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흐른다
채 바 다
《전하, 아니되옵니다》(번암 채제공평전 저자), 고대 해양탐험가
역사와 문화
청계천淸溪川은 북악과 인왕산 백운동에서 발원한 계류가 한양 도성 한 복판에서 삼청동천과 합류하여 물길이 힘을 얻은 다음 동쪽 방향으로 물길을 다잡고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청계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청계천은 도심을 관통한 다음 한강 본류와 합류하기 직전 중랑천과 만나는데 그 길이는 10.92 km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양은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를 뛰어 넘어서 세계적인 도시 서울로 도약하였다.
청계천 명칭은 ‘청풍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계천은 조선 태조 때에 양안을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나 폭우로 인하여 무너진 일이 있었다. 1406년 태종 때에는 장마로 큰 비가 내리자 개천 물이 넘쳐도성 한복판이 물바다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10년(태종 10년) 8월에 뚝과 방축을 쌓았다. 1412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청계천을 정비하여 양안에 석축을 쌓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토사가 유실되고 쌓여 하상이 높아지자 오간수문(현재 청계천 6가)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水標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2월에 하천을 정비하는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 을 설치하여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으로 연결하였다. 이곳은 정월 대보름에 다리 밟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알려 지고 있는데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1760년 영조 때 2월에 하천바닥을 정비하여 1773년 준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여서 오래전부터 쌓인 흙과 모래들을 준설하였는데 그 과정을 《준천사실》에 기록하고 있다.
청게천은 주민들이 버리는 분뇨와 오물 심지어 쥐, 고양이, 강아지 등 짐승의 죽은 시체를 비롯하여 죽은 유아의 시체까지도 밤중에 몰래 개천에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더욱 정도가 심해졌다. 이렇듯 개천에 오물, 모래, 자갈이 계속 쌓이게 되자 영조 때 대규모의 준설작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청계천
1773년 영조는 채제공을 대동하여 공사를 독려하였다. 한편에서는 준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영조의 결단으로 준설 공사를 어렵게 마무리 하였다. 준설 공사를 마치고 채제공은 일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설 작업을 단행한 영조의 결단과 공덕을 높이 찬양하는 〈준천가〉를 남겼다. 〈준천가〉는 칠언배율七言排律 형식의 40구 276자로
“…육칠월 도성에 장마라도 들면/ 땅위의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네/조정 대신들 의론이 분분할 때/ 성군의 결단은 명쾌하고 빠뜨림이 없었네/ 국고재정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장정들은 앞 다투어 떨쳐 나섰네/ 임금님 납시어 살피심에 피로를 모르는데/ 물은 옛길따라 어찌 그리 편하게 흐르는가/ 땅기운도 막힘없이 소통이 잘되네…”
濬川歌
天有銀河水 하늘에 은하수 있어
文采昭回九萬里 문채가 구만리 빛나고
地有淸渭水 땅에 맑은 위수가 있어
貫穿長安流不已 장안을 꿰뚫어 그치지 않고 흐르네
漢陽包絡大山川 한양은 큰 산천에 싸여
左祖右社萬年址 종묘사직 만년의 터전
衆水發源西北隅 뭇 물줄기 서북 모퉁이에서 발원하여
一道鋪練王城裏 왕도 안에 명주 하나 펼쳤네
五間鐵鎖束其東 오간 자물쇠는 그 동쪽을 묶어
開閉惟視衰盛水 여닫는 건 물의 성쇠를 본다
國初陶勻大費力 개국 초에 나라 다스림에 크게 힘을 써
虹橋十二晴空起 열두 홍예다리 맑은 공중에 일어났다
邇來定鼎四百載 그 이후로 도읍을 정한 지 사백 년
崩沙塌下無時止 모래 무너지고 떨어져 내려 무시로 그쳐
一經潦過增一閼 한번 큰물이 지면 막힘 한번 더해
厥坎往往平地似 그 구덩이 왕왕 평지 같았다
有時莊嶽六七月 이따금 장마 육칠 월
地上水高深沒膝 땅 위 물 높아 깊이 무릎을 빠지게 하여
廟議紛紛苦不齊 조정 의론 분분하여 같지 아니하자
聖斷揮霍無遺失 임금님 결단 재빨라 빠트림이 없네
府庫金帛散不計 창고의 재물 헤아리지 않고 흩뜨렸고
萬夫勇趨如箭疾 수많은 인부 용감하게 달려오는 게 화살같이 빨랐다
畚鍤騰騰直到底 삼태기질 가래질 떵떵 곧장 밑바닥에 이르러
標刻重出舊年月 표시 눈금이 다시 나온 건 옛 시간
移沙作阜高萬丈 모래 옮겨 언덕을 만들어 높이 만 길
大車小舟相磨戛 큰 수레 작은 배 잇닿아 부딪치네
鸞輿臨視不知疲 거둥하신 임금 내려다보니 피로한 줄 모르고
水順舊軌何秩秩 물은 옛 길에 순하여 어찌 차례 있는지
兩岸十里如弦直 양안 십리 활시위 같이 곧고
三營築石無虧缺 삼영이 돌을 쌓아 이지러진게 없네
澄波演漾蔭楊柳 맑은 물결 출렁출렁 버들에 그늘 지우고
灝氣虛明照城闕 천지 가득 청명한 달빛 성궐을 비춘다
豈徒邦人免墊溺 그래 나라 사람만 빠지는 걸 면하겠는가
惟應地氣善疏洩 응당 땅 기운도 잘 트일 것
夏禹鑿之我后濬 하나라 우임금이 뚫고 우리 임금이 쳤으니
事有大小功則一 일에는 크고 작은 게 있으나 그 공은 하나
聖世爲政可反三 성세의 정사는 유추할 수 있으니
隨處疏通兼導達 곳곳 소통되고 겸하여 의사를 드러낸다
美哉洋洋若不斷 훌륭하다! 성대히 흘러가 끊임없는 것 같으니
