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1. 3. 23.~24.(화,수) - 음력(2. 11.~12.), 일출 06:29~일몰 18:43
●산행지: 수도지맥 1구간 (초점산-산제현)
●산행코스: 소사재(탑선슈퍼)-초점산-수도지맥분기점-고랭지채소밭-땀때기고개-877m봉-감주재-861.6m봉-국사봉갈림길-하성-배티고개/3번국도-거말산/봉산-우두령(1,099번지방도)-861m봉-1,008m봉-마당바위-시코봉(1,237m)-서봉(금오지맥분기점)-수도산(1,317.1m)-동봉-불석재-구곡령-송곡령/고비재-단지봉-좌대곡령(1,257.6m)-1,118.3m봉-용두암봉(1,124.9m)-목통령-1,030m봉-성만재-1,143m봉-불기령-1,012m봉-1,150m봉-분계령-두리봉-1,095m봉-남산(1,112.9m)-깃대봉(란석산,1,086m)-장자동고개-918m봉(헬기장)-고불암-1,010m봉-장구재-944m봉-1,017m봉-임도-1,020m봉-마령(1,004m)-큰재-매화분맥갈 림봉/980m봉(헬기장)-1,030m봉)-작은가야산(1,065m)-소바위암봉-우두산(1,046.3m)-의상봉-마장재-노르재-뒤들재-비계산(1,125.7m)-산제현(59번국도)
●먹거리: 생수1.5리터, 빵(옥수수꿀호떡, 단팥빵, 단팥크림빵, 띠베패스츄리), 땅콩샌드4, 단백질바, 사브래, 산도2, 미니자유시간6, 홀스4, 사탕2, 알마겔5, 홍삼스틱6
●준비물: 쟈켓, 바람막이,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반장갑, 손수건, 휴지, 우의, 물티슈, 스패츠, 긴팔, 말방울2, 매트, 안대, 귀마개, 양말, 여분의류, 전지가위, 띠지50
●거리: 약 64.8km
●소요시간: 33.34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버스28,400, 편의점7,700, 뼈해장국8.000, 거창-탑선 군내버스, 거창-가야 군내버스 고속버스28,400, 뒤풀이15,000
●날씨: -2~19, 첫날은 미세먼지, 아간에 바람 많이 불고 둘쨋날은 맑음
●산행경과:
* 3. 23.
- 06:58 : 소사고개 탑선슈퍼
- 07:56~08:10 : 수도지맥분기점
- 08:03 : 초점산(1,249m)
- 10:04 : 감주재
- 10:26~10:41 : 국사봉삼거리
- 10:33 : 국사봉(875.1m)
- 11:35 : 하성
- 11:48~12:00 : 배티재/ 백학 경로당
- 13:14~13:20 : 거말산(901.6m)
- 13:55 : 우두령
- 16:23~32 : 시코봉(1,237m)
- 16:38 : 심방갈림길
- 17:12 : 수도산신선봉/ 금오지맥갈림봉
- 17:24 : 수도산(1,317.1m)
- 17:55 : 불석재
- 18:32 : 송곡령
- 19:17~25 : 단지봉(1,327m)
- 20:20~21:16 : 휴식
- 21:20 : 좌대곡령(1,257.6m)
- 22:08 : 목통령
- 23:43 : 성만재
* 3. 24.
- 00:07 : 독용분맥 갈림길
- 00:46 : 분계령
- 01:07 : 두리봉(1,133m)
- 15:27 : 불기령
- 01:15~02:10 휴식
- 03:23~03:52 휴식
- 04:04 : 남산(1,112.9m)
- 04:30 : 깃대봉/난석산(1,086m)
- 04:45 : 장자동고개
- 04:55 : 고불암 종루
- 05:54~06:23 : 휴식
- 08:50 : 작은가야산(1,065m)
- 10:04~11:07 : 우두산(1,046.3m)
- 10:33 : 의상봉(1,038m)
- 12:23 : 마장재
- 13:41 : 수월고개
- 14:23 : 비계산(1,125.7m)
- 16:31 : 산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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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거리
- 소사고개~우두령 15.2+3km
- 우두령~고불암 25.2km
- 고불암~산제치 18.2km
- 산제치~마령재 18.2km
-. 싸리터재~지릿재 20km
- 마령재~기미재 17.8km
- 지릿재~미곡천합수점 23.7km
- 기매재~청덕교 15.8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배티고개: 백학경로당 수도
- 웅양택시: 055-942-3801
- 목통령 가기전 개금방향 이정표로 2~300m내려가면 계곡물 있음.
- 고불암: 약수터(종루에서 본당 대각선으로 100m)
- 거창 가조면 택시: 055-942-1231
- 산제현에서 거창휴게소 1.8km
- 합천 묘산면 택시:
- 마령재 내려서기 전 우측으로 약 200m 아래 화엄사 절 있음.
- 합천읍 택시: 055-931-2757, 933-5555
- 기미재: 매점 영업 안함, 대원휴게소
- 고령군 택시: 054-956-1116, 954-1234
- 청덕교~낙동강합수점 1.5km
- 청덕 양진리 적교 개인택시: 055-932-8604
- 적교장, 도일장, 강변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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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탑선슈퍼 가는길
- 동서울터미널~거창 ~15시, 17:10, 19:10, 3.30h, 28,400
- 남부터미널~거창 07:30~16:10, 18:10, 23시, 3.30h, 24,000
- 거창시외버스터미널(서흥여객)~소사마을(탑선슈퍼) 06:20, 0.50h
- 서흥여객버스터미널: 055-944-3720
* 산제현~거창 서흥버스
- 거창읍-가야면 왕복 버스: 17시
* 거창시외버스터미널-서울 오는길
- 14, 16, 18:30, 동서울, 28,400, 3.30h
- 14:40, 15:30, 17, 22, 남서울, 21,800
* 청덕면 밀정마을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밀정마을~합천버스터미널: 16:00
- 미곡리~합천버스터미널: 17:00
* 합천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합천시외버스터미널~남서울, 13, 15:30, 17시, 32,400~42,100, 4.20h
* 고령터미널~남서울 17:25, 3.55h, 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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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 맞아요?
한강기맥, 한북정맥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수도지맥은 가야산과 황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는 가조들의 의상봉이겠죠.
의상봉을 다녀와야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오늘 어디까지 가느냐가 그보다 더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변수가 생겼어요.
두무산과 오도산은 묶음으로 같이 넘어야 하는지라 두 산을 넘어가기는 시간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의상봉을 다녀와 산제현에서 끊고 가조온천단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네요.
다음날 산제현에서 싸리터재나 마령재까지 할 심산이었는데 갑작스레 일이 생겨 급거 상경했습니다.
남은 2구간도 거리가 비슷해 같은 방법으로 진행해야겠네요. 밤기온이 좀 더 올라가겠죠.
노상에서 토막잠을 자는게 바람때문에 추웠어요.
어제 새벽 네시까지 후기 정리하느라 골치가 띵~ 했습니다.
홀대모에 옮겼더니 사진이 왕창 커져서 그만 후딱 내렸습니다.ㅜㅜ
오전에 방장님 사무실 방문해서 한수 배우고 와서 다시 해보니 사진이 작아지네요. ㅎㅎ~
이제 사진 줄이는 방법을 알았어요. 사진 올리고 왼쪽 축소 표시에 1000을 입력하고 전환버튼을 눌르면 돼요.
방장님은 포토웍스 어플로 사진 줄이는 방법도 알려주셨어요.
음!~ 폰사진을 컴에 옮겨두고 그걸 다시 포토웍스로 줄이는 방법이에요. 콜라쥬 기능도 같이 있더군요.
이 쉬운걸 가지고... 어렵게 낑낑 댓던 시간이 있었더란 말이죠. ㅋ
저 잘만 가르쳐 주시면 하나 알면 열을 깨우치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워낙 강해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나 뭘 물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잘만 가르쳐 주신다면 좋은데 쓰는데 대부분 그게 아니라서 차라리 아쉰소리 안하고 멍청하게 살겠다는 식이죠. ㅎㅎ
그런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트랭글에 위치저장으로 찍은 사진이 파일로 나타나질 않아서 못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50장 이상의 사진을 올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요. 궁즉통, 언젠가는 알아질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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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지맥(修道支脈)이란
수도지맥은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군, 경남 거창군의 삼도가 만나는 대덕산(大德山, 1,290.9m) 남쪽의 삼도봉(초점산, 1,250m)에서 남쪽으로 350여m 떨어진 1,180m 지점에서 분기하여 동남쪽으로 가지를 쳐 경남북 도계를 따라 봉산(902m), 수도산(1,317m), 단지봉(1,326.7m), 좌일곡령(1,257.6m)을 지나 가야산을 목전에 두고 두리봉(1,133m)에서 도계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창군과 합천군의 군계를 따라 남산(1,113m), 마령(1006.5m), 우두산(의상봉, 1,046.2m), 비계산(1,130m), 88고속도로, 두무산(1,038.4m), 오도산(1,120m) 등 1,000m급 이상의 장쾌한 능선이 60여km 이어진다. 오도산에서 거창군과 작별하고 온전한 합천땅으로 들어서며 고도를 낮춰 토곡산(644m)을 지나면 다시 경남북 도계를 만나 고령군과 합천군의 군계를 따라 만대산(688m), 시리봉(408m)을 지나 솜등산(271m)에 올라선 도계능선과는 작별을 하고 마지막 여력으로 필봉(330m), 부수봉(317m), 성산(205.7m)을 내려서서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와 미곡리 황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05.8km의 산줄기다. 산줄기상의 봉우리는 국사봉(875.1m), 봉산, 수도산(1,317m), 단지봉(1,327m), 두리봉, 남산(1,113m), 우두산(1,046m), 비학산(1,130m), 두무산(1,039m), 오도산(1,120m), 토곡산, 만대산, 노태산, 시리봉, 솜등산, 부수봉, 필봉, 성산 등이며, 산줄기가 가두는 물줄기는 북동쪽의 대가천, 감천, 추계천, 복하천, 양화천, 가야천, 안림천 등이 있고, 남쪽의 황강(황강천, 계수천, 좌가천,석가천, 합천천 등)이 흐른다. 수도지맥의 동북쪽으로 흐르는 감천(甘川)은 길이 69km, 유역면적 10만㎢로 수도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의 지명을 낳게하고 김천시 일대를 지나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수도지맥 동쪽 내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會川)은 길이 78km, 유역면적 78,000㎢로 수도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대가천(大伽川)을 이루어 성주호에 들었다가 다시 동으로 흘러 고령읍에서 소가천(小伽川), 안림천(安林川)과 합류하고 고령군 덕곡면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수도지맥 서쪽으로 흐르는 황강(黃江)은 길이 111km, 유역면적 13만㎢로 남덕유산(1,507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합천호(陜川湖)에 들었다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들어 맥을 다한다. 수도기맥은 도상거리 105.8km로 행정구역은 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시, 성주군, 고령군과 경남 거창군 합천군을 지난다.
