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의 휘(諱)는 천계(天啓)니 판도판서(版圖判書)요,
배(配)는 창원 황씨(昌原 黃氏)니 사헌규정(司憲糾正) 군석(君碩)의 녀(女)이다.
증조부는 휘(諱) 지흥(之興)이니, 고려후기 문과계림부 참군, 증 참지정사를 지내셨다.
고조부는 휘(諱) 희(禧)니, 밀직사 삼사 좌윤이셨다.
1395년(을해년) 조선 태조 4년에 태어나셔서
출사(出仕)는 아니하셨고, 어계선생의 유년기에 일찍 별세하셨다.
돌아가신 해를 알수 없으며,
생육신(生六臣)중의 한분이신
정절공(貞節公) 조 려(趙 旅) 어계선생(漁溪先生)이 공(公)의 아들이며,
관직은 증(贈)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하셨다.
자세 한 이력과 행장(行狀)은, 고증(考證)키 어렵다.
묘소(墓所)와 선적(先蹟)은
공(公)의 묘소(墓所)는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신좌(辛坐)<하림재 묘역>에 있으며,
배위(配位) 숙인(淑人) 성산이씨(星山李氏) 묘(墓)도 신좌(辛坐)이며, 쌍분(雙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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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림(霞林)- 하림재(霞林齋) 시정공(寺正公) 추모지소(追慕之所)로.
매년 음력 10월 11일 오전에 시정공 묘사를 지내고 있다.
시정공(寺正公)의 제각(祭閣)인 하림재(霞林齋)는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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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산 87번지에 위치한 묘역(墓域)에는
조선 단종임금때 생육신의 한 분이신 어계 조려 선생의 부친인 조 안 묘를 비롯하여
장자 동호와 그의 자(子) 장자 순(舜), 여섯째 건(騫), 건(騫)의 자(子) 정견(庭堅) 등
4대에 걸쳐 5부부의 묘(墓)가 있다.
이 묘역은 조선조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사대부의 가족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묘지 배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1977년 6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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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조씨 전설- 보검탈갑(寶劍脫匣)
어계선조님의 친부(親父)이신 시정공(寺正公) 諱 安, 贈 司僕寺正, 墓 西山 下林洞 辛坐上下兆)
이 묘소 일대를 하림에서는 부상등(父喪嶝: 어버이 장사를 모신 산등이라 口傳되어 오고 있다)
전 묘역을 둘러싼 환송(環松)을 합한 산등이는 줄잡아 만여평이 될 것이고,
시정공묘소를 상,하로 하여 10여분의 묘분을 둘러싼 잔디밭도 어림잡아 2000여 평이 됨직하다.
묘소마다 놓여진 바위만한 크기의 상석(床石)들과 옥으로 빚어진 듯한 아름드리 비석(碑石)들이
수백년 전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 되었는지 아랑곳 없이 백일홍 옆에 자리한 진귀한 말(馬)모양의
수석상(獸石像: 현재는 도굴되어 없어졌음)을 동무 삼아 그 등을 타기도 하였는데.
수 많은 지사들이 방문하여, 묘역을 보고는 맹호출림(猛虎出林) 형국이지요 하며,
그기에는 다분히 항설(巷說)로 금낭(金囊), 청오(靑烏), 등 장경(葬經) 에 통안(通眼)이셨다고
알려져 온 '어계선조' 님을 사숙(私淑)해 오고 잇었던 것 같았다.
이 묘역은 생육신 어계선생님의 선부되시는 시정공님의 분묘를 비롯하여,
그 후사 봉분들이 안장되어 계신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어계선조님 께서는 친히 선부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택묘(擇墓)하신
여기 혈형(穴形)은 "보검탈갑(寶劍脫匣)"이라고 하셨다.
" 보배로운 칼이 칼집에서 빼어져 나온 격이요,
그 칼날위에 소장하셨기에 배례하지 못하도록 돌로 담을 둘러 표시를 해 놓았노라." 고 하시고는,
" 칼날 위에 목을 대면 목숨이 위태로워 진다는 이치" 라 하셨다.
묘에 절하면 죽는다 ? 는 구전의 전설이 전 해져 오고 있다.
