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나 2: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34번째, ‘테쿠나, 저축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나누겠습니다.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라고 합니다.
‘저축한 것’은 ‘테쿠나’고요, 이게 원래 뜻은 ‘배열, 준비’ 이런 의미고요. 그리고 ‘무한하다’는 건 ‘아인 카체’ 라고 ‘아인’은 부정불변화사죠, 그래서 부정의 의미가 있는 그런 단어고요, 그래서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다’ 이런 의미고, 카체, ‘카체’가 ‘끝, 경계, 종말’ 이런 의미죠, 그래서 ‘끝이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니느웨 성의 보물을 노략하는 그런 과정이 있죠. 근데 성 안의 보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무한하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하는 거죠, 보물을 뜻하는 이 ‘저축한 것’이라는 말이 ‘테쿠나’인데 이거는 구약 성경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 이따가 살펴 보겠지만, 에스겔서에 한 번 또 나오는데 이때는 성전의 식양, 배열, 구조, 이런 거를 묘사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훔서 본문에서도 '테쿠나'는 미리 준비된 거다, 배열된 거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거죠.
그러니까 니느웨성에 들어갔는데 이 앗수르가 약탈하고 모은 보물들이 어딘가에 잘 준비돼 있다는, 차곡차곡 쌓아놨다라는 거죠, 무수한 보물들이 막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창고에 막 뒤죽박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잘 배열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보물 창고라는 거 자체도 어마어마하게 크겠고 그리고 니느웨가 그동안 약탈한 보물들을 잘 관리했다라는 의미도 되죠. 그러니까 그 재물들, 보물들, 약탈한 그것들을 잘 정리해서 보관했다라고 하는 거는, 내가 이것들을 계속 잘 관리하고 내 걸로 잘 삼아서 지켜가겠다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부귀와 권세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때가 되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생긴 거죠. 그래서 자기와는 무관한 것들이 되어버린 거죠. 그렇게 오랫동안 애쓰게 모았던 것들이, 이게 우리 인생도 이와 같겠죠, 영원한 것이 없다는 걸 분명히 우리가 알아요. 그렇지만은 우리가 막상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냔 말이에요. 내가 이 땅을 떠난다,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떠나야 된다라는 거를 머리로는 알지만 내가 정말로 그러한 때를 기다리고 있고, 그러한 때가 올 것이라는 걸 믿고 있느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또한 이 앗수르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면서 내가 가진 것들 소유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고 잘 정리하고 그것들을 내가 관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거죠.잠시 하나님이 어떤 교육의 재료로 허락하신 그 파님에 대해서, 그 속에 담아주신 뜻을 알기보다는, 그것들을 소유하는 거에 더 관심이 많고, 그것들을 끝까지 붙잡는단 말이죠. 나의 마지막 날이 마지막 때가 온다는 걸 그걸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냔 말이죠. 내가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질 존재다라는 거, 땅에서 떠나야 하는 존재라는 거를 인정하지 못한다니까요. 말기암 환자한테 가서 물어봐도 자기는 꼭 나아서 건강한 몸으로 나갈 거라고 하지 절대로 자기 죽는다는 얘기 안 해요, 인정하지 않는다니까요, 자기의 종말, 끝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은.
물론 죽음의 의미 자체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하는 거고, 우리 육의 죽음은 그걸 가르쳐주는 교육의 재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타난 것들, 보이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교육의 재료인 거예요. 그래서 죽음조차도, 그 십자가 죽음을 가르쳐주는 교재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온전하게 죽지 않으면 이 땅에서 눈을 돌리는 것조차도 어렵다는 거죠. 온전한 하나님 나라로의 귀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어떤 뜻 가운데서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온전하게 알지 못하면은 그것조차도 가능하지가 않은 거죠, 끝까지 연연한단 말이에요.이 땅의 것, 눈에 보이는 것, 그걸 내가 가지려고 하면 그게 나의 소유가 된단 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걸 실제라고 믿잖아요, 그러면 그것들이 물질이 가치를 갖게 되는 거고, 그것들을 가치를 환산해 놓은 게 돈이잖아요. 그래서 돈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을 사랑한다의 의미는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본다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금욕 생활을 했지만, 그들을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거란 말이죠. ‘저축한 것’, ‘테쿠나’라고 해요. 여기에 에스겔서에 한 번 더 나온다고 했죠. 에스겔서 43장 11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겔 43: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예, 여기서 ‘구조’가 ‘테쿠나’라고 해요.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칼람’, ‘수치를 당한다, 부끄러워한다’ 하는 건데 이 죄를 깨닫는 거죠,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거예요.그러면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출입하는 것과 모든 형상을 보이며’라고 해요. 성전의 형식은 겉으로 주어진 말씀, 그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성전은 우리에게 보이는 걸로 주신 말씀인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죄를 깨닫는 거는 결국 율법에 의해서 죄를 깨달아요, 그래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어떤 뜻 가운데 그것까지 알게 되는 거죠.