수도지맥의 최고봉은 단지봉(1,326.7m)이지만 가야산(1,433m)의 서쪽 봉우리에 불과해 두번째인 수도산(修道山, 1,317.1m)을 지맥의 명칭으로 정했다고 하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좌일곡령(左壹谷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국토포탈 고시지명은 좌대곡령(左臺谷嶺)이다. 광복 이전 지도와 구기본도에도 한글로 좌대곡령이라 표기된걸 보면, 인쇄본에 표기하면서 어려운 대(臺) 자를 읽기 쉬운 일(壹)자로 잘못 오기하여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좌대(座臺: 기물을 받쳐서 얹어 놓는 대)라면 말이 되지만, 좌일(左壹)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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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지맥의 행정계를 살펴보면, 분기봉(1,180봉)을 출발할 때는 좌(동) 경북 김천시 대덕면, 우(서) 경남 거창군 고제면을 경계지으며 경남북 도계를 가르며 남향하다, 삼면봉인 877.2m봉에서 우측이 고제면에서 웅양면으로 바뀌어 우두령 이후까지 이어진다. 거창 우두령을 출발할 때는 좌측(북)이 경북 김천시 대덕면, 우측(남)이 경남 거창군 웅양면으로 경남북의 도계를 경계지으며 동쪽으로 이어지다, 시코봉(1236.5m)에서 우측이 거창군 가북면으로 바뀌면서 남쪽으로 양각지맥을 분기시키고, 기맥길은 동향과 북동향으로 이어져 수도산서봉(신선봉)까지 이어지고, 이 서봉에서 좌측이 김천시 증산면으로 바뀌면서 북쪽으로 금오지맥을 분기시키고, 맥길은 동남향과 동향으로 이어져 목통령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계속 경남북 도계를 가르며 이어진다. 목통령을 출발할 때는 좌(북) 경북 김천시 증산면, 우(남) 경남 거창군 가북면으로 경남북 도계를 경계지으며 동북향하다, 독용분맥 갈림봉인 삼군봉(1012m봉)에서 북쪽 석항령(돌목재) 방향으로 독용분맥을 분기시키면서 좌측(북쪽)이 김천시에서 성주군 가천면으로 바뀌어 동남향하여 가야산 갈림봉인 두리봉(1135.1m)까지 이어지고, 이 두리봉에서 다시 좌측이 합천군 가야면으로 바뀌어, 온전히 경남 안으로 들어서서 좌(동) 합천군 가야면, 우(서) 거창군 가북면으로 나뉘어 장구재와 치인4리 갈림능선 이후 까지 이어지는데, 전체적으로 '역C자' 형태로 이어진다. 내초막 갈림능선을 출발할 때는 좌(동) 합천군 가야면, 우(서) 거창군 가북면으로 경계지으며 ‘S자’ 형태로 남향하여, 삼면봉인 우두산(1046.3m)에서 우측이 가북면에서 가조면으로 바뀌어 남동향하여 산체치 이후까지 이어진다. 수도지맥 중 경관이 가장 수려하다는 우두산과 비계산을 지나는 구간인데, 우두산ㆍ 의상봉ㆍ 비계산 등 명산 산행지로 등로 정비와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길 잃을 염려는 크게 없다. 산제치를 출발할 때는 좌(동) 합천군 가야면, 우(서) 거창군 가조면을 경계지으며 남동향하여, 두무산(1036.2m)에서 좌측이 가야면에서 묘산면으로 바뀌어 남향과 서향, 남향으로 이어져 오도산을 지난 삼면봉(1067m)까지 이어지고, 삼면봉에서 우측이 거창군 가조면에서 합천군 봉산면으로 바뀌어 온전히 합천군 안으로 들어서서 ‘역C자’ 형태로 진행하여 살태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산제치에서 두무산까지, 두산지음재에서 오도산까지 산불방지통제구간(2월1일부터 5월 15일까지)으로 정해져 있다고 고지되어 있으나 출입에 대한 통제는 어디에도 없다. 싸리터재를 출발할 때는 좌(북) 합천군 묘산면, 우(남) 합천군 봉산면을 경계지으며 동남향하여, 삼면봉인 568.1m봉에서 우측이 봉산면에서 합천읍으로 바뀌어 잠시 동남향하다 ‘V자’ 형태로 동북향하여 이어지고, 토곡산 지나 녹대산갈림봉에서 좌측이 합천 묘산면에서 고령군 쌍림면으로 바뀌어 남동향하여 만대산에서 다시 우측이 합천군 율곡면으로 바뀌어 동향과 남동향하면서 지릿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수도지맥 끝구간은 율원고개를 출발할 때는 좌(북동) 합천군 덕곡면, 우(남서) 합천군 쌍책면을 경계지으며 동남향하여, 삼면봉인 239.5m봉에서 좌측이 덕곡면에서 청덕면으로 바뀌어 쌍책면과 청덕면을 가르며 잠시 서향하다 '234.9m봉'에서 대체로 남동향으로 바뀌고, 필봉(327.5m)을 지난 261m봉에서 온전히 청덕면 안으로 들어서서 동향하다 대체로 남동향하여 날머리인 미곡리 말정, 황강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청덕교 부근에서 그 맥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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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군(茂朱郡)
무주군은 전북 동북부에 있는 군이다.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충북, 충남, 경북, 경남 등 4개 도와 인접한다. 반딧불이의 대표적인 서식지로 유명하고, 청정환경을 기반으로 관광ㆍ레져형 기업도시를 지향하는 휴양도시로서, 무주덕유산리조트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017년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의 개최지이다. 2005년 정부로부터 기업도시로 선정되어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군청 소재지는 무주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5면이다. 무주는 고려말까지 독립현이었던 주계현(朱溪縣)과 무풍현(茂豊縣)을 조선초에 통합하면서 머리 글자를 따 붙인 이름이다. 삼국시대에 주계는 백제의 적천현(赤川縣), 무풍은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적천현은 단천현(丹川縣)으로 개칭해 진례군(進禮郡:금산)의 영현이 되었고, 무산현은 무풍현으로 개칭해 개령군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까지 단천현은 마한·백제 문화권에 속했으며, 무풍현은 변진·신라 문화권에 속했다. 940년(태조 23)에 단천현을 주계현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주계현과 무풍현이 모두 진례군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무풍현에 감무를 두고 주계현도 겸임하도록 했으며, 1391년(공양왕 3) 무풍현에 주계현을 병합함으로써 지금의 무주군의 틀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제 개편에 따라 1414년(태종 14)에 무주현으로 개칭했고, 중심지를 주계(朱溪)에 두었다. 임진왜란 후에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된 것을 계기로 1674년(현종 15)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금산군의 안성면·횡천면을 편입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남원부 무주군, 1896년에 전라북도 무주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 정리로 금산의 두입지인 부남면이 무주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부내면·서면·북면이 무주면으로, 풍동면·풍남면이 무풍면으로, 신풍면·풍서면·횡천면이 설천면으로, 상곡면·유가면이 적상면으로, 일안면·이안면이 안성면으로, 부남면은 그대로 통합되어 6개 면이 되었다. 1979년에 무주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백두대간의 여러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이 뻗어 있다. 또한 진안고원의 북부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400~500m 이상의 내륙산간지역이므로 논으로 이용할 수 있는 평야는 협소하다. 군내에는 적상산(1,029m)·거칠봉(1,178m)·백운산(1,010m)·지봉(1,248m)·덕유산(1,614m)·두문산(1,051m)·대덕산(1,290m) 등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이 곳곳에 솟아 있다. 금강이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에서 발원하며, 무주구천동에서 발원한 남대천과 덕유산 산록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금강에 합류한다.
* 거창군(居昌郡)
거창군은 경남 북서부 내륙 산간지방에 있는 군으로 백두대간과 수도지맥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간분지지역으로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와 약용작물의 재배지로 이름난 지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곳의 지명이 크고 밝은 벌판이란 의미를 담은 거열·거사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진한과 변한, 신라와 가야, 신라와 백제,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위치하여 지리상의 요충지였다. 거창읍 개봉동과 마리면 말흘리 고분군의 규모와 유물들로 보아 가야연맹 중의 한 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거열군이었다. 757년에 거창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강주(진주)에 예속되었다. 이때 영현으로 여선현(지금의 위천지방)과 함음현(지금의 가조면 지역)을 두었다. 마리면 지역은 당시 이안현으로 천령군(함양)에 속해 있었다. 940년에 함음현을 가조현으로 고치고, 여선현을 감음현으로 개칭했다. 1018년에 거창현으로 강등되면서 가조현·감음현·이안현과 함께 합주(합천)에 소속되었다. 1172년에 거창에 감무를 두어 독립했다. 1271년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현이 가조현에 옮겨와서 1432년까지 머물렀다. 1414년에는 거제현과 거창현을 합하여 제창현으로 만들었다가 다음해에 거창현으로 환원하여 현감을 두었다. 1495년(연산군 1)에는 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1506년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1729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별호는 아림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북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마리면·위천면·북상면을 안의군에서, 신원면을 삼가군에서 편입시켰다. 1937년 거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51년 신원면에서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나 거창지역의 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남부지방의 유일한 고원지대인 진안고원에 이어져 있는 산간침식분지이며, 서쪽에 백두대간과 북쪽에 수도지맥을 경계로 경북·전북과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남덕유산(1,507m)·삼봉산(1,254m)·수도산(1,317m)·단지봉(1,327m), 서쪽에는 기백산(1,331m)·금원산(1,353m)·월봉산(1,279m), 동쪽에는 두리봉(1,133m)·의상봉(1,046m)·비계산(1,126m)·오도산(1,134m)·숙성산(899m) 등이 둘러 있고, 남쪽은 비교적 낮은 보록산(796m)·월여산(863m)·갈전산(764m)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를 이룬다. 대분지 속에도 호음산(930m)·건흥산(563m)·금귀산(710m)·보해산(912m) 등이 분포되어 웅양·고제·위천·마리 등의 작은 분지들이 발달했다. 군내의 산들은 낙동강 지류인 황강·남강·감천·금강 등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위천(渭川)이 분계·산수(山水)·소정(蘇井) 등 작은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군의 서부를 흘러내려오다가, 황강천·계수천·남산천 등이 합류하여 이룬 황강과 거창읍에서 만나 남서류한다. 군의 동부를 흘러내린 가천도 지산천과 합류하여 남하면에서 황강으로 흘러든다. 거창군은 고대의 유물유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가야산, 서쪽으로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등 3대 국립공원과 남쪽에 1988년 완공된 합천 댐 등이 있어 천혜의 관광중심권에 위치해 있다. 위천면 대경리 일대의 위천계곡에 위치한 수승대는 국민관광단지로 정비된 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이황이 이름지었다고 한다. 형태가 거북 같아서 일명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주위의 노송과 누각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며, 건계정·거열성도 함께 알려져 있다.
* 김천시(金泉市)
김천시는 경북 서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금오산, 서쪽은 황악산으로 백두대간의 일맥이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지나며, 대전과 대구의 중간 지점에 있다. 율곡동 일원에는 한국도로공사 등이 이전하여 혁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신음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14면 7동이다.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김천면·군내면·미곡면 일대가 시로 발전한 곳이다. 김산군은 신라 때 동잠현(桐岑縣)으로 이곳은 눌지왕대에 아도(阿道)가 직지사를 창건하는 등 신라 불교전래의 통로가 되었던 곳이다. 757년에 김산현(金山縣)으로 고쳐 개령군 영현이 되었다. 1018년에는 경산부(京山府:성주)의 속현이 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되었다. 조선에 들어 성주의 속현이었던 어모현(禦侮縣:지금의 김천시 어모면 일대)을 병합했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하여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는 금릉이었다. 김산군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3등군이 되어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김산군·지례군·개령군을 통합하여 김천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20개면으로 조정했다. 이때 김산군의 군내면과 미곡면이 금릉면으로 통합되고, 김천면은 그대로 존속했다. 예천과 안동을 연결하는 경북선이 부설되던 해인 1931년에 김천면과 금릉면을 합하여 김천읍으로 승격시켰고, 1949년 김천읍은 대구에 이어 경상북도에서 2번째로 시가 되었다. 이때 김천군의 나머지 지역이 금릉군으로 개칭되었다. 김천시는 고려시대부터 충청도에서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통하는 김천역이 설치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며,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 초기에는 김천장이 대구 다음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던 곳이다. 1905년 경부선, 1931년 경북선, 1918년 경부국도,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함으로써 더욱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김천시는 통과지역의 성격만을 지니게 되었고, 신흥도시인 구미의 그늘에 가려 도시 및 시장의 기능이 침체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 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던 금릉군과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어 김천시가 되었다. 시의 동북부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백두대간의 줄기를 따라 추풍령(秋風嶺, 1,111m)·삼도봉(三道峰, 1,177m)·대덕산(大德山, 1,290m)·눌의산(743m)·황악산(1,111m)·천덕산(986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삼도봉은 충북·전북·경북의 경계가 되고 있다. 남쪽에는 대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수도지맥이 뻗어 있고, 수도산(修道山, 1,317m)·단지봉(丹芝峰, 1,327m)·국사봉(875m) 등이 주봉을 이루며 경남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동쪽에는 도립공원인 금오산(金烏山, 977m)이 솟아 있어 구미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영암산(782m)은 김천시·칠곡군·성주군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동남쪽에는 백마산(716m)·압속산(870m) 등이 솟아 성주군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또한 추풍령·면목령(面目嶺)·주치령(走峙嶺)·우두령(牛頭嶺) 등의 고개는 높은 산지를 가로지르며 인접지역으로 통하는 주요 육로가 되고 있다. 직지천과 감천은 이 지역의 주요 하천으로, 직지천은 황학산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며 금릉평야의 관개용수원으로 이용된다. 모암동에서 직지천과 합류하는 감천은 남서부에서 북동부로 이 지역을 관통하며, 직지천·아천·율곡천·부항천 등과 합류하여 개령평야를 이루고 구미시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이들 하천에 의해 형성된 개령평야와 금릉평야는 넓고 비옥하여 예로부터 경북 남서부지역의 주요곡창지대가 되어 왔다.
