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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당신 아랫 뱃살 늘어지는것좀 봐~~ 그렇게 운동을 해도 효과가 있는거에요?”
드레싱룸에서 정균의 출근복장을 챙겨주던 솔희는 정균의 아랫배를 꼬집으며 놀려대었다.
솔희는 천진난만할 정도로 명랑하고 쾌활하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정균의 눈에 드문드문 어두워지고 갑자기 공포에 질리는 솔희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럼 나도 당신 배좀 확인해 보자”
정균이 솔희의 아랫배를 만져보지만 유감스럽게도(!) 솔희의 뱃살은 아직 군살 하나 잡히질 않았다.
물론 솔희는 몸의 살이 전체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탄력이 있고 유려한 몸매의 라인은 살아 있다.
“내 나이 52살이야. 이제 운동방법을 바꿀걸 고민해 봐야지”
“놀랐죠? 여자나이 48살에 왜 당연히 아랫배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거죠? 그럼 저랑 요가 도장에 등록 같이 해요”
솔희는 오늘 정균의 출근 복장을 비즈니스 캐주얼 콤비로 갖추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한 베이지색 양말을 꺼내 정균 앞에 내밀었다.
정균은 언제인가부터 솔희가 골라주는 옷과 양말이 아니면 자기 스스로 출근이나 외출복장을 갖출수 없게 되었다.
맘대로 입었다가 솔희에게 치도곤을 당할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맘대로 옷을 입을 타이밍도 만날 수 없었을뿐더러 이제는 뭘 입어야할지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감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그날 솔희의 기분과 구상에 따라 양말서부터 시작하여 머리카락 모양까지 가꾸어져야만 했다.
아침식사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정균은 실내차고로 나갔고 솔희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정균이 다시 솔희를 향해 돌아서자 솔희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무언가를 확인시킨다.
“오늘 아시죠? 호반에서의 재회기념일이에요. 몇 년차죠?”
“12년차입니다, 사모님!”
“합격! 훈제연어랑 와인이랑 갈릭브레드 준비해 놓을테니깐 일찍 들어오세요”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정균의 출근 준비를 시켜주느라 막상 솔희는 아직 흰색 레이스가 치마 끝 부분에 달리고 웃가슴이 드러난 나이트 레시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흡사 연주용 드레스나 웨딩드레스로 착시하기가 쉬웠다.
솔희의 이런 아직 채 환복하지 못한 잠자리 복장은 자기보다 남편을 먼저 챙기는 부지런한 여인의 면모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렇게 명랑하면서도 목소리를 진지하게 짝 낮추어 이야기하는 솔희의 오른 손은 정균의 가슴에 고정되어 있다.
정균은 가볍게 솔희의 허리를 끼고 솔희는 그의 목을 안은 상태에서 이들은 몇 번 입술을 포개어 키스를 하며 서로의 콧김마저 교환한뒤 아침 이별을 고했다.
차에 오른 정균은 백밀러로 후방을 응시했다.
솔희는 차고문 바로 앞에까지 나와 정균을 배웅하고 있다.
정균은 리모콘을 눌러 차고분을 닫았고 셔터가 내려갈때까지 솔희의 치맛자락 아래 두 다리가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매일같이 만나는 단란한 가정의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균은 오늘 웬지 복합적인 상념에 빠져들었다.
12년전 두 번째 결혼식을 마치고 서너달이 지나 급작스러운 솔희의 호출을 받고 서울로 급히 달려갔을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도도하고 거만했었고 아름답고 카리스마 있던 솔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차장의 차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땀과 눈물에 젖은채 그를 바라보던 솔희의 눈빛은 안도감과 동시에 모든걸 의탁하고 의지하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솔희를 안정시키고 차를 몰아 돌아오는 길에 정균은 그녀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공황장애가 심하게 온거지?)
(.............악마를 보았다면 믿으시겠어요?)
(누가 우리 솔희한테 악마짓을 했다고, 가만 안 놓아둘거야)
(.............7년전의 제가 악마였어요. 전 지금 아까 그 병원에서 그 악마를 대면했어요. 당신이 조금 늦게 왔더라면 전 그 악마와 함께 찻길로 뛰어들었을거에요, 그래야만 그 악마도 죽일테니깐요)
정균은 잊고 싶었던 그 7년전의 첫결혼생활 때의 어느날이 떠올랐다.
파트너에게 허락받지 않은 일방적인 임신중절 수술과 영구피임시술을 받고 돌아온 그날 그는 솔희를 심하게 나무랐지만 솔희의 태도는 당당하고 도도했었다.
오히려 정균이 뒷걸음질치며 그녀에게 사과를 했을 정도로.