성전은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천국의 진리를 담고 있죠.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출입하는 것과, 모든 형상, 이것들이 전부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들이란 말이죠.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성막을 짓게 하셨고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성전을 짓게 하셨죠. 그게 전부 내 안에 만들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죠. 성도가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고, 하나님 나라가 곧 성전이란 말이죠.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란 말이에요, 사랑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를 죽여서 자기 백성 살리는 사랑, 그걸 담고 있는 거예요 전부. 그러니까 성전이나 성막이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이 다 그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 진리를 담은 게 성전이라면 내가 성전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건 바로 그거란 말이죠. 십일조라고 하죠, 하나님은 모든 말씀 그 말씀을 열의 계명에 담았잖아요.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고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세요, 그래서 모든 말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그리고 제시하시는 모든 것들이 말씀인데, 그 말씀을 ‘다바르’, ‘말, 일, 사건’이에요, 그게 말씀으로 보이면은 말씀인 거고, 말씀으로 안 보이면 일로, 사건으로, 보인다고 했죠.
'말씀을 말씀하여 이르시는데', ‘레 아마르’라고해요, ‘아마르’, ‘말씀’을 하는데 진리로 말씀하는 거예요. ‘레’라는 전치사가 앞에 있어요. 이게 ‘~을 위하여’에요, 그러니까 진리로 말씀하시기 위하여, 다바르,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니까 시내산은 산이잖아요, 성전인 거고 지금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모든 게 말씀이고, 하나님이 성전된 우리에게 시내산에서 말씀하시는 건, 성전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마르로,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다바르로, 형식으로, 식양으로, 제도로, 규례로, 율법으로, 가르쳐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하늘의 진리는 땅인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율법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땅인 우리에게 오시면, 말씀은 육신이 되어 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땅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그 다바르가 일로, 사건으로,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1차적으로 감지가 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성도가 그 일들, 사건들을, 말씀으로 받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예, 보이는 거 나타난 것들이 전부 말씀으로 깨달아지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되는 거죠. ‘규례’, ‘훅카’라고 해요, 그리고 ‘법도’, ‘추라’라고 해요, 이 ‘형태, 형상, 모양’이라고 하는데 앞에서 제도라고 한 말과도 같은 거고 율례, ‘율례’는 ‘토라’라고 해요. 그걸 ‘알게 하라’라고 해요. ‘야다’의 히필 명령형이에요, ‘알게 하라, 깨닫게 하라’ 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게 아니라, 알게 해 주시는 분에 의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전의 모든 것들, 제도, 구조, 출입, 형상, 이런 것들은 뭔가 엄격하게 성전을 가르쳐주시고 그것대로 잘 짓고 그걸 잘 준수해야 된다, 지켜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말씀해 주신 대로 만들으라고 하셨으니까, 그래서 그것처럼 또 말씀을 주시면 법도와 율례를 잘 준수해야 된다 이렇게 들리지만, 결국은 성전은 우리란 말이에요, 성전된 우리에게 알아야 할 하나의 진리, 진리는 십일조, 그 십자가란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그 은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란 말이죠. 출애굽기 15장 25절 합독시겠습니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다'는 말이에요, 처음 성경에서 정하시는 모습이죠.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법도와 율례를 정하는데 나무를 가리킨단 말이에요. ‘가리키셨다’는 말은 ‘야라’라고 해요, 야라, 야라인데 이게 야라가 ‘던지다’라는 뜻이 있어요, 가르치다는 뜻도 있는데, 던지다는 뜻이에요, 가리키다라고 하는데 던지게 하셨다는 거예요. 모든 율례, ‘율례’라고 할 때 그 ‘토라’ 라 했잖아요, 이게 야라에서 온 말이에요, 야라에서 온 게 토라예요. 그러니까 가르쳐주시는 가르침이 토라인데, 토라의 가르침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그 십일조로 수렴되는 거죠. 그 토라를 율법이라고 하고 모세오경 전체를 토라라고도 하는데, 그 가르쳐주시는 내용은 나무란 말이에요, 한 나무.
십자가, 하나 되게 하는 십자가, 그러니까 쓴물인 우리 안에 나무, 그 십자가가 던져진단 말이에요. 십자가가 던져진다는 거는 우리가 십자가 진리를 알게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를 우리에게 야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던지는데, 가르쳐주시고,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진리가 쓴물인, 율법인, 우리 안에 던져지면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단물이 되는 거죠.
‘그가 물에 던지니’ 던지라고 하니까 물에 던져요, 이때는 ‘샬라크’라고 해요. 하나님이 던지라고 하시니까 던졌는데 이 샬라크는 ‘내 던지다, 집어던지다’는 뜻이에요. 그 나무, 예수란 말이에요, 예수를 집어던져서 죽여버리는 거예요. 창세기 보면은 요셉을 형제들이 ‘구덩이에 던지자’라고 한단 말이에요. 우리 안에 나무가 십자가 수난을 받으면서 던져지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신다'라고 하는데, ‘법도’가 ‘호크’예요, 호크. 아까 ‘규례’가 ‘훅카’라고 했죠, 같은 거예요. 호크의 여성형이 훅카예요. 그리고 율례, 율례는 ‘미쉬파트’인데 이건 ‘심판’이라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심판은 ‘가르침’이라고 했잖아요. 이 미쉬파트란 말 자체가 ‘샤파트’에서 온 말이고, 샤파트 앞에 ‘멤’이 붙은 거죠,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샤파트 앞에 멤이 붙었는데 멤은 ‘말씀’이잖아요, 말씀, 진리, 그러니까 말씀 진리로 다스리고, 통치하는 거, 이게 ‘미쉬파트’, ‘심판’이라고 하는 거예요.