磐泰宗祊寧且謐 굳건한 종묘 편안하고도 고요하다.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는 중앙도서관에서 이를 발견해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번역본을 보고 “청계천 복원공사와 비교해볼 만한 중요한 사료”로써 “보기 드문 명문”이라며 “청계천 완공에 맞춰 원문과 번역문을 새겨 시민들에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게 됐다.
준천가는 조선 개국 초부터 영조 49년 석축 공사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 개천 역사를 매우 함축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작으로 오간수교(청계천 6가)에 그 내용을 금문으로 남겨놓을 수 있게 됐다. 준천가는 채제공의 수준 높은 시문을 통하여 당시 청계천의 주변환경과 정치 상황들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기념비적인 명작이다.
채제공은 누구인가
채제공蔡濟恭(호:번암樊巖, 1720년 5월 12일, 음력 4월 6일∼1799년 2월 22일, 음력 1월 18일)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남인 출신으로는 숙종 때 권대운(1612∼1699)의 정계 진출 이후 약 100년 만이었다. 15세에 향시에 급제하고 174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영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채제공은 국왕에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로 벼슬을 시작했다.
1753년(영조 29) 34세에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이의 폐단과 개선책을 보고하여 영조에게 미래의 재목으로 주목 받았다. 1758년(영조 34) 39세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영조가 내린 폐세자 비망기를 반납하여 반대파의 상소와 탄핵으로 수많은 시련에 부딪쳤다.
훗날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데 정당성을 제공한 중요한 인물로서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 서서 영정조 시대의 문예부흥과 성공시대를 이끈 명재상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신해통공辛亥通共
민간의 상업 활동을 허용하다
1791년 좌의정 채제공의 건의에 따라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금난전권이란 난전, 즉 민간 상인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동안 국가의 허락을 받은 시전들은 상업 활동을 독점하고 민간인이 사사로이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상업 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시로 흘러들어온 농촌 빈민들은 생계 수단으로 행상을 했는데, 시전들이 바로 이 금난전권을 내세워 이들의 생계를 위협함에 따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육의전을 제외하고는 시전들이 금난전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민간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중기 이래 발달해 왔던 조선의 상업은 한 단계 도약할 계기를 맞게 됐다.
1791년(정조 15)
요약 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시행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시전상인들만의 특권 상행위를 비시전상인들에게도 허용한 정책).
조선 후기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일반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일반 시전상인들만의 상행위 활동을 배타적으로 제한한 권한)을 폐지하여 비시전계(非市廛系)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상업정책이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 과정에서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이 부여되어 이들이 상품의 전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일부 난전상인을 비롯한 일반상인들도 새로운 시전을 조직,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18세기 경 도시의 상업계는 특권적 금난전권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강화는 도시의 경제 질서를 경화시키는 한편, 물가상승을 초래하여 영세상인 및 수공업자 그리고 도시빈민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
금난전권을 소유한 특권상인들은 노론계열의 벌열(閥閱:국가에 공로가 많거나 관작 경력이 많은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정계 벌열의 발호에 경제적 후원자역을 맡고 있었으므로, 금난전권의 유지는 탕평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저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를 보호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과 동시에 노론 벌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남인 집권층의 정치적 결정이 작용했다.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던 논의는 1764년(영조 40)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발매의 이론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통공발매론은 1787년(정조 11)에 일부 시행된바, 이를 정미통공(丁未通共)이라 한다.