* 성주군(星州郡)
성주군은 경북 서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북 칠곡군, 서북쪽으로는 경북 김천시, 남쪽으로는 경남 거창군과 경북 고령군, 경남 합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군청 소재지는 성주읍이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이다. 성주는 6가야 중 벽진가야(碧珍加耶)로 가야연맹의 중심국 중 하나였다.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 성산군(星山郡: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일대의 加利縣)의 영현이 되었다. 나말여초 이 지방 호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인해 경산부로 승격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고령군을 속군으로, 약목(若木)·인동(仁同)·지례(知禮)·가리(加利)·팔거(八莒)·김산·황간(黃澗)·관성(管城)·안읍(安邑)·양산(陽山)·이산(利山)·대구(大丘)·화원(花園)·하빈(河賓) 등 14개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대읍이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1308년(충렬왕 34)에 성주목으로 승격했으며, 1310년(충선왕 2)에는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종대의 군현제 개편 때 성주목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614~23년에 신안현으로, 1631~40년에 성산현으로, 1736~45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1895년에 대구부 성주군, 1896년에 경상북도 성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두입지였던 인곡면·운라면·흑수면·도장면·소야면·가현면·덕곡면·노다면·다산면이 고령군으로, 비입지(飛入地)였던 노장곡면이 현풍군으로, 두입지 증산면이 지례군으로 이관됨으로써 많은 지역을 상실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용산면·남산면·북산면·본아면이 성주면으로, 선남면·화곡면·산남면·오도면이 선남면으로, 대동면·두릉면이 용두면으로, 조곡면·초곡면이 성암면으로, 지사면·법산면이 지사면으로, 대리면·청파면이 청파면으로, 운곡면·명암면이 벽진면으로, 유곡면·초전면이 초전면으로, 유동면·당소면·망성면이 월항면으로 통합되고, 신곡면은 김천군에 넘겨주었다. 1934년에 용두면·성암면을 용암면으로, 지사면·청파면을 수륜면으로 통합·개칭하고, 1979년에는 성주면을 읍으로 승격했다. 지세는 남서부 군계에 위치한 가야산(伽倻山, 1,430m)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군 전체를 둘러싼 작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다. 서부와 북부에는 형제봉(兄弟峰, 1,022m)·염속산(厭俗山, 870m)·독용산(禿用山, 956m)·백마산(白馬山, 716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동부와 남부에는 서진산(棲鎭山, 742m)·도고산(道高山, 349m)·영취산(靈鷲山, 332m)·작산(鵲山, 532m)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서북부는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부에는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그 중 서진산(棲鎭山, 일명 禪石山)은 월하면 인촌리와 칠곡군 약목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서남쪽 산기슭에는 고려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한 선석사(禪石寺)가 있고, 그 앞의 태봉(胎峯)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세종의 여러 왕자들과 단종의 태를 안장한 태실이 있다.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어 봄·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하천을 보면 서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은 군의 서부를 동남류하여 고령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한다. 강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천(伊川)은 벽진면·성주읍 및 선남면 사이를 흐르는 하천으로, 벽진면의 고당산과 염표봉산에서 발원하여 남동류하고, 벽진면과 성주읍 남쪽을 지나 월항면 대산리에 이른다. 초전면백마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남류한 지류 백천(白川)과 합류하고 다시 남동류하여 선원리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 합천군(陜川郡)
합천군은 경남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 땅이 기름지고 거주 환경이 양호해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1960년 이후 산업화의 물결로 인구의 전출이 심해 군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의령읍, 가례면·칠곡면·대의면·화정면·용덕면·정곡면·지정면·낙서면·부림면·봉수면·궁류면·유곡면 등 1개읍 12개면 116개리가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야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6세기 중엽 부근의 가야국들을 병합할 때 신라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이곳에 장함현(獐含縣)을 두었다가,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의령현으로 개칭하고 함안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에 진주의 속현으로 합속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파견되고, 신번현(新繁縣)을 병합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감이 파견되는 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의령의 별호는 의춘(宜春)·의산(宜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군이 되어 진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에 경남 의령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곡면·화양면·낙서면·상정면은 그대로, 풍덕면·덕곡면이 풍덕면으로, 이가례면·일가례면이 가례면으로, 대곡면·모의면이 대의면으로, 덕암면·용암면이 용덕면으로, 화곡면·일정동면이 정곡면으로, 이정동면·지산면이 지정면으로, 경산면·부산면·보림면이 부림면으로, 일류곡면과 합천군 궁소면이 궁류면으로, 가수면·봉산면이 봉수면으로, 정곡면·이류곡면·능인면이 유곡면으로 통합되었다. 1916년에 풍덕면이 의령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33년에는 화양면·상정면이 화정면으로 통합되었다. 1979년에 의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서부에는 지리산의 지맥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이는 동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점차 낮아진다. 북쪽 경계에는 미타산(662m)·국사봉(668m)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줄기가 남쪽으로 이어져 서부에는 만지산(607m)·산성산(741m)·한우산(764m)·자굴산(897m)·벽화산(511m) 등이 솟아 있다. 낙동강이 동쪽 경계를 곡류하며, 남강이 남쪽 경계를 북류해 지정면 동쪽 경계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또한 군의 북동부를 흐르는 유곡천도 천락천·신반천 등을 합류해 낙동강에 흘러든다. 그밖에 소하천들이 군내 곳곳을 흘러 남강에 유입하며, 이들 소하천의 상류지역인 가례면·칠곡면 등지에는 산간분지가 발달했다. 경지는 이들 하천연안에 분포하며, 큰 평야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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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기맥을 하며 하루 묵어가던 안의, 그 안의 고을의 존폐와 연결되었던 인물 정희량을 여기서 다시 만납니다.
♤ 소사고개(少沙峙, 530m)
소사고개 즉 지경재는 경남 거창 고제면과 전북 무주 무풍면을 잇는 덕유산 고갯길로 옛 지명은 도마치로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를 아우르는 삼남대로에서 도마치는 문헌이나 지도에서 중요한 고갯길로 등장하는데 옛 지명은 대동지지 거창편에 등장하며 정상기의 팔도지도에도 표기된 요충 고개였다. 전라도 쪽은 무풍 덕지리이고 경상도 쪽은 고제의 봉계리를 가르고 있으며 덕유산을 넘는 경상고 고개 중 소사고개는 비산비야를 이루고 있다. 고개마루에도 고냉지 채소밭이 개간되어 있는 이 고개는 1089번 지방도가 통과하는 길목이고 소사고개의 지리적 특징은 일반적 산의 마루금으로 도계를 표시나는 관행을 벗어나 북사면인 무풍 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소사고개란 이름은 모래가 날리는 모래재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고개 아래의 소사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細) 모래를 까는데 일년 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희고 깨끗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縣)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고개는 경남 거창군과 전북 무주군을 잇는 고개지만 고개의 행정지번은 경남 거창 땅으로,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약간 내려서야 도계를 이루는 경계지점이 나오고 전북 지역에서는 이 고개를 도마재(都麻峙)라고 부른다. 1728년(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중 안음의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기병했는데 거창과 합천을 장악한 반군의 주력은 거창에 집결하여 북상준비를 하였다. 성초역에 주둔한 정희량은 소사고개를 넘어 무주를 거쳐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기병한 반군 세력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관군의 동원과 진군은 예상보다 신속하여 무주방면의 도로도 전라도 군사들이 먼저 장악하여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진군할 수 없었다. 소사고개 아래인 지금의 고제면 생초마을의 성초역 부근에서 발이 묶여있던 정희량은 내부 반란으로 소사고개를 넘지 못하고 체포되어 참수되었는데 김천도찰방에 속한 거창의 성초역은 지금 고제면 용초마을에 소재했다. 소사고개를 넘지 못한 반군 정희량은 정온의 4대손으로 조선후기 최대의 모반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봉계리
소사고개가 위치한 봉계리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의 법정이로서 탑선, 지경, 소사, 원기, 원봉계, 내다의 여섯 마을이 있다. 탑선은 옛날 죽산 전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하며 마을앞에 높이 1미터의 2층 석탑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동쪽 원탑선을 탑서이라 하고 서쪽에 소사와 북쪽에 지경이 있는데 이들 세 담을 통틀어서 탑서이라고 부르며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안긴 높이 700m의 고지대이다. 지경마을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지금도 영호남 경계에 있으며, 경상도 땅 안에 있으므로 지경내라고 하며 장포라고도 썼고, 원기마을은 옛날 성초역에 따른 원이 있었으므로 원터라 한다. 원봉계는 옛날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불당이 많아서 당골이라 하다가 한말 이곳에 살면서 동학혁명 때 치안유지에 공이 있었다는 하종호의 호 봉서에서 새봉자를 따서 봉계라 고쳤다고 하고, 300여 년 전 엄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덕지리
전북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마을은 본래 금산군에 속했다가 조선 현종 15년(1674) 무주가 도호부로 승격될 때 무주군에 편입되어 구천동과 함께 황천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덕지리에 편입되어 있는 무풍면의 최남쪽, 남대천의 최상류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부흥, 도마, 북수, 방곡안실 마을이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골들이 모여 남대천을 이루고 이 시냇물은 한치저수지로 유입되며 대덕산과 망덕산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덕지리라 부른다. 부흥마을은 뒷산인 삼봉산의 지세가 부(富)를 일으킬 형국이라 하여 부흥동(復興洞)이라 한다. 소사고개를 경계로 양쪽에서 살아온 소사동, 지경내, 부흥동 등 마을은 전라도와 경상도 개념이 없다. 소사고개 마루에서 무풍쪽으로 내려와 도경계선이 지나는 부흥동이 거창과 무주의 시내버스 회차지이다.
♤ 초점산(1,249m)/ 삼도봉(경북 김천, 경남 거창, 전북 무주)
경북 김천시 대덕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세개 도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예전에 이곳 능선에 억새가 뒤덮혀 초점산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초점산 보다는 삼도봉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삼도봉(경북 김천, 전북 무주, 충북 영동)이 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가르는 삼도봉은 8도를 분할했던 조선 초기에 삼남의 분기점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역할을 했던 곳이다.삼도봉을 중심으로 음식, 말씨, 문화 등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로서 남쪽으로는 가야산과 수도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대덕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삼봉산과 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와 개념도에서는 이 곳 수도지맥 분기봉에서 삼도(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시, 경남 고제면)가 갈리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통상 거창 삼도봉은 이 곳에서 대덕산 방향으로 0.4km 오른 초점산(삼도봉)을 말한다.
♤ 수도지맥 갈림삼거리(1,180m)
수도지맥은 이곳 분기점에서 우틀하여 완만하게 내려가며 진행이 되지만 직진 방향의 삼도봉인 초점산이 350m 거리에 있어 다녀와서 출발한다.
♤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
내감리는 김천시 대덕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남면에 속했던 중감과 내감 두개의 마을로 1895년에 남면이 삼분되면서 상남면에 귀속되었다가 1914년에 내감과 중감이 통합하여 내감리라 칭하고 김천군 대덕면에 편입되었다. 대덕산과 국사봉 사이 골짜기의 윗쪽 산간 오지에 위치한 벽촌으로 면소재지에서 6km 떨어져 있으며 덕산천의 지류인 감주천의 발원지로서 연화1리 앞 30번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지방도로의 종점으로, 남과 서는 준령으로 경남 거창군과 경계하고 북은 덕산2리와 외감리와 동은 문의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과 그 유래를 살펴보면 내감과 웃감주는 감주 골짜기의 네개의 부락(내감, 외감, 중감, 절골)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웃감주 또는 내감이라고 했고 진터와 중감은 감주골짜기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감이라 했는데 임진왜란 때 공장군과 박장군이 이곳에서 진을 친 사실이 있다하여 진터라고도 한다.
♤ 삼면봉(877.2m)
경북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 웅양면 신촌리의 삼면봉이다. 4등삼각점(무풍430)이 있다.
- 등로 우측으로 구름재 갈림 이정표가 서있다.
♤감주재(甘州峙)/ 임도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 쪽으로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 방면은 비포장인 채로 이어져 있다. 감주재는 삼도봉 아래 내감리와 외감리 골짜기가 깊은 계곡이어서 감계(嵌溪)라 하였고, 군진(軍陣)이 주둔했던 병영에서 계곡으로 쌀뜨물을 흘려보내 물맛이 달았으므로 감주(甘州)라 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국사봉갈림길(824m)/ 국사봉(875.1m)은 0.4km 왕복해야 한다.
경북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와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의 경계지역에 있는 봉우리인데 옛날 국사를 통신하기 위해서 봉화를 올리던 봉우리로 삼국시대에 백제가 처음 쌓았다가 임진왜란 때 길이 1.5km에 높이 2m로 다시 고쳐 쌓은 석축인 국사봉여산성지가 있으며 정상에는 무풍308 삼등삼각점이 있다.
- 암릉봉에서 10분여 오르막을 올라 백학동 갈림 이정표가 서있는 국사봉 갈림길에 이른다. 들머리에서 약 8km, 분기봉에서 약 6.8km 지점이다.
♤ 607m봉/ 하성(霞城)
하성(霞城)은 웅양면 한기리 오산부락에서 동북쪽 약 300m 지점에 옛날 삼국시대에 쌓은 성터로서 원래 이곳은 돌이 귀한 곳이라 성을 쌓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아녀자들이 동원되어 먼 곳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았다고 하여 일명 여성이라고도 하며 치마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여성에는 다른 하나의 애절한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성은 성벽으로 계곡과 산 정상부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벽과 외벽을 자연석으로 쌓고 가운데를 흙으로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을 사용하였다. 산성의 축조 연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서 다시 수축하고, 하성(霞城)이라 불렀다. 정유재란 때는 이일(李鎰) 장군이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의 15만 군을 맞아 싸우다가 패한 곳이라고 한다. 이 성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오는데, 남매가 성을 쌓았는데 누이동생이 돌을 치마에 담아 운반하여 성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여성(女城), 또는 치마성이라고 하였고,「경상북도읍지」의 「지례현읍지」편에는 이 성을 여산성(女山城)으로 적고 있다. 주위에 산재해 있는 돌들은 남매가 성을 다 쌓고 돌들이 남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성의 길이는 1.5㎞,높이는 2m 정도로, 예서마을 뒷산인 해발 560m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 능선을 따라 성벽의 흔적이 보이는데, 서쪽의 한기리 쪽과 동쪽의 문의리 쪽에 높이 2m 정도의 석축이 있고, 정상부에는 폭 2.5m, 높이 2m의 석축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의 동쪽은 급경사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으며 성의 폭은 1~2m, 외벽 높이는 5m 정도이다. 성안은 현재 주민들의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 백학동
백두대간 수도지맥 줄기가뻗어 하성을 이루었으며 경북 김천시와 경계하고 경남 거창의 관문이면서 해발 육백 고지대로 통하는 "배터재"라 하며 "학" 모양으로 생긴 터라 하여 백학동이라 하였다.
♤ 배티고개/ 3번국도
배티고개는 3번 국도가 지나는 경남 거창 웅양면과 경북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와 경계이다. 이곳은 오산마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제는 백학동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부락이다. 문의리의 유래는 평산 신씨와 파평 윤씨 등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사봉 아래로 깊숙히 들어와 살면서 선비의 기개와 유학을 대표하는 문자와 의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삼았다. 동쪽으로는 월매산이 서쪽으로는 국사봉 등 높은 산이 많은 고산지대로 대리에서 발원한 화전천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 앞을 돌아 나간다. 수년전 수해로 큰 피해를 입었고 도로 직선 공사로 마을이 두 동강이 나면서 마을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으며 원문의는 임터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 자리 잡은 마을로 김천에서 가장 골이 깊은 오지 마을 중 한 곳으로 원래의 문의마을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국사봉으로 오르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았으므로 내촌이라고도 하는 마을로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집성촌이다.
- 건너편에 거말산 봉우리가 뾰족하게 보인다. 배티고개 백학마을에서 거말산은 3km이다.
♤ 목넘이재
목넘이 고개라 불려지는 고개로서경남 거창군 웅양면 신촌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를 잇는 고개로 이정표가 서있고 사람들이 다니는지 길은 뚜렷하다.