심판은 하나님이 너 죄 지었으니까 지옥 가라고 하는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알려고 하는 이 진리 알아야지 하면서 가르쳐주시는 거, 그걸 미쉬파트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게 심판이에요. 성도에게 심판은 가르침이란 말이에요. 그 의미를 모르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성도는 그 의미를 알고 감사에게 받는 거예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미쉬파트, 심판이 오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처벌처럼 느껴지지만 성도에게는 가르침으로 깨달아진단 말이에요.
70십인역에서, 지금 법도와 율례라고 하는데 호크와 미쉬파트, 이 법도와 율례라고 쓴 호크와 미쉬파트의 역어로 쓰이는 단어가 한 단어가 있어요, 한 단어가 이 두 단어에 역어로 다 쓰여요, 그게 뭐냐면은 ‘디카이오마’예요. 로마서 5장 18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롬 5:18) 그런 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라고 하는데, 여기에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 오역이에요. ‘많은’이 아니고 ‘모든’이에요, ‘파스’. 많은은 대다수고 아닌 사람도 있는 거고 이렇게 되지만, ‘all’이란 말이에요. 파스,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 영어 성경에서도 전부, ‘all men’이라고 해요, ‘모든 사람들’ 이렇게 되는데, 이게 선악과 사건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걸로 인해서 ‘그 범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된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모든 사람이, 파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의로운 행위, 디카이오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디카이오시스,‘의롭다 하심, 칭의’를 받았단 말이에요. 예,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디카이오시스, 의롭다, 의롭게 되었다라고 칭의를 해 주시는 거죠. 그래서 생명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게 뭐예요? 그렇죠,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그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우리가 전부 의롭게 되는 그러한 일이 있는 거죠.
근데 모든 사람을 왜 많은 사람으로 우리 성경은 번역했을까요?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데 영어에서는 전부 all이라고 했는데 왜 우리 성경만 많은이라고 했을까, 좀 의아할 수가 있는데, 이게 번역자가 염려를 하신 것 같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별걸 다 걱정하는 거죠. 만인 구원론인가,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성경은 분명히 이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나? 이렇게 볼 수도,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많은 사람, 이렇게 의역을 한 것 같아요. 이게 ‘파스 안드로포스’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라는 게 성경에서 사람은, 성경에 들어온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사람 아닌 사람은 ‘짐승’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짐승도 나중에는 때가 되면은 단계를 거쳐서 사람이 되지만 우리가 전부 짐승이었잖아요. 이성 없는 짐승, 어쨌든 사람이라고 하는 거는 ‘이쉬’란 말이에요, 이쉬. 하나님의 어떤 뜻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자가 되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건 원래 하나님 말씀이고, 드러난 거 나타난 거 그 속에는 하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데 근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형식으로 볼 때는 뭔가를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오해하기가 쉽죠. 왜냐하면 성경은 뭔가를 하라, 하지 말라, 이렇게 그런 형식으로 돼 있으니까, 뭔가를 많이 하게끔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전부 십자가의 은혜, 디카이오마 요거를 깨닫지 못하면은, 그걸로만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율법적인 행위, 그것 때문에 많이 짐을 지고 가는 경우가 있는 거죠. 근데 나타난 말씀 속에는 전부 가르쳐주시는 뜻이 있는 거죠. 그 뜻은 전부 진리란 말이에요, 십자가 은혜 가르쳐주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나타내 주신 거 그 파임들 그것들과 그것들은 물론이고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의 형식으로 주신 모든 말씀까지도, 그것들은 전부 십자가의 은혜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걸 가르쳐주는데 우리가 보이는 대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뭘 하라 하지 말라 이렇게 보이는 것 같은데, 전부 그 속에는 그 내용이 들어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거 찾아가고 있는 중이잖아요. 그 말씀 속에는 어떤 진리가, 어떤 은혜가, 담겨 있는가, 그거 찾고 있잖아요. 결국은 그 은혜를 발견하는 자인 거죠, 성도는. 그렇게 발견하도록 하나님이 이끌어가신단 말이에요, 끌어가시는데 그걸 우리 성경에서 ‘율법의 요구’라고 한다고 했죠. 로마서 8장 4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이’성도’란 말이에요. 행하는 거는 행위를 하라는 게 아니라 ‘페리파테오’예요, ‘가라’는 거예요, 십자가 지고 주님 따라서 가는 거예요. 그러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라고 하는데 이 요구가 율법은 ‘노모스’죠. ‘호 디카이오마 호 노머스’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의 디카이오마, 그 의로운 행동, 그러니까 ‘디카이오마’에는 ‘규정, 법령, 의로운 행동’ 이런 의미가 있어요.그러니까 ‘디카이오마’는 ‘법이면서 율법처럼 보이면서, 그 안에는 또 의로운 행동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 의미 자체가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 안에 십자가 진리 들어있다’라고 가르쳐주시는 단어이기도 한 거예요, 디카이오마가.
