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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 심판 재앙 (6:1-17; 8:1)
본문
(1)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값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짜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첫째 막간 삽입) (8: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주해
[1] 앞 장은 어린양이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들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을 말했다면, 본 장은 그 인들을 실제로 차례차례 떼는 장면을 서술한다. 그리고 앞의 두 장은 하늘 보좌의 장면을 묘사했다면, 본 장부터는 땅의 사건들로 장면이 전환된다. 어린양이 일곱 인들 중의 하나를 떼실 때 요한은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오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네 생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천상적 요소들을 묘사하는 4:6-9에서 등장한 바 있다. 사자, 송아지, 사람, 날아가는 독수리의 얼굴을 지닌 네 생물은 창조주의 신적 속성들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피조물을 대표하는 천상적 존재들이다(Beale, 1999: 330). 계시록에서 그들은 주로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고(4:6; 5:6,11; 7:11; 14:3) 천상적 예배를 주도하며(4:8-9; 5:8-10,14; 19:4)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6:1,3,5,6,7; 15:7)(Osborne, 2002: 275). 이들 네 생물이 자연계에 임하는 재앙들을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을 대표하는 그들의 역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말의 등장과 연관된 재앙이 그에 상응하는 네 생물에 의해 선언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본문 구조는 요한이 어린양 예수께서 인을 떼는 것을 ‘보는’ 동안 오라고 말하는 네 생물의 명령을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네 생물 중 하나가 발한 “우렛소리 같은” 음성은 주로 예배 장면에서 등장하지만(14:2; 19:6), 본문의 음성은 구약의 ‘폭풍 신현’(神顯)을 반영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임하신다는 개념과 연관된다(Osborne, 2002: 275).
[2] 네 생물 중 하나가 ‘오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요한은 흰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환상을 보았다. 처음 네 인(印) 심판을 묘사할 때 네 말들이 등장하는 것은 구약 스가랴 1:8-15, 6:1-8을 배경으로 한다. 이들 구절에서 말 탄 자들은 하나님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을 심판하는 수단으로 언급되고, 말들의 색깔은 전쟁의 지리적 지점들을 나타낸다(Johnson, 1981: 472). 첫째 인 심판에서 흰 색 말을 탄 자의 정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이다. 어떤 학자들은 흰 말을 탄 자가 그리스도와 복음의 승리를 나타낸다고 보기도 하고(Alford, Ladd),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적그리스도와 악한 세력들의 승승장구를 나타낸다고 보기도 한다(Walvoord, Mounce). 전자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계시록에서 흰 색이 항상 그리스도나 의(義)와 연계된 색이고, 19:11-16은 흰 말을 탄 자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후자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본 절 이후에 나오는 네 말들이 모두 심판의 도구들로 등장하는데 오직 흰 말을 탄 자만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렵고, 더구나 첫째 인을 뗀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가 또한 말 탄 자로 동시에 등장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본 절은 해석자의 전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다. 두 해석 모두 가능하기는 하지만, 두 번째 견해가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선호되고 있다. 처음 네 인 심판은 모두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에 전쟁과 기근과 사망과 같은 재앙들을 퍼붓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첫째 인만 심판의 문맥을 떠나 그리스도와 복음의 승리를 강조한다고 보는 것은 문맥의 흐름과도 어긋난다. 본문에서 흰 말과 그것을 탄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전령 구실을 한다. 때문에 흰 말을 탄 자가 전투의 수단인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아 계속해서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전쟁을 일으켜 그것을 심판하는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함축한다(이필찬, 2006: 321). ‘활’은 전쟁 도구이고 ‘면류관’은 전쟁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보통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졌다는 것은 전쟁에 숙련된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서 정확히 과녁을 맞추는 것은 고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면류관을 ‘받았다’는 말은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사탄과 그 주구들이 비록 세상에 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허용해서 벌어지는 일이다(Beale, 1999: 377).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은 전쟁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을 함축한다. 