- 거말산 정상까지 1km 남아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 거말산(巨末山, 901.6m)/ 봉산/ 우측으로 70m 다녀옴
거말산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 군암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 이름은 거말흘산(巨末訖山)이다. 옛날에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우두령재를 동쪽에 두고 서쪽의 웅양면 하성리에서 김천 대리로 넘는 배티재를 두고 있다. 옛날에는 거말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산, 봉수산, 봉산으로 불렸는데, 거말흘산 봉수대는 남쪽 금귀봉 봉수대의 신호를 받아 북쪽 구성산 봉수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상에 있는 곰 형상의 정상석은 2014년 거창군에서 등산객을 유치하기 위한 일환으로 거창에 있는 높은 산에 그 지역 특색에 맞춘 정상석을 세웠는데 이곳 거말산의 곰 형상은 웅양의 곰을 형상화한 정상석이란 설명이 보인다.
♤ 거말흘산 봉수대(巨末訖山 烽燧臺)
이곳 거말흘산 봉수대는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이후 오랜기간 동안 사용되어져 오다가 19세기 이후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5개 봉수 노선 중 제2거(炬)로 남해, 진주, 합천, 거창, 지례, 금산, 충주를 거쳐 서울 목멱산(木覓山, 남산)으로 이어지는 봉수대이다. 거말흘산은 일명 봉우산 또는 봉수산이라고도 한다. 봉수대 축법은 돌과 흙으로 쌓았으며, 규모는 둘레 20m, 높이 4m, 폭 4m 정도로 추정된다. 19세기에 편찬된 거창읍지에 따르면 봉수군은 별장 1명, 오장 5명이었다.
巨末訖山烽燧 卽牛馬峴西峯 南準金貴山烽燧 北應知禮縣龜山 -新增東國輿地勝覽
(거말흘산봉수 즉우마현서봉 남준금귀산봉수 북응지례현구산 -신증동국여지승람)
♤ 감천(甘川) 발원지
감천(甘川)은 김천을 대표하는 하천으로, 대덕면 우두령 봉화산(901.6m), 내감리 국사봉(875.1m), 덕산리 대덕산(1,290.9m)에서 발원하고, 삼도봉에서 흐르기 시작한 부항천과 지례에서 합류하여 북동 방향으로 흐르다가 김천시를 관통하여 구미시 선산읍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총 길이 74.27㎞의 하천으로, 대덕면에서 구성면 광명리까지 이르는 상류 구간인 감천(鑑川) 33.4㎞과, 구성면 광명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이르는 감천의 하류부인 감천(甘川) 40.9㎞으로 구분된다. 과거 글이 없어 소리 또는 의미를 한자어로 표현하던 한자차용 시기에, 감천의 표기는 우리말 ‘감’의 소리를 한자어 감(甘)에 대응시켰으며, ‘천’은 ‘내’의 뜻을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감천은 우리말로 '감내'가 된다. 기원적으로 우리말 ‘감’은 신(神)을 이르는 것으로, 단군왕검에서 보듯 ‘검’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즉 ‘검’의 모음이 바뀌어 ‘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검’은 신뿐만 아니라 ‘중심’의 의미도 함께 있었으므로, 감천은 ‘신’이란 뜻이 없어지고 ‘중심’이라는 뜻만 남아 김천 지역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인 ‘중앙천’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밖에 김천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감천의 물맛이 다른 지역보다 달고 맛이 있어 감천(甘川)이라고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 우두령(牛頭嶺, 577m)/ 우척현 전투(牛脊峴戰鬪)
우두령은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를 연결하는 109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소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우두령이라 한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우두치(牛頭峙)로 나온다. 이 고개는 백두대간의 대덕산(大德山)에서 동쪽으로 가야산(伽倻山) 방면으로 뻗는 지맥(支脈) 중의 국사봉(國士峰)과 수도산(修道山)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남북방향의 고개로 북사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甘川)의 상류계곡과 통하고, 남사면은 낙동강의 지류 황강(黃江)의 상류하곡과 이어진다. 우두령을 지나는 지방도는 이들 양 계곡을 따라 남북으로 직선상으로 뻗어 있다. 고개 서쪽으로는 남해∼초산간의 국도가 지나는데, 이 도로는 북쪽으로 지례(知禮)를 거쳐 김천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양(熊陽)을 거쳐 거창에 이른다. 따라서, 우두령은 경북의 남서부지역과 경남의 북부산간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옛날에는 남해안의 삼천포(지금의 사천)에서 진주ㆍ산청ㆍ함양을 거쳐 우두령을 넘고, 다시 북쪽으로 김천ㆍ상주ㆍ점촌을 거쳐 문경새재[聞慶鳥嶺]에 이르는 남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직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이 재는 우척현 전투(牛脊峴戰鬪)지로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초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군 제6진이 정암진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4번째로 거창을 통해 전라도를 침략하려다가, 이 곳 우두령(우척현)에 매복하여 있던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 2,000명에게 크게 패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 시코봉(1,236.5m)/ 양각지맥분기봉/ 삼면봉(김천시 대덕면, 거창군 웅양면 → 거창군 가북면)
멀리서 보면 소의 코처럼 보인다 하여 시코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소코」→「쇠코」→「시코」로 변이되었다는 것이다. 거창군에서 포도 송이를 형상화 한 대리석 정상석을 2014년에 세웠다. 이 봉우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경남 거창군 웅양면, 가북면이 만나는 삼면봉이자 양각지맥 분기봉이다. 이 부근에는 소와 관련한 이름이 많은데, 우두령은 소의 머리요, 시코봉은 소의 코이고, 양각산은 소의 양쪽 뿔이며, 구수재는 소의 여물통(밥통)이고, 흰대미산 남쪽 끝자락의 우랑동(牛郞洞)은 쇠불알에서 따온 지명들이다.
- 넓은 공터에 정상석과 이정표가 서있다. 우측으로 양각지맥으로 이어지는 분기봉이고 수도지맥은 좌측으로 내려서 능선안부를 걷는다.
♤ 양각지맥(兩角支脈)이란
양각지맥이란 수도지맥 우두령에서 3.9km 동쪽으로 떨어진 시코봉(1236.5m)에서 남쪽으로 분기되어, 동으로 가천천, 서로 계수천을 가르며 양각산(1157.5m), 흰대미산(1018.5m), 회남령, 보해산(911.5m), 살피재, 일산봉(627.9m), 감토산(518.6m)을 거쳐 거창 남하면 대야리의 가천천이 황강에 합수되는 가천교까지 이어지는 33.5Km의 산줄기이다. 양각산은 산 정상의 두개 봉우리가 마치 소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흰대미산은 정상부가 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흰대미산, 흰돌더미산으로 불리며, 정상석에는 흰덤이산(白石山)이라 박혀있다고 한다.
시코봉에서 잠깐 가면 좌틀하는 곳에 이정표가 나옵니다. 용량관계로 사진은 생략~
♤ 심방갈림봉(1,243m)/ 심방마을
양각지맥의 흰대미산 우측 아래 심방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의 마을로서 고려 말 신방(申芳)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은거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뒷산에 땔감 나무(섶나무)가 많아서 신방(薪方)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경치가 아름다와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여 붙은 심방(尋芳)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 거창군 가북면(加北面)
거창군의 북동쪽 끝자리에서 가소현의 북쪽을 차지하므로 가북이라 한다. 가조면과 같은 연혁을 가졌으며, 가소현, 함음현, 거제현, 제창현에 속하였다가 거창군에 포함되게 되었다. 북쪽은 수도지맥의 두리봉, 단지봉, 수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경북의 김천시와 맞닿았고, 동쪽은 두리봉에서 의상봉으로 뻗는 가야산의 서쪽 가지에 의해 합천군 가야면과 맞닿는다. 서쪽은 수도산에서 흰데미산에 보해산, 금위산으로 달리는 산줄기에 의해 응양면, 주상면과 경계를 지운다. 가북면의 북쪽 한가운데 솟은 단지봉에서 덕유산으로 남쪽에 뻗는 산줄기는 본면을 동쪽에 박암리, 몽석리, 용암리의 3개 리로서 큰골이 되고, 서쪽에 해평리, 증촌리 2개 리로서 작은 골이 되며, 두 골짝이 어울리는 곳에 우례리가 있고, 남쪽 끝에 용산리가 자리한다.
♤ 수도산 서봉(1,313m/ 신선봉/ 금오지맥갈림봉/ 삼면봉(거창군 가북면, 김천시 대덕면 → 김천시 증산면)
금오지맥 갈림봉이다. 신선봉으로도 불리우며, 시코봉에 이어 또 다른 삼면봉(김천시 대덕면, 증산면과 거창군 가북면)이다. 「부산 같이하는 산악회」에서 2008년 7월에 스테인레스 이정표를 세웠는데, 지금은 지맥과 기맥 이름이 지워져 있지만, 맥길이 강을 가르므로 강 이름에서 이름을 따와, 금오지맥을 감천지맥으로 수도지맥을 황강기맥으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 금오지맥(金烏枝脈)이란
금오지맥은 수도지맥의 수도산 서봉에서 북동방향으로 분기하여 추량산(589.4m), 삼방산(865.2m), 염속산(869.9m), 염속봉산(679m), 빌무산(783.6m), 고당산(596.2m), 별미령(514m), 백마산(715.7m), 금오산(968.9m), 제석봉( 512.2m), 국사봉(480m,), 백마산(434m,), 다봉산(276.2m), 꺼먼재산(400.5m), 백마산(180m)을 일구고, 감천(甘川)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구미시 선산읍과 고아읍을 잇는 선주교 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81.4km인 산줄기이다. 금오지맥의 산줄기 좌측(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감천(甘川)이 되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은 회천(會川)이나 백천(白川)이 되어 낙동강에 합류된다.
♤ 수도산(修道山, 1,317.4m)/ 1등삼각점
수도산 정상에는 큰 돌탑과 김천시에서 세운 정상석, 또 다른 정상석과 삼각점이 세워져 있다. 수도산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와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서쪽의 대덕산, 동쪽의 단지봉 등과 산줄기가 이어지며, 산 남쪽에서 좌가천이 발원하고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감천에 흘러든다. 산은 '불령산(佛靈山)ㆍ 선령산(仙靈山)ㆍ 신선대ㆍ 수락산'이라고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거창)에 "수도산(修道山)은 군 동북쪽 36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여지도서」(거창)에도 "수도산은 관아의 동북쪽 30리에 있다. 곧 대덕산의 동쪽 줄기이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산지」에 의하면 이칭인 신선대와 수락산은 신선들이 노는 곳이라고 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의 높이로만 따지면 우리나라 30위권 안에 들지만, 산림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지명도가 낮다.
♤ 수도암
수도산에는 수도암이 있는데 도선국사가 통일신라 때 창건한 후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고 하여 산과 도량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했다고 한다. 수도암에는 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계곡에 용추라는 이름의 구혈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인현왕후(仁顯王后)길
인현왕후(1667~1701)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계비(繼妃)로 본관은 여흥민씨이다. 1701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37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굴곡진 삶을 살다간 왕비로 기록되고 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현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였다. 유교적 이념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왕의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것은 왕비로서 치명적인 결격사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현왕후는 왕과 조정에서부터 민초들까지 널리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계략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3년간 머물며 복위를 기원한 곳이 바로 이곳 수도산 청암사다. 인현왕후는 폐위당한 후 어머니 은진 송씨의 외가와 인연이 있던 청암사에서 3년을 지냈다. 인현왕후는 상주 외가에서 보내 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살면서 기도를 드리거나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을 짓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 인현왕후가 주로 다녔던 길이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인현왕후길’이다. 훗날 궁으로 돌아간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서찰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구한말에 궁녀들의 시주로 불사를 일으켰으며, 지금 가람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인현왕후길은 김천시에서 3년을 보낸 인현왕후의 역사적 현장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길이다.
♤ 청암사(靑巖寺)
청암사는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불령산(수도산) 북동쪽 기슭에 있는 절로 직지사의 말사다. 859년(신라 헌안왕 2) 도선이 창건하였고, 부속 암자로 수도암과 백련암이 있다.
여기도 이정표가 뚜렷하게 서있습니다. 나 불석재노라고.... 사진은 용량관계로 생략합니다.
♤ 불석재/ 불석동
불석재는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에 있는 지금은 사라진 불석동이란 마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불석동은 가북면 작은골의 가장 북쪽 끝 동리였는데 지금은 마을리 없어졌다. 폭시기라고도 하였는데 수도사 부처를 다듬은 돌이 이 골짜기에서 나왔으므로 불석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을과 고개 이름이다.
- 이정표(↓수도산 1.3km, ↑단지봉 3.3km, 심방하산 3.9km)가 서 있다. 우측 거창 쪽에 불석마을이 있어서 불석재라고도 하며, 좌측 수도리로는 무흘계곡이 펼쳐진다.
♤ 아홉사리고개/ 구곡령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김천시 증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아홉사리고개라고도 부르며 우측으로는 웅양면 심방마을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무흘구곡으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 중촌마을
거창군 가북면에 있는 법정 이름 중 한 마을로서 불석동, 수재동, 심방소, 다전, 동촌, 산수동, 고비 등 일곱개 마을이 있다.
♤ 송곡령/ 고비재(高飛峙, 700m)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고비마을에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단지봉 오르기 전에 위치한다. 우측 거창 쪽에 중촌리 고비마을이 있어서 고비재라고 하며, 일설에 학이 높이 날며 노닐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고사리와 같은 고비나물이 많아 고비라 한다는 말도 있다.
- 이정표(↓수도산 2.9km, ↑단지봉 1.7km, 중촌마을 4.9km→)가 있다.