(욥 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라고 해요.
‘발견한다’는 말은 ‘마차’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라고 하는데 ‘나아간다’는 말은 ‘보’고요. 처소에 나간다는데 ‘처소에는’ ‘아드 테쿠나’라고 해요. 테쿠나, 테쿠나 앞에서 나왔었죠, ‘저축한 것’이라고 할 때 ‘배열, 준비’라는 뜻이라고 했잖아요. 성경에 두 번 나온다고 했는데 한 번 더 나왔죠. 이게 뭐냐면은 스트롱코드가 달라요. 우리가 앞에서 본 두 가지는 8,498이에요, 8,498번의 테쿠나고, 지금 이 욥기에 나오는 테쿠나는 8,499번이에요. 근데 차이를 모르겠어요, 똑같아요, 자음 똑같고 모음 똑같고 뜻도 똑같아요, 배열, 준비, 똑같단 말이에요. 다만 고정된 장소라는 뜻이 하나 더 들어 있는데, 고정된 장소라는 의미에서 ‘처소’라고 우리 성경이 번역을 한 거죠.
근데 처소라고 번역을 했는데 개혁 성경에서는 보좌라고 해요, ‘보좌’. ‘준비된 것, 고정된 것’ 이런 의미라고 하는데 분명치는 않죠. 그렇지만 ‘나아간다’라고 했을 때는 보좌의 의미가 있는 거죠, 하나님의 보좌, ‘아드’, ‘~까지’니까, 하나님의 보좌라고 해도 무방하죠. 그렇지만 본래 의미가 배열, 준비, 이런 의미니까 지금 번역자가 보좌까지 가기에는 좀 부담을 느꼈는지 처소라고 번역을 한 거예요, 이거는 후퇴한 거예요, 약간 의미를 무난하게 만들려고 한 거예요. 이 ‘테쿠나’라는 단어가 조금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 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 성경의 용례를 보면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아요. 이걸 좀 의미를 좀 분석해 보자면 테쿠나라는 단어는 ‘쿤’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쿤. ‘쿤’이 뭐냐면 ‘준비하다, 확립하다, 고정하다, 확고하다’ 이런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명사화하니까 준비, 그리고 고정된 것, 배열 , 이런 의미가 나온 거죠. 창세기 43장 16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예,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라고 하는데, 이게 원문으로 보면은 그리고 ‘라 요세프 에트 빈냐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라’가 ‘보다’는 거죠, 그러니까 요셉이, 요셉이 ‘에트 빈냐민’이라고 해요,‘에트’가 목적격을 가르쳐주는 전치사죠. 그래서 ‘벤냐민을’ 이라고 번역을 해야 돼요, ‘베냐민을 봤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그 사이에 뭐가 있냐면, ‘그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에탐’이라고 해요. ‘에트’에다가 3인칭 남성 복수가 붙어 갖고 ‘에탐’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들과 함께’, 이때는 베냐민 앞에 붙은 대격 불변사가 아니라 ‘~와 함께’라는 뜻이에요, 이게 스트롱코드가 좀 다르죠.
그러니까 그들과 함께 있는 베냐민을 본 거예요, 요셉이 벤냐민을 봤는데, 그들과 함께 있는 벤냐민을 본거에요. ‘벤냐민’이라는 말 자체는 ‘벤과 야민’이죠, 그래서 ‘야민’이 ‘오른손, 오른편’이에요. 그러니까 이 오른손 오른편 이거는 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옳다는 거죠.
옳음, 진리를 뜻하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 뭐 이렇게 하기도 하는데 옳음, 진리의 의미예요. 그래서 우편 강도,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거는 오른쪽 왼쪽의 구분을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보이는 거, 나타난 거, 여기에 머물면 우리가 강도란 말이에요. 근데 보이는 거, 나타난 것을 그대로 보고 있으면 진리가 아니죠, 그러면 왼편 강도인 거에요. 그리고 그 나타난 것들로 보이지 않는 나라, 그 진리를 복음을 깨달으면 그래서 깨닫게 해 주셔서 깨닫게 되면, 그러면 우편 강도가 되는 거예요. 옳음의 강도, 진리의 강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강도인 거는 변함이 없고, 십자가에 박혀서 죽는 것도 변함이 없고, 다만 표현을 우측 강도, 좌측 강도, 이렇게 해주는데 아느냐, 모르느냐, 그 차이만 있는 거에요, 성도가
(창 35: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혼이 떠나려 할 때 '혼'은 '네페쉬'이에요. '네페쉬'는 혼이 아니라 '육적인 목숨'이라고 했죠, 육적인 목숨이 죽게 되었다, '키무트'. 키무트라고요. 이거는 뭐냐 하면 '왜냐하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죽을 때가 돼서 이렇게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네페쉬가 떠났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육적인 목숨이 떠나요. '무트' '진리'의 완성이잖아요, 진리가 깨달아지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으면 죽는 게 무트잖아요. 죽었기 때문에 네페쉬가 '야차' '나갔다'라고 하는 거예요. 네페쉬는 육적인 목숨이니까 네페쉬가 떠나면 영이 되는 거죠, '루아흐'. 영의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영이 아닌 존재 루아흐, 루아흐는 진리니까 진리를 깨달으면 영의 사람이 되는데, 깨닫지 못하면 그건 '네페쉬' 상태인 거죠. 진리의 죽음, 무트 타무트의 죽음을 죽으면. 그러니까 네페쉬가 떠난 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이제 루아흐가 오신 게 되는 거죠.
