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15. 오후 3시. 세실님의 오페라 산책
"피가로의 결혼 중에서 난 이 음악이 젤 좋더라고. 아마도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인가봐."
"아......발레극이 나온 장면이었죠? 저도 중학교 1학년때 그 영화에 꽂혀서 여러번 봤지요."
토요일 오후, 단촐한 예배당 뒤에 앉아 제뉴어리님과 피숑(나)은 소근거렸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중이었고 중간중간 세실님(홍관수님)의 명쾌한 설명이 이어졌다.
모짜르트. 그와 함께 한 연수(年數)가 올해로 26년째이니......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결론은 한결같다는 것이다. 이 자명한 천재 덕분에 이른 나이에 클래식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오페라의 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죽음은 모짜르트의 음악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엘버트 아인슈타인-
"나는 교향곡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분야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제뉴어리님이 잘 아실터지요. (좌중의 시선집중. 제뉴어리님은 방긋 웃었다.) 하지만 저는 오페라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며 자신있습니다. 모짜르트는 오페라 뿐 아니라 교향곡도 많이 작곡했지요? 뭐...교향곡이야 꼭 그가 아니더라도 브람스, 말러, 부르크너가 발전시켰을겁니다. 그러나 만일 모짜르트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십시다. 그래서 오늘날 피가로의 결혼의 유머와 위트가 있는 멜로디, 이면에 우수가 깃든 멜로디를 감상할 수 없다면요.....얼마나 끔찍할까요?! 찬란한 슬픔!! 그게 바로 모짜르트의 작품만이 지닌 매력이지요."
정말 그랬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나?! 어느날 밤에 우연히 보게 된 아마데우스. 영화가 종료된 후에도 이어지는 강렬한 여운....일종의 금단현상을 겪고 있는 환자처럼 초조하게 골몰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피가로의 결혼 전체를 다 감상하리라....그러려면 빨리 내일이 되어야 했다...뜬 눈으로 지리한 겨울밤을 어렵사리 보내고 이튿날 근처 음반점이 오픈하자마자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전곡반을 구입했다. 니코틴 중독자가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나서야 심신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듯 그 유명한 서곡이 들리자마자 금새 평온과 행복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야기는 좀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저녁 거실에서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설핏 잠들었다 깨어났다. 스크린에는 한 신사가 케이크에 꽂힌 생일 초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 중년 남성의 중저음의 목소리에는 초등학교 3학년의 무지한 귀로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리듬과 선율이 실려 있었다. 그 노래가 서곡 다음에 첫 등장하는 스잔나와 피가로의 이중창이라는 걸 4년 후 그 날에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 속 흥얼거리던 남성이 유명한 명 바리톤 호세반담이고 그 영화가 가면속의 아리아(1987년작)라는건 스무살이 되서야 알았다.
"피가로는 신화 속 비현실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는 스잔나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들뜬 채 침대 치수를 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오페라는 진정한 의미의 3인칭 시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희곡은 자신을 침범하는 모든 것에 치명상을 입히는 거인이다. 악습에 대해 그리고 잘못된 대중에 대해 희곡의 힘있는 일격을 마련히 두어야 한다. -P.A. 보마르셰-
책장 한 귀퉁이에 고이 모셔둔 불문과 재학시절 전공서를 꺼내든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스무살 무렵의 추억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간다. 그러다가...화가 나티에(1685~1766)가 그린 보마르셰의 초상, 거기서 시선이 머문다. 부유한 차림새의 보마르셰. 그게 화근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전조를 끊임없이 보여주었건만 혁명가들은 항상 그를 수상쩍게 여겼으니까.....여하튼 그의 피가로 그리고 모짜르트의 피가로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따지고보면 귀족들은 재수좋아 귀족이란 신분으로 태어난 거잖아....그래서일까? 귀족 일색인 코지판투테를 제외한 그의 모든 오페라에서 가장 먼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언제나 평범한 서민들이다.
"피가로는 자신의 약혼녀 스잔나를 넘보는 백작의 흑심을 이성적으로 좌절시킵니다. 피가로야말로 계몽주의의 중심사상인 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 왜 결혼 같은 걸 했지?
도회지에 살며 거리의 소음이며 극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그리고 무도회의 회황한 불빛 아래에서 마음이 부풀고 관능이 충족되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무도회가 벌써 먼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사치스런 생활과 접촉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무언가가 남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엠마에게는 그 무도회를 추억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사소한 일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애석한 미련만이 남아 있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보바리 중에서-
"여성분들은 알마비바 백작부인이 부러우세요?! 제발 그러지마세요. 귀부인들은 꽉 조이는 코르셋에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걸치고 무거운 패물들과 거추장스러운 가발을 달고 다녔어야해요. 아무리 급해도 뛰어서도 안되고요.(물론 그 차림새로 뛰기도 힘들었겠지만요.) 참! 드레스 기장은 결코 발목이 보여서는 안되요. 그 당시 발목을 드러낸다는 건 마치 오늘날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활개치는 거랑 다를게 없었으니까요."
'오!! 선생님, 무릇 여자들은 허영심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구요. 보바리즘이란 용어가 괜히 나왔겠어요? 전 엠마의 심정이 너무도 이해되요. 저도 한번쯤은 화려한 생활을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묵인하고 인내할 줄 알아야 했답니다."
바로 그 순간 귀부인에대한 평소의 어리석은 동경이 싹 사라졌다.
"알마비바 백작부인은 봉건주의하에 만연하던 남성우월주의의 피해자 입니다."
