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년
- 케이밥에서 브라이트 엔젤까지
권정순
땅에서 내려간다
등성이를 타고 아래로 발을 옮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내려다본다
새벽 하늘 저편의 포도주빛 구름들
마음 틈새로 빛줄기가 들어오고
절벽은 붉은 병풍으로 둘러서 있다
강물에 깎여진 바위 층에
찰랑거리는 햇빛
몇 백 년 전 바람들 절벽을 붙잡는다
콜로라도 강물이 내려갔다는
깊은 산의 내장
오래 전부터 금이 가는 소리
드디어 맨 밑바닥 내 생의 반환점에
누워 있는 콜로라도 강물
무심한 듯 반기는 비취빛 여신을 친견한다
반대편 올라가는길목을 바라보는데
바람 같이 물소리 같이
문자로 담을 수 없는 비기秘記 하나 건네주고
돌아눕는 푸른 여신
모퉁이에서 나귀 행렬을 보내며
해독할 수 없는 소리를 품고
검은 절벽 사이를 올라갈 때
내 안에서 험준한 산이
무너지는 소리
막바지 가파른 끄트머리 땅 위에 올라서자
먼저 도착한 태양이
언어가 지워진 내 마음을 비추고
사람 그림자 하나 내보낸 자리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릴린 먼로를 데리고 오다
권 정 순
마릴린 먼로가 새로 오는 날은 가게 안 공기도 들떠있다.
처음에는 검은 베일의 수녀복 안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어느 날은 먼로가 자유 여신상이 되어 오른 손에 권총을 높이 치켜들고 서 있었고
다음 번에는 야구 모자에 엘에이 다저스 글자 한 귀퉁이가 날아간 유니폼을 입고 할딱거렸다.
사내애들은 마릴린 얼굴을 내려다 보며 눈을 크게 떴고,
앞가슴이 풍만한 여인들은 수퍼 사이즈를 입고 눈을 뜬 듯 만 듯 그녀 같이 웃었다
그리고 먼로 무덤 옆에 묏자리를 사 둔 어떤 영감탕구가 죽자
마누라가 시신을 어디다 쳐박고는 그 땅을 비싸게 팔았다는 소문도 돌아다닌다.
죽어서도 이국 장사꾼들 주머니를 채워주는 여인.
보름 뒤에는 얼굴 반쪽이 해골이 된 채 머리에 붉은 꽃을 꽂고
나타날 것이라고 티셔츠 도매상은 귀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