인간의 전쟁 욕망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반역하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식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흰 말을 ‘탄 자’를 묘사할 때 ‘앉은 자’(the one sitting)란 독특한 분사어구가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보좌에 ‘앉은 이’로 묘사하는 표현을 본 딴 것으로 보인다(Osborne, 2002: 277).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만유를 다스리고 계시듯이, 흰 말에 ‘앉은 자’도 끝없는 정복욕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한다. 여기서 말을 탄 자는 귀신 세력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다면 흰 말을 탄 자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간들의 부패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함축한다. 하나님은 부패한 인간들의 정복욕이 분출하도록 허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3-4]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실 때 요한은 둘째 생물로부터 오라는 소리를 들었고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네 생물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붉은 색은 피 흘림과 살육을 상징한다(Osborne, 2002: 278). 붉은 말을 탄 자가 허락을 받아 ‘큰 칼’을 가지고 서로 죽이게 하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는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큰 칼’은 큰 전쟁을 나타내는 환유로서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수단이기도 하다. 일단 큰 전쟁이 발발하면 인간들은 “서로 죽이는” 살육 행위를 함으로써 결국 그들 간의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주목할 것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두 가지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큰 칼을 받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를 야기하는 원인으로서 원인,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해 있다. 즉 전쟁을 통해 서로 살육하고 평화를 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심판 행위이다. 서로 피 흘리고 살육하는 전쟁은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허용에 따라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경 저자들은 사건을 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5-6]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고, 셋째 생물이 검은 말을 불러낸다. 검은 말은 전쟁과 피 흘림의 결과로 생긴 기근과 고통, 슬픔과 탄식을 상징한다(Johnson, 1981: 474; Osborne, 2002: 279). 말을 탄자의 손에 ‘저울’을 가졌다는 것은 6절에서 언급된 밀과 보리를 측량하기 위함일 것이다. 요한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네 생물 ‘중간에서’ 나는 음성은 아마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는 음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 들은 음성의 신적 출처를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가 들은 음성의 내용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하루 품삯을 받아봐야 밀 한 되와 보리 석 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전쟁으로 생긴 기근 때문에 식량비가 보통 때보다 적어도 12배 이상 올랐다는 것을 뜻한다(Beckwith, 1922: 520; Johnson, 1981: 474). 존슨에 따르면 밀 한 되는 일반인이 소비하는 하루치 식량이고, 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주로 먹는 식량으로서 보통 밀가루와 섞어서 먹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 온 종일 일하고 품삯을 받아봐야 하루치 식량을 살 수 있을 뿐 그것은 가족들이 함께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을 것이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명령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이 명령은 기근의 제한된 범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가뭄은 밀과 보리 경작에 영향을 미치지만 극심한 가뭄이 아닌 한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밀과 보리는 로마제국 시대에 두 가지 주된 식량 자원인 반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소비하였다. 도미티안 황제 때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그는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밀과 보리를 경작하도록 조치한 바가 있었다(Osborne, 2002: 281). 따라서 감람유와 포도주가 아직 남아 있고 밀과 보리 값이 폭등했다는 것은 가뭄이 부분적일 뿐 아직 극심하지 않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Mounce, 1977: 155). 이것은 인 심판에서 나팔 심판으로 진행되면서 재앙의 정도가 좀 더 심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7-8] 어린양이 넷째 인을 뗄 때 넷째 생물이 청황색 말을 탄 자를 불러낸다. ‘클로로스’란 형용사는 노르스름한 초록색(yellowish green)을 의미한다. 그것은 푸른 풀을 지칭할 수 있지만(막 6:39; 계 8:7), 사람에게 쓰일 때는 병자의 창백한 얼굴색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BAG, 890; Osborne, 2002: 282). 때문에 이 술어는 때때로 질병이나 죽음을 묘사할 때 사용되곤 했다. 요한이 청황색 말 위에 앉은 자를 ‘사망’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술어는 보통 사람들이 기근 뒤에 전염병이나 역병으로 죽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렘 14:12; 눅 21:11 등). 사망을 언급한 뒤에 요한은 한 진술을 덧붙이는데(“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망과 음부는 보통 한 짝처럼 붙어 다니는 술어들이다(1:18). 음부를 번역한 히브리어는 ‘스올’인데, 그것의 일차적 의미는 무덤이다. 