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아주머니
조 흥 제
문우의 수필집을 읽다 보니 꼭 내 얘기 같았다.
그 분은 경상도 영양이 고향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 와 고모부 댁에서 고종 사촌 동생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대학에 다녔다. 5․16 혁명 후 고모부가 직장에서 쫓겨 나 8식구의 생계가 막막하게 되었다. 그러니 객식구인 지인이 그 집에 있을 수 없어 고모부에게 고향으로 가겠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학교육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고모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뚫고 나갈 길은 있다. 대학 을 포기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광화문 전화국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36년 간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고마운 고모부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못드리고 돌아가셨고, 고종사촌들은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으면서 영등포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영등포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나를 살려 주셨다.
6․25 사변 후 곤궁한 충청도 피란시절에 내가 죽을 병이 들었다. 수술을 해야 살 병인데 돈이 없어 병원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도 외아들인 나를 살리고자 부모님은 눈 딱 감고 대전 박외과로 데리고 가셨다. 밤이었다. 퇴근했던 의사가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달려 와 내 상태를 보더니 곧 수술 준비를 시켰다. 수술 중에도 의사는 내 눈을 계속 들여다 보더란다. 수술 후 의사는 ‘30분만 늦었어도 수술할 수 없었다’고 하더란다.
수술을 하여 살아나긴 했지만 천문학적인 병원비가 문제였다.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아버지는 천지 사방을 헤매셨다. 하지만 내남정 없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남의 아들 병원비 보태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아버님 속은 얼마나 상하셨을까?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지 영등포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영등포 아저씨가 거금을 조건 없이 주셨다. 병원 비의 반값이었다. 아버지는 위스키 한 병과 조기찌개를 맛 있게 끓이고 원장을 우리 입원실로 불러 위스키 한 잔을 권하면서 사정 얘기를 하고 선처를 호소했다. 어른들이 나간 후 위스키 병에 남은 한 방울을 먹었더니 입안에 불이 나서 쩔쩔맸다. 16세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아서였다. 조금 남은 조기찌개를 먹었더니 세상에 그렇게 맛 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보았다. 중병을 앓고 나서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 조기찌개의 맛이야 말해 무엇하랴! 의사는 아버지의 진정이 가슴에 와 닿았던지 나의 퇴원을 허락했다. 43일 만이었다. 퇴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추석이 되어 동네에서 돼지를 잡아 분배했다. 우리집에 두 근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수술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먹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먹다 죽는 한이 있어도 먹겠다고 떼를 썼다. 전에는 돼지고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몸이 허약해지니 몸이 끌어 당겼다.
5․16 혁명 후 우리는 서울로 이사 와서 영등포 아저씨네 근방인 문래동에 셋집을 얻어 만화방을 운영하면서 영등포 아저씨 아들 중학교 1학년생과 초등학교 4 학년 짜리 두 학생의 가정교사를 겸했다. 그러다 직장을 잡아 그만 두었다. 우리도 강북으로 이사 온 얼마 후에 소식을 들으니 셋째 아들이 신혼 초 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해 죽고, 5․18 광주 사태 후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넷째(내가 가르쳐 주었던 중학생)가 엄청난 빚을 감당 못해 부도를 내고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때 찾아 뵈었더니 영등포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2003년 첫 수필집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얘기를 써서 수필집으로 내 박외과 원장(가장병원)에게 두 권을 보내 드렸더니 한 권은 친구에게 주었다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영등포 아저씨께도 갖다 드렸다. 그 무렵 영등포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영전에서 아저씨께 감사함을 전하고 천국에 가시라고 기도드렸다. 몇 년 후 추석을 맞아 영등포 아주머니를 찾아 뵈었더니 허름한 20평 아파트에 사셨다. 80평 단독주택에 사셨는데 어찌된거냐고 여쭈어 보니 넷째 아들이 안고 죽은 빚을 갚아 주기 위하여 집을 팔았다고 하셨다. 분가한 아들이 진 빚을 부모가 갚아 줄 의무는 없지만 아들이 편한 마음으로 천국 가라고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던지 그 좋던 얼굴이 반쪽이 되셨다.
그날 저녁에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영등포 아주머니야.”
젊었을 때 그 맑던 목소리였다.
첫댓글 돌아보면 참 고마운 분들이 많더군요. 찾아보시는 그 마음,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좋은 ㅏ람이 더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