♤ 내촌마을
경북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의 마을 이름으로 그 유래는 소학 내칙편의 예의범절을 배우는 것이 사람이 되는 근본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단지봉((丹芝峯, 1,327.4m)/ 민봉/ 수도지맥의 최고봉
단지봉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와 경남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내원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2.2km,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 덕동마을에서 북북동 쪽으로 약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산 정상이 항아리(단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한약재인 지초(芝草)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단지봉의 원래 이름은, 산이 토산으로 둥글고 민민하다고 해서 ‘민봉’으로 불려 왔는데, 단지봉 어원도 단지처럼 둥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아니라 후삼국시대 때 견씨왕조 후손이 단지봉 아래 마을로 피난 와 살면서 단지봉 아래 대를 만들고 기도하여 귀한 아들을 얻은 뒤, 단자와 태를 산 어디엔가 묻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단지봉 북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옥동천이 되어 증산면의 한복판을 지나 감천에 유입되고, 남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석가천이 되어 황강에 유입된다. 단지봉은 경상남북도의 경계에 위치한, 고도가 높고 규모가 큰 봉우리로, 백두대간 대덕산 남쪽 초점산에서 가야산을 향해 동남동 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인 수도지맥의 최고봉으로서 단지봉의 동쪽에는 좌대곡령이, 서쪽에는 송곡령이라 불리는 준령이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가야산과 백두대간을 연결하고 있어 지리산을 가야산과 연계하여 덕유산과 함께 국공연산을 하는 장거리 산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 헬기장 우측편에 이정표(←두리봉 9.3km, 수도산 4.5km→, ↑내촌입구 4.0km)가 있고, 거창군 가북면 내촌 방향 등로도 선명하다. 헬기장에서 100m 정도 진달래 군락지 사이길을 따라 나가면, 수도지맥의 최고봉인 단지봉이다. 수도지맥이란 이름을 얻은 수도산보다 더 높다. 거창군에서 세운 자연석 정상석과 무심님의 대리석 정상석, 삼각점(가야 447)이 설치되어 있고, 한켠에 테크 전망대도 마련되어 있다.
여기도 이정표 사진을 찍었지만 용량관계로~
♤ 홍감(弘甘)마을 갈림길
홍감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에 있는 마을로 홍감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 앞에 가마솥 같은 모양의 큰 바위를 ‘홍가마’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 홍감마을 갈림길 이정표(↓단지봉 1.3km, ↑두리봉 7.9km, 홍감 3.4km→)가 있는 잘록이 안부이다.
♤ 좌대곡령(左臺谷嶺, 1,257.6m)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 경계 봉우리인「좌대곡령」이다. 간혹 고개 령자로 끝나 고갯마루로 오해를 받곤 하지만 고개가 아닌 암릉으로 된 봉우리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좌일곡령(左壹谷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국토포탈 고시지명은 좌대곡령(左臺谷嶺)이다. 광복 이전 지도와 구기본도에도 한글로 좌대곡령이라 표기된걸 보면, 인쇄본에 표기하면서 어려운 대(臺) 자를 읽기 쉬운 일(壹) 자로 오독하여 굳어지게 된것으로 보인다. 좌대(座臺: 기물을 받쳐서 얹어 놓는 대)라면 말이 되지만, 좌일(左壹)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좌대곡령은 홍감마을에서 두무사 절터를 지나 수도로 넘어가는 재로, 한자 표기 오류뿐 아니라 위치 또한 현재의 좌대곡령에서 단지봉 방향으로 내려선 잘록이 안부인 홍감마을 갈림길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산하에서 봉우리를 령(嶺)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지리산의 영원령, 설악의 마등령과 대승령, 백두대간의 선자령, 낙동정맥의 사관령, 호미기맥의 치술령, 진양기맥의 관술령 등이 그렇다.
- '수도지맥 / 좌대곡령 1257.8m / 조은산'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한다.
♤ 용두암봉(龍頭巖峰, 1,125.6m)
용두암봉은 김천시 증산면과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 계곡 아래 마을에서 보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산 아래 용암마을에서는 용암바위라고도 부른다.
- 단지봉 2.2km, 두리봉 7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고, 1118.3m 암봉 정상을 지나 용두암봉까지 계속 바위지대를 지난다.
♤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우측에 보이는 수도산과 가야산 사이에 있는 거창군 가북면 용암마을은 뒷산에 용 머리 형상의 바위(용두암봉)가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아쉬웠던 점 중 한가지 개금마을을 바라보지 못 했다는.... 하지만 마을 불빛 몇 점과 개짖는 소리는 확인이 되었어요.^^
♤ 거창군 가북면 상개금(上開金)마을
개금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의 마을로서 두개의 개금마을이 있는데 상개금은 큰골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서, 용암마을 동북쪽 해발 800m고지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에 모기가 없다고 한다. 하개금 마을은 개금골의 아래에 자리해 개금불이라 한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개금(開金)은 옛날에 금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마을 주변 산에는 금광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금동불상이 나와 ‘개금불(開金佛)’이라 하였다는 말도 있다. 북동 2km에 경북 성주군과 맞닿아 있고 동으로 재를 넘으면 합천 해인사가 나온다. 상개금마을 버스종점, 개금 경로당 앞에는 맑은 샘물이 쉼없이 솟아 석가천(石加川)으로 흐르는 황강의 발원지가 있다. 이 샘물은 이 마을의 1등 식수원인데, 이 물과 맑은 공기 그리고 건강식품 덕분에 개금마을이 장수 마을이 되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주민들은 배추, 감자 등 고랭지채소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요즘엔 부가가치 작물인 오미자를 주로 재배한다. 고지대에서 생산된 이곳 오마자는 딴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청정하다. 개금마을 또 다른 특산물은 마(麻)다.
♤ 목통령(木通嶺, 985m)/ 목마재
목통령 사거리는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 경계 능선상에 있는 고개로 좌우로 고개 길이 선명한 잘록이 안부이다. 목통령은 북서쪽으로 경북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와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다. 으름덩굴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어서, 으름덩굴의 뿌리와 줄기를 목통이라 하여 이뇨, 치열, 관절염, 위장 장애에 쓰는데 그 한자 표기인 목통(木通)에서 지명을 따 왔다. 과거에는 김천에서 거창과 합천을 넘나들던 유일한 통로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고개였는데, 고개가 높고 경사가 가파르며 교통로 기능의 필요성이 적어 김천시에 있는 대부분의 고개와 달리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옛날 그대로의 자연환경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고개로 오르기 위해서는 험한 등산로를 거쳐야 하므로 현재 사람들이 왕래하는 고개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군사적 통로가 되었던 고개라고 한다. 험한 고개 주변에는 가야산, 수도산 등 험준하고 높은 산이 즐비해 호랑이와 표범, 늑대 등 맹수가 더러 출몰했었다고 전한다. 목통령 북쪽 비탈면에서 성주군과 고령군을 흐르는 대가천의 최상류인 목통천이 발원하여 황점리와 김천시 증산면을 지나 성주군으로 흘러들고 목통령 남쪽 비탈면에서 거창군과 합천군을 지나는 황강의 지류 하천인 석가천이 발원하여 흐른다.
♤ 김천시 증산면 원황점(元黃店)마을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원황점마을은 원래 유황(硫黃)을 구운 마을이라고 하여 황점(黃店)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김해김씨 중간 시조가 처음 유황을 구워 나라에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시초였다. 유황은 당시 주요 군수품으로 유황을 정제해 공납하는 이들에 대한 관리는 엄격했을 터 그 생활도 속박되고 구차하였을 것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의 상류부 하곡에 원래 마을이 있었는데, 병자년(1936년) 수해 때 유실되어,지금의 아래쪽으로 이주하였다. 원황점에는 조선 영조 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 1691~1756,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균역법 만드는데 기여)와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김천을 둘러본 뒤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으로 넘어가기 위해 황점 뒤 목통령에 접어들었는데, 워낙 험준한 고개인지라 그만 허기에 지쳐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산나물을 찾아나선 아낙이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젖먹이에게 줄 불어난 젖을 짜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고, 박문수는 부인에게 소원을 물었다. 부인은 황점 사람들이 대대로 독한 유황을 캐서 나라에 바치는 일이 지극히 고단하니 이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하소연하였고, 박문수는 이를 임금인 영조에게 보고하여 이후 유황을 상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한 아낙의 젖보시로 천형같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원황점이라는 마을 지명도 원래 유황을 캐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작나무 군락지는 수도산 동봉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데요. 지맥길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 자작나무 군락지
자작나무는 겨울숲의 귀부인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늦가울이 되면서부터 백색 나신(裸身)을 드러낸다. 자작나무는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하여 붙은 이름으로, 한국(중부 이북)ㆍ일본의 깊은 산 양지쪽에서 자라는 참나무목 자작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이다. 줄기의 껍질이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이것으로 명함도 만들고,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연애편지지 용도로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다.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 않으므로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가 자작나무껍질이며, 목재는 단단하고 치밀해서 조각재로 많이 쓰이는데 팔만대장경도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華)로 쓴다. 결혼식을 화촉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옛날에 촛불이 없어서 자작나무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을 대용했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는 잎이 달린 자작나무 가지를 다발로 묶어서 사우나를 할 때 온몸을 두드리는데 이렇게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제수나무나 고로쇠나무와 함께 이른 봄 곡우 때 줄기에 상처를 내어 나오는 수액이 산촌에서는 중요한 농가소득원이 되고 있다. 우리의 영산 백두산에 오르다 보면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아름드리 백옥과 같이 하얀 자작나무들인데, 개마고원 북쪽 여진족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자작나무 숲에 머문다고 믿어 사람이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저승으로 보냈으며, 독성이 없어 옛날 서당에서 훈육용 회초리로 사용하였다 한다. 비교적 공해에는 약하지만 나무껍질이 아름다워 정원수ㆍ가로수ㆍ조림수로 심는다. 목재는 가구를 만드는 데 쓰며, 한방에서는 나무껍질을 백화피(白樺皮)라고 하여 이뇨ㆍ진통ㆍ해열에 쓴다.
♤ 성주군 가천면
국립공원 가야산 아래 위치한 성주군 가천면은 성주 서부지역의 교통과 산물 교역의 요충지로, 경남 합천군ㆍ거창군과 경계를 이루며, 김천시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옛날부터 경상도를 대표하는 5일장의 하나였던 천창장이 크게 번성했다. 천창장이 열리던 가천면 소재지 창천리는 원래 ‘샘이 있는 너른 들판’이란 뜻의 샘바대(천평`泉坪)로 불렸으나, 조선 숙종 41년(1715) 목사 윤헌주가 이곳에 양곡 창고인 천야창(泉野倉)을 세우고 지명을 천창(泉倉)으로 바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창이 일본 발음으로 ‘센소’(戰爭)라 부르니 뜻이 좋지 않아 창천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 때문에 요즘도 ‘창천’을 ‘천창’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지명을 ‘천창리’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간혹 있다. 천장장이 서는 날이면 성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합천ㆍ거창ㆍ김천에서도 장꾼들이 몰려와 시장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가야산 기슭의 천창장을 보기 위해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을 넘나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산길이 가야산 옛길이다. 해발 1,000m에 이르는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 가운데 합천 사람들은 코배이재[고개를 오르려면 코를 땅에다 박을 정도로 가파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를 넘어오는 고갯길로, 거창 사람은 불기재를, 김천에서는 돌목재를 넘어 천창장으로 왔다.
♤ 신계리
경북 성주군 가천면에 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른다. 신촌리, 적계리, 정리 등을 병합하면서 신촌과 적계의 이름을 따 석계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교동, 돌목제, 새점, 늦으미기, 정자마을 등이 있으며 교동마을은 신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학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돌목제마을은 돌이 많은 고개 밑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정자마을은 만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수도지맥에서 성주군 구간은 돌목재 분기봉에서 가야분맥 분기봉인 두리봉까지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구간 약 1.2km이다.
수도지맥에서 성주군이 차지하는 구간이 여기 독용분맥 갈림봉에서 두리봉까지 입니다. 다음 지도상으론 600m 되던데, 실제 걸어보니 1km는 넘는듯 했습니다.
♤ 독용분맥 갈림봉(1,125m)/ 돌목재분기봉/ 삼군봉(거창군 가북면, 김천시 증산면 → 성주군 가천면)
삼군봉(김천시·성주군·거창군)이자 독용분맥 갈림봉이다. 석항령 분기봉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성주군 가천면 그리고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삼군 경계봉으로 왼편 북쪽으로 내려앉은 산줄기가 김천에서 성주군으로 바뀌고 김천 시계(市界)이면서 이곳을 넘어 형제봉, 독용산으로 이어진다. 이곳 석항령 분기봉에서 두리봉까지는 성주군 가천면과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두리봉에서 장자봉까지는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의 경계가 이어진다. 다시말해 이 봉을 지나면서 좌측편이 김천시 증산면에서 성주군 가천면으로 바뀌고 우측은 계속 거창군 가북면으로 가르며 동남향하게 된다.
♤ 독용분맥(禿用分脈)이란
독용분맥은 수도지맥 목통령과 불기령 사이 돌목재 분기봉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형제봉(1022.5m), 독용산(956.1m), 신흥뒷산(562.6m)을 거쳐 창천이 대가천(大伽川)에 합류하는 가천면 창천리 창천제1교에서 맥을 다하는 14.6km 맥길이다.
♤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에 위치한 독용산성은 수도지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인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경북 기념물 제105호. 표고 약 955m의 독용산을 중심으로 하여 정상부를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이며 성벽 길이는 약 7.4㎞이다. 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 2.5m, 폭 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500년전 성산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 관찰사 정중휘가 개축하여, 동서남북 7개 포루,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있었으며, 동서군량고가 있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다. 군기고(軍器庫, 일제시 유물발굴)에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별장1, 승장1, 호병44호로서 산성을 방어하였다 한다. 산세가 험한 오지이고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땅이 평탄하여 전쟁을 대비한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북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예속된 병영(兵營)이 설치되기도 하였으며, 군기창(軍器倉)을 경영한 군사성(軍事城)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성주(星州)뿐만 아니라 김천(金泉)·고령(高靈)·거창(居昌)·합천(陜川)지역까지를 방어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던 군사상 중요한 성곽이었다.