성경은 전부 내 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내 안의 일이 전부 네페쉬와 루아흐의 일인 거란 말이에요.내가 하나님의 뜻, 진리를 깨달으면 루아흐고 아니면 내 뜻이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무트타무트, 십자가에 죽음을 죽으면, 진리의 완성을 죽으면 그러면 루아흐가 되는 거죠. 라헬이 죽었다는 거죠, 무트. '라헬'은 '암양'이잖아요, 암양. 글자가 같아요. 스트롱 코드가 하나 차이가 있는데 이 라헬은 암양의 의미예요.그러니까 암양이 죽으면 씨는 숫양이 되는 거죠. 라헬이 죽을 때 '베노니'라고 해요,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는 거죠. '벤'과 '아웬'이라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아웬'은 '고통, 불행' 이런 의미고 '헛됨, 거짓, 사악'도 있는데, 아웬의 일인칭 소유격이 결합이 되니까 '오니'가 된 거예요. 그리고 벤과 합쳐져서 '벤오니'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고통의 아들, 나의 불행의 아들' 그런 의미죠.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야곱인데 야곱이란 말은 안 해요. 굳이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이게 옳다라고 하는 거예요. 베냐민, 이 아들이 옳은 아들이다, 진리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네페쉬가 떠나면 루아흐가 오는 거고 베노니가, '베노니' '나의 슬픔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진리의 죽음을 죽으면 그 베노니가 베냐민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그러니까 베노니와 베냐민은 예수와 그리스도인 거예요. 둘이 짝인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무 다무해주고 그걸 죽는 게 부활인 거예요, 베냐민, 진리의 아들로의 부활.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거고 그게 이제 죽고 부활하는 일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네페쉬가 죽는다 이러면 괴로워하잖아요, 슬퍼하잖아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다니 이러면서 슬퍼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맞다라고 하는 거예요. 죽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 나의 그 네페쉬, 내가 가진 그 육적인 목숨, 소유까지 부모, 자식, 형제자매, 전토 그리고 나의 목숨까지 모든 것 그 안에 다 들어있단 말이에요. 나의 모든 것, 내가 두 마음으로 판단해서 이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게 나의 가짜 생명이잖아요. 그 목숨 버려야 된다라고 하잖아요. 그거 버리는 게 슬픈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맞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옳다 진리다'라고 하는 거예요.
요셉이 베냐민을 보는데 '그들과 함께 보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요셉의 형제들인데 요셉이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하라'라고 하죠. 이 사람들이라고 할 때 '에노쉬'라고 해요, '에노쉬 하 아나심'이라고 하는데 하아나심 에노씨예요. 원형인 이 사람들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까 '이쉬'가 있었다고 했죠. 에노쉬와 이쉬도 이제 베노니와 베냐민의 관계인 거예요.'에노쉬'가 '아나쉬'에서 왔다고 했죠, '병들다, 고칠 수 없는, 지독하게 악한, 슬픔, 비참한' 이러한 존재라는 거예요. 우리가 원래 이러한 존재예요. 그러니까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는 걸 봤다'라는 말은 '진리의 아들이 율법과 함께 있다'는 얘기인 거예요. 진리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아직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하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 명의 아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성경 전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에요. 내가 진리의 아들이 됐는가 아닌가, 베냐민이 됐는가 아닌가, 그거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이 사람들’ ‘이 에노시’들을 모두 싸잡아, ‘싸잡아서’ ‘에노시’라고 한단 말이에요. 베냐민까지 다 합쳐서 이 사람들을 다 하나란 말이에요,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짚으로 지은 성전이잖아요. 성전으로 ‘보’ ‘들어오게’ 하라. 성전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들어오게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테바흐’ ‘도살’이에요, 도살의 짐승. 그리고 이 짐승을 ‘타바흐하라’라고 ‘도살하라’라고 하는 거예요, 도살의 짐승을 도살하라. 이 말은 ‘예수 죽여라. 희생 제물이신 그 예수 죽여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쿤’ ‘준비하라’고, ‘이게 준비다’라고 하는 것이죠, ‘준비하고 확보하고 확립하고 확정하는’ 거죠. 이게 준비하는 거고 확정하는 거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확정한 거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면 죽는 거란 말이 그걸 준비하고 확정했다라고 하는거죠.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해요. ‘에노쉬’들이 ‘정오’에 ‘초하르’라고 했죠, 초하르. 그러니까 가장 밝은 때, 빛이 밝은 때, 진리의 빛이 가장 밝게 비치는 때가 ‘초하르’ ‘정오’고, ‘그때 진리의 양식을 내가 함께 먹는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에노쉬’가 진리를 깨닫고 ‘이쉬’가 되는 거고, 온전한 아들, 그 진리의 아들 베냐민이 되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이 준비하고 확정하신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에노쉬에서 베냐민이 되는 그 구원을 가르쳐주는 그런 일인 거예요.