신약에서 음부는 이중적 의미로 쓰였다. 그것은 때로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장소(행 2:27,31)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악한 자들이 죽어 들어가는 장소(눅 16: 23; 계 20:13-14)를 지칭하기도 한다(Johnson, 1981: 428). 본문은 ‘사망과 음부’를 인격화하여 앞서고 뒤따르는 귀신적 세력들로 묘사한다. 이들 세력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는” 일을 한다. ‘권세를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할 권한을 이들 귀신 세력들에게 부여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인 심판에서는 “땅 사분의 일의 권세”가 언급되지만, 나팔 심판에서는 “땅 삼분의 일의 권세”가, 대접 심판에서는 온 땅의 권세가 언급된다. 심판이 진행될수록 재앙의 강도가 점점 더 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땅 사분의 일의 권세”란 표현은 사망과 음부가 인류에게 가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망과 음부가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수단은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을 통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검’은 전쟁과 같은 인간의 폭력을 상징하고, ‘흉년’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를, ‘사망’은 역병으로 인한 죽음을, ‘땅의 짐승들’은 야생 짐승들의 공격을 뜻한다.
[9-11] 다섯째 인을 뗄 때부터는 말들의 은유가 언급되지 않고 자신들을 죽인 자들에게 보응해 달라고 제단 밑에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장면이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었다. 제단이 언급된 것은 그들이 부르짖을 때 하늘 성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고 대신에 하나님과 어린양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한다(21:22). 그렇다면 제단은 본문에서 비유적 언어로 쓰였다. 제단과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함께 언급된 것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고난이 희생제사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하늘 성전 제단에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처럼,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희생 제물이 되어 하늘 성전 제단에 드려진다. 순교자들이 제단 위가 아니라 아래 있었다는 것은 희생제물의 피가 제단 위에 부어져서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빌은 더 가능성이 있는 제안을 한다. 계시록에서 제단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할 수 있다(Beale, 1999: 391). 하나님이 보좌에서 통치하는 목적들 중 하나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때문에 순교당한 백성이 제단 밑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요한이 본 것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었다(9절). 일반적으로 이것은 죽은 뒤에 몸이 없는 순교자들의 영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계시록에서 ‘푸쉬케’란 말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 자체를 가리킬 때가 많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로 부른다. ‘대주재’란 호칭은 기본적으로 소유권이란 개념을 내포한다(TDNT2:44). 모든 인생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시다(3:7). 순교자들은 그에게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고 탄원한다. 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우리 피”란 말은 성도들이 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갚다’ 동사는 신약에서 징벌하거나 보응한다는 의미로 쓰인다(TDNT2:442ff). 성도들은 자신을 해치는 자들에게 직접 보복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롬 12:19). 그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한다. 따라서 순교를 당한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을 언제까지 미루실 것인지를 탄원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탄원에 대해 두 가지로 응답하신다. 하나는 순교자 각자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흰 옷’은 의나 승리와 자주 연관된 상징어이다(Johnson, 1981: 475). 때문에 하나님이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는 것은 순교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주를 시인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삶으로써 참된 승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이다. ‘잠시 동안’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보응의 때가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하나님 보시기엔 짧은 기간일 수 있지만 여러 세대에 걸친 기간일 수도 있다(12:12; 20:3). 기다리는 기간은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찰 때까지”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이 이르기 전에 죽임을 당해야 할 순교자들의 숫자가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이란 표현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동격의 관계로 본다면 순교자의 동료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면서 서로 간에 형제로 불리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것처럼 장차 죽임을 당할 다른 동료 종들, 즉 그들의 형제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누가 순교를 당할 것인지를 알고 계시고 멀지 않은 때에 그들 각 사람을 신원해주실 것이다.