♤ 돌목재/ 돌곡래/ 석항령(石項嶺)
돌목재는 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와 김천시 증산면 장전리를 잇는 고개이다. 고개에 돌이 많아서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는 고갯길이 가파르고 급해서 ‘ㄹ’자 모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돌목재라고 불렸는데, 한자로 억지 표기하면서 '석항령'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지지자료」에 돌목재가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석항(石項)이란 한자 이름과 돌목재라는 한글 이름이 같이 기재되어 있고,「조선지형도」에도 이 두 이름이 한자와 일본어[가타카나]로 병기되어 있다고 한다.
♤ 불기령(997m)/ 분계령/ 불귀재
불기령은 거창군 가북면 개금마을에서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월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아랫 마을인 불기마을에서 유래됐는데, 불기마을에는 철기시대의 꽃을 피운 풀뭇간이 있어 연장의 생산과 정비작업이 활발했다. 일부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가면 하루 만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불귀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가야산국립공원이라 샛길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후로 고도가 좀 있는 오름길이다.
- 두리봉 갈림삼거리봉에서 좌측 두리봉 정상을 다녀옵니다. (0.3km, 5분)
♤ 두리봉(1,135.1m)/ 가야분맥 갈림봉/ 삼군봉(거창군 가북면, 성주군 가천면 → 합천군 가야면)
두리봉은 경북 성주군 가천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 합천군 가야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두리봉은 가야산의 한 봉우리로, 동쪽으로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석항령·형제봉을 거쳐 멀리 독용산으로 이어진다. 두리봉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사료에는 기록이 없는데, 가야산의 한 봉우리로 인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펑퍼짐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두리봉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봉우리가 둥글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금마을 주민들은 '사방을 두루 볼 수 있다'고 해서「두루봉」이라고 한다고 한다. 두리봉에서 좌측 앞쪽으로 보이는 삼각점(가야 454)이 있는 봉우리를 또 다른 두리봉(1,134.2m)이라고 하기도 하며, 기맥길에서 북서쪽 가야분맥 방향으로 0.3km정도 벗어나 있지만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경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곳으로 좌측으로는 성주군과 이별하고 합천군 가야면으로 접어들며 이젠 경남 땅으로 수도지맥의 발을 들여 놓는다.
- 가야분맥 갈림봉인 두리봉은 시그날이 많이 달린 공터로 길주의 지점이다. 기맥길은 넓은 직진 방향이 아니라 우측 잡목사이 희미한 등로로 들어서야 한다.
곧, 산줄기종주영웅 반열에 오르실 대구 비실이부부대선배님께서 직접 실측 결과를 올려주시고 "가야지맥"으로 추가해야 한다며 최근 강력한 주장을 제기하셨습니다.^^
♤ 가야분맥(伽倻分脈)/ 미숭분맥이란
가야분맥은 수도지맥 분계령(불기령)을 지난 두리봉(1135.1m)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부박령(1,071m), 상왕봉(1,430m), 우두봉(1,432.6m), 가산(690.7m), 솔티재, 북두산(697.7m), 문수봉(677m), 미숭산(755m), 떡곡재를 지나 고령읍 고아리 골안마을 , 안림천이 회천(會川)에 합류하는 량교(良橋)에서 그 맥을 다하는 27.6km의 맥길을 말한다.
♤ 가야산(伽倻山, 1,430m)
가야산은 일명 우두봉이라고 불리는 높이 1,430m의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상 경남 합천군, 거창군과 경북 성주군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단지봉 등의 톱날 같은 암봉이 병풍처럼 펼쳐진 영산이다. 이 산은 1972년 10월 13일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 법보사찰 해인사를 비롯하여 마애불 입상, 석고여래입상, 반야사 원경왕사비 등 국보급 문화재가 많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계곡물은 해인사 앞에서 합쳐져 동남으로 돌아흘러 아름다운 가야천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에 홍류동 10리 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선경을 이루고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 계곡의 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여름에는 콸콸 흐르는 맑은 물이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리운다. 높이로만 친다면 중악이지만 그것이 만든 넓은 영역과 그 산 자체의 격조와 품위로 본다면 예로부터 자주 현퍈에 쓰이는 '해동 제일의 명산'으로서 유감이 없다. 예로부터 가야산은 법보종찰이 위치할 수 있는 산으로서, 천하에 뛰어난 지덕을 갖춘 산이다. 또한 호국 불심의 일념으로 팔만대장경(국보32호)을 각인하여 국난을 스스로 극복한 조상의 숨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 기록에 '산형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에서 제일다'라고 한데서도 증명된다. 가야산은 오대산(1,563m), 소백산(1,439m)과 더불어 왜적의 전화를 입지 않은 곳으로 삼재(수재, 화재, 풍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신라 말엽 해동 문장의 시조였던 고운 최치원이 운둔, 수도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종적을 감췄다는 운둔지가 바로 홍류동에 있으며 또한 길 옆 석벽에는 고운의 시 한수가 지금도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치원대 또는 제시석이라 부르고 있으며 고운이 바둑을 두었다는 농산정이 제시석과 함께 있다. 최치원을 비롯하여 서산대사 청허(淸虛), 서산의 제자 사명(四溟), 강희맹 등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 가야산성/ 용기성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산성, 용기성이라 불리는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가야산 정상에서 계곡을 끼고 구축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축은 백운동에서 용기사 터로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1km 정도 되는 지점에 계곡을 가로질러 합천군과의 경게를 이루는 정상의 서쪽 능선을 따라 남아있으며 수구 및 성문으로 되어있는 통로가 있는데 서쪽 계곡 너머로 이어지는 성벽은 모두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으며 조선 숙종 떄 근처에 독용산성이 수축됨에 따라 이 산성은 용도 폐기 되었다.
트랭글에 위치저장을 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트랭글에 저장한 사진이 나오질 않아요. 덴장~ 잘됐죠 뭐 어차피 다 올리지도 못하는데...
♤ 살푸지재(947m) 평전사거리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마을에서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아래 성황당 터처럼 보이는 돌무덤이 보인다.
- 키 큰 활엽수와 초지로 이루어진 평전이다.
♤ 남산(1,113.6m)/ 3등삼각점/ 헬기장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산과 깃대봉을 함께 표기하고 있지만 국립지리원 고시지면은 남산으로 표기되고 있다. 거창군 개금 사람들이 개금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부른데서 이름이 되었다.
- 헬기장으로 무심님의 대리석 정상석과 3등삼각점(가야 313)이 박혀있다.
난석산과 장자동 고개는 고불암종루와 가깝습니다. 지나며 여기가 거기일 것이다는 짐작은 들었지만 자료정리한 것을 찾아볼 시간이 없어서 지나고 나서야 그기가 그기 맞구나 했습니다. 운행중에는 밧데리 아끼려고 비행기모드로 놓고 진행하니깐 인터넷으로 지도 띄우거나 자료를 찾아보며 걷기가 번거롭습니다.
♤ 난석산(蘭石山, 1,085.5m)
일부 지도에는 깃대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제시대 측량을 위해 깃대를 꽂아 놓은 봉우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소나무 등 잡목이 우거져 봉우리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곳이다.
- 남산에서 약 0.2km 정도 내려서서 우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상에 있다.
지나가면서 보니 양쪽 다 임도던데요 -.,-
♤ 장자동고개
장자동 고개는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에서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장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우측 거창 방향으로는 고개마루까지 2차선 포장도로가 이어져 오는데, 좌측 합천 방향으로는 해인사의 반대로 도로가 끊겨 59번 지방도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아직 도로가 뚫리지 못하는 이유는 수행에 방해된다는 해인사측의 반대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도로가 연결되면 거창 개금마을에서 합천 해인사 방향의 마장동 마을로 바로 이어져 양쪽 통행이 훨씬 수월해 진다. 지금은 수십배 더 먼 거리로 빙 둘러야 하는, 즉 가북에서 가조로 내려가 고속도로나 국도를 따라 야로와 가야를 거쳐 해인사 길을 통해 들어 올 수 있으며,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해인사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서 차량뿐 아니라 사람도 각각 4,500원과 3,000원씩 입장료를 내야만 통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판 산적이 따로 없다. 수행에 방해가 되어 도로를 개설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통행료를 받지 못할 경우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라는데, 하루 빨리 행정 당국이 나서서 59번 도로가 원활히 개통되어 이용객이 마음놓고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두리봉 분계령에서 이곳 장자동고개까지 가야산국립공원 군에 포함되어 출입금지지역이다.
♤ 고불암(古佛庵)
고불암은 가야산 자락 해인사 부지 내에 해인사 말사 중 가장 높은 해발 9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10만평의 넓은 부지에 대웅전 및 부속건물과 1,200평 건물 실내공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2만기의 위패를 모시는 납골당인 무량수전을 두고 있다. 고불암의 동조보살좌상(銅造菩薩坐像)은 고려시대의 청동불상으로, 한국전쟁 때 어느 스님이 이북에서 지고 내려 온 불상이라 한다. 보관 상태가 결실된 상태이지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고려후기의 자비로운 미소를 띤 상호라든가 화려한 영락장식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보살좌상의 크기는 전고 74㎝이다.
♤ 길주의 지점(1,021m)
고불암 종루 극락문을 지나 길주의 지점인 1,021m 갈림봉에 오르는데, 기맥길은 우틀하여야 하므로 주의해야 할 지점이다. 직진방향으로 선명한 등로가 넓게 나있으나 직진 등로는 1,023.8m봉을 거쳐 마장동으로 바로 내려서는 일반 등로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이 구간은 일부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여 비법정탐방로이면서 산불방지통제구간(3월 2일부터 4월 30일)으로 지정된 구간으로 시그날과 표지판이 거의 붙어있지 않은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緇仁里)/ 해인사(海印寺)
치인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고지대 산간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치인, 말찡이, 삼정 마을 등이 있다. 치인 마을은 해인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말찡이 마을은 마장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제 40대 애장왕이 해인사를 세우려고 머물 때 마장(馬場)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삼정 마을은 애장왕이 3년간 머물 때 삼정승이 함께 따라와 머물렀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인데, 초막동(草幕洞)은 삼정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초막과 외초막이 있다.
여기 비닐하우스를 염두에 두고 우째 살짝 신세를 져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해가 떠서 도착했습니다.^^ 거리와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 불찰이네요.
♤ 장구재(920m)
좌측 내초막마을 아래로 비닐하우스가 가까이 보이는 잘록이 안부이다.
♤ 백학동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산간 지역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로서 동서쪽으로 감월천이 흐르며 하천 주변으로 굼들, 새첨들, 오리섬들 등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빼밭골, 정지안마을 등이 있는데 빼밭골은 백학마을로도 불리는데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정지안은 정자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재로는 감은사지가 있는데 350여년 전까지 마을 뒷산에 있었던 절터로 지금도 근처에 깨어진 기왓장이 출토된다.
좌측 가야 내초막과 우측 거창 백학동을 잇는 991m 임도 고개를 지나 잘록이 안부인 마령에 닿는다.
♤ 마령(924m)/ 마령지나 마령봉으로 올라갑니다.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에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마장동이 있으므로 마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개 좌측으로 외초막과 마장동이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부 지도는 25분여 더 진행한 지점인 1001.7m 봉을 마령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성황재 돌무데기 지나면서도 여기가 거긴가보다 하고 트랭글에 사진 저장을 했는데 그 파일이 뜨지를 않네요.
♤ 큰재/ 성황재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은사마을과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마장동과 외초막으로 연결하는 고개로 해인사와 거창군 가조면을 연결하는 큰 고갯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잊혀진 길이 되어 거창쪽으로 내려서는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은 가야천을 만들고 서로 흐르는 물은 우가천이다. 이 성황재는 일제 때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주령(主嶺)을 끊었다 하여, 이후 오가는 길손들이 그 곳을 메우기 위해 돌을 던져 쌓고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 1001.7m봉'에서 5분 정도 내려서면 잘록이 안부인데, 돌무덤 흔적이 있다.
이정표를 트랭글에 위치저장을 하며 찍었는데 트랭글에 저장한 사진이 나타나질 않아요.
♤ 매화분맥 갈림봉(980m)/ 단지봉갈림봉
은근한 오르막을 지나 갈림 능선봉에 오르는데, 기맥길은 우측길이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선명한 등로는 매화분맥으로 이어진다. 매화분맥은 수도지맥 마령과 작은가야산 중간 980m봉에서 북동쪽으로 분기하여 식기재, 단지봉(1029.2m), 남산제일봉(1054.3m), 매화산(953.9m), 남산봉(321.5m)을 거쳐 이천(利川)이 가야천(伽倻川)에 합류하는 월광교 두물머리까지 이어지는 12.4km의 맥길이다.
♤ 매화산(1054.3m)/ 남산제일봉
경남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에 있는 매화산은 가야남산 또는 천불산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야산의 지맥으로 가야산에 버금가는 웅장하고 다양한 산세를 지니고 있다. 불가에서는 천불산으로 부르는데 이는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매화산의 정상인 남산제일봉은은 가야산 남쪽에서 홍류동계곡을 끼고 솟았고 주봉을 기준해서 다섯 갈래로 산줄기가 뻗었으며 정상인 남산제일봉에 날카로운 암석들이 삐죽빼죽 솟아있는 일곱개의 암봉이 차례로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는데 정상 부근에는 금관바위, 열마바위, 곰바위 등이 있다.
♤ 작은가야산 갈림길/ 우회길
1030m봉에서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오르면,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고, 좌측 희미한 능선 방향에 흰 시그날이 걸려있는 갈림길에 이르는데, 작은가야산 갈림길이다. 당연히 좌측 능선으로 향하는데, 무심코 지나다 보면 바로 직진 우회길로 따르기 쉬운 곳이다. 즉, Y자 갈림길에서 우측은 우회길이고 좌측 등로를 타고 정상에 오르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지가 요 작은 가야산 아래 보이는 죽전마을 합천군 가야면 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작은가야산(1,065.1m)
거창군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가야산의 축소판이라고 하여 작은 가야산이라고 불린다. 작은가야산에는 거창군에서 세운 작은 대리석 재질의 사각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석 바로 아래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좋다.