그 잔치 자리에서 풀려나는 자가 있죠? 붙잡혀 있다가,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는 자, 시몬이 풀려나죠.예 ‘쉬므온’, ‘들음’이라는 뜻이에요. ‘샤마’에서 온 이름이에요. ‘형제들 중에서 시몬이 붙잡혀 있었다’라고 하는 거는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나에게서 들을 귀 없는 그 귀, 들음, 들음을 붙잡아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차압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거 뺏어가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나에게서. 그리고 시몬을 풀어준단 말이에요. 풀어주는 건 뭐예요? 이제 진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라고 하는 거죠. 그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냐면 시몬 베드로가 되는 거란 말이죠. 시몬, 시몬이란 말이에요. ‘베드로’ ‘반석’. 말씀을 짠돌로 받아갖고 다른 사람 귀를 자르던 자였잖아요. 그 들을 게 없는 그 귀, 그걸 가진 자였는데 그걸 진리 하나로 받아서 음과 금으로 이제 나누어 주는 자가 되잖아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이 진리, 눈에 보이는 그것들은, 그 보물들은 없지만, 참된 속전이시고 성령이신 예수 그리스도 내가 준다라고 하는, 그걸 나누어주는 자가 되는 거죠. 들을 수 있는 들음에 시몬 베드로가 되는 거죠. 출애굽기 15장 17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기업의 산에’, ‘나할라’ ‘상속받는 산’, 성전이죠. ‘산’은 ‘하르’. 성전에 ‘나타’ ‘심는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 천국을 주시고 그것이 우리가 받는 상속이고 유산이죠. 거기에 ‘주의 백성을 심는다’. 주의 백성을 심는대요, ‘심는다’는 말은 이게 ‘나무 심는다’는 거거든요, ‘나타’. 에덴에 선악을 아는 나무를 심었다, ‘나타’란 말이에요, ‘심는다’. 나무로 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무는 항상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로 심는다는 거예요, 주의 백성을. 그러니까 주의 백성은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거죠.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처소’는 여기서 ‘마콘’이라고 해요. 이게 ‘테쿠나’와 비슷한 거죠. ‘고정되거나 확정된 어떤 장소’를 뜻한단 말이에요. ‘쿤 하는 곳’, 쿤에다가 맴을 붙인 게 ‘마콘’이잖아요, ‘고정되거나 확정된 장소’. 아까 ‘테쿠나’가 ‘고정된 장소’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걸 ‘처소, 보좌’라고 번역이 됐었는데,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준비하는 곳이죠.
그리고 ‘예비하신 것’, 예비하신 것은 ‘파알’이라고 해요. ‘만드신 것’이에요, 만드신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그리고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세운다’는 말은 ‘쿤’, 쿤이고 그리고 ‘성소로소이다’ ‘미크다쉬’. ‘
카다쉬’의 곳이다. ‘카다쉬’가 ‘거룩하다, 성별하다’ 이런 뜻이죠. 거룩하게 성별하는 곳입니다라고 하는 거죠. 거룩하게 성별한다는 거는 십자가로 죽인다는 거예요. 제물로 죽여서 십자가에 죽여서 거룩하게 구별한다. 그래서 봉헌한다, 이게 '카다쉬'의 의미죠. 그렇게 봉헌하는 곳이 '미크다쉬' '성소'구요.
그 '주위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시고 손으로 세우시는 성소'는 그러니까 결국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는 하나님 백성, 우리 얘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성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먼저 죽으시고 그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부르고 인도해서 성소로 세워주시는, 이 일이 이미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준비되고 확정돼 있다, 이게 '테쿠나' '준비'의 의미인 거죠. 그 준비가 테쿠나. 그 테쿠나가 무한하다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준비가 '아인 카체' '끝이 없다'.하나님의 뜻은 영원이잖아요. 영원에서 시작해서 영원에서 완성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카체' '끝이 없는' 거죠, 영원이라는 거예요. 시간과 무관한 일이 영원의 일이에요, 끝이 없는 일이에요. 본문으로 가서요.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헤므나' 아름다움의 '갈망'에, '케리' '기구', 기구가 '카보드' '풍부하다, 영광이다'. 영광의 의미까지 있어요, 카보드가 영광 풍부의 의미가 있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4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호 13:14-15) 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 15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셰올'이라고 하죠, 이게 '죽은 자의 거처, 음부'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권세', '야드' '손'. '스올의 손에서, 권세에서, '파다' '속량'하고, 사망에서 '구속한다' '마웨트'. 무트타무트의 죽음이죠, '마웨트'. 죽음에서 '가알' '속량한다'는 건 '가알'이에요. 그래서 속량하다, 되 사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근친'이 '고엘'이잖아요, 고엘. 고엘을 하는 거를 '가알'이라고 하는 거죠.