[12-14]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우주적 격변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우주적 격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현상들이다. (1)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2)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3)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질” 것이다. 이런 표현들 전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어떤 사건들은 고대 우주론의 시각을 반영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무화과나무의 설익은 열매들이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듯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든가, 하늘이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처럼 떠나간다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고대인들은 궁창을, 땅을 덮은 지붕처럼 생각했는데, 요한은 그 궁창이 큰 지진으로 흔들려 떠나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본문의 표현들 중 많은 부분은 예수의 감람산 담화에서도 발견된다(마 24:29-30). 예수께서 죽으실 때 실제로 우주적 격변현상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본문의 묘사들을 상징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견해는 지나치다. 하지만 온 세상의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진다면 사람들이 산과 바위에 숨을 곳을 찾는 것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주의 날에 우주적 격변 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지만 본문의 문자적 표현 그대로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본문이 묘사한 우주적 격변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큰 공포와 고통을 안겨줄 것은 자명하다. 계시록에서 ‘지진’은 여러 차례 언급되고(8:5; 11:13,19; 16:18), 해, 달, 별들의 격변 현상도 몇 차례 언급된다(8:12; 9:2; 16:8). 이런 것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임하실 때 나타나는 전조 현상이다(삿 5:4-5; 욜 2:10).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도 이런 물리적 격변들은 “진노의 큰 날”에 동반되는 전조현상이다.
[15-17] 앞의 세 구절은 여섯째 인 심판이 가져온 재앙들을 소개한다면, 15-17절은 땅의 모든 거주자들이 이들 재앙에 대해 나타낸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한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은 권력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부유층과 영웅들을 가리키며, “모든 종과 자유인”은 다양한 신분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듯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여섯째 인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임한다고 볼 수 없다. 계시록에서 “땅의”란 수식어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불신 세상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여섯째 인 재앙과 관련된 하나님의 심판은 그를 믿기를 거부하고 귀신과 우상들을 숭배하며 성도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Johnson, 1981: 476).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하는 심판이 두려워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간청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구약과 신약의 구절들 가운데 등장한다(사 2:19,21; 호 10:8; 눅 23:30). 땅의 거주자들이 보고 공포에 떨게 된 대상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 “그 어린양의 진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의 백성에게는 긍휼과 자비의 얼굴로 나타나고(민 6: 25-26; 시 4:6; 80:3 등)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분노의 얼굴로 나타난다(레 17:10; 시 10:4:29 등). 신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주로 심판의 문맥에서 등장하지만(살후 1:9; 벧전 3:12), 계시록은 ‘하나님의 얼굴’을 부정적인 문맥(20:11, “땅과 하늘이 그의 (얼굴)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과 긍정적인 문맥(22:4, “그들이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에서 모두 언급한다. 장차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얼굴을 친히 뵙고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지만, 땅의 거주자들과 죄악에 오염된 옛 피조세계는 그의 얼굴 앞에서 피하여 간 데가 없을 것이다(Osborne, 2002: 296). 놀라운 사실은 두 번째 심판에 대한 묘사이다. 땅의 거주자들이 산과 바위틈에 숨으려고 하는 이유는 “어린양의 진노” 때문이다. 이미지의 역설적 면이 부각된다.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은 이제 심판자로서 불신 세상에 진노를 쏟아 붓고 있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어린양은 이제 진노를 내리는 어린양이 되었으며, 힘없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이제 가장 강력한 심판주 어린양이 되었기 때문이다(Osborne, 2002: 296).