♤ 소바위
합천군 가야면 죽전리에 있는 수도지맥 작은가야산과 우두산 사이의 능선상에 있는 바위이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는데...
- 매미바위와 불상바위도 지나고 소바위 정상을 타고가다 거대한 바위벽을 만나 좌측 아래로 우회하기도 하며 죽전마을 하산길을 지나 우두산까지 암릉으로 된 바위능선을 타고 간다.
♤ 우두산(牛頭山, 1046.3m)/ 별유산/ 삼면봉(합천군 가야면, 거창군 가북면 → 거창군 가조면)
우두산은 거창군 가북면, 가조면, 합천군 가야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아홉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주봉은 상봉이다. 가야산국립공원 남서쪽에 위치하며 남쪽의 비계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우두산 지명은 산의 형세가 소머리를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백의「산중문답」에 나온 구절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이름을 따 전체 산이름을 별유산(別有山)이라고 하였으며, 상봉을 별유산으로 부르기도 한다.『세종실록지리지』(거창)에 "견암사(見庵寺, 현 고견사)는 가조현(加祚縣) 우두산(牛頭山)에 있다."라는 기록에 등장한다. 이후 『여지도서』(거창)에도 "우두산은 가조현 동쪽에 있다. 곧 합천 가야산 서쪽 산줄기이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한국의 산지』에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참선한 곳이라고 하여 의상봉이라고 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는데, 거창군 가조면이 자리잡은 가조분지를 북쪽에서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세이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다른 봉우리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 거창군에서 세운 자연석 정상석(우두산 / 1046m)과 이정목(←의상봉 0.6km, 마장재 2.0km→)이 있다.
♤ 거창군 가조면
가조면은 거창군의 동부를 이루며 동쪽으로 합천군의 서북부 가야면과 맞닿고 북쪽으로는 가북면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합천군 사산면과 봉산면이 서쪽으로는 남하면에 접한다. 가조는 땅이 넓고 분지로 이뤄졌으며 정감록에는 가야산 만수동 한양 조씨 천년도읍지라고 기록돼 고대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가소라는 성읍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시대에는 가소현, 함음현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 가소현, 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시대 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동쪽에는 합천군과 거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두무산(1039m)과 오도산(1134m)이 있고 숙성산, 미녀봉, 우두산, 의상봉, 장군봉 등 수려한 고산준령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휘감아 아름다운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가천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그 유역에 거창군 동부지구 최대의 가조들을 이룬다. 가조들은 1972년 서병지구와 1975년 마상지구의 경지 정리가 이루어져 거창군 동부지구 최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마상리에 동서 방향의 군도가 있거 거창읍과 연결된다. 문화재로는 고견사 석불과 거창원천 느티나무 및 거창당동 당산 그리고 원천정 등이 있다.
♤ 거창군 가조8경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의 명소 8곳을 정해 홍보하고 있는데, 거창군 가조면(加祚面)에서도 가조8경을 정하여 놓았다. 가조 1경 의상봉, 가조 2경 가정산폭포, 가조 3경 용소, 가조 4경 비계풍혈, 가조 5경 박유산, 가조 6경 수포대, 가조 7경 문재산, 가조 8경 각시소가 그 곳인데, 오늘 이 곳 의상봉과 비계산 직전 비계풍혈 두 곳을 지난다.
♤ 우두산 가조분지 & 일본 개국신화
일본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는 일본 개국신 스사노 노미코토가 터를 잡은 땅이 언급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땅이 일본이 아니라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곳으로 소시모리에 살던 개국신 스사노는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운국)에 정착한다. 이것이 일본 최고의 역사서가 전하는 일본의 탄생으로 그렇다면 이 신화에 등장하는 소시모리 즉 신들의 고향 고천원은 어디일까 궁금한데 이경희 전 가야대 총장은 일본 건국신화의 무대 고천원(하늘의 벌판)은 가야 땅 우두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시모리의 이두식 표기가 소머리이며 이는 대가야 땅 우두산을 일컫는다는 것이며 심지어 이총장은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가야 발상지 고령 땅에 고천원고지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의 언어학자 마부치교수도 이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일본의 개국신과 신화의 고향은 이곳 거창의 우두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두산은 일본 개국신화와 관련이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일본의 개국신화도 우리 단군신화와 비슷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신들이 내려와 땅에 닿기 전에 가족을 이루고 살았다는 고천원이라는 별천지가 있다는 것으로 또한 그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도 특이하다. 우두봉 아래 가조분지는 일본 천황가의 본향인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곳인데 유력한 근거로 고천원에는 소시모리가 있다는 것이며 이 소시모리를 소의 머리를 닮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가야산 우두봉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천원을 추정한 것이다. 이렇듯 주봉 우두산은 일본의 개국신화와 관련된 전설의 산이며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숭배되는 스사노 노미코토가 천강(天降)하여 살았다는 소시모리에 비정되기도 한다. 다른 견해는 춘천의 우두산 주변을 고천원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가야인들이 최초 일본 열도를 개척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가조분지 출신의 일파가 천황가를 형성하며 일본 열도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가조분지가 고천원이라는 설을 유력한 견해로 본다. 가조분지는 삼면이 700m에서 1,100m급의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접근 자체가 어려운 곳이지만 내부 벌판은 넓어 식량 생산에는 부족함이 없다. 방어에 유리하고 식량 걱정이 없는 높은 천상의 벌판이 바로 고천원으로 가조분지를 관통하는 유일한 하천인 가천은 남쪽으로 협곡을 이루며 낙동강 지류인 황강에 합류한다. 고대인들의 생각에 이 협곡의 상류에 거대한 들판이 있으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천황가의 선조들은 이러한 지형에 정착하여 후일 일본 열도까지 진출하는 힘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 의상봉(義湘峰, 1,046m)/ 우두산에서 우측 등로를 타고 다녀오는데 왕복 거리 약 1.2km로 40분 소요
의상봉은 가조의 진산 우두산(牛頭山)의 서쪽 지맥으로 가조면 수월리에 위치한다. 의상봉(義湘峰)은 제2봉이지만 주봉인 상봉보다 인기가 많아 의상봉을 산 전체의 이름으로 인식하기도 했다고도 전한다. 비계산(동남쪽) 북쪽으로 수덕산이, 서북서쪽으로 덕유산과 남덕유능선 및 기백산과 금원산 능선 그리고 황석산과 거망산 능선이 보인다. 서쪽 사면에서 우가천, 남사면에서 고견천 등이 발원한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참선한 곳이라 하여 이름되었으며 산자락에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理貞)이 창건한 고견사(古見寺)가 있고, 경내에 동종과 석불, 탱화,《법화경》등의 문화재가 있다. 십이지신상석, 수석이 아름다운 고견천, 가정산 폭포, 낙화담, 가마소 등의 명소가 즐비하다. 산 아래에는 숙종이 원효대사를 기려 내린 강생원(降生院)을 비롯해 높이 80m의 고견사폭포(견암폭포)가 있다.
- 거창군에서 세운 자연석 정상석(의상봉 / 1038m)이 있다.
고견사에서 산이 쩌렁쩌랑하게 떠들며 올라오는 산객 두분을 만났어요. 주차장에서 장군봉을 찾아가다 알바를 했다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올라오고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그랬죠 아저씨들 닭대신 봉만난 격이라고 여기로 잘 오셨다고~
♤ 고견사(古見寺)
신라 문무왕 7년에 의상과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고견사 뒤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는데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터로 알려져 의상봉이라 한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가야산, 서쪽으로 덕유산, 남쪽으로 지리산이 보이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장군봉과 별유산, 비계산, 미녀봉, 박유산의 산세가 빼어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씨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밭 150결을 주어 대궐의 향을 내려 해마다 2월과 10월 수륙재를 지내게 한 사찰이다. 또 이 절에 고운 최치원이 머무르리도 했다고 하고 최치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의상대사가 도를 닦을 때 날마다 대사와 상좌가 먹을 만큼 쌀이 나왔다는 쌀굴도 있다.
♤ 마장재(840m)/ 마당재
마장재는 우두산과 비계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노른재를 거쳐 죽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참나무 두그루가 있는 억새밭이다. 좌측으로 죽전저수지가 보인다. 억새능선 철쭉군락지로 지나온 우두산 상봉과 의상봉 그리고 지남산 지나 장군봉으로 이어진 산줄기 뿐만아니라 우측의 매화산과 남산제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역시 전망이 좋다. 수월리는 비계산에 달이 떠서 비치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인데 수월리에 소재한 고만리들은 땅이 기름지고 넓은 평야이다.
- 주차장 갈림삼거리 이정표(↓우두산상봉 2.0km, ↑비계산 2.8km, 주차장 1.6km→)에서 비계산 방향으로 나가는데, 앞쪽으로 1,094.1m봉이 높게 솟아있다.
비행기모드를 잠깐 해제했더니 매시지가 잔뜩 쌓였네요. 갑작스런 일이 있었다며 내일 출근해 줄 수 없겠느냐는... 출근해서 돈벌으라는 건데 거참 마다할 이유도 없고, 사실은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시키는 대로 해야죠. 거창 나가서 막차 타고 올라가기로 합니다.
♤ 노르재/ 황령
노르재는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노르재 아래의 대전마을은 합천 가야면의 지역으로 큰 밭이 있으므로 한밭 즉 대전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령동(황령 또는 노른재), 남교동 이후 한밭 이름을 따라서 인지 몰라도 1975년 앞산을 개간하여 수만평의 큰 밭을 이루어 현재 약초와 초지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재배하고 있다.
- 우두산 산신제단이 있고 내려서면 억새풀에 점령당한 헬기장으로 좌측으로 가야면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지맥의 풍광이 좋다. 1,094.1m봉을 향한다.
비계산 바로 가는게 아니고요. 여기로 왕창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야 합니다.
♤ 뒤들재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서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넓은 평지가 나오고 상수월(3.7km)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곳이다.
- 돌탑과 거창휴게소(2.2km)를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1,095m봉으로 향한다.
♤ 가조 제4경 비계풍혈
비계풍혈은 비계산(해발 1,129m) 산정의 지인봉(智仁峰)에 위치하며 깊이 20여m의 굴이 있어 가조 고을에 바람이 일 기미가 있으면 이틀 전부터 굴속에서 바람소리가 일렁이고, 그 소리가 가조현까지 들렸다 하여 "비계산 바람굴(風穴)" 이라고도 한다. 산 아래에는 "가야산하 만수동(萬壽洞) 한양조씨 천년도읍지"라고 전하는 고만리들, 즉 감안(궁정)들과 궁배미(宮城址)가 전설되고 있다.
♤ 비계산(飛鷄山, 1,136m)/ 지인봉(智仁峰)
비계산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와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북쪽 가야산국립공원의 우두산에서 산줄기가 남쪽으로 이어져 비계산을 이룬다. 동쪽 두무산으로 흐르는 산자락 아래로 지나는 88올림픽고속도로의 합천터널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인접한 별유산, 장군봉과 함께 닭이 금벼슬의 관을 쓰고 심장부에 고견사(우두산에 위치한 사찰)를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이며, 비계산은 닭머리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산세가 마치 닭이 날개를 벌리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여 비계산이라고 부른다.『지승』(합천)에 군의 북서쪽, 거창과의 경계에 비계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동쪽에 오두산이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도 『해동지도』(합천), 『1872년지방지도』(합천) 등에도 산이 기재되어 있다. 산에 비계산 굴이 있다.
- 두번째 봉우리로 세개 봉 중 가장 높은 실질적인 비계산이라 한다. 합천군 숭산비운산악회에서 세운 대형 자연석 정상석(飛鷄山/ 비계산/ 해발 1125.7m)이 자리하고 있고 세번째 봉우리에는 비계산 삼각점(합천 302 / 1981 재설)이 있다.
- 부근에는 거창에서 유명한 수승대가 있는데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는데 신라가 백제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으로 그래서 원래 이름은 수송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황이 시 한 수와 함께 지금의 명칭을 지었다고 하며 숙종 때 조성한 귀연서원과 약수정 등도 남아 있다. 또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가 멀지 않으며 숙박을 하려면 거창읍의 숙박시설을 이용한다.
- 비계산에서 산제치까지 3.5km이다.
공부를 해놓고도 건성으로 봐가지고, 알바를 했습니다. ㅠㅠ
서울에서 급하게 올라오라는 전화도 받고, 잘 하면 버스도 타겠다 싶어 서둘르던 참인데 여기서 그만 알바를... 시루봉으로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올라서는데 이때 땀을 젤 많이 흘렸습니다. ㅋㅋ~
♤도리 갈림삼거리 이정표(↓비계산 0.15km, ↑산제치 3.4km, 도리 1.9km→)가 애매하게 길 안내를 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비계산 세째봉인 삼각점봉에서 3분쯤 내려서면 갈림길 좌우측으로 공히 시그날이 달려있는데, 이정표는 좌측 등로가 산제치로 가고, 직진 우측 등로가 도리로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나, 우측 직진 방향이 산제치로 가는 정상 등로다. 도리는 경남 합천군 대양면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대부분 지대가 구릉성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북쪽에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산제치에는 버스가 서지 않지만 보이면 불러 세워야겠죠.^^ 게스트 하우스는 언덕 너머 150m,, 물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는 정보가 없네요.