(출 13: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대속한다'는 말 '파다'가 세 번 나오는데, '나귀'는 '하모르'죠. '붉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붉은 빛 짐승, 우리를 얘기해요. 첫 새끼는 장자잖아요, 장자는 율법이라고 했죠. 그 율법은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해라. 율법인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으신다, 이게 대속이잖아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우리의 목은 굳으니까 꺾여야 되는데 그 대신에 주님이 '고엘'이 돼 주셔서 구속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주님이 '고엘'이 되어 주셔서 구속해 준다라고 하시는 거죠.
'사망과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는데, 이 '사망' 사망은 '마웨트'라고 했죠.'네 재앙', 재앙은 '데베르'예요, 데베르. '역병, 페스트'라고 하는데 이게 '다바르'와 같은 글자죠, 다바르. 그러니까 말씀을 오해하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그 율법이, 율법이 역병인 거예요. 제대로 깨닫지 못한 말씀이 전부 재앙이고 역병이고 그렇게 되는 거죠.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데, '멸망'은 '코테브'고요.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 '뉘우침'은 '노함'이라고 해요, 노함. 이게 '나함'과 같은 글자죠. '슬픔, 회개'라고, 회개를 뜻하는 글자죠. 그래서 '내 눈앞에서', '민'이라는 전치사하고 '아인'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가 아니라 '내 눈으로부터'가 되는 거죠.눈은 진리잖아요. 그 진리로부터, 그러니까 진리로 인해서 '노함' '회개'가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거죠, 회개하게 된다. 이 구절은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거는 고린도전서 구절하고 비슷하죠.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해요.
'쏘는 거', 쏘는 것이 '켄트론'이라고 하는데 이게 '몰이 막대기'잖아요. 몰이 막대기로 목자가 양들이 다른 곳으로 가면 콕콕 찌르는 거죠. 그게 가르쳐주는 일인 거죠.
(전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찌르는 채찍' 이게 '도르본'이라고 해요, 도르본. 이게 '켄트론'이죠, 몰이 막대기. 그리고 '잘 박힌 못 같다'라고 하는데 이게 '심긴 못'을 뜻하는 거예요, 몰이 막대기. 몰이 막대기와 못이 나오는데 이게 십자가의 의미이면서, 몰이 막대기, 막대기는 십자가란 말이에요. 십자가로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거죠. 거기에 못이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박히시는 못인 거죠. 예, 그러니까 전부 진리의 말씀을 뜻하는 거고, 그건 '다 한 목자가 주신 바다'. '한 목자' '에하드' 그리고 '라아'의 분사형이죠. 그래서 '풀을 뜯기는 자, 친구가 되는 자' 그가 한 목자인 거죠. 하나 되게 하는 목자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신 거죠.
'그분이 주신 거다', '나탄' '주신 거'죠, '세워준 거다'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라고 주신 거예요. 그걸 주셨는데 그걸 알아먹으면 그건 나에게 주신 게 되는 거죠. 그 십자가 그게 진리란 말이죠. 그게 뭔지 알면 하나 되게 하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거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사망이 괴롭히는 게 아니라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에요. '네가 가르치는 거', 너의 십자가가 어디 있느냐,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니코스'라고 하죠.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거죠. '다나토스의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의 찌르는 막대기가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다나토스의 죽음이 승리하는데 '그 승리는 그 십자가에 있다'라고 하는 거죠. '십자가로 그 승리를 얻는다'라고 하는 거죠.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십자가에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거죠, 그걸 통과한 예수 그리스도.
돌아가서요.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라고 해요. '비록'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비록이라고 해석하기는 좀 애매해요. 이게 '키'라는 접속사가 있거든요, '왜냐하면'이잖아요. 그러니까 '형제 중에서 결실하기 때문이다'라고 앞에서 '사망한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랬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 뉘우침이 네 눈앞에서 숨으리라'라고 했잖아요. '그 진리로 인해서 회개하게 된다'라고 했죠. 거기에 대한 이유를 가르쳐주는 게 다음 구절인 거예요.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형제 중에서 결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형제 중에서 결실하는 자가 있었죠. 요셉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아들을 낳았잖아요, 두 아들을. 그 므낫세 잊혀지고 제거되어서, 제거된다는 거는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거죠.그리고 에브라임, 여기에 '파라' 파라인데 쌍수잖아요, 갑절이라는 거예요. '파라' '갑절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열매 맺기 때문에 그 뉘우침 회개가 일어나는 거다라고 가르쳐주는 거고요.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다'라고 해요. 광야에서 성령의 바람, 그 진리에 의해서 '그 쌓아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된다'라고 하는 거죠. '쌓아둔 바' 그러니까 우리가 소유라고 믿었던 것들, 의지했던 것들 그것들이 다 그 진리의 바람,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약탈된다. 약탈되는 게 빼앗기는 건데 그게 의미를 잃은 거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들의 의미를 아는 거죠. 그걸 알게 되면 그걸 빼앗긴다라고 하는 거예요, 약탈된다. 주님이 도둑으로 오셔서 뺏어주시는 게 우리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을 두 마음을 뺏어서 한마음으로 만들어 주시는 거죠.