‘진노’란 말은 계시록에서 여섯 차례 등장하는데 본문은 그것을 첫 번째로 언급한다. 어린양의 진노는 독립적인 요소가 아니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통치가 불신 세상에 집행된 결과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는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의 중심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뗄 때 요한은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다”고 말한다. “진노의 큰 날”은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의 도래를 예언한 구약 구절들을 반영하고(욜 2:11,31; 말 4:1, 5; 습 1:14-16) 신약에서도 그것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나타난다(고전 1:8; 빌 1:6, 10; 살전 5:2; 벧후 3:10). 주의 날의 도래를 말한 구약과 신약 저자들의 예언은 드디어 계시록 6:16-17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된다. ‘이르렀다’(엘뗀)는 부정과거 동사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진노의 큰 날”은 최후심판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Beale, 1999: 401; Osborne, 2002: 298). 혹자는 본문의 사건이 주의 재림과 종말 자체를 말하기보다 그 직전에 일어날 모종의 전조적 사건을 그린다고 본다(Witherington III, 2003: 136). 그들은 일곱째 인을 뗄 때 어떤 재앙이 임하지 않고 일곱 나팔 재앙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증거로 댄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일곱 심판 시리즈들의 순환적 성격을 소홀히 한 것이다. 인, 나팔, 대접 심판 시리즈의 여섯째 및 일곱째가 항상 종말을 다루기 때문에 이들 심판 시리즈가 엄격한 시간순서를 따라 진행한다고 보기 어렵다. 16-17절에서 종말이 이르렀고 주의 진노의 큰 날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최후심판을 도래시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은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되묻는다. 이 질문도 구약에서 자주 등장한다(욜 2:11; 말 3:2; 나 1:6). 최후심판 날에 주께서 진노 중에 임하실 때 그를 대적하는 어떤 누구도 그의 면전 앞에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강력한 정복자 왕이시기 때문에 원수들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가 쏟아 붓는 극렬한 재앙들 앞에서 누가 감히 설 수 있겠는가!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만 우뚝 설 것이며, 그를 거역하는 땅의 거주자들은 산과 바위틈에 얼굴을 가리고 숨기에 바쁠 것이다.
[8:1] 처음 여섯 인 심판들은 7장의 두 막간 이야기의 삽입으로 6:17에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8:1에서 다시 시작된다. 본 절은 인 심판 시리즈를 결론짓는 역할을 하면서도 일곱 나팔 심판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곱째 인 심판은 앞선 여섯 인 심판들과 달리 어떤 구체적인 재앙 현상이 동반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어린양이 일곱째 인을 떼실 때 어떤 특정한 재앙이 나타나는 대신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천상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 소리가 중단되고 잠시 고요해진 것은 지상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3-4절) 들리게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천사들의 찬양도 중단된 것은 그만큼 큰 환난 속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지극하기 때문일 것이다(Johnson, 1981: 488). 천사들의 찬양보다 중요한 것은 핍박받는 성도들이 자신들을 신원해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소리이다. 이것은 땅의 거주자들에게 임하는 심판 재앙들이 성도들의 기도와 울부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Bauckham, 1993: 70-80). 하지만 일곱째 인 심판은 뒤따르는 나팔과 대접 심판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고요함은 지상에 쏟아질 신적 진노의 큰 폭풍을 앞두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경외의 고요함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늘의 고요가 “반 시간쯤” 지속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오전 제사의식에서 향을 피우는 반 시간을 반영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길게 지체되지 않고 신속하게 집행될 것을 시사해준다.
해설
6장은 어린양이 두루마리 책의 일곱 인봉을 떼고 세상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 네 인들을 뗄 때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던 네 생물이 나타나 네 종류의 말들을 호출한다. 말들의 등장은 스가랴 1:8-15과 6:1-8을 배경으로 한다. 이들 구약 본문에서 말을 탄 자들은 하나님 백성을 박해하는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계시록 본문에서도 말을 탄 자들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현 세상질서를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처음 네 인 심판을 실행하는 것은 어린양이지만, 말 탄 자들의 활동들을 승인하고 허락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6:2,4,8).
어린양이 첫째 인을 뗄 때 첫째 생물이 흰 말을 탄 자를 호출하는데, 몇몇 학자들은 계시록에서 흰 색은 항상 긍정적 의미를 지닌 상징이기 때문에 본문의 “흰 말을 탄 자”가 19:14-16에 나오는 백마를 탄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처음 네 인 심판과 연계된 말들은 모두 재앙을 쏟아 붓는 심판의 전령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첫째 인 심판 때 등장하는 흰 말 탄 자만 그리스도와 복음의 승리를 상징하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첫째 인 심판은 오히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방하여 끝없는 전쟁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지닌 부패한 인간들에게 임한 것이다.