♤ 산제현(山際峴, 580m)/ 산제치/ 1084번 도로
산제현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도리와 합천군 가야면 성기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다. 북쪽의 비계산(1,130m)과 남쪽의 두무산(1,036m) 사이의 능선에 형성된 고개이며 고개 북쪽으로 88올림픽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합천터널이 있다. 조선시대 사료에서 산제현을 찾기는 어려우나 『광여도』(거창)에 읍치 동쪽 상가남면과 합천의 경계부에 산제동험액(山際洞險阨)이 묘사되어 있고, 『조선지지자료』(거창)의 상가 남면에 대학동 동쪽 가에 있는 산으로 (山峴)이 수록되어 있다.
- 대학동 산제치는 동쪽 59번 도로와 서쪽 1084번 도로가 갈리고, 아델스코트 게스트하우스로 진입하는 도로가 고개 옆으로 나 있다. 1971년에 공병단이 길을 뚫었다는 준공기념비와 아델스코트 CC 표석이 있다.
- 거창 휴게소를 지나 가조면 온천지구에 모텔이 많고, 하나로마트와 음식점도 있으니 가조택시를 불러 이용할 수도 있겠다.
첫댓글 수도지맥 하시는군요 저는 두구간 을한방에 하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 무사안산 힘내세요
바랑산대선배님!
손자 원균이와 대간산행 멋지십니다.
원균이가 할아버지와 백대두대간을 걸으며, 장래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길 기원드리겠습니다.^^
퐁라라님!!
수도지맥 첫 구간을 산제치까지 가 브렀네요,
비실이가 수도지맥 넘나들었을때가 13년이 넘고보니 가물가물하네요.
산패랑, 표지석이 확~ 바뀌어져 있구요,
퐁라라님의 글을 보고서야 수두지맥이 아하~~ 이렇구나,
나머지 성산까지 잘 가르쳐 주이소,
작은가야산엔 다시한번 가 봐야 것습니다.
비실이대선배님!
나와바리 지나며 가야산 맹주께 신고 못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막걸리로 과태료 흠뻑 따라 드리겠습니다. ㅋ
정상석은 큼지막 한걸루 다 바뀐것 같았습니다.
수도지맥 산패작업은 산너머님이 오래전에 배방장님과 한방에 수도를 접수하며 했다는데 드물게 남아있었습니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없으니 여기가 거긴가보다 하고 그냥 지나치네요.
두리봉이나 매화분맥 갈림봉은 가야산과 남산제일봉으로 분기하는 중요한 지점인데,
정상석은 커녕 이정표도 변변찮아 인지도가 매우 약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요며칠 전에 정수지맥 산패위치 바로잡아 주셨다면요.
일부러 발걸음 하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아래 사진이 소바위봉에서 바라본 가야산입니다. 앞쪽 봉우리가 작은 가야산이에요.
아이쿠야 수도지맥을 두방으로 날릴심사네요.
우리는 여섯번이나 힘들게 갔었는데 말이죠.
퐁라라 게시판지기님이 가시는 곳은 언제나 날씨도 좋고. 날씨가 좋으니 사진빨도 기가막히네요.
수도지맥 수고하셨습니다.
부뜰이운영자님!
가능하면 맑은 날, 시계가 멀리 나가는 날로 선택할려고 노력합니다.
비 온 다음다음날이랄지, 바람이 세게 부는 맑은 날요.
한달에 최소 두번은 갈 계획이니, 날씨를 보며 택일을 하고 앞뒤로 조정을 하곤 합니다.
산행의 기본은,
제공되는 제반 사항을 총정리하여 사전에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왕지사 가는 걸로 정해졌다면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지요.^^
부뜰운영자님은 전문가용 카메라 dslr로 올려주시지만 저는 폰사진이라 허접하기만 합니다.
폰사진이라도 세세한 기능을 최대한 살린다면 사진이 나을텐데,, 있는 기능도 제대로 활용을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주시니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3구간 종주한것을 원샵종주 대단한 체력 입니다~
체력 보안 비결좀 알여주셔유~
지난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종주기록 잘보고 가유~
법광선배님!
평소 밥을 잘 먹습니다.^^
작년 건강검진에 위내시경 하며 조직검사를 했는데 내벽이 좋지 않데서 약을 지어먹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빵을 무쟈게 많이 가져가서 절반은 그냥 가져왔습니다.^^ 혹시 몰라 원샷 종주 가능할 만큼 가지고 간것 같습니다. ㅋㅋ
법광선배님!
혹시 다음 구간 물을 구할 수 있는 장소 알고 계시면 도움 주십시요.
제가 알기로는 기미재에 이동매점이 나오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화장실은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까요?
싸리터재나 큰재, 지릿재, 매화재, 율원재 등 그 외 가까운 다른 장소 알고 계시면 정보 부탁드립니다.^^
저는 오로지 지맥길만 걸어봐서 잘 몰라유~
제가 봉수지맥을 걷든날 (24일) 수도지맥 거창지역에 계셨군요
많은 지맥중에 단연 돋보이는 장쾌한 맥이라 여겨집니다
철저한 준비와 강한체력이 부럽습니다 장거리 수고많았습니다 .
네 묵언선배님!^^
수도지맥 굵직굵직 한데요.^^ 하지만 후반부는 조금 약해지는듯 합니다.
오도산 이후론 1,000m급 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싸리터재 이후로는 잡목길이 나타나는가 봅니다.
오도산까지는 일반 등산객들도 많이 찾는데 싸리터재 이후로는 맥꾼들이나 다니는 모양입니다.
철야 산행에 졸려서 혼났습니다.^^
코로나로 근력운동을 멈추니 밤새 진행할 체력이 되지 못합니다..
배낭 무게를 고려해 경량우모를 넣을까말까 했고요, 긴팔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두세개 가지고 다니던 장갑도 하나 보이지 않고, 잠바도 부실해 비상용 우의를 꺼내 입었는데 밤에 바람이 있어 추웠습니다.
2구간은 감안해서 좀더 준비를 잘 해볼려고요. 감사합니다.^^
산길샘 나들이에서는 산길샘 에서 트랙불러오기 하면 사진 찍힌 위치가 표시되고 그걸 터치하면 사진이 보여지는데 트랭글도 그럴것 같은데 안되나요?
네! 달님대선배님,
전에는 자동으로 사진이 저장 되었는데 지금은 트랭글에서 내려받기를 해야 저장이 되네요.
그리고 바빠서 자세하게 확인 안하고 저장을 눌렀더니 엉뚱한 사진이 엉뚱한 장소에 저장되었네요. ㅋ
어차피 현재 제 능력으론 50장 올리는게 한계라서 이정표나 산패를 찍은 사진을 올리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
거침이 없으시네요.
수도지맥 연봉들의 고도뿐만 아니라 가야산을 품고 있어서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 산줄기라는 느낌입니다.
의상봉의 계단은 정말로 만만치 않아 보이네요. ㅠ
사방 모두 시원스런 절경에 사로잡혀 눈요기하느라 시간이 훨씬 소요될 것 같네요.
다가오는 모임날 가야산 상왕봉에 오를 날을 기대해 봅니다.
이틀동안 만만치 않은 여정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선답자분들의 산행기가 있어 어렵지않게 진행할 수 있었네요.
울산의 산이선배와 플러스선배는 원삿원킬로 트랙을 남겨주셨습니다.
4월 첫주는 비가 들었고 둘째주는 선거가 들어서 다음 일정 잡기가 애매합니다..
2구간은 물때문에라도 시내나가서 한구간 끊어야할까 봅니다.
오늘부터는 비슬지맥 자료 수집에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급한 전화 받고 서두르다 보니 엉뚱한 곳에 와 있더라.
그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듯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그래도 휴, 한숨 한번 토해내고,
정석으로 되돌아 나가는 퐁라라님은 진정한 산꾼이십니다..
땀을 많이 흘린 만큼 기쁨도 더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窮則通! 이 말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수도산~단지봉~가야산,
오래 전, 이 장쾌한 능선에 반해 꺼이꺼이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퐁라라님!
좋은 산, 좋은 능선에서 좋은 경험 많이 쌓고
행복한 인생을 계속 이어가시길 진심 응원합니다. 즐감했습니다.
네 범산선배님!^^
저의 바람은 162지맥 하나하나 모두 테마와 줄거리가 있는 산줄기로 포스팅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에 쫒긴다든지, 생업으로 공부할 여력이 없으신 분이 대부분이지만 어려운 가운데 노력을 기울여 지맥길에 살을 풍성하게 붙여 아름다운 볼거리, 읽을거리로 만들어 주시는 선답자님들의 후기를 발견하면 고맙고 존경스런 마음이 절로 든답니다.
무릇 산행후기란
나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후답자분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자세히 제공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홀대모에 올려지는 산행기는 산행의 준전문가로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정확성까지 기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것 같습니다.
일구와6기맥을 마치고 산행기를 많이 참고한 선배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강호에는 이름없는 고수분들도 많고, 선답자님들이 남겨주신 후기는 곧 정보의 보고(寶庫)와 같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후답자의 편리를 위해 한 곳에 모은다고 노력은 해보는데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군요. 겨우 많으면 15개 정도 참고를 하는 편입니다.
범산선배님 후기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도움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풍라라님 수도지맥1구간 수고 많으셨읍니다.
내가 댕겨오구 난(작은가야산 이후~ )몇일후 다녀오셨네요...ㅎㅎ
선제치 에서 잘 끈으신듯 싶읍니다..
두무산...
골프장 끝나는 부분 에서 정상까지 뎀비알 1km이상 죽음입니다....ㅎㅎ
오두산은 쬐끔 낳읍니다....만
역시나 힘들고...ㅎㅎ
늘...즐거운 맥길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즐거운 오후되십시오.
무영객형님!
트랙을 살펴보긴 했는데 야간에 졸면서 가셨을까요?
지릿재까지 가셨는데 마령재에서 알바를 하셨더군요. 수도지맥 다 끝내긴 하셨나요.
뾰족한 오도산을 봐도 전망은 좋은데 오름이 힘들겠더군요.
게다가 오도산에서 조망을 밤에 지나긴 조금 아까웠습니다.^^ 물론 야경도 멋지겠지만요.
산제치 이후에 물을 구할 장소를 찾고 있어요.
물을 구하면 굳이 시내로 내려가지 않고 노박할려고 하구요.
그렇잖음 시내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해서요. 첫구간보다는 낮은 산들이니 조금은 수월하겠죠.^^
혹시 아직 마지막 구간 출발하지 않으셨다면 지릿재에 물 2리터 묻어두시고 문자주시면 모임날 막걸리 한잔 따라드립니다.~^^*
수도지맥 산세가 뛰어나고 멋진 조망이 많은 지맥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지맥 중 한 지맥입니다 퐁라라님 사진 잘 보았습니다 우두산 비계산 시코봉 등 최고의 지맥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금오지맥도 했으니 양각지맥으로 수도산 다시 올라야 하는데 ㅎ~~~
세르파선배님!
양각지맥 분기점은 이정표 거리로만 봐서는 수도암에서 3.83km, 우두령에서 3.4km, 심방마을에서 3.8km네요.
수도암에서 수도산까지 2.43km오르고, 능선을 따르는게 가장 편안 접근방법인가 봅니다.^^
거말산에서 바라보는 시코봉부터 수도지맥 1구간은 가야산이 있어 대간 급이나 되는듯 했습니다.
수도지맥 하셨잖아요. 2구간에 물 구할 데를 알아본다니께요. 약수터 보신적 없나요?^^ ㅋㅋ
물은 생각이 잘 안나고 전두환 선영은 생각나네요 역적이 나온 선영입니다 꼭 보고 지나가세요~~~.
날을 잘 골라 가십니다.퐁라라님 ^^
평일날은 시간을 낼수 없는 처지라
평일에 다니시는 분들 무지 부럽습니다.
좋은날 골라 아무때나 떠날수 있다면
가장 좋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한대로 움직여야죠 ^^
워낙 꼼꼼하게 산행 준비물도 챙기시고
산행을 하시니 긴 장도에도 불편함을
최소화 하시고 걸음 하십니다.
맑은날 수도지맥 상에 올라 유유자적하며
걸음하시는 퐁라라님의 모습이 잘 배여
나온 산행기 인듯 합니다..
수도지맥 첫구간 잘 들여다 보았습니다.
다류대장님!
고생을 안 할려고 사전에 후기도 많이 살펴보고,
택일도 앞뒤로 조절해서 하는 편입니다..
비오는 날 내려갈 순 없잖아요. 끔찍해요.^^
날짜는 휴일이나 주말이나 상관없이 제 근무 싸이클에 맞춘답니다.
아직도 초짜입니다. 배낭만 무겁습니다.
이번에도 빵이 절반이나 남았어요. 물도 1000cc가량 남았고요.
불필요한 물건인 전지가위, 약, 연고, 부직포, 휴지도 5회 사용분은 되나봐요.
비상용 과자도 그대로 그냥 되가져왔어요.
무거운 충전지도 1만짜리 세개를 넣어갔네요. 두개로도 충분한데...
충전짹도 쓸데없이 두개나 가지고 다닙니다. 케이블도 서너개... ㅜㅜ
첫날은 미세먼지가 많아서 시계가 흐릿했습니다.
밤에 추워서 고생했는데요. 비상용 우의라도 없었으면 추울뻔 했어요.
둘쨋날은 간밤에 바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하늘이 맑게 개이고 시계가 멀리멀리 나갔습니다.^^
도대체 근무를 조정하고 ㅎ 대단하십니다 ㅎㅎ 산에서 주무시면 추워요 소주는 꼭 드시고 주무세요 화이팅입니다 ~~~~
근무 안 바꿔주면 늦춰야 해서요.
후배들한테 아쉰소리도 하고 그럽니다.^^
물 이외엔 먹고 싶어도 사과나 포도, 오렌지, 쇠주 이런건 내려와서 먹습니다.
무거워서 그냥 참고 말아요~~ ㅋ
산행을 도를 닦으면서 하시네요 세속산행이 즐거워요 ㅎㅎ 항상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