'쌓아둔 바'라고 할 때 쌓아둔 바는 '오차르' '보물'이라고 그래요. 보물이라고도 하고 '창고'라고도 해요. 말라기서 3장 10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 십일조, 열의 계명이잖아요. 열의 계명을 하나로 아는 거, 아까 앞에서 말씀드렸죠. 진리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하나로 아는 거죠.
십일조를 '베타오차르'라고 했잖아요, '벧' '집, 성전'이고 그리고 '오차르' '보물'인데, '보물의 집, 보물의 성전'이 되는 거죠. 성전은 나니까 보물의 성전은 나란 말이에요, 보물이 담기는 성전인 나. 보물은, 보물은 뭐가 보물일까요? 예, 예수 그리스도. 보물이라는 거는 어떻게 보면 가치 중립적이에요. 여기는 이제 깨달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말라기서 마지막 부분에 '참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라'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보물의 집에, 보물의 성전, 원래 참된 보물이 담기는 성전인데 우리가 다른 걸 보물로 알고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거 손에 잡히는 거 이걸 보물로 알고 있죠. 히브리어에서는 '오차르'인데 이게 헬라어에서는 '데사우로스'라고, 이게 보물이라고도 하고 창고라고도 해요. 이게 오차르와 같은 말인 거죠. 마태복음 6장 19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데사우로스' '보물'을 이 '오차르'와 같은 의미라고 했죠. 그걸 땅에 '데사우리조' '쌓아두지 말라'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성도가 '베타 오차르' '보물의 성전'이잖아요.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담기는 성전인데 근데 십일조, 하늘의 진리 그 열의 말씀, 모든 말씀을 하나로 아는 게 십일조고 그래서 그걸 하나로 알면 성도 안에 그 진리가 들어오면 진리의 이제 성전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성도가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가 되는 거죠.자꾸 십일조로 내놓으라고 하는데 내놓아야 될 거는 진리의 성전이 되어서 그 진리가 담긴 성도 자신인 거예요. 그걸 내놓는 거예요. 그걸 이제 '쌓을 곳이 없게 해주겠다'라고 하는 거죠. 그걸 그 십일조를 내면 내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해주겠다, 진리를 깨달은 자 안에 생명의 양식이 넘치게 되는 거죠. 그 복을 받는 자인 거죠.
보물을 '땅에 쌓는다'는 말이 있고 '하늘에 쌓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보물인 거죠. 그 사람에게는 그게 또 진리가 되는 거예요. 눈에 가치 있게 보이는 것들, 그것들을 가치 있게 보게 되면 그것들의 가치를 매겨놓은 게 돈이니까 그 돈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거는 그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고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를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거죠.거기에서 이제 성도는 눈을 떼는 자죠. 그래서 이제 모든 것들을 하나로 보인자죠, '데사우루스'라고 하죠. 그 보물 그걸 '쌓는다' '데사우리조'라고 하는데, 그걸 쌓고 쌓으면 그 자체로 보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땅에 보물을 쌓느냐 하늘에 보물을 쌓느냐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열심히 쌓았더니 그것이 땅의 보물 하늘의 보물이라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땅이 되기도 하고 하늘이 되기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땅의 것들을 열심히 쌓았어요. 내가 주인이 돼서 땅의 것들 열심히 쌓고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눈에 보이는 것들 그것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고 모았단 말이에요. 끌어모았는데 그 저축한 것들이 전부 그것들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노략해 주시는 거죠, 다 털어가 주시는 거죠. 그 털어가 주시면 내가 사랑했던 것들, 내가 쌓고자 했던 것들이 사실은 하늘의 보물을 깨닫게 하기 위한 교육의 재료였구나 이걸 알게 되는 거죠.우리가 뭐가 능력이 있어가지고 '이거 아니군요'라고 손 털고 돌아설 능력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쳐주시는 거예요, 털어가 주시는 거예요. 뭔가를 통해서 어떤 일을 통해서 그것들을 다 털어주시면 거기에 집착했던 자기에게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능력 있는 자가 전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늘의 진리라는 보물을 쌓을 수가 있게 되는 자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걸 쌓게 되면 성도가 하늘이 되는 거죠. 하늘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진리의 보물을 담는 그 하늘이 되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이 된 내 안에 담고 그리고 간직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내가 하늘에 쌓이는 보물이 되는 거고 내가 보물과 하나가 되는 거죠. 성도는 그러한 자란 말이에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것들 땅의 보물 다 버릴 수 있게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일상에서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버리지 못했던 것들 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버린 그 우리 안에 하늘의 보물로 가득할 수 있도록 그 진리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진리 바르게 깨달아서 우리를 진리의 아들 베냐민으로 하늘로 만들어 주시고 하늘과 하나 되길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