둘째 인을 뗄 때 둘째 생물은 붉은 말을 탄 자를 호출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여서 땅에서 평화를 찾기 힘든 심판 상황과 연관된다.
셋째 인을 뗄 때 셋째 생물은 검은 말을 탄 자를 호출한다. 그가 손에 저울을 가졌다는 것은 잦은 전쟁으로 곡물 값이 폭등하여 일반 기근이 심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기근 상황에도 감람유와 포도주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기근 재앙이 한정된 부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넷째 인을 뗄 때 넷째 생물은 청황색 말을 탄 자를 호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게 한다. ‘청황색’은 본래 노르스름한 초록색을 가리키는데 보통 푸른 풀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하지만 때로는 병든 사람의 창백한 얼굴색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이것은 청황색 말을 탄 자를 ‘사망’으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인간들은 끝없는 정복욕을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켜서 서로 살육함으로 땅에서는 평화를 찾기 어려운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였다. 자연히 잦은 전쟁으로 기근은 심해지고 식량 값은 폭등하여 생존 자체가 힘들어지면 온갖 전염병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고통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당하도록 허용하고 심판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섯째 인 심판부터는 말들의 은유가 사라지고 새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말씀 증거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의 신원과 보응을 간청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것은 인 심판의 재앙들이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순교자들이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인 자들의 악행을 보응하지 않고 지체하시는가를 탄원할 때, 하나님은 순교자 각인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신다. 이것은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지 않고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참된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순교자들을 죽게 한 것처럼 그들의 동료 종들, 즉 그들의 형제들을 죽여서 하나님이 정한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저자는 순교자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요 참 승리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표현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요한은 복음 증거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들이 실제로 죽임을 당하지 않았어도 순교자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실 때 다양한 우주격변 현상들이 나타난다. 큰 지진이 나고 그 여파로 해와 달이 영향을 받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는 현상들이 그것이다. 우주격변 현상들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다분히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기 때문에 12-14절의 묘사들을 문자 그대로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런 우주적 격변현상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일어난다면 땅에 거주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큰 공포와 고통을 안겨줄 것이 뻔하다. 자연계의 이런 격변현상들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내리는 재앙들이지만 그것은 또한 어린양에 의해 집행되는 진노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컸는가는 그들 위에 임하는 무서운 재앙을 목도하고 산과 바위틈에 숨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절규하는 데서 가늠해볼 수 있다. 요한은 여섯째 인을 뗄 때에 땅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다”고 선언한다. ‘이르렀다’는 부정과거 동사는 일어난 사건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구약과 신약 저자들이 예언한 “주의 진노의 큰 날”이 계시록 6:16-17에서 최종적으로 실현된다.
일곱 째 인 심판(8:1)은 첫번째 막간 이야기가 삽입된 후에 언급되는데, 그것은 앞선 여섯 인 심판들과 달리 특정한 재앙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 ‘반 시간’이란 짧은 기간 동안의 고요함을 소개한다. 일곱째 인 심판에서 고요함이 소개된 것은 큰 환난 중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부각시키면서도 다가올 심판의 큰 폭풍을 앞둔 두려움의 고요함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들리게 하기 위해 천사들의 찬양 소리도 멈추게 할 만큼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뿐만 아니라 인, 나팔, 대접 심판들은 환난 중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 요한은 극렬한 심판이 주어지는 동안에도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부각시킨다. 성도들의 기도는 세상에 대한 심판을 앞당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인이다.
인 심판 시리즈 이후에 아직 일곱 나팔과 대접 심판이 남아 있음에도 최후심판과 종말의 장면이 여섯째 인 심판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은 계시록 전체의 구조가 엄격한 시간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요한은 엄격한 시간순서를 따르기보다 동일한 심판을 점진적 반복의 형태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 심판 시리즈가 최후심판과 종말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점진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같은 심판장면을 반복하면서도 점차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반복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최후심판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역사의 무대에서 우뚝 서실 것이요, 그를 대적했던 모든 자들은 그의 얼굴 앞에서 능히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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