(여보, 솔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말로 할게. 이제 다시 당신을 악마라고 부른다던지 자살한다던지 그런 말을 하면 나한테 크게 혼날줄 알아)
솔희는 쓸쓸하게 운전석의 정균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혼내실건데요?)
(혼나는 사람이 혼나는 방법을 결정하나? 집에 미리 회초리나 준비해 놔)
정균은 짦막하지만 듣는 솔희에게 임팩트가 갈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각오는 사뭇 진지한 것이고 더 이상 솔희의 자학이나 자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 그녀에게로 전해졌다.
솔희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멍한 표정을 풀고 운전 중인 정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회초리 준비할께요. 집의 가장인 당신이 매를 들겠다는데 따라야죠!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조심하게 될 것 같아요. 아세요? 당신이 죽을 뻔한 저를 두 번이나 살렸어요)
그 두 번이라는 말에 정균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녀에게 첫 번째 죽을뻔한 적은 언제냐고 굳이 묻지는 않았다.
또 다시 그녀의 상처를 자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정균은 비로소 엘에이에서의 첫 결혼생활 때 솔희에게 받은 상처를 지울수 있었다.
그에게서 솔희는 이제 그저 상처받아 약하고 병들고 아프고 오직 그에게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균은 그날 이후 12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때의 일을 잊을수가 없었다.
좋았던 일이던 나빴던 일이던 이들 사이의 일을 망각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해이해지는 것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몇년전 대학 실기강사와 예고 실기강사를 겸할 정도로 외부활동을 늘렸다가 공황장애가 재발한 솔희는 대학출강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3년전에 의사로부터 투약검토가 필요한 상황이 종료되었고,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리고 솔희는 신경내과에 더 이상 방문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찌보면 공황장애와 우울증은 남은 솔희의 여생에 새겨진 화인과도 같다.
사무실에서 정균은 다음주로 넘길 일과 지금 처리해야할 일을 구분짓는 일간 마무리 작업 진행중이다.
그때 택배기사가 사무실에 들어와 정균의 이름을 확인한뒤 소포를 전달한다.
겉 박스를 뜯으니 예쁜 포장지와 매듭으로 쌓여진 또 작은 박스가 나온다.
바로 그때 정균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고 그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통화버튼을 누르며 뺨에 가져다 대었다.
“응, 여보!”
“여보! 어제 냉장고에서 꺼낸 노르웨이산 연어 오늘 반나절 동안 은은한 온도에 데워서 훈제 완성해 냈네요! 지금 토핑하고 있는 중이에요, 언제 들어오세요?”
“마무리 하는 중이야”
“해가 6시반도 되기 전에 진대요.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우리 재회기념일이지, 설마 그걸 잊었을리라고?”
정균과 솔희는 다섯개의 가정기념일을 지내 왔다.
두 사람의 생일, 하나는 5월 중순의 첫 결혼 기념일, 또 하나는 성탄을 지낸 직후 연말의 두 번째 결혼 기념일, 그리고 10월 중순의 춘천 호반에서의 재회기념일이다.
12년전 그날도 그랬다.
정균의 집 구경을 하기로 결정하고 솔희가 잡아 놓은 모텔에서 방을 뺀후 솔희의 제안에 의해 마트에 가서 훈제연어를 구입해서 저녁 와인상을 차렸었다.
그 이후로 매일 이날이 오면 솔희는 아예 생연어를 사서 이틀에 걸쳐 정성껏 연어 훈제를 완성한후 약간의 소금과 후추와 마늘가루, 파슬리와 라임을 이용한 요리에 와인을 준비해 주었다.
“오늘 학생들 예비콩쿨 심사 있다고 하지 않았나? 벌써 끝나고 집에 왔어?”
“어머, 말을 어디까지 들은거에요? 거기엔 교과 담당쌤들만 가고 전 거기 갈 필요 없어요. 암튼 빨리 들어오셔요.”
하루에 서너번씩 통화를 하면서 솔희가 재잘대던 말들을 모두 기억할리 없는 정균은 솔희에게 핀잔을 듣고 빠른 귀가독촉을 받으며, 귀챦은 생각은 들었지만 이게 평범한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 실감이 아직도 들지 않는다.
정균이 오래전부터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 그에게 이루어졌건만 아직까지도 낯설을 때가 있다.
12년전 솔희는 춘천에서 결혼식을 올린뒤 그녀는 성당에서 정균의 세례명인 유스티노의 여성형인 "유스티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녀의 공언대로 3년동안 전업주부로서 바깥 직업없이 오직 정균의 내조에만 전념했다.