후세의 많은 일가들과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선산에 얽힌 이야기가
그 일화속의 지혈형국 에 대한 것은
현조 정절공께서 당신의 소묘 이후 발복으로 ' 자손만대 창성'을 예고하셨고,
복지원 하림(福地院 下林)으로 천거(遷居)하시어 새 터를 잡으시면서
이후 후손들이 다시 번창해 나갈 길지를 지정하여
명문화해 둘 정도로 높으신 신안(神眼)과
후손(後孫) 명복에 각별 하신 분께서
하필 당신의 친부(親父) 묘혈(墓穴)이
'보검탈갑' 의 형국인가 싶어 그러하신 것이라 하는데 !
지사 육관 손석우는 그의 저서 <터>(상권 답게사, 1994년 207 p) 에서
풍수지리(風水地里)란
'우주 자연의 위대한 조화를 이탈하고,
하늘이 정해 놓은 운명까지도 바꾸어 버리는것(奪神功, 改天命)' 이라고 했다.
600여 년전 이나라 강토에는 금은보옥과 비길수 없는 명지가
허다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황후장상의 명복을 길이 누리는 염승지(厭勝地: 땅이 사람에게 미치는 힘)가
어계선조님의 신안(神眼)으로 어찌 하나 둘 이었으리오만,
홍곡단풍(鴻谷丹楓), 금계포란(金鷄抱卵), 상운봉일 (祥雲奉日),
금오탁시(金烏啄屍), 비학(飛鶴), 지주형국(蜘蛛形局) 등등을 외면하시고,
'보검탈갑' 형국을 택(澤)하심이여 !
생각컨데 현조께서는 점혈(占穴)에 있어 무욕대복(無慾大福)이요,
무위최귀(無位最貴) 인 것이 아닌 가 싶어 머리 숙이며 흡열(恰悅)해진다.
'보검탈갑' 의 관혈(關穴),
그것은 분명히 조선조에 있어 사대부가를 결정짓는 사절환에서
'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보검은 칼집에서 나왔을 때만이 그 본분을 수행할수 있다 하겠다,
따라서 탈갑의 요건은 이미 보검 으로써 유용함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거늘
이 보금은 장차 어떤 운용함이 겠는가 ? 하는 것이 관권 이렷다.
칼날은 분명 현실 세계에서의 진,선과 정의의 미를 위해
척사현정(斥邪顯正)을 쾌도난마 (快刀亂麻) 하는 것에 그 사명과 명분이 있지 않겠는가 ?
왕후장상 그 들이 백성과 나라의 대의를 외면하는 일을 일깨우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헌신적 의절을 오히려 숭앙케 하고,
현학문사의 곡필에 차라리 직필의 의절로서
한 몸 바쳐 가문과 사회와 국가를 보위하는 장한 후손 두기를
당신께서 진심으로 발원하는 뜻이
여기 있지 않았는가 감히 추념해 보는 것이다.
- 이렇듯 바로 보이지 않는 '보검탈갑' 의 유훈은
조선조 500년과 이후 오늘까지 후손들은 지켜오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사절환중 특히 절의를 소중히 여겨셨던 함조(咸趙)선조들의 행적과 업록을 살펴보면
그 맥락은 여지없이 현재까지도 지속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다.
학덕과 인품, 지략에서 자타가 공감하는 위상에 있으면서
그 명예와 지위에 연연하기 보다 의리나 절도를 중히 여겨
징사(徵士: 학덕이 출충한 자에게 임금이 벼슬을 내려 부르는 것)에도,
과만(瓜滿: 停年) 전에도 굳이 사양하거나,
아함곡세(阿含曲世)에 광정직언(匡正直言) 후
일고의 미련도 없이 귀향하거나 유배 또는 투옥의 길을 택했음을
후손들조차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 허다함이라 그러하다
타관에서망향을 가슴에 담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련만
선묘하에서 선조의 위상과 그 얼이 뇌리에 각인되고 혈관에 흘러
자국마다 족적이 흥건한 사람은 향수 또한 각별하지 않은가 싶다.
일가는 백대 치친(百代之親)이라는 전래의 풍습이 마음에 서린탓이러니 와
함조 족친이면 초면 이면서도 지친인 듯
손 잡고 내밀을 나누어도 될것 같은 친밀함이 앞서고,
항렬따라 통호유서(通呼有序)하고 내 집에 숙식이라도 청하고 싶은 정분이
절로 우러나는 것이 비단 나만의 일일런지
모르겠지만, 선조의 행적을 생각하며
나름대로의 서산대사 선시인 답설(五言絶句)를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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