 이름 짓기를 모색했다.
광범위하게 찾던 중 시대를 16c까지 소급,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한 기록을 찾았다.
당시에 스페인 왕실의 일본제도도'(日本諸島圖)에 'Sanuqui'(讚岐)가 있는데 스페인에서
귀국한 '텐쇼견구((天正遣歐) 소년사절단'에 동행한 예수회순찰사의 해도기사(海圖技師)
가 작성한 '일본도'(日本圖)에도 사누키의 유일 기항지로 우타즈초(宇多津町)가 있다.
알파벳 표기로 'VTANGRA'(うたんぐら/우탕그라)라고.
이 '우탕그라'가 '우타즈초'를 의미하며, 따라서 대항해시대의 '인연'(緣) 같은 것이 있는
우타즈초가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잘 공존하고 있는 기적의 마을이다.
그러므로 '우탕그라' 라는 이름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키 워드(key word)와 마을의 키
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름으로 정했단다.
이상은 우탕그라의 주인 나카이쿄코의 말인데, 그녀에게 낙점되어 젠콘야도를 관리하는
이리에 무네노리(入江宗德)와 노리코(德子) 부부의 소회는 어떤가.
오사카의 금속가공회사를 정년(60세) 퇴직한 부(夫) 무네노리.
공인 센다츠(先達/大阪 極樂講所屬)인 부(婦) 노리코.
10여년 동안에 10회 이상 시코쿠헨로를 걸음으로서 헨로와의 인연이 깊어진 부부.
그들이 헨로에서 받은 오셋타이를 돌려주는 제2의 인생을 발원하고 있을 때 우탕그라가
관리인을 물색중이었다.
갑과 을은 의기가 투합되었고 이리에 부부의 제2의 인생은 2010년 2월(平成22) 오사카를
떠나 우타즈초에서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이 날의 두 합숙자(중년과 청년)와 더불어 계속되었고 석식은 없지만
후덕한 보살 노리코가 준비한 다과를 들며 계속되었다.
그들의 관심 역시 까미노였다.
국적과 노소 불문, 내게 겸손하고 저자세인 것은 나이 때문인,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겠
지만 헨로가 최고여야 하는 일본인들의 애국심에는 내 까미노 소개가 분명 충격일 것이다.
하지만 명명백백한 객관적 사실인 걸 어찌 하겠는가.
자극을 주려고 일부러 한 얘기가 아니고 자기네가 듣기를 원했기 때문에 말했을 뿐이다.
밤이 이슥하여 노리코가 잠자리로 나를 안내했는데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합숙방이 아니고 별도의 조용한 방인데다 샤워를 한 몸이라 해도 들어가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안락한 새 비단 침구였기 때문이다.
헨로상을 위한 침구일 리 없고 사용한 적이 없는 전통 양갓집의 이부자리다.
최초의 북상 백두대간의 중정리(문경) 어느 민가(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17회글참조)
에 이어 2번째 체험이었다.
이리에 부부는 한국 늙은이인 내게 왜 이리 후대하는가.
식민 통치의 원죄를 의식하는 세대가 아닌 그들이 선대들을 대신하여 사죄하는 것이 아닐
진대 시코쿠헨로 완주를 코앞에 둔 '스고----이'(すご----い) 늙은이에 대한 예우?
그들이 우교관계에 있는 까미노 몰리나세까를 공유했으며 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의
까미노 기록에 경의를 표하는가.
맨바닥 체질에 푹신한 비단 이부자리가 어울리는가.
되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을 낭비해서야.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견구소년사절단과 예수회, 우탕그라와 우타즈초,의 석연찮은 관계
등을 정리해 보는데 활용했다.
미개 섬 일본은 백제의 문물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당나라의 불교와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서 견당사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16c에는 서양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할 목적으로 예수회의 입국을 무조건 개방했다.
1549년 하비에르(Francisco Javier)를 시작으로 기독교의 전래는 순풍을 만난 듯 했다.
1582년에는 10대(13, 14세) 소년들로 소위 덴쇼견구사절(天正遣歐使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예수회의 알선으로 스페인과 뽀르뚜갈, 로마교황청 등을 방문하여 기독교를 빙자,
신 문물 수입에 구걸했으며 괄목할만큼 성과를 올렸다.
10대에 출국해서 20대가 된 1590년, 8년만에 귀국할 때는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비롯하여
서양악기, 해도 등 필요한 것들을 지참했다.
.그러나, 서양의 최신 발명품인 총기를 비롯해 예수회를 채널로 한 국가적 발전의 기틀이
확보된 후에는 곧 기독교에 대한 무분별, 무자비한 박해를 시작했다.
참초제근(斬草除根)의 방식이 어찌나 강력하였는지 기독교 전래 5c에 신도수가 초기의 수
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잔혹한 수단으로 국력을 확장했으나 스스로 일으킨 2차대전으로 자멸하였음에도
재기의 야욕 역시 추악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2차대전 주범의 다른 축인 독일은 대화의 부족을 원인으로 진단하고 사죄와 더불어 대화
운동(Christian Academy)을 전개하는데 엄청난 마르크를 쏟아부었는데 일본은?
시코쿠헨로의 '동행이인'(同行二人)을 돌파구로 삼았는가.
견구사절의 예수회순찰사가 지닌 지도에 사누키의 유일한 기항지 우타츠초를 VTANGRA
로 표기했다고?
내 스페인어가 워낙 짧기 때문인지 VTANGRA는 우타츠초의 스페인어 표기라 할 수 없다.
스페인人들의 수기(手記/handwriting) 'U'자와 'V'자 구분이 애매한 것이 일반적이다.
표기된 단어의 뜻에 따라 U자도 되고 V자도 된다.
스페인어에서 'VT'쌍자음이 필요한가.
마지막 레이조인 88번 오쿠보지가 88km남은, 78번레이조의 밤이 가고 있다.
거듭되는 쌍팔(88)은 일본인들의 기호숫자?
그리고 우연일까 인위인가.
88km에 남은 10개 후다쇼가 자리하고 있으므로 잔여 후다쇼간 거리는 평균 8.8km다.
까미노의 막판 프랑스길에서 2일에 해치운 거리지만 귀국일을 제외해도 9일이 남았다.
일당 10km만 걸어도 되는 길, 남은 날들을 어떻게 요리할 지 스스로 관심거리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