솔희는 그녀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과 병원과 마트, 은행을 제외하고 스스로 외출을 삼가하고 대부분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녀는 단둘이 사는 넓은 2층 집을 깨끗히 관리하고 인테리어 잡지를 탐독하며 계절마다 커튼과 침대보를 바꾸고 두 사람의 옷을 전문적으로 세탁하고 직접 수선했다.
원래 요리에 소질이 있던 것을 과거 애써 숨겨왔던 솔희는 식단표를 짜놓고 채식 중심으로 아침과 저녁, 그리고 주말의 특선요리를 선보였다.
정균의 코디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그녀도 잠자리 화장에 더욱 정성을 기울여 남편 정균의 눈을 기쁘게 했다.
정균은 평일날 아침 출근시간을 제외하면 화장하지 않은 솔희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질 정도였다.
그의 직장이나 독서클럽에 이벤트가 있으면 솔희는 성장을 하고 따라나가 조용하고 아름다운 사모로서의 역할을 했다.
솔희는 아침에 먼저 일어나 식사준비를 하고 피아노를 연주했고 저녁때 그의 퇴근을 기다리며 피아노를 쳤지만 원래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졌었던 자신의 캐리어를 완전히 머릿 속에서 삭제했다.
그녀는 늘 정균의 만족한 얼굴과 칭찬을 염두에 두었고 그를 가장으로 정성껏 섬기는게 그녀의 삶의 목표이며 숨쉬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저 전업주부가 되기 위해 존재했던 것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던중 어디선가 춘천 시내의 예술 중고등학교로부터 영입제안을 받았다.
좁은 지역이라 솔희가 정균의 독서모임에 화려하게 연주로써 데뷔를 한 이후로 오래지 않아 그녀에게 피아노 실기강사 자리가 주어졌다.
사실 그 독서 모임 안에 학교 재단관계자가 있었고 그가 교감이나 음악주임교사에게 귀뜸을 한 모양이었다.
(전 앞으로 단돈 천원짜리 한 장 만들지 않을거에요. 먹는 것, 입는 것, 얼굴에 분 바르는 것, 병원비 당연하고, 가끔 내 친구나 후배들 놀러오면 계네들한테 돈쓰는것도 다 당신 손에서 나온 돈으로 충당할거에요. 허락하시겠다면 지금 당장 시청에 혼인신고하러 가요.)
솔희는 12년전 첫날밤 아닌 첫날밤을 지낸 후 정균의 체온이 가시지 않은 몸의 따사로움과 축축한 팬티의 촉감을 엔조이하는 상태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정균에게 다짐을 받아 놓은터였다.
그녀는 자기에게도 전업주부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 많이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때의 춘천에서의 만남과 극적인 결합은 그녀의 잠재의식에 억눌려 있던 모든 욕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격이었다.
하지만 얼떨결에 39살이나 되어 사회생활을 재개한 솔희는 특유의 꼼꼼함과 따뜻해진 교수법으로 학생들의 인기와 존경을 샀다.
원래 그런 실기강사들은 쉽게 쉽게 교체가 되었지만 학교측에선 솔희가 오래 동안 일해주길 바래서 솔희는 꽤 오랜 세월 동안 학교 일을 할수 있었다.
거기다가 성하의 추천으로 음악대학의 피아노전공과정에 실기강사로 나갔지만 한학기만 채우고는 그만두었다.
그녀의 공황장애가 재발했고 의사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균의 폰에 반가운 톡이 하나 떴다.
그것은 그의 집을 인수했었던 강선생의 메시지였다.
[정균형, 집사람이랑 다음달에 한국 방문합니다]
[반가와요. 제 집에 빈 방 있으니 춘천에 오시면 우리집서 머무세요. 시간 괜챦으시면 부부동반으로 함께 여행합시다]
강씨는 정균에게 자기들 부부의 사진을 보너스로 보내주었다.
정균은 그들의 사진을 보며 유달리 남편에 비해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늙어보이는 리사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집안에서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솔희가 훈제한 연어를 썰면서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솔희는 정균과 함께 식사할 때 여전히 앞치마 차림으로 정균과 대각으로 자리하여 정균이 첫수저를 뜨기전가지 얌전하게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아 두는 자연스런 행동으로서 정균을 집의 주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 예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가끔 서로가 서로를 한참 동안 응시하기도 한다.
12년간 정균과 솔희는 식사때나 주말에 거실에서 차담을 나눌때도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두 사람 간에 삭제되었던 6년의 세월을 그렇게 해서 보상받으려는 것일까.
정균에게도 솔희에게도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10년 단위를 넘어선 재차 동행의 세월 속에 중년의 나이가 되고 그들 사이에 비록 아이는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가 함께 마주보며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집안 전체가 소등되고 그들의 2층 침실에 무드램프가 켜지는 시간이 오면 지금도 정균은 솔희의 모든 것을 탐닉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지금도 솔희와 한 잠자리에 드는게 실감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솔희는 나잇 러브타임이 되면 그냥 그의 손길에 모든걸 다 맡겼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작은 공포와 불안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며 그녀에겐 가장 듬직한 때였다.
