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 의해, 범한 잘못과, 그 원인을 뿌리 뽑아서,
솔직히 신에게 사과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성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신으로부터의 자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흐림을 뿌리 뽑는 길은, 반성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혼의 진화에의, 하나뿐인 기회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를 보는 것 (=지관),
이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흐림은, 이때에 맑아지고,
우리들의 마음은 신의 빛에 의해,
가득 채워져 선정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겨우, 싯다르타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고,
마음의 기준을 깨닫고,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를 확실히 정정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ㅡㅡ 자연도 그 조리(條理)에 따라, 춘하추동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의 선악에도, 일정한 기준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 마음의 기준이 없으니까, 혼란이 일어난다ㅡㅡ.
싯타르타는, <올바른 마음의 기준>을 가지고,
어린 시절의 사건이랑, 그 당시의 상념, 행위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성을 하여, 마음의 흐림을 뿌리뽑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주; 다카하시 신지 님의 강연 중에서
누구나 어린 시절(1살부터의)을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3~4시간 걸리는 사람부터,
7~8시간이 걸리는 사람 까지,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오사카에서 만났던 70대 노학자의 경험담에 의하면,
대학시절 칠판에 쓰여진 글자 한자한자까지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
ㅡㅡ 출생의 비밀을 들었던 6 살 때,
그것은 어린 마음에도 너무 놀라서 어찌 할 바를 몰랐던 것이었다.
어머니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이 의붓어머니였던 놀라움.
그 후, 자신의, 의붓어머니에 대해 차가워진 태도,
과연 그런 것이 괜찮았을까.
그리고, 아무런 기억이 없다고는 해도,
친어머니는, 자신이 난산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부왕도 매우 슬퍼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부왕에 대해서도, 의붓어머니에 대해서도,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ㅡㅡ.
싯다르타는, 마음속으로부터 양친, 의붓어머니에게 사죄하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생각해 내려고 하면,
반드시 의붓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해져 오는 것입니다.
의붓어머니에 대한 어리광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ㅡㅡ 귀여워해 주신 의붓어머니의 사랑, 생모의 일을 몰랐다면,
어쩌면 친어머니라고 계속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몰랐던 쪽이, 의붓어머니도, 자신도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심술궂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고독해져 갔던 자신의 마음.
그것은 어린아이의 감상(感傷)에 의한,
독점욕의 반대 표현은 아니었을까.
부왕도 아마 걱정했을 것입니다.
재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왔던 것일까.
"신이여! 부왕, 어머니, 의붓어머니에게 범한 죄를 용서해 주세요...."
싯다르타는 마음속으로부터, 신에게 사죄하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자주 카피라의 지하실 속에 틀어박혀,
열쇠를 잠그고, 의붓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또, 마시에루 대신과, 찬타카에게도 상당히 폐를 끼쳤습니다.
그것은 왕자로서의 오만한 행위였습니다.
부왕의 권력의 우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통했던 어리광이었습니다.
왕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어리광은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찬타카와 성 밖으로 나갈 경우,
자주 농부들이 소를 채찍질해 농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동물들이 혹사당하고 있는 것을 슬퍼하거나.
작은 벌레가 새에게 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생명의 불쌍함에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항상 신변의 여러 현상에 감상(感傷)적인 행동이,
역시 죄를 만들고 있던 것이 되는가ㅡㅡ.
싯타르타의 반성은,
선악(善惡)의 하나하나를,
올바른 마음의 기준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재판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가을의 수확을 축하하는 축제 때는,
부왕과 함께 성외를 순유했던 것입니다.
그때, 농민의 과중한 노동에 지친 비참한 모습을 보고,
같은 인간이면서, 왜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인 것일까.
과연 이러한 것으로, 괜찮은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12~3세 경부터, 자연을 통해,
무정(無情)한 여러 현상이 눈에 띄어갔습니다.
새랑 짐승이 서로 먹는 모습을 보고,
슬픈 나머지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성의 크샤트리야들이, 잡아 온 동물을 도살하고 있을 때, 울면서,
“죽이지 마.” 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습니다.
쟌부의 나무 밑에서,
바라몬의 선생이었던 비스바에게 배운 명상에 빠져,
인생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ㅡㅡ.
카피라 바스투에서의 일이, 회상이 되어 마음속에 그려져 갑니다.
ㅡㅡ 쿠샨 티데우로부터 배웠던 무도(武道)는,
‘기. 검. 몸. 의 일치가 비법이다.’라고 했었습니다.
"마음이 없는 검은 명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배웠습니다.
.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고, 스스로를 지키고,
마음의 악을 잘라 버리는 검으로 해야만 한다”
라고도 배웠던 것입니다.ㅡㅡ
지금, 우르베라의 숲에서,
비로소 그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아는 싯다르타였습니다.
“검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사악(邪惡)을 잘라 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검이 있는 것은, 싸우기 위한 도구로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나의 검은 ‘법’이다. 마음과 행위의 법이다.
법이야말로 신의 마음의 표현이다.”
라고, 지금은 돌아가신 쿠샨 티 데우의 가르침에,
새삼스럽게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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