한숨은 숨기려 하자 더욱 깊이, 살짝 훔쳐보는 눈길은 훔쳐볼수록 더욱 달콤히, 부끄러워할 일이 없는데도 뺨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줄리아의 쌀쌀함에는 아직도 정이 서렸도다. 그 조그만 손은 정답게 떨면서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살짝 쥐었노라. 가슴으로 느낄 정도로 정답게 살짝, 너무나 살짝 쥐었으므로 마음속에는 의심만이 남게 되네.
그는 자기 입술을 여인의 입술로 가져갔고, 손으로 여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돈 후앙 1편 중에서 발췌-
스무살 마지막 무렵, 수많은 중고서적방을 일일히 방문하여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가면속의 아리아 비디오 테입을 내 방에 들였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10년 전의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니까.....
다시금 할머니의 팔베개, 그 때로 돌아가보자. 장면은 생일축하 이전 장면이다.
지붕을 접어 오픈시킨 이륜 마차가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다. 오후의 포근한 햇살 아래서 두 남녀는 듀엣을 부른다. 이중창은 중년 남성의 나긋나긋하고 기품있는 웃음으로 끝난다. 그 노래가 체를리나와 돈조반니의 라 치 다렘 라 마노라는 거, 후에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변주곡으로 회자 되었다는 거...모두 유년시절엔 몰랐다. 다만 초등학생의 뇌리엔 아름다운 잔상과 멜로디만 깊이 남았었지....
"10대 미소년 케루비노는 연상이든 연하든, 계급이 높든 낮든 여자라면 닥치는대로 달려들지요. 돈조반니의 전신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거 같은데요. 바람둥이 케루비노를 통해 봉건적 계급사회가 붕괴되고 근대적 평등사회가 도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막강한 지위와 막대한 재산을 총동원하여 처녀 스잔느를 가지려는 에스파냐의 영주(백작), 이에 대항하는 그녀의 약혼자 피가로 그리고 영주부인(백작부인)의 노력들, 이것이 전부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보마르셰, 가장 익살맞은 줄거리(la plus badine des intrigues) 중에서-
실상 줄거리 자체는 아주 단순한데 그 단순한 짜임이 인물들의 여러 감정선들이 얽히고 섥히며 복잡한 양상으로 거듭난다.
가령 케루비노가 군대로 쫓겨나 상심할 때, 피가로가 빈정대는 대상은 젊은 호색한 케루비노는 물론이려니와 늙은 호색한 백작도 해당된다. 지략가 피가로의 이 중의적 표현에 백작은 섯불리 화를 낼 수도 없다.
또한 원작가 보마르셰가 애착을 갖던 5막 3장, 오페라로는 4막에서 속고 속이는 명장면들....백작의 바람기를 잡으려는 백작부인과 스잔나그리고 그들의 계략에 걸려든 백작, 백작부인이 스잔나로 스잔나가 백작부인으로 변장한지 모르고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분개하는 피가로,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는 피가로에게 화가 난 스잔나와 뒤늦게 목소리로 그녀란 걸 알고도 미안한 마음에 여전히 모른척하며 기꺼이 따귀를 맞는 피가로의 능청.
그렇다면 이쯤해서 2006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피가로의 결혼의 무대 분위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페르메르의 시정(詩情)은 분위기의 시정이다. 화폭 속 인물들에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빛에서 나온다. 인물들의 용모를 부드럽게 만들고, 머리카락을 후광으로 둘러싸고 여인들이 입은 옷자락을 비단처럼 반짝이게 하고 그녀들의 아주 평범한 활동을 신비스런 광채로 둘러싸는 것은 바로 이 빛이다. 실상 페르메르의 모든 천재성은 빛에서 기인한다. 그림틀의 한쪽에서 들어온 빛이 공간을 가로질러 반대쪽까지 이른다."-요하네스 페르메르, 파스칼 보나푸 지음-
느닷없이 왜 페르메르냐고?! 오페라 무대 조명이 딱 그랬으니까......밤이 배경이 되는 4막의 소나무 아래에서의 클라이막스 부분을 제하고는, 거의 모든 해프닝이 낮 동안에 일어나므로, "한나절"이라는 시간적 효과를 최대한으로 강조하고자, 커튼 드리운 창을 설치하여 자연광이 잔잔히 스며들도록 했다. 이로써 오페라는 우아한 명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감상하는 듯한 착시를 안겨주었다.
또한 원래 극의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중후반인데, 의상과 헤어는 로멘틱 스타일이 대세이던 19세기 초중반이어서 매우 이채로웠다. 무대위 여인들의 x자형 실루엣 드레스라든지 신사들의 프록코트와 실크햇 그리고 연미복은 루이필립(1830~1848) 치하의 왕정시대를 연상케했다.
"옆 방에서는 탁구를 치고 있어요. 모르겠어요.....탁구치면 엔돌핀이 돌고 행복하다던데 전 오페라를 들으면 엔돌핀보다 4천배 효과 있다는 다이돌핀이 느껴져요. 전 정말 오페라를 좋아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의 매력에 푹 빠졌으면 좋겠어요."
첫 방문, 첫 수업이지만 고스란히 전해지는 뜨거운 열정!! 이번 주말의 최대 수확이라면 진정한 오페라 광(狂)을 만났다는거! 나 또한 클래식을 오페라로 시작했기에 그 분의 맘을 헤아릴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아까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귓전에 들리자마자 코 끝이 찡하면서 왈칵 감정이 북받쳤었지!! 아마도 그간 그토록 오페라가 무척 고팠나보다.
불현듯 난 깨달았다. 앞으로 매달 3째주 토요일에 세실님의 오페라 산책에 나오게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