서로를공유하는 밤에는 정균의 스킬이라던지 여자가 원하는 때와 부위를 적시에 만족시켜주는 감각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행위를 멈추고 정균의 눈두덩이가 솔희의 마스카라로 세운 눈썹에 닿도록 서로를 한참 응시하곤 했다.
정균에겐 그저 솔희라는 한 여자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 옆에 있는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솔희는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는 대신 남편 정균에게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할수 있었기에 둘만의 단란한 가정은 흔들릴 일이 없었다.
"당신 강선생님한테 연락 받았어요? 전 리사씨한테 문자 받았어요. 다음달에 남편이랑 한국에 방문한다고요. 춘천에서 며칠 머물거라고 했는데 우리 집에서 자라고 제가 덜컥 말했는데 괜챦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강선생한테 부부동반으로 남해안 여행이나 가자고 제안해 놨어"
"와! 남해안......!"
솔희는 강선생과 리사 부부의 한국방문과 정균이 말한 남해안 부부동반 여행에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정균에게 물었다.
“여보, 궁금한거 있어요”
“뭔데?”
“미국 살적에 당신은 저더러 늘 당신만을 위한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했어요. 저도 잊고 지냈지만 지금에야 생각나네요, 왜 지금껏 그 연주회를 열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나요?”
정균은 솔희의 그 말을 듣고서야 불현 듯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에게 남편을 위한 연주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결혼 초기부터 솔희에게 가정연주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해왔고 누누이 거절당해왔다.
거기에 더하여 불륜에 빠졌던 솔희는 그 엉뚱한 남자를 위한 개인연주회를 해준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 때 솔희의 일탈이나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그였다.
지금에 와서 정균은 그런 요구 자체가 굉장히 유치하고 좀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정균은 재결합 후에 솔희에게 가정연주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할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 솔희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 했다.
“여보, 당신은 아침마다 1층에서 연주를 하지, 그 은은한 리듬과 선율로 침대에 남아 있는 나를 깨워. 그건 나를 매일매일 의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야. 퇴근해서 들어올 때 쯤 집 앞에서 시동을 끄면 집안에서 당신이 연주하는 유명한 작곡가들의 빠르고 힘찬 피아노 선율이 들려. 이제 편안하게 당신과 일상을 보내자는 신호로 들리지. 그래서 가정음악회니 나만을 위한 연주회니 이런건 사치라고 생각해. 당신은 하루에 두 번씩 가정음악회를 열어주니깐”
순간 테이블 맞은 편의 솔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도 가늘게 늘인다.
솔희의 입술은 벌건디 색상으로 착색되었고 눈 주위는 연한 금색과 짙은 금색의 투톤 아이섀도우로 인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솔희는 정성스런 풀메이크업으로 그를 위한 그녀만의 예의를 갖추고 있다.
솔직히 말한다면 솔희의 화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짙어지고 있었지만 조금도 천박함이 느껴지질 않는다.
40대 후반이 되어 파릇파릇하고 날카로운 미모는 사그라들었지만 이제는 우아함과 성숙미가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솔희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감출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가장 듣고픈 말이었던 것 같다.
“정말로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치고 싶고 연주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인데도 당신은 그걸 가정연주회라 생각하는건가요?”
“나 들리라고 치는거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관심이 없고 음악소리를 소음으로만 생각하는 사내라면 당신은 집안에서 피아노를 칠 용기가 있었을까?”
솔희의 눈빛은 완전히 풀려버렸다.
정균의 말 하나하나를 음미하듯이 감상을 마친 솔희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치마를 벗어 키친 아일랜드에 접어 놓은뒤 정균의 손을 잡았다.
“매일매일이 가정연주회였다면 지금부터 하는 연주는 특별연주회가 될거에요. 너무 늦었지만 당신만을 위한 연주회를 지금 할께요.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도 대충 연미복이랑 비슷하니깐 연주회 필이 날거에요, 일어나세요”
정균은 ‘일어나세요’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솔희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거실로 나가 쇼파에 앉았다.
솔희는 구석 끝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의 뚜껑을 연뒤 뚜벅뚜벅 다시 걸어나와 유일한 청중 정균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일한 청중 정균은 쇼파에서 일어나 솔희에게 짝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 솔희의 단 한사람 정균만을 위한 독주회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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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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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달리기 한듯한 가정 생활
잼나게 잘 보았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달리기한듯한 가정생활이란 표현이 참 찰지네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님께도 각별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