그러나 통공발매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791년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에 의해서였다. 노론벌열에 대항하며 정조의 측근에서 탕평책의 시행을 지지하고 있던 그에 의하여 시행된 이 상업정책을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부른다. 이로써, 전통적인 육의전 상인을 제외한 일반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은 혁파되었으며, 도시내의 일반상인들은 금난전권의 저촉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해통공은 1794년에 실시된 갑인통공(甲寅通共)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통공정책이 실시된 이후 금난전권을 상실한 일반시전들은 금난전권을 다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아직도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는 육의전 속에 포함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세도정권 시기에 이르러 세도정권의 반동성에 편승해서 한때 금난전권을 다시 인정받은 사례도 있었지만, 통공발매 정책은 그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시전상인들이 통공발매 정책의 철폐를 요구한 것은 국가에서 그들에게 계속 각종 잡역의 부담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금난전권을 통한 특권적 이익의 확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해통공을 통하여 확인된 통공발매 정책의 시행으로 조선 후기 도시상업의 전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해통공은 신흥상인자본이 시전제도와 같은 보수적·특권적·봉건적 상업조직의 구각을 타파하고, 당시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하여 상업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봉건정부가 종래의 특권적 시전 체제로서는 새로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인(私商人)의 활동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는 한계에 달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준론(峻論 : 淸流를 자처하며 사대부의 의리와 명예 및 절개를 숭상하려는 노론계의 논리) 중심의 탕평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 아래 진행된 경제개혁 정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을 통해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었고, 상업의 발전이 촉진되어갔다. |
청계천 다리
-모전교毛廛橋:석교, 1412년 태종 12년
-광통교廣通橋:지금의 광교,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던도성 안 중심통이다.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이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다. 현재 광교네거리 지하에 남아 있다.
-장통교長通橋:한화빌딩 북쪽, 종로 12길 남쪽에 있었다. 장통방長通坊에 있어서 장통교라고 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장교長橋라고도 하였다. 청계천과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광제교廣濟橋:장교동 20번지에 위치.
-수표교水標橋:1420년(세종 2)에 만들어졌다.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마전교馬廛橋:1420년(세종 2),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다.
-효경교孝經橋:장사동 아세아전자상가 남쪽에 있었다.
-영풍교永豊橋:소경다리, 새경다리, 효경다리, 효교孝橋라고도 하였다. 다리 밑에 거지가 많이 살아 음력 12월에 임금이 거지들을 살폈다고 한다.
-태평교太平橋:지금의 마전교 자리에 있었다. 태종 때는 창선방교彰善坊橋, 성종 때는 태평교라 하였다.
-오간수교五間水橋:오간수문 위로 통행하기 위해 만든 다리.
-영도교永渡橋: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로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 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이다.
청계천은 1950년 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판자촌이 하류로 갈수록 많아져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환경정화사업으로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청계천 복개(광교∼청계 6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청계 6가∼청계 8가(신설동),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청계 8가 ∼신답철교 구간을 순차적으로 복개하였다.
복개된 청계고가도로는 도심 교통소통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이후 도심 하천 되살리기 등 자연환경 보전 차원에서 청계천변의 물길까지 완전히 복구하여 오늘날 아름다운 서울의 청계천을 누리게 되었다.
권력무상
청계천은 오랜 역사와 문화에서 여러 애환들을 고스란히 담고 흐르고 있다. 21세기 서울은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 발전하면서 한강을 만나 서해로 태평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1410년(태종 10년) 8월에 청계천 변을 돌로 다시 축조하였는데, 이는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튼튼하게 다시 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쓴 석물이 정릉의 석물이었다. 정릉은 이성계가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에게 넘겨주려 하자, 태종이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정릉(강씨의 묘)의 석물을 청계천으로 옮겨 그 돌을 모두가 밟게 했다는 야사野史가 아직도 청계천에 흘러내리는 중이다.
채바다는 누구인가
이 책은 의로운 정신과 신뢰 그리고 책임정신을 앞세워 올 곧은 직언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일생을 살았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생애와 지도자상像을 조명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많은 고뇌를 하였다. 번암은 나라의 큰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큰 어른이시기에.
번암은 영조와 정조-두 임금을 섬기며- 두 왕조의 탕평 기조아래 성공시대를 이끌었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국정운영 전 분야에 걸쳐 변화와 개혁을 이끌었던 정치 지도자이다. 번암의 의로운 정신과 신뢰정신으로 성공한 지도자의 전범典範으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많은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다.
