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장수는 축복인가 재앙인가.
황 재 영
2022년 7월 27일 수요일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다. 병든 채로 17.2년, 건강수명 66.3세, 기대수명 83.5세, 세계 21위에서 10년 만에 일본에 이어 2위. 수명은 3.3년 늘었지만, 건강 수명은 거의 변하지 않아 2060년엔 국민소득의 60%를 국민연금 건보료로 쏟아 부어야 한다.
이 기사를 접 하고 보니 나는 기대 수명은 거의 다 살았다. 그렇다면 이미 장수로 축복을 받은 셈이다. 이런 처지에서 ‘이런 삶을 살고 싶다’란 주제로 글은 쓴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고 싶다는 것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이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수명은 무한(無限)한 것이 아니라 유한(有限)하다. 영생을 갈망하던 중국의 진시황. 희대의 철권통치자였던 북한의 김일성. 억만장자인 미국의 스티브 쟙스.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3천억 원의 돈이 불어난다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병상에 누워 있다가 결국 고인이 되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명은 무한(無限)한 것이 아니라 유한(有限)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장만한 살림살이가 늘었다. 장만하기만 하고 아깝다는 생각으로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옷장만 해도 그렇다. 수십년이 지난 옷들을 입지도 않으면서 보관만 하고 있다. 그런 옷들은 이미 유행이 지났거나 치수가 맞지 않아 입을 수도 없다. 지금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은 후 모두 불태워질 것이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구두·운동화·등산화·골프화·장화 등 각종 신발로 가득하다.
이제 나는 산에 오르지는 못한다. 등산화 중에는 몇 번 신었지만, 말짱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 이 등산화와 등산 장비 중에 쓸만한 것은 골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쓰레기장으로 보내야 한다. 낡은 등산화는 내 몸뚱이를 감당하며 높은 산을 오르내린 내 분신이다. 버릴 때는 연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집은 책만 보관하는 방이 따로 없다. 내방은 1인용 침대 외에는 전부가 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 올 때 한번 정리하여 지역 도서실에 기증했지만, 20년 새 많이 불어났다. 내가 평생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서책인 논어·맹자·시경·서경·대학과 사전류(국어·일어·영어·한자옥편)도 이 기회에 과감히 버리겠다. 유리 액자로 제작된 각종 훈포장과 기념패를 벽에 걸어놓을 장소가 없었다. 과일 박스에 넣어 보관 중이다. 이것도 해체하여 종이 증명서만 꺼내 파일에 넣어 보관하고 나머지는 전량 쓰레기로 처리할 생각이다. 사진도 앨범에 끼지 못하는 사진이 박스에 쌓여있다.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알지 못하는 사진은 과감하게 쓰레기로 처리할 결심이다. ‘아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땅으로 간다. 영혼은 신에게 가고 유산은 혈연에게 돌아간다.’는 옛말이 있다. 망인이 살아 있을 때는 부귀다남(富貴多男)하고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었다. 문상객이 상주에게 호상(好喪)이라고 칭송하는데 간혹 시신을 앞에 두고 상속 문제로 혈연이 다투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소송을 통해 법정투쟁까지 한다. 참으로 민망한 장례식이다. 이는 망인이 생전에 미리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상속은 유언이 없을 때만 발생한다. 유언이 있으면, 상속은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런 유언 없이 사망한 경우에만 민법에 정해진 상속이 된다, 유언장이 있는 곳에 친인척이 있다. 그러나 유언장이 없는 곳에 더 많은 친인척이 있다. 이게 세상인심이다.
장수는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오래 살기를 희망한다. 그 희망속에는 병고 없이 오래 살아야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현대는 국가 차원에서 노인 복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생명 연장에 필요한 의술도 발달하여 100세 시대가 왔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병든 채로 17년 이상 산다면 100세 시대가 왔다고 좋아할 수 있겠는가. 의술이 죽음과 싸워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 최종 목표라고 한다면 의술은 백전백패다. 100세 시대가 늦어지더라도 우리는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 삶을 추구하기위해 나는 오늘도 걷는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래서 쓸만한 것은 기증하고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하겠다. 가진 건 없지만 자식간에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유언장도 작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산책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물 흐르듯이 지나가고 있다. 그 한편에 내가 서 있다.
황재영
경북 경주 출생.육군 중령 예편. 「문예사조」 수필 등단.한국전쟁문학회 부회장.청향문학회 회원.실버넷뉴스 부국장.국보수필문학대학원 수료. 저서「6·25 전쟁 피난 체험기.「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공저 「꿈과 열정 사이」.국가유공자(화랑무공훈장.인헌무공훈장.무공포장.월남금성훈장.삼일보국훈장 수훈).