번암樊巖은 영조英祖(조선 21대 왕, 1694∽1776) 임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臣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문서를 돌려드릴까 합니다. 세자의 폐위를 거두어 주소서!”
이 말을 듣고 영조는 “도승지 말이 옳다! 가납하겠노라. 경과 같은 사람이라면 마음에 기댈 수 있을 것이다”
영조는 임금의 입장에서 신하의 충정을 헤아리며, 비로소 번암을 다시보게 된다. 번암의 솔직한 직언과 의로운 정신에 높은 신뢰감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훗날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이르고 있다.
“나와 너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지켜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忠臣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번암에 대한 신뢰감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군신관계에서 신뢰감은 국가경영에서 최고의 가치와 덕목이라 하겠다.
정조正祖(1752∽1800)의 책상머리에는 번암을 이간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상소가 가득했다. 번암은 노론으로부터 끊임없이 올리는 탄핵 상소에 국정운영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정국의 난맥상과 어려움속에서도 번암에 대한 정조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조는 번암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속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네. 세 가지 의리 하나로 쥐었네/ 손에는 직필直筆을 잡았네. 타고난 품성은 뛰어나고 영특했으니/ 끌채 밑의 망아지는 되려 하지 않았네/ 구름에 닿을 기개, 조수潮水를 삼킬 국량, 문장은 강개하고 드높았네/ 이간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네.”
또한 정조는 번암을 향해서
“불세출의 인물이다. 지금은 국정을 바로 잡아야 할 시기이다. 내가 최근 깊이 준비하고 헤아려서 경을 한 점의 잘못이 없도록 깨끗한 위치에 두었으니, 경 또한 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을 생각하라!”
정조는 세상을 떠나는 번암의 뇌문비에 이렇게 남기고 있다.
‘나는 매우 위험한 중에 그를 재상으로 발탁했다. 그 지위가 높고 직무는 국왕과 가까웠으며 총애와 신망이 두터워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기운이 빠지게 했다. 50여 년 동안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조는 탄복할만하다. 조정에 노성만한 대신이 없으니 장차 나라 일 어찌 할 것인가. 저렇게 신임을 독점한 사람은 예전에도 들어보지 못했다’
번암은 우의정과 영의정이 없는 상황에서 3년 독상獨相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정조 재위 24년 동안 23년간을 투철한 책임감을 가지고 정조의 성공적인 치세를 위하여 헌신적인 희생으로 역사상 명재상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번암은 중국 사행길을 떠나며, 북학의 대가 박제가와 이덕무 등을 동행시켰다. 이들은 서얼출신으로 중국의 발달된 모습과 변화를 보고 돌아와서 정조의 개혁에 앞장섰다..江
글쓴이:채바다 한국의 콜럼버스, 탐라국 탄생신화 역사시대 벽랑국 발견, 5세기 백제 왕인박사 일본뱃길탐험, 13세기 삼별초 뱃길탐험(제주-진도), 오키나와(琉九, 쿠수쿠城) 탐방, 네덜란드 하멜표류연구(네덜란드 국가경쟁력 청년인문학) 최초발표(국립부경대학, 국립목포대학, 제주대학, 서울동작구청, 마포구청, 여수시, 진안군, 장성군 성공아카데미 등) 한양대 화공학과를 졸업(이학사)하였다. 필자는 대학 전공과 다르게 통나무 떼배를 만들어 타고 일본을 세 차례 탐험 했다. 4∽5세기 백제 왕인박사 도해뱃길탐험, 탐라국 탄생신화에 나오는 벽랑국 탐험(제주-완도-강진, 마량항). 13세기 고려 삼별초 탐험(제주-진도) 등 6~7m 넘는 폭풍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엽편주와 다름없는 통나무 떼배에 한 가닥 목숨을 맡기고 고대 한일 해양탐험에 미쳐서 반생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청년이 쓴 하멜표류기를 만나면서 네덜란드 청년들의 도전정신에 심취되어 ‘네덜란드 청년 인문학’ 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각급 대학, 연구원, 지자체에서 특강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는 험난한 뱃길 탐험에 예상치 못하는 폭풍과 파도를 헤치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미치지 않고는 도전할 수 없는 탐험 항해이다. 세계 일류국가는 거친 바다에 도전한 해양강국들이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네덜란드이다. 일류국가로 가는 길은 오로지 해양에 도전하고 개척하는 길 뿐이다. 그동안 탐험에 이용했던 통나무 떼배와 유물들은 국립해양박물관, 제주해녀 박물관, 영암군, 강진군, 서귀포시에 기